CAFE

오늘복음♥묵상글

2026년 6월 6일 (녹) 연중 제9주간 토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6.06.06|조회수17 목록 댓글 0

제1독서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의로움의 화관을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4,1-8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3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4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5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우선적 사명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말씀 전파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지배 계급의 지식인들을 책망하신다. 그들은 자기네 지식을 백성을 착취하는 데 이용한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주님께 칭찬을 듣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나열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언어는 따뜻하고 정겨운 교훈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논쟁의 칼날이 되고, 그 칼날은 율법 학자들을 겨눕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길이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향한 우월과 교만의 무대가 됩니다. ‘기도’조차도 제 위신을 위하여 길게 늘어뜨린 장식으로 삼으며, 그리스 말 표현에 따르면 과부들의 ‘집마저 삼키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당시 관행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회적으로 취약한 과부들을 위한답시고 재산을 맡아 주면서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성전 제의를 위하여 봉헌하라고 권하면서 재산을 빼앗은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긴 기도는 제 이익을 위한 구실이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더욱 무겁게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 뒤에 마르코 복음사가는 곧바로 장면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 맞은쪽에서 사람들이 돈을 넣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부자들의 많은 돈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액수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가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요.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남는 것을 바쳤으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 ‘자기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거대한 금과 은을 삼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동전 두 닢으로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가’, 또는 무엇을 ‘내맡기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가진 돈과 시간과 노력, 봉사를 바라는가. 아니면 그들의 온전한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기를 바라는가.(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모습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만난 과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를 찾아가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이때 과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 17,12).

오늘 복음의 과부가 봉헌한 돈은 렙톤 두 닢입니다. 요즈음 돈의 가치로 환산하자면 그녀의 전 재산은 약 천 원에 불과합니다. 한 끼를 겨우 때우기에도 부족한 이 돈을 그녀는 왜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것에 한탄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하느님께 바치고 난 뒤에 사렙타의 과부처럼 죽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녀가 놓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을 전 재산을 바친 것에 대한 칭찬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풍족하게 가진 것이 많음에도 목숨이 위태한 과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을 두고 탄식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는지에 대해서는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라는 율법 학자의 말을 두둔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할까요? 단순히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하루하루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를 오늘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유다인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입니다. 그들에게는 공동체의 보살핌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사회의 지도자라면 마땅히 그들을 배려하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남편을 잃고 홀로 산다는 것은 가난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은 힘도 없기에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율법 학자들은 가난한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과부들을 속여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기가 일쑤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정직하게 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척하면서 기도를 오래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당시 사회에서 지도층이자 높은 지위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산 정약용은 무릇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특별히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들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제로 살면서 신자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명예욕은 쉽게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보다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이 전하는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 헌금 이야기를 읽으면서 옛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은 비밀입니다.

어린이 미사가 있는 아침이면 어머니는 꼭 오백 원을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헌금으로 내라고 주신 돈입니다. 잘생긴 이순신 장군과 멋있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푸르뎅뎅한 지폐였습니다. 그 당시 어린이 시내버스 요금이 60원이었으니 저한테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오백 원을 쥐고 성당으로 가는 길에 ‘엄청난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갤라그라는 컬러화면으로 된 최신 전자오락입니다. ‘딱 한 판만이다!’ 하고 시작한 것이 어느 새 오백 원은 동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할 줄도 모르는 오락을 하다보면 언제나 오십 원만 남았습니다. 헌금으로 고작 오십 원을 내면서 매번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 쓰고 남은 동전을 드리는 마음을 예수님이 내려다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깊이 뉘우쳤습니다. 어린 마음에 오락실 ‘갤라그’보다 당연히 예수님이, 하느님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킹콩을 하기로 했습니다. 킹콩은 한 판에 이십 원짜리 흑백오락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예수님께 봉헌하면서 ‘딱 한 판은 봐주세요!’라고 기도했던 순수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자를 ‘톡톡히’ 셈하고 계셨나 봅니다. 한 번에 이십 원씩 봐주시더니 ‘밀린 헌금’을 온몸으로 갚으라고 이렇게 저를 신부로 만드셨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제는 ‘갤라그’보다, ‘킹콩’보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창식 신부)

☆☆☆☆☆☆☆☆☆☆☆☆☆☆☆☆☆☆☆☆☆☆☆☆☆☆☆☆☆☆☆☆☆☆☆☆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들이 백성을 지배하고 백성을 등쳐 먹으려는 행태는 같은 모양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근간인 율법을 다루는 법조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하느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억울한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들은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힘 있는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민생(民生)! 민생(民生)!”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울 좋은 말뿐이며, 실상은 자신들의 안위만 걱정하는 파렴치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지배 계층에 있는 지식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언제나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무척 오래 합니다. 요즘도 조찬 기도회니, 뭐니 하면서 자신들만의 기도회를 수시로 엽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현혹합니다. 그들에게는 진실, 진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거짓말, 사기 등으로 중무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법을 적용할 때,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서민들에게는 가혹합니다. 불의와 부조리는 그들 편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행실을 두둔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삶 속에는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디에 속합니까? 율법 학자와 같은 부류입니까? 아니면 과부와 같은 사람입니까?

☆☆☆☆☆☆☆☆☆☆☆☆☆☆☆☆☆☆☆☆☆☆☆☆☆☆☆☆☆☆☆☆☆☆☆☆

누구에게나 돈은 귀중한 것입니다. 그 귀중한 돈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헌금입니다. 신앙 없이 가능할는지요? 믿음이 없으면 헌금이 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바치는 공납금이지 헌금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헌금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정성과 함께 바쳐야 올바른 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헌금은 무모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생활비를 바치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여인은 바쳤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을 믿고 신뢰한다는 자세입니다. 자신이 바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드리겠다는 각오입니다. 여인의 정성이 행동으로 나타난 셈입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활비를 바쳤다는 사실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왜 바쳤는지, 그 동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부의 헌금은 믿음과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눈여겨보셨습니다. 이렇듯 헌금의 정성은 마음가짐입니다. 얼마나 많이 바치는지가 아닙니다. 어떤 돈을 어떻게 바치는지도 아닙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담아 바치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판단하는 것처럼 물질의 양 자체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형편을 먼저 헤아리십니다.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탈렌트를 받고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받고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재주도 없고, 배경도 없고, 그저 건강 하나만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귀한 가문에 많은 상속을 받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능에 빼어난 용모까지 받아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탈렌트를 가진 사람이 벌게 된 한 탈렌트를 다섯 탈렌트를 가진 사람이 벌게 된 다섯 탈렌트와 똑같이 평가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공평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특히 강조하셨습니다. 그의 책 ‘어둔 밤’은 감각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한 젊은 가르멜 수도자가 말합니다.

 

“저의 십자고상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성물입니다. 이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 말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 성인은 이렇게 조언하셨습니다.

 

“십자고상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다면, 그 십자고상을 버리십시오.”

 

어두운 밤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요한 성인의 요구였습니다. 사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진짜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집착도 큽니다. 자기 뜻과 맞지 않다면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 역시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끊어야 할 집착은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끊어야 할지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낮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데, 가난한 과부는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작은 동전으로 그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할 만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르게 보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사람들은 헌금함에 들어간 동전의 액수를 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주머니에 남아 있는 비율을 보신 것입니다. 즉, 부자들은 자기의 풍족한 재산 중 일부를 바칩니다. 과부의 헌금은 가장 작았지만,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봉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원어인 그리스어 ‘생활비’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과부는 내일 당장 살아갈 기약조차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 전체를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온전히 내어 맡긴 것입니다. 모든 집착을 버린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기심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이십니다(성 암브로시오).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첫 번째인 독서 티모테오 2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스승 바오로 사도께서 제자이자 동료 사목자인 티모테오에게 착한 목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근조근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은 사제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번째 의무요 과제인 복음 선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① 복음 선포는 일생에 한두번 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것입니다. 사제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선포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하십시오.” 복음 선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건강이 허락해도,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들어가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② 복음 선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복은 선포 여정에 반대와 몰이해, 시련과 박해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덕이 끈기와 인내의 덕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면서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류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해야 합니다. 낙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자극도 필요합니다.

③ 주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을 다시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높은 시련의 파도가 다가올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당히 중심을 잡고,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단한 것이, 제자들이나 동료 사목자들에게 그럴듯한 훈시 말씀만 건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선포한 것을 있는 그대로 당신이 사셨습니다. 말과 행동, 가르침과 구체적인 생활이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향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정신없이 달려온 복음 선포 여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또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이토록 당당하게. 이토록 자랑스럽게 자신의 지난 세월을 소개할 수 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마치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밀도 높은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 이후 바오로 사도는 단 하루, 단 한 순간도 주님 외에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생애가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생애였습니다.

 

 

 

유혹과 맞서는 자는 하느님을 품지 못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마태 2,14-15)

찬미 예수님!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6월의 성모 신심 미사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 편의 숨 막히는 추격 영화 같습니다. 잔혹한 권력자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칼을 빼 들었고, 요셉과 마리아는 한밤중에 급히 짐을 싸서 낯선 땅 이집트로 도망을 칩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가족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피해 비겁하게 쫓겨 다니는 피난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뼈아프고도 중대한 영적 질문을 던집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천사 군대를 동원해 헤로데를 쳐부수지 않으시고, 굳이 성가정을 한밤중에 '도망치게' 만드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신비를 통해,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유혹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 진짜 영적 생존법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품에 갓난아기를 소중히 안고 길을 가는 한 어머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골목길에서 사나운 들개가 침을 흘리며 덤벼듭니다. 이때 어머니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어머니가 무술을 연마한 유단자이고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내가 저깟 개 한 마리 못 이길 줄 알아?" 하며 아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들개와 맞서 싸우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행여나 흙먼지가 튀어 아기의 눈에 들어가거나 짐승의 발톱에 아기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두려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도망을 칩니다.

어머니가 도망치는 이유는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내 자존심이나 내 힘을 증명하는 것보다, 내 품에 안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품은 자는 결코 들개와 기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체면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 이것이 생명을 품은 자의 가장 위대한 본능입니다.

이 원리는 전 세계 국가 원수들을 보호하는 최정예 요원들의 '경호 프로토콜'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VIP가 연단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군중 속에서 암살자가 총을 꺼내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경호원들은 절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따지거나, 맞서 싸우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느라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경호원들의 제1수칙은 단 하나입니다.

 

위험이 감지되는 그 즉시, VIP의 머리를 강제로 누르고 몸을 둥글게 감싼 뒤, 어떤 질문이나 망설임도 없이 가장 가까운 안전 가옥(Bunker)을 향해 냅다 뛰어 도망치는 것입니다. 경호의 핵심은 적을 물리치는 멋진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생명'을 살려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체면을 차리거나 상황을 따지고 맞서 싸우려 들면 VIP는 목숨을 잃습니다. (출처: 댄 에머리, 『시크릿 서비스: 대통령 경호의 세계』)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보여준 행동이 바로 이 '어머니의 본능'이자 완벽한 '영적 경호 프로토콜'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하니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의 자존심 강한 남자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니, 이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서요? 하느님이 벼락을 내려 헤로데를 죽이시면 되지, 왜 비겁하게 한밤중에 도망을 가야 합니까?"라며 따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불평 한마디 없이 남편 요셉의 이끌림에 완벽하게 순종하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자존심이나 내 편안함이 아니라,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고귀한 '예수님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임을 말입니다. 내가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상황의 비참함이나 도망치는 수치심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목숨 걸고 지켜내야 할 '아기 예수님', 즉 세례를 통해 잉태된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헤로데와 들개들, 즉 내 안의 교만과 분노, 돈을 향한 탐욕, 음란한 쾌락이라는 마귀는 틈만 나면 내 영혼의 아기를 물어뜯어 죽이려고 이빨을 드러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자주 범하는 치명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바로 유혹의 들개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 이기겠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술자리나 쾌락의 유혹이 넘치는 장소에 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앙이 깊으니까 이 정도 유혹은 내 의지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 나는 절대 취하지 않을 거야. 나는 흔들리지 않아."

이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영혼 안에 '하느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 자의 지독한 오만입니다. 만약 내 품에 갓난아기 예수님이 안겨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어떻게 감히 그 위험한 유혹의 자리에 머물며 마귀와 주먹다짐을 하려 들겠습니까?

 

싸우는 동안 유혹의 흙먼지가 내 영혼의 아기에게 덮이고, 마귀의 발톱에 내 안의 은총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텐데 말입니다. 유혹과 맞서 싸우려 드는 자는, 아직 하느님을 온전히 품지 못한 가짜 신앙인일 뿐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하필 스스로는 걷지도 못하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어머니 품에 안겨 세상에 오셨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완벽하게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고집을 꺾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해질 때까지, 우리 영혼 안에서 스스로 무력한 아기처럼 머물며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잉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의지로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어!'라며 뻗대는 얄팍한 '교만의 화분'에 갇혀 있는 한, 주님은 내 안에서 영원히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무력한 아기로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의 들개 앞에서 나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체면을 버리고 화장실로 숨거나 그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는 '겸손'을 선택할 때 어떻게 될까요? 내가 교만의 화분을 스스로 깨부수는 그 순간, 내 안의 아기 예수님은 비로소 우주를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본모습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유혹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작아졌을 때, 내 안의 주님은 가장 커지시어 세상의 그 어떤 마귀와 유혹도 단숨에 짓밟을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을 내 삶에 마음껏 펼쳐 보이십니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생명을 지킨 성가정은, 헤로데가 죽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또 장애물이 생깁니다. 잔혹한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두려워합니다. 그때 천사가 다시 꿈에 나타나 방향을 틀어 갈릴래아 '나자렛'이라는 깡촌으로 우회하도록 내비게이션의 경로를 수정해 줍니다.

왜 우주의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멸시받던 나자렛 깡촌에 숨겨두셨을까요? 세상의 사나운 들개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완벽한 '위장술(Camouflage)'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보물은 가장 허름한 상자에 숨겨야 도둑이 훔쳐 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메시아를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보잘것없는 마을의 청년으로 30년 동안 완벽하게 숨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발휘해도 유혹을 보면 도망쳐야 할까요? 당연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할머니가 장성한 아들과 길을 가다가 들개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을 믿고 개와 싸워야 할까요?

 

무서워 도망을 치면 아들도 함께 올 것입니다. 만약 유혹이 나를 따라잡을 양이면 그때 아들이 돌아서서 개와 맞설 것입니다. 그러니 어쨌거나 죄에서 도망치십시오. 이것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밤 당장 짐을 싸서 도망치라 하시면 도망치고, 시골 구석에 숨어 있으라 하시면 기꺼이 머무르십시오. 그 철저한 도망과 침묵의 발걸음만이 내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유일한 경호 수칙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처럼,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도망을 통해 내 안의 주님을 위대한 하느님으로 키워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기술 공화국’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투자자인 Peter Thiel의 생각도 함께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업가를 넘어, 기술이 앞으로 인간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저서 Zero to One에서 “0에서 1로 나아가는 창조”를 강조하며,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발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기술 공화국’입니다. 앞으로의 사회는 기술이 중심이 되어 재편될 것이고, 그 핵심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인공지능입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담당해 온 사무직과 지식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휴머노이드입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로봇들은 생산 현장에서 반복적이고 육체적인 노동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에너지입니다. 이 모든 기술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결국 지능과 몸, 그리고 힘을 균형 있게 갖춘 나라가 새로운 문명을 선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한 가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중심에는 결국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술은 세상을 빠르게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을 살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과 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의 시대를 살면서도, 더 깊은 인간성과 신앙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오스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파견된 후배 신부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전, 교구의 요청으로 그 본당의 상황을 살펴보고 보고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조심스럽게 판단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이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에는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목을 시작하는 신부님을 만난다는 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세 가지 다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의 뜻’,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뜻’을 먼저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목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 뜻’이 앞설 수 있는데, 시작하는 자리에서부터 ‘하느님의 뜻’을 먼저 고백하는 그 모습이 참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신부님의 길 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또한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다짐 속에서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의 사목이 아니라, 이어지는 사목, 다음을 준비하는 사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마음에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책임을 나누는 그 자리에서 교회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는 신부님께 환영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신부님을 통해 이 공동체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 안에도 작은 다짐이 생겼습니다. 필요할 때 함께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사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제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남았습니다. ‘잘 되겠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겠구나.’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 바오로의 권고와도 이어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을 알려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작은 정성을 보십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을 보십니다.

세상은 기술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와 에너지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전혀 다른 원리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위선과 허영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작지만, 정성 어린 헌금을 사랑하십니다. 구원은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정성과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이 믿음을 간직하며,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작은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바로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에게
받으시고픈 것은


나 아닌 나
아닌


바로


내가


하느님께
드리고픈 것은


나 아닌 나
아닌


바로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이어서 렙톤 두 닢을 넣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보시고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고 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 당시 과부에게 있어서 남편을 사별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그렇게 자신의 생활비를 바치고 나면 사는 것 자체가 힘들 수도 있는 봉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 자신의 것을 봉헌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봉헌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많은 경우 봉헌이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하느님께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것을 봉헌한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은 아까운 마음을 갖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봉헌이라는 것은 자신의 것을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봉헌의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완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노래를 잘한다고 했을 때 물론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그만큼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좋은 목소리를 주셨고, 음악적인 재능을 주셨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열정과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그렇게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탈렌트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 사랑은 힘있고 가진 것 능력 따라 차별을 두지 않은다.<마르코12/38-44>6월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을 거룩하고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면 가난하고 모자라고 볼품없는 사람에 대한 친숙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 가진 자리 멋진 자리를 탐하지 말고 낮은 자리 없는 자리 멋없는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고 그런 서람들 과 친숙한 사람이여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은 어부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선택하시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어울리며 함께 하시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비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오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찬미 찬송하시는 말씀은 교회는 귀담아듣고 믿음을 살라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살고 그들과 깊은친교를 가지고 사는 것 교회의 첫 번째 일입니다. 저는 신품받고 가난한 농촌의 보좌@로 사목하다가 나의일은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사는 길이라 생각하고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상담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며 하느님 뜻을 나누고 힘받고 힘주며 살고 있습니다. 어느 때 든지 무엇을 주는 사람에게 감사하지만 없는 사람에게 나눌 생각으로 받고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성주본당 보좌로 살 때 성탄 판공을 성주읍내를 떠나 시골 오지만 한달 25곳의 공소를 돌며 쪽방에서 잠을자고 미시들이며 살던 습관이 나중에 농촌에 관심을 가지고 농민운동을 시작하여 지금의 농민회의 지도신부하며 농촌청년들과 6년을 살다가 인사이동으로 중단하였지만 지금까지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의 관심이고 수도원의 가난한 후배를 도우며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관심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아니 권위 의식 버리고 낮은 자리 겸손과 온유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날 주교님들의 목장을 힘의 상징으로 보았는데 어떤 사람의 해석에 십자가가란 말을 듣고 휘두르며 사는 힘의 싱징이 아니라 십자가에 힘없이 죽으신 주님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주교자리는 십지가 상에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 따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관도 힘의 상징 아니라 가시관의 상징이라 그 자리는 함들고 어려운 자리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랑 거리를 만들어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모범을 보이며 더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야 할 자리입니다.

힘은 섬김으로 가진바는 나눔으로 멋을 자랑거리가 아니고 함께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말씀 따라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내어주며 섬기고 친교를 가지고 사는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푸르른 싱그러움이 짙어가는 6월의 첫 주말입니다. 초록의 생명력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은총의 아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 헌금함 앞에 앉아 가난한 과부의 손길을 눈여겨보십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렙톤 두 닢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안에 담긴 과부의 온전한 신뢰와 사랑을 알아보셨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마르 12,43)

세상은 흔히 눈에 보이는 크기와 숫자로 가치를 매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것의 양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를 보십니다.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 것을, 곧 생활비 전부를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느님 앞에 내어놓을 것이 너무 적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정성, 짧은 기도, 묵묵한 희생까지도 모두 기억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렙톤 두 닢’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세상의 기준에 기죽지 말고, 나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자비와 은총을 가득히 내려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봉헌의 삶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동기들보다 3년 늦게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7,000명이 넘는 큰 본당에 보좌 신부로 발령받았을 때, 사제의 삶에 대한 저의 기대는 무척 컸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신자 분들이 기도와 사랑으로 부족한 저와 동행해 주셨고, 덕분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행복한 사목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한구석에 작은 공허함이 생겨났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제 안에 ‘하느님의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정작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는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동전 두 닢 뒤에 숨겨진 그 순수한 믿음과 정성을 헤아리십니다.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마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의탁하기보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겉으로 보기에만 좋은 신앙생활에 머물곤 합니다. 열심히 일상을 살아내도 영적 메마름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지 모릅니다. 따라서 가난한 과부가 지녔던 전적인 신뢰와 용기를 우리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까지 기쁘게 봉헌하며 주님 안에서 참된 충만함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봅니다.

 

 

 

「일부는 전부보다 많을 수 없습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초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 온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핸드폰도 최고급 사양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왕따당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AI 로봇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 중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손희송).

 

오래전 일입니다. 컨테이너 박스에 거처를 삼으시고 살고 계시는 아가다 할머니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네잎클로버입니다. 전날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행운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시들까 봐 물컵에 담아서!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잎클로버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
      송영진 모세 신부님
1) 여기서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말씀’은 참된 신앙인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위선자들이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고,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선의 큰 문제점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는, “너희는 율법학자들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입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는, 거룩한 사람인 척 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이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자기를 존경하라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존경한다는 뜻으로 공손하게 인사했고, 회당 예배 때나 잔치 때에는 그들을 위해서 윗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그 존경은, 진심으로 하는 존경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만 하는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니 존경받는 것을 즐기는 쪽만 위선자였던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척 하는 쪽도 위선자였습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는,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신심을 과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흉내 낸 것, 또는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일 뿐입니다.


2)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탈출기에,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라는 율법이 있습니다(탈출 22,21).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3) ‘가난한 과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인으로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 과부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데도 형편이 안 되어서 못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괜히 주눅 들기도 하고, 자기가 뭔가 많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말씀이, 그 과부를 본받으라는 뜻이긴 하지만, 누구다 다 전 재산을 바치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헌금(성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형편이 안 되어서 그 과부처럼 가진 것을 다 봉헌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진 것을 다 봉헌한다고 해도, 칭찬받고 싶은 명예욕으로,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힘없는 과부들에게서 빼앗은 돈 가운데 일부를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강도짓 같은 일로 빼앗은 돈을 봉헌한다면, 아무리 큰돈을 봉헌한다고 해도, 그것을 봉헌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감히 하느님을 자기들 범죄의 공범으로 만드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이든지 무슨 제물이든지 간에,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정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레위 22,17-25). 그 전에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봉헌하는 사람 자신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인 ‘기도, 자선, 단식’을 행함에 있어서 율법학자들의 교만하고 위선적인 모습과 가난한 과부의 겸손하고 소박한 모습을 서로 대비시켜 보여주십니다. 먼저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율법학자들을 강도 높게 질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행위를 “남에게 보이려고”, 즉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과시하여 보여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기도, 자선, 단식을 실천하는 것은 불결한 것을 멀리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느님과 보다 가까워지기 위함입니다. 즉 그 기도, 자선, 단식은 하느님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한 ‘재계’(齋戒)인 것이지요. 그런데 종교 지도자라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런 재계를 행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려고 하지 않고, 그 행동을 통해 자기들이 영광을 누릴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악표양’이 되고 있으니 강도 높게 비판하신 겁니다.

한편,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소박한 봉헌을 칭찬하십니다. 많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큰 돈을 넣은 것에 비해, 그녀가 봉헌한 돈은 고작 ‘렙톤 두 닢’, 오늘날 우리 화폐가치로 따지면 3천원도 안되는 적은 금액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지요. 그건 그녀가 봉헌한 ‘액수’만 보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셨기 때문입니다. 거들먹거리며 큰 금액을 헌금함에 턱하고 집어넣은 부자들 다음 차례에, 보잘 것 없이 적은 금액을 봉헌하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자기 처지가 너무나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저것밖에 안내느냐’며 자신을 비웃고 업신여기는 이들의 모욕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율법학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가 아니라,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좋은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기에, 그런 부끄러움과 업신여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봉헌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런 그녀의 봉헌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참된 재계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분께 도움이 되고자 하는 그녀의 정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고자 노력한 그녀의 삶 전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이들처럼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즉 자신의 ‘일부’를, 그나마도 남들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이 빼앗기듯 내놓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봉헌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우리와 완전히 하나되기를 바라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의 전존재를
내어놓는
봉헌을 만납니다.

참된 봉헌은
자기 존재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을
어떤 가치에
헌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봉헌의 삶은
돈의 가치가 아닌
마음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마음의 가치는
겸손함 속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우리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큰 것을 기억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봉헌된 작은 것을
기억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이루고도
감사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부족함 속에서도
내어놓을 줄을
알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참된 삶입니다.

참된 삶은
하느님께 내어맡긴
참된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감사의 응답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창던지기 종목에서 영국 선수 스티브 베클리는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의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고, 그 역시 그 어떤 때보다도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을 6개월 앞두고 발목 부상을 입었습니다. 6주 동안 목발을 짚어야 했고 훈련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는 6주 동안 목발을 벽에 기대어놓고 의자에 앉아 창던지기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창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고, 손가락으로 꽉 쥔 서늘한 금속 손잡이의 감촉을 느꼈습니다. 완벽한 창던지기 자세를 취했고, 던진 창이 높이 아치형을 그리며 날아가는 순간에는 그의 근육도 긴장했습니다. 창이 저 멀리 날아가서 땅에 꽂히는 장면을 계속해서 상상했습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중요하다고 말하지요. 실제로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이 훈련으로 향상된 성적을 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스티브 베클리 선수가 ‘훈련을 할 수 없으니,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어.’라고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방법을 사용할 수 없을 때는 좌절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을 이 세상 안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처럼 자비의 빈손, 믿음의 빈손, 정결의 빈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었겠지만, 주님께서는 지향을 보시기 때문에 그녀를 칭찬하십니다.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다 넣을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시는 그녀의 지향을 보신 것입니다.

자캐오도 자기 재산의 절반으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었고, 과부도 동전 두 닢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베푼 많은 재산과 가난한 사람이 건넨 두 닢이 하늘 나라에서는 똑같은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재물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보다 하느님께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랑의 지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게 사랑의 지향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주님께 봉헌할 재물이 없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을 더 슬퍼해야 합니다.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에머슨).

 

자기 자리를 지킴.

어느 석상이 야외에 서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고 햇볕이 뜨거울 정도로 쨍쨍 내리쬘 때도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습니다. 석상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만스럽지 않을까요?

석상을 만든 작가가 이곳에 세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상도 기쁠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자신을 보고서 감상을 하며 기쁨을 간직하는 사람을 볼 때가 아닐까요?

이렇게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석상을 보면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도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불평불만으로 지금 자리를 떠나려고만 애쓰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자리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고 자기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헌금이나 있어서 금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마음이요, 정성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미드라쉬(히브리어,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 가운데 랍바(랍비들의 가르침) Ⅲ’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제가 어느 가난한 여인이 봉헌한 한줌 밀가루 제물을 손에 받아들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 사제는 즉시 하느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밤 꿈에 그는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바친 것을 멸시하지 말아라.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과 같으니라.”

 

봉헌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 역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예물이 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면 좋겠습니다. 보다 큰 액수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처지가 각자 다릅니다. 10만원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10만원이 하늘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액수보다는 마음과 정성을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봉헌이나 자선 금액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 때문에 소외당하거나 상처받은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각종 헌금이나 기부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사목자들은 없는 교우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곘습니다.

 

성 목요일이 저물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입구 헌금함 맞은편 계단에 앉아 계셨습니다. 저 건너편에는 13개의 헌금함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을 맞아 수많은 유다인이 헌금을 하러 몰려왔습니다. 어떤 부자들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양손 가득 동전을 들고 왔습니다.

값어치가 큰 금화나 은화를 하나 조용히 넣고 돌아서면 간단하고 좋을텐데, 그들은 ‘있어 보이려고’, 뽐내려고, 수많은 동전들을 갖고 와서 요란스럽게 헌금함에 넣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헌금의 액수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것 없는 헌금을 크게 업신여겼습니다.

이윽고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금액이 고작 렙톤 두 닢이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이스 화폐 단위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었습니다. 두 렙톤은 로마 동전 한 과드란스와 동일한 가치를 지녔는데, 껌이나 한통 살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이 과부가 지니고 있던 전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 돈을 넣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테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2장 43~44절)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드린 선물은,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의 큰 기부금보다도 더 뛰어납니다. 그녀가 두 렙톤을 헌금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그날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쓰고 남는 것을 바쳤습니다.

 

헌금이나 기부, 자선에 액수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곧 마음이요, 정성입니다.

 

 

 

<저 먼 나라의 어린이가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고를 치른 마틴 니뭴러(Martin Niemoller)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옥고를 치른 후 위대한 「2차 대전 책임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체험이 나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느 날, 니뭴러 목사가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데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뭴러 목사도 그 대열에 서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이상하게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꾸 변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게 사랑으로 예수님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니뭴러 목사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네 책임이다.”

이 말을 들은 니뭴러 목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 정권에 대해 항거만 했지 한 번이나 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죗값이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 똑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고 “이 전쟁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구나!”라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눈물로 쓴 책이 「2차 대전 책임백서」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겉모양으로는 모든 율법을 다 알고 지킨다고 사람들이 여기게끔 꾸미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가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 곁에는 천 원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천원까지 헌금통에 집어넣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보살펴주시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그런 사람을 자신의 형제처럼 사랑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그런 책임을 무시하면서 완전한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 학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율법까지도 이용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낳은 아들이 카인입니다. 그는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그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 말 안에는 자신 안엔 율법이 없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율법은 책임입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책임을 깨우쳐주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미소짓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입니다.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가는 길에 새의 둥지를 보았습니다. 소나무 가지 사이에 둥지가 있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몇날 며칠 둥지를 떠나지 않았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지켜보지만 어미 새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벌써 10일 이상 지났으니 곧 둥지에서 새끼 새를 볼 것 같습니다. 한 마리의 새끼 새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미 새의 눈물겨운 품기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돌아보면 쉽게 포기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게으름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고, 열등감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이기심 때문에 포기한 적도 있고, 주변의 환경을 탓하며 포기한 적도 있습니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 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몇 번 들었습니다. 지난달에 마지막 방송을 했는데 1987년부터 진행했으니 33년이 되었습니다. 방송할 때는 20대 였는데 지금은 50대 후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청자들을 위해서 방송했다고 합니다. 33년이란 긴 시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던 강석, 김혜영 진행자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충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잠시의 방심과 나태함 때문에 또다시 어려움이 시작되곤 합니다.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해서 대처를 잘 하였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개학을 앞둔 시기에 이태원에서의 감염이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개학이 연기되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밀집된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람들 사이를 신나게 돌아다녔고, 확진자는 다시 늘어났습니다. 정부와 지방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대처로 일단락되었지만 경각심을 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죽비’가 되어 제게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게 합니다. 

 

신앙인은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눈길

닿는 곳

 

날 보는

너 아닌

나일 때

 

난 자유

난 진실

난 참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톤 두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다고 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은 단순히 어느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것이나 가난한 이를 위한 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정성과 사랑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은 마치 불쌍한 이를 돌보는 긍휼의 차원이 아니라 감사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종종 그러한 봉헌에 대해서 제대로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 때로는 봉헌마저도 아까워하곤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에 엄마 입에 과자를 넣어줄 때 엄마는 그 아기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면서 더 많은 것을 더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과자를 아까워하면서 손에 꼭 쥐고 아무도 주지 않을 때 어쩌면 더 받을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우리의 하느님께 참된 봉헌을 했을 때 그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의 모습을 사랑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봉헌의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과부의 헌금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지만, 외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하시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하신다. 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신경 쓰는 그들의 불행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13개의 헌금 궤가 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위한 헌금 궤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 그런데 한 과부는 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을 헌금 궤에 넣었고, 예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희생하고 바쳤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마음으로 재어진다. 즉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셨다.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실히 응답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귀퉁이만으로 응답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코는 은총에 호응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조건 없이 단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과부를 비교하고 있다.

 

자선을 베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이다. 비록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동전 두 닢을 넣는다면 우리는 힘자라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한 것이다. 보리빵 한 조각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자선행위의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냉수 한 잔으로 하늘 나라를 얻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늘 헌금을 한 과부의 모습을 통하여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 말에 ‘의복이 날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바라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보다 무엇을 입고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더 높이 사기도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스스로도 입고 있는 옷의 모습이나 종류, 매무새 그리고 갖추고 있는 각종 소유물과 액세서리 등에 따라 스스로도 행동이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말하기도 한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울법 학자들의 허례 허식을 지적하신 후 부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의 적은 헌금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과 평가를 수시로 던지며, 나 스스로 어떤 자리에 앉아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앞서, 내가 주님 앞에 진실한 사람인가를 점검하고, 내가 어떤 것을 중시하며 무엇을 추구하고 마침내 이루려고 하는지를 되새기며 주님께 나아갑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저마다 삶의 상황이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 율법 학자, 부자들,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고루 겪게 되는 삶의 기회들, 시기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

문맥으로 보면 현재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사두가이들과 두루 마찰을 빚고 계시는 중인데, 오늘의 대목에서는 율법 학자들을 정면으로비난하십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예수님께서 단지 그들을 같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자고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는 지식과 권위를 소유한(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 인사받기를 즐기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찾고 과부를 등쳐먹으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태도는 오늘날 심심찮게 문제가 되고 있는 위선과 갑질의 전형이지요.

그들은 앎과 삶이 분리되어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빠진 우리의 단면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선을 위해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지식과 권위, 능력과 영향력을 제 명예와 영광을 위해 오용하고 남용하는, 어찌 보면 주님 눈에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지요.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마르 12,38).

그들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봉헌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꼭 재물만이 아니어도 탈렌트나 시간, 건강 등 우리 삶에 이런 풍요의 순간이나 기회가 없지 않지요. 그때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태도는 결코 작거나 하찮지 않습니다.

그런데 봉헌의 지향이 하느님의 더 큰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헌금함에 돈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찬사를 보내줄 사람들 때문인지, 사심 없는 감사의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하느님만 아십니다. 중요한 건, 사람은 그 봉헌의 물리적 수량을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2).

보호자 없는 과부는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아주 취약한 약자입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하니 그녀는 생활 이전에 생계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살았을 겁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재산도 사람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이 철저한 고독으로 밀려났던 시기를 떠올려 줍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혹 지금 이 순간 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체험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때 절망의 나락에서 추스르고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건 놀라운 결단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남은 것을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박박 끌어 모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지요.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몰아넣은(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태도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모습이지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바치는 건 그게 무엇이 얼마나 되었든 액수에 관계 없이 렢톤 두 닢도 못 되는 가치니까요. 또 돈, 인맥, 제도 등으로 겹겹이 보호막을 치고 살아도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외에 인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단순한 의탁과 겸손한 봉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유언에 가까운 내용을 전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이미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린"(2티모 4,7) 선배로서 바오로가 충고합니다. 그는 기회가 늘 좋거나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압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2티모 4,5)라는 권고에는 사랑하는 제자이며 후배에게 갖는 짠하고 안쓰러운 심경까지 비칩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박해와 모욕과 죽음의 위협 속을 걸어가는 복음 선포자의 삶이 세상 눈에는 그저 렙톤 두 닢 어치도 못 되는 가치일 수 있지만, 하느님 눈에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마르 12,43) 봉헌한 것이지요. 그 가치는 하느님과,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간 이들만이 압니다.

 

"이제 다 늙어 버린 이 몸을 버리지 마소서. 제 기운 다한 지금 저를 떠나지 마소서"(화답송).

시편 저자는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담아, 아니, 저마다 가난하고 초라한 실존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아 노래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나약하고 가련한 실존을 지고 꿋꿋이 살아가는 길은 우리의 가난을 그 약함과 부족함, 죄악까지 주님 발 앞에 바치는 의탁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가난과 겸손으로, 온 세상,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부요하고 완전하신 성삼위 하느님을 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부자가 아니어서, 가난해서 행복한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봉헌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청년들과 고해성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성사죠. 저도 그렇습니다. 사제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말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제 삶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침묵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누구보다 성경에 밝은 사람들이었고, 율법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그 내면의 삶을 꿰뚫어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이 아닌 세상 것에 있음을 밝히시면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하느님께 소중하다고 알려주십니다. 과부는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함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크고 작음, 많고 적음, 길고 짧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없는 기준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그때에는 진실한 마음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을 위한 완전한 봉헌< 마르코, 12/38-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이렇게 친찬하십니다. “ 저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 저 들은 모두 풍족한 가운데 많이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부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낳으라는 ㅁ말씀이 아니라 헌금 봉헌의 참 뜻은 자기를 전부 봉헌하는 정신을 아려주십니다. 팍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도 강도맞은 사람위하여 가진 것 전부를 내어주고 간호하고 가진 시간 모두를 활해하여 도우고 죽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은 가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삶 자체를 십자가에서 봉헌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참 교훈은 남김없이 바치어라입니다.

 

우늘 날 세상의 정치 구조나 이념이나 두가지 양상으로 형ㅈ 성되어 있습니다. 평등 시회를 이루고자 하는 공산사회주의 자가 자유로운 삶이란 나라가주는 것을 먹고 마시고 개인적으로는 여행의 자유 선택의 자유도 없이 하느님 같은 통치자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입니다. 또 하나는 자유 민주주의로써 각자가 자기 능력것 노력해서 일어나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삼ㄹ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며 사는 자유 분망한 자유로운 삶어서 여행의 자유 주거에 자유 나라의 법대로 살아가면 안전된 삶과 개인의 능력을 마음것 발휘하는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구라파에 오랜 전통을 따라 황제 중심적 형테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다음 개혁된 세상은 공산당 최고인원이 황제처럼 사회 경제 안보 공동체 삶을 조종합니다. 땅도 자산도 기업도 모든 것이 나라가 관리하고 권력의 중앙 집권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공산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주님은 자유 의지에 따라 서로 사랑의 법을 실천하도록 이끄시고 하느님에게 받은 것을 남김없이 나누어주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길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 네가 모은 저 많은 것 죽음뒤 뉘 찾지가 되겠나.” 세상의 존재한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내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육적 관계인 면에서 보면 세상의 이익이나 이해관계에서 가진 것기 적은 사람은 적네고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내라는 뜻이 아니라 여의 인도를 받은 사람은 지금 고통중에 있고 가진바가 없도 희망을 가지고 살며 많이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가난한 마음으로 세사에 부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희망을 가지고 살라 하심입니다.

교회는 무수한 가난한자의 봉헌 정신으로 기초를 쌓고 튼튼한 바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는 진실 되고 거짓이 없고 공정하고 정의롭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황재나 대통령이나 최고 자에 의해 관리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 한사람 한 사람의 서로 사랑하는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나라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역사 안에 왕이 디스리는 나라가 한계가 있어 망하고 살아지고 하지만 국민이 공동체적 협력으로 이끄는 영적 교회는 지옥문이 처 이기지 못합니다. 많고 적은 것아 아니라 자기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는 봉헌생활을 하느님은 받아드리십니다. 는 말씀입니다. 이멘. “격언 새의 두날 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르지 못하면 < 한 날개를 가지고 날으지 못합니다.>땅에서 하느님을 희망하며 살아갑시다.”

 

 

 

‘가난한 과부’ 교회가 받을 ‘의로움의 화관’ - 복음선포에 필요한 성령의 은사 ⓺ 경외심 혹은 두려워함

     이기우 신부님

성령강림 대축일 이후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이미 받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는 데 쓰일 수 있는지를 그날의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곱 번째 은사로서 복음을 들려주시고 주관하시며 완성하실 하느님께 대하여 경외하면서 그분의 심판에 대해서는 두려워해야 할 바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경외심 혹은 두려워 함으로 불리어지는 이 은사는 복음선포의 주관자이시고 완성자이신가 하면 심판자이기도 한 하느님의 역할과 그분께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일러줍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로 봉독된 말씀에 의하면, 이 복음선포의 자세와 마음은 ‘가난한 과부’와 ‘의로운 화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상징되는 현세적 가치에 대한 자세를 상징하는 것이 ‘가난한 과부’ 이야기에 담겨 있으며, 이와 함께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느라고 벌인 노력과 거둔 성과를 평가함에 있어서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마음이 ‘의로운 화관’ 이야기에 담겨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합하여 복음선포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는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가진 돈이 많았던 부자들은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지닌 힘을 이용하여 갈릴래아와 유다 지방에서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부재지주로서 막대한 임대수입을 취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가난해진 이들이 돈을 빌리러 오면 고리대금업으로 쌓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부와 재산은 착취로 얻은 불의한 재산이었습니다. 이를 위장하느라고 그들은 헌금을 많이 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전 재산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뚤어진 현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놓고 비난하는 일은 피하셨지만 그렇다고 칭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가진 것이 궁핍하여 얼마 되지도 않는 생활비를 쪼개어 봉헌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유한 바리사이들에 대해 에둘러 비판하시는 모양새입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진 재산이 많음을 자랑하는 그 자체가 하늘에 쌓기를 멀리하고 있다는 자기폭로입니다.

 

재물은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눔이요, 공동선을 위한 투자입니다. 사회와 정부가 미처 하지 못하고 있는 공동선의 구석을 교회가 신자들로부터 받은 헌금으로 보살피면 그것이 나눔이요 하늘에 쌓는 것이 됩니다. 신앙인들이 자기가 일해서 번 돈으로 개별적으로나 혹은 공동체 단위로 나눔과 투자를 해도 똑같은 복음선포입니다.

 

이 나눔과 투자에는 긴급구호처럼 일회용으로 돕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복지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나 시설을 세워 도울 수도 있고, 당사자들이 주체가 된 공동체 운동을 뒤에서 돕는 일도 있으며, 아예 빈곤이라는 사회병리현상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입법활동이나 정책개선활동 또는 사회계몽운동을 벌이거나 이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나 정부가 공동선에 대해 벌이는 노력을 팔장끼고 수수방관하며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복음선포의 자세가, 가난한 과부의 일화를 보도한 복음사가의 편집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강조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이는 적어도 교회가 신자들이 하느님께 바친 헌금을 맡아서 쌓아두어서는 안 되며, 최고선의 뜻에 따라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한다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같은 이치로, 신자들이 자신이 일해서 번 돈과 그렇게 모은 재산을 남겨서 땅에 쌓아두지 말고 죽기 전에 최고선의 뜻에 따라서 공동선에 사용해야 하지요.

 

사도 바오로는 이 문제에 있어서 철저했습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어느 사도보다도 복음적으로 살았습니다. 가난한 이방인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천막 만드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생활비와 활동비를 스스로 벌어서 마련했으며, 기성 사도들이 관할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는 코린토 공동체를 통해서 모금을 하여 보내기도 했습니다. 천막 노동으로 마련한 돈으로 값비싼 양피지를 사서 각 공동체에 편지를 써서 보냄으로써 말씀 전례에서 돌려가며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산을 남기지 않았고 제자 몇 사람과 공동체들을 남겼습니다. 그런 그가 남기는 유언이기 때문에 무게가 있고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뜻과 사람을 남겨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이것이 티모테오와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당부라면, 다음은 자기 자신의 고백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을 아끼거나 쌓아두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투자하여, 마침내 의로운 화관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참 생명에 이르는 길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Cap. 14, lect. 2)

그리스도 친히 길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길은 목적지에서 떨어져 있지 않고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덧붙여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길이신 동시에 목적지이십니다. 인성에서 볼 때 길이시고 신성에서 볼 때 목적지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나는 길이다.”라고 하시고 하느님으로서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진리와 생명”이라는 이 두 단어는 길의 목적지를 잘 지시해 줍니다.

 

길의 목적지는 우리 인간 열망의 목적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다음 두 가지를 열망합니다. 첫째로 진리를 아는 것을 열망합니다. 이 열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입니다. 둘째로 존재의 지속을 열망합니다. 이 열망은 모든 피조물에게 공통적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진리이시기 때문에 진리의 앎에 이르는 길이십니다. “주여, 진리 안에서 나를 인도하소서. 그러면 나는 당신 길을 걸으리이다.” 그리스도 친히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십니다. “주여,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의 목적지를 진리와 생명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위에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 친히 생명이십니다. 성서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 친히 진리이십니다. 성서는 “그분은 사람들의 빛이셨다.”고 말합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길을 통해서 가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리스도를 택하십시오. 그분은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거라.”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사람을 통해서 걸어가라. 그러면 하느님께 도달할 것이다.” 길을 벗어나 속력을 내는 것보다는 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은 비록 진보는 느리지만 목적지에 조금이라도 다가섭니다. 한편 길을 벗어나 걷는 사람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목적지에서 더 멀어집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리스도께 바싹 다가서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다다르고자 갈망하는 진리이십니다. “내 입은 진리만을 말한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리스도께 바싹 다가서십시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께 바싹 다가서십시오. 주님이 길이시기에 여러분은 곁길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 바싹 다가서는 사람은 곁길로 가지 않고 바른길로 걸어갑니다. 주님은 진리이시고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에 속이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주님은 생명이시고 또 생명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에 불완전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세상에 왔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함승수 신부님

사람들을 웃기는게 직업인 ‘개그맨’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개그맨을 ‘하고 싶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개그맨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얼굴을 비롯한 겉모습이 너무 웃기게 생긴 사람은 후자에 속하지요. KBS 희극인실 역사상 개그맨 시험에 한 번에 붙은 사람이 지금까지 딱 두 명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옥동자’로 유명한 정종철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오지헌씨입니다. 둘 다 ‘웃기게’ 생기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지요.

 

하루는 오지헌씨가 중학교 시절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식사를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그에게 외모 때문에 마음이 참 힘들고 괴로웠을 것 같다고 걱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오지헌씨는 너무나 밝은 모습으로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나는 단 한 번도 내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느냐고 이유를 묻자 오지헌씨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제가 믿는 하느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남들만큼 잘생긴 외모를 안주신게 아니라, 제가 개그맨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얼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오지헌씨의 이런 넉넉하고 담대한 마음가짐이야말로 팍팍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남들보다 못생긴 자신의 얼굴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에게만 멋진 외모를 주지 않으신 ‘불공평한 하느님’을 원망하며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우울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지헌씨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만 은총을 덜 주신게 아니라, 남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특별한 은총을 주신 것임을 깨달았기에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당당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가진 게 많아야, 형편이 넉넉해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닌, 하느님과 나와의 특별한 관계 안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특별한 은총에 감사할 줄 안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넉넉하게 갖고 있지 못해도 얼마든지 기쁘게, 그리고 기꺼이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기꺼이 봉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가 낸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이 낸 것보다 더 많다고 하십니다. 상대적인 ‘양’을 보시지 않고 절대적인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만큼 다 쓰고 남은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카인의 재물’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느님의 몫으로 기꺼이 내어드리는 ‘아벨의 재물’을 더 어여삐 받아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탈렌트를 받고 태어나는데, 또 어떤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받고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재주도, 배경도 없이, 그저 건강 하나만을 받고 태어나는데, 어떤 사람은 부유한 가문에서 뛰어난 재능에 빼어난 용모까지 받아 태어납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하느님의 섭리가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탈렌트를 가진 사람이 벌게 된 한 탈렌트든, 다섯 탈렌트를 가진 사람이 벌게 된 다섯 탈렌트든 똑같이 귀하게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공평하신 하느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가져야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소극적이고 물질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기쁘게 내어드릴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현존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최민석 신부님

오전 물 냄새에 비가 오려고 그러는가 했는데 뜨거운 태양과 함께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린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 기회에 거실에 깔아 두었던 칙칙한 카패트를 꺼내어 햇볕에 말렸다.

여름 오후 햇볕이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하루를 가꾼다. 정원 장독대에 목화모종을 심고 물을 준다. 이마에는 구슬 같은 향기로운 땀방울이 맺혀있다. 여름엔 땀방울마저도 영혼의 노래가 될 수 있다. 뜨겁게 살면서 침묵으로 엎디어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여름이다.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겨울은 덥지 않아서 좋고 여름은 춥지 않아서 좋다. 사시사철 모두 좋으신 하느님의 작품이기에 완벽하다. 인간의 눈에는 2% 부족한 것도 사실은 있는 그대로 온전하다는 것이 실상이다. 살아갈수록 삶의 온전함을 깨닫는다. 요즘은 더위를 이기는 열매처럼 추위를 이기는 꽃씨처럼 꿋꿋해 보이는 것은 사랑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중에는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꼭 이 기도문이 아니더라도 이 말은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고,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 걸핏하면 입에 오리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을 받기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이왕 주는 사랑이라면 타산적이고 쩨쩨하지 않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라.’ 나 자신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쭙잖지만, 그래도 가끔은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말이다. 내 삶의 주제도 결국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다.

그러나 요즘 들어 나는 가끔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을 시큰둥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그 사랑으로 인해 오히려 오만해진다면 그 사랑은 참으로 슬프고 낭비적인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힌 가운데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12, 43-44)

 

사랑하는 일은 가진 모든 것으로 헌신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항상 배려하는 마음, 그 사람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도 항상 의식의 언저리에 있는 그 사람의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전인적인 투신을 전제하는 대단한 영혼의 행위다.

사람이 사랑받는다는 것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모난 마음은 동그랗게, 잘 깨지는 마음은 부드럽게, 너무 ‘비싸서’ 오만한 마음은 겸손하게 누그러뜨릴 때에야 비로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만큼 의연해질 줄 알고, 사랑받는 만큼 성숙할 줄 알며, 사랑받는 만큼 사랑할 줄 안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아파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가다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신부’라는 간판을 이마에 달고 다니면서도 나는 정작 사랑을 제대로 받을 줄 몰랐다. 걸핏하면 모서리 날카로운 네모가 되고, 걸핏하면 당연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는 듯 거만한 마음을 갖고, 또 걸핏하면 내가 거저 받는 그 많은 사랑들도 적다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런 당신 사랑의 그늘이 편해서 나는 지친 날개 펴고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가슴이 작은 한 마리 새가 되는 느낌이다. 당신 사랑의 현존은 온 종일 당신의 나뭇가지에 앉아 기쁨의 목소리로 행복한 노래를 부르게 한다. 모든 생명은 사랑을 받아야 성장한다. 그리고 사랑받은 생명이어야 사랑한다. 그렇다.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순리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열매가 여름 햇살에 익어가고 있다. 이 계절의 무더위도 하느님의 축복이다. 주님의 사랑을 믿는 일이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이며 내 생애 최고의 일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기회가 좋건 나쁘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번에 코로나 전염병 대처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와 우리 의료진들과 우리 국민이 얼마나 잘 대처하였는지 잘 드러났고,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자신을 비하하고 '헬 조선', 곧 '지옥과도 같은 한국'이라고 얼마나 자학하며 살아왔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얘기를 꺼낸 것은 우리도 이제 자부심을 갖자는 뜻이 아니라 위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왜냐면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아닐지라도 위기에 대한 올바른 대처는 지레 죽고 들어가거나 어떻게든지 위기에서 도망치려는 패배주의적이고 소극적인 대처가 아니라 어떻게든지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적극적인 대처라고 얘기하지요. 

우리 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일 때는 위기의 국면에서 오히려 국민을 위하고, 국민은 아엠에프 때 금 모으기에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동참했고 이번에도 의료진들은 참으로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국민은 정부의 지침을 잘 따랐지요. 

그랬더니 지금까지 우리는 말끝마다 유럽 몇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칭하며 우리는 후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우리가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가, 곧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위기를 기회로 제대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가진 우리는 더더욱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는 말이고 저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왜냐면 우선 복음 선포 자체가 좋은 기회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할 때 무엇이 좋은 기회이고 무엇이 나쁜 기회입니까?

 

우리를 '어서 오십쇼.'하고 환영하는 그런 곳과 그런 때입니까?

다시 말해서 반대나 박해가 없는 것이 좋은 기회입니까?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곳에 선교나 전교를 나갑니다. 선교나 전교는 그렇게 해도 되고, 그렇게들 많이 합니다. 가톨릭을 환영하는 곳에 나가서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는 복음이 없는 곳에 그러니까 복음이 선포되지 않은 곳에 가는 것이고, 복음이 선포된 적이 한 번도 없거나 지금 선포되지 않는 곳이 오히려 더 필요하기에 선포해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관구장일 때나 선교 책임자일 때 어디를 선교해야 할지 참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로 돈을 가지고 가 선교를 가면 환영도 받고, 그래서 선교의 결실도 눈에 보이게 맺을 수 있는데 그곳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며 탄압하고 특히 천주교를 극히 경계하는 그런 공산주의 나라들이나 이슬람 국가들에게 갈 것인가 결정해야 할 때 저는 복음이 없는 곳을, 없으니까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쪽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기회가 좋지 않으면 조용히 복음을 살면서 현존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했는데 그것은 프란치스코가 수도회로는 처음으로 선교에 대한 규정을 수도규칙에 넣으면서 허용이 되면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선 "아랫 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가톨릭은 사목자건 신자들이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는 안이함이 전반적으로 있고 특히 저를 포함하여 일부 사목자는 복음을 선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목을 하며 왕노릇이나 하려고 합니다.

 

이런 저에게 오늘 서간은 큰 도전을 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도 바오로는 신앙인의 사명이 바로 복음선포자라는 사실을 티모테오를 통해서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믿는 종교인이 흔히 빠지기 쉬운, 그 예가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을 볼 수 있는데, 이론은 강하지만 실제 실천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누구보다도 말보다는 실천하는 모습으로, 여러 가지로 겪는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복음선포의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주옥과 같은 경험의 말을 티모테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2티모 4,2-5)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감동을 주는 자신의 삶에 대한 주옥같은 말을 해줍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7)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를 사랑한 한 신앙인으로 사도 바오로 같은 신념에 차 있는 말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심판관이신 주님과 의로움의 화관에 대한 희망이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신념에 찬 삶을 살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대접받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를 조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인 군자같은 말을 하고 겉 꾸미에 신경 쓰지만 정작 그는 정반대로 말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생활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 대해 이렇게 이르십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9-40)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여유롭게 돈을 내는데 비해 가난한 과부가 와서는 렙톤 두 렢톤을 헌금함에 넣는 모습을 보십니다.

렢톤은 그리스 시대부터 통용하던 가장 낮은 화폐 단위이지요. 마르코는 친절하게도 당시 로마 화폐단위로 따져서 두 렢톤이 한 과드란스에 해당한다고 설명까지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동전은 가장 낮은 단위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 많은 돈을 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고 또 적은 돈을 긍정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의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과 과부의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 모두’을 대비하며 과부의 입장과 정성을 두둔하시는 것입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내는 사도 바오로의 두 번 째 서간을 통해 복음선포의 사명에 성실한 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킨 자신의삶을 고백하는 모습은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어떤 풍족한 상황이나 많은 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가운 데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이십니다.

우리는 꼭 화폐가 아니라, 때로 울고 싶고 지칠 때라도 주님께서는 내 이웃을 위해서 작은 ‘사랑과 친절’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어디에서든, 좋든 나쁘든 성실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 또 아무리 궁핍한 가운 데 에서라도 주님께서 명하신 복음말씀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외롭고 힘들 때에 주님께서는 지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을 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다운 신앙인으로 늘 이웃에게 복음을 실천하며 항상 겸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활에 쫓겨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봉헌을 일깨워

주십니다.

 

생활의 봉헌은

생활의 간결함으로

이어집니다.

 

간결할수록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생활의

봉헌으로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우리를 위한

생활의

봉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과부의

정성이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어줍니다.

 

자신의 생활에서

온 마음을

봉헌합니다.

 

생활을

먹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현실에도

가장 가난한

과부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시는

주님께 의지합니다.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

봉헌하는 맑은 날

되십시오.

 

생활에서 출발하는

봉헌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