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1-6
그 무렵 1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4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
5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6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합 임금에게 가뭄을 예고한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낸다. 주님께서는 까마귀를 시켜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제1독서). 산으로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행복하여라.” 하고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선언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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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는 불충한 백성에게 내릴 하느님의 징벌과 가뭄을 아합 임금에게 예고하고, 주님의 명을 따라 백성을 위해 참회의 예를 갖춘다.엘리야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호칭은 엘리야의 인생 전체와 관련된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서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인 ‘참행복’을 선언하신다. 이 산상 설교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가 만들어 내는 변화에 관한 것이며, 인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주실 하느님의 뜻에 관한 선포이다. 이 행복 선언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짐을 선언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는 군중과 제자 모두를 향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하고 또한 끝맺습니다(마태 4,25; 7,28-29 참조). 산상 설교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보편적 가르침입니다. 먹고사는 문제, 울고 웃는 문제, 그리하여 이 삶을 그토록 모질게도 살아 내야 하는 까닭을 담고 있습니다.
행복 선언은 현재 상태를 미화하거나 치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함, 슬픔, 무력함, 굶주림이라는 인간의 낮은 자리를 들추어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은 하느님 나라를 억지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부족함을 견디며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은 유다의 쿰란 공동체가 말하던 ‘영 안에서 낮아진 이들’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유배의 고통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 내며, 자신의 힘 없음이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기회이자 초대가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행복 선언이 그리는 현실의 ‘슬픔’은(5,4 참조) 역사 속 이스라엘이 겪은 상실과 폐허가 된 시온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현실이 팍팍하여 가난과 힘겨움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향합니다. 힘이 없기에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약하고 부드럽기에 ‘온유’합니다(5,5 참조). ‘의로움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5,6 참조) 단순한 윤리적 욕망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정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5,7-9 참조) 꿋꿋이 살아 내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박해받는 이들에게(5,10 참조) 약속된 하늘 나라는, 세상이 짓밟은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뒤집어 주실 새로운 질서가 됩니다. 그 질서가 가리키는 행복은 현실의 찬란한 성공이 아니라, 상처의 한가운데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조용한 회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기어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어이’를 붙들고 살아 내는 신앙인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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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울림이 좋은 목재를 찾으러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높은 산에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으려고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그러다 빛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시들고 말라 죽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부담이 되는 죽은 가지를 떨구어 냅니다. 안타까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은 가지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는 나이테가 얇고 섬유질이 길고 단단해져 질 좋은 울림 목재가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죽은 부분,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악습과 악덕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를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지를 떨구는 순간에는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고집이 얇아지고, 성품이 더 단단해져 아름다운 삶의 울림을 낳는 목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취하지 않고, 해로운 것을 버리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31-32면 참조). 악습과 악덕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버리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또는 이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잘라내지 않기도 합니다. 달콤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그 삶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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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 슬픔,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받음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는 곳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며, 그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까지 뿌리를 뻗은 만큼 수분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습니다. 곧 돈, 명예, 권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으니 그들이 성취한 행복은 그만큼 가볍습니다. 이처럼 시편 1편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당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둔 이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시편에 비추어 행복 선언을 다시금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내용은 행복을 위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뿌리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오는 가난, 슬픔, 박해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냇가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뿌리를 뻗을 수 있는 것입니다.(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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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행복하다는 느낌이 적어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어릴 적에는 지금보다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와 기쁨을 먼저 느낀다면, 나이가 들수록 그런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확실함에서 슬픔을 먼저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태도와 신념에 따른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바로 행복과 불행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 주는 복음의 대헌장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박해받는 이들이 언제나 현실 속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정수인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가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이들은 현실에서 겪는 모든 일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일들에 행복을 찾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위로받으며, 자비를 입고, 하느님을 만나는 그분의 참된 자녀들입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것들만 쫓는 세속적 욕망이 커질수록 신앙인인 우리가 하느님마저도 세속적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희망은 현실을 이기는 아편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내가 지향하는 것이 참된 진리임을 하느님 안에서 확신할 때 주어지는 선물임을 명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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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오늘 갈릴래아의 한 산 위에서 인류를 위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대헌장을 반포하십니다. 이 헌장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참된 행복에 관한 선언입니다. 행복 선언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현존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뺏고 빼앗기는 재력과 억누르고 억압당하는 권력에 바탕을 둔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 정의는 이러한 불의한 사회 구조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삶을 위한 정의입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불의한 사회가 만들어 내는 물질적, 권력적 가치들을 배격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가치들만이 인간을 참된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과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그 가치는 곧 진리이고,진리만이 세상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세상이나 인간이 만들어 내는 기쁨과 행복은 있다가도 없고, 얻었다가도 잃어버릴 수 있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깊고도 고요하며, 그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세상은 그를 외면하거나 박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께 참기쁨과 참행복을 얻어 누리기 때문에, 박해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정신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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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의 가난’이었습니다. 어떠한 마음이겠습니까? 욕심 없는 마음일는지요?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욕심 없는 마음이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에도 어느 정도의 욕심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돈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상이나 이념에서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명예와 권력에도 붙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잘못에서도 홀가분해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이러한 마음이 되면 ‘가난한 마음’은 깨달아집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가난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가난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소유’하게 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재산과 물질을 소유하되 그것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 살지만 누구에게도 매이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가난한 마음이기에 채워 주십니다. 자유로운 마음이기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분께서 채워 주시고 그분의 힘이 떠나지 않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가난한 마음’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아이가 콧물을 흘립니다. 이를 보고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한 선천적 결함을 의심할까요? 아니면 일반적인 감기의 증상으로 생각할까요? 이런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두통이 있습니다. 이때 뇌종양과 같은 심각한 질환의 신호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피로 등의 단순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까요? 만약 콧물이나 두통을 가지고 심각한 병으로 의심하고 있다면 아마 주변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몇 년 전에, 우리 교구에서 병원에도 암을 감별하는 펫시티(PET CT)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미리 모든 암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교구 신부들이 정기 건강검진을 받으며, 이 펫시티 검사를 했습니다. ‘나에게 암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물론 발견되신 분은 없었습니다.
불필요한 가정을 통해서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제와 맞닥뜨리는데, 그 문제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며 산다면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생각들로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어리석음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십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옛 율법(십계명)을 받았던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규칙과 금지 조항을 넘어선 ‘사랑과 은총의 새로운 율법’을 산 위에서 직접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옛 율법은 ‘무엇을 하지 마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율법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은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전혀 다른 행복이었습니다. 세상은 부유함, 웃음, 권력, 인정받는 것 등을 행복이라 부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난, 슬픔, 온유, 박해받음을 행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나의 외부적 조건이나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눈에는 결핍과 고통으로 보이는 상황조차도,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은 옛 율법으로 인해 힘든 상태였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조항으로 인해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 조항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만 생각했습니다. 이 모두를 지킬 수 없기에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특히 사랑의 관계 안에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것에 대한 걱정보다 하느님께 집중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불행은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키에르케고르).
만 원 짜리의 행복!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이를 조금 먹어가면서 행복에 대한 기준이 대폭 수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벌고, 더 인기를 얻고, 더 대박을 내고...그러면 더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바도 참 많습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게 된 거부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반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산 상속 때문에 벌어지는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광경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지니고 있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병고에 시달리게 되니,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쓰고 싶어도 걸어다니지를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하늘 높이 금자탑을 쌓았지만, 결국 열심히 죽 쒀서 개 주는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재산이 행복 불행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은 소소한 일상 안에 담겨있음을 자주 체험합니다. 저같은 경우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그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든 뭔가에 열심히 몰입할 때입니다. 몰입의 대상이 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보다 복음적이고 생산적일 때, 느끼는 기쁨은 더욱 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한 대목 한 대목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같이 작고,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는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지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사는게 너무 바빠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파 눈이 핑핑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 원짜리 순대국밥을 한 그릇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했습니다. 80년대에 신학교를 다녔던 선후배 사제들입니다. 오스틴으로 새로 온 신부님을 환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미국에 와서는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만큼 미국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가 됩니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그 자리에는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 7개월이 지난 신부님, 그리고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이 함께했습니다. 저는 어느덧 8년이 넘었습니다. 한 달이 갓 지난 신부님은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바쁜 시간입니다. 그래도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동료 사제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7개월이 지난 신부님은 이제 막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의욕이 넘칩니다.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신부님은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여유가 있고, 말과 표정에서 감사가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에게 생긴 작은 원칙은 ‘오늘 하루’입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그것이 쌓여 과거가 되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모여 미래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행복 선언’, 또는 ‘진복팔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은 성공하고, 많이 가지고, 인정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복은 소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행복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욕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은 눈에 보이는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진복팔단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길입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성적이 올라 부모님께 칭찬받았을 때, 뜻밖의 도움으로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서류가 순조롭게 준비되어 영주권이 나왔을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픈 교우가 치유되었을 때,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순간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마치 도파민이 매 순간 계속 생성된다면 오히려 몸에 해가 되는 것처럼, 기쁨도 늘 같은 강도로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행복했던 순간에 감사했다면, 아픔의 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뿐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참된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하느님의 평화를 심어 줍니다.
저는 행복은 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길이 생깁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이웃과 함께 걸어갈 때 그 자리에 행복의 길이 생깁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로 살 수 있다면, 기쁨의 순간에도, 고난의 순간에도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이 말씀은 결과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초대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감사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 행복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빼앗거나 움켜쥐지 않으며
함께 마음이 가난한
행복
서로 슬프게 하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
서로 거칠게 대하지 않으며
함께 온유한
행복
서로 내치거나 버리지 않으며
함께 자비로운
행복
서로 불의의 제물 삼지 않으며
함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행복
서로 더럽히지 않으며
함께 깨끗한
행복
서로 짓밟지 않으며
함께 평화로운
행복
서로 하느님을 핑계 삼지 않으며
함께 하느님을 따르는
행복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셔서 군중에게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 ‘진복팔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하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덟가지 행복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리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께서 함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치게 될 때 무엇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그 희망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두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살며 자신의 욕심을 다 채운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결국엔 바다가의 모래성처럼 인생의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면 다 사라지고 말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 인생에 힘들고 어려운 이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 끝까지 희망을 두고 세상의 다른 것이 주는 허망한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 행복은 고생 끝에 따라옵니다. <마태 6, 1-12> 6월 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아기의 첫울음에 젖을 물리고, 봄에 논과 밭에서 피땀 흘리고 고생 없이 가을의 풍성한 추수를 기대하지 못합니다. 외로움을 느낄 때 친구를 찾고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 마실 것을 찾습니다. 찾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찾아서 얻게 되고, 잃은 사람을 찾아서 다시 얻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주님의 행복론은 고생하고 짐 진 사람, 아픔을 느끼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행복이라 하십니다. 힘 남용하고, 가진 것 자랑하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 찾아서 행복하고, 우는 사람 웃게 되고, 온유한 사람 땅을 차지하고, 외로운 사람 흡족하게 되고, 자비로운 사람 자비를 받고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 참 평화를 누리고, 박해받는 사람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어느 날 안동 어느 단체 피정을 지도하려고 대구에서 버스를 탔는데, 마지막 자리 하나 있어서 편하게 앉아서 가려고 책을 보려는데 마지막에 올라온 부인이 아기 업고 자리가 없어 서서 가게 되었습니다. 비로 제 옆에 서서 아기를 내 코앞에 대고 서 있어서 아기 냄새가 나서 나도 모르게 아기 머리를 돌리려고 하니 아기가 주먹을 쥐고 나를 향하여 “일어나시오.” 했습니다. 3시간을 서서 갈 수 없어 “예수님이라도 못 일어나” 했다가 차가 떠나니 막 울기에 우는 예수님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고 아주머니를 앉히고 서서 갔습니다. 아기는 즉시 어머니 젖을 먹기에 나는 먼 산을 보며 서서 안동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양보하고 난 후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봄에 서서 본 보리밭이 파란 카펫으로 보이고 밖의 전경이 아름답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안동에 도착했습니다. 피정 첫 시간 이런 말 하고 시작했는데 대성공이었습니다.
“고생하고 짐 진 사람은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의 짐을 가볍게 하리라.” 하시는 주님 말씀 따라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고달프고 힘든 일이 있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행복이 따라옵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며 감사하고 찬미 드리는 한 더 큰 행복이 찾아옵니다. 지금은 수도자의 길을 70년 동안 따라 살고 있어 어려움을 겪는 다른 구십 노인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외롭지 않게 찾아주는 사람,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앞뒤로 있어서 외로움 없이 살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할 거리 주고, 일할 힘주고 받으며 주위에 “필요한 것 없습니까?” 묻는 사람, 돕는 사람이 있어서 요양원에 안 가도 보호받고 사랑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고생이나 어려움은 행복의 시작입니다. 어려움을 잘 견디고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행복을 받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소위 ‘일류대’에 들어가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책상에는 “나는 공부하는 기계다!”라는 글귀를 붙여 놓았습니다. 지금은 기계처럼 죽어라 공부하고 나중에 일류대학교에 들어가면 그때가서 행복해지자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원하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풍족한 삶을 영위하려면 연봉을 많이 받고 고용이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일단은 취업준비에 집중하고 좋은 직장에 가면 그 때 행복해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도 하고 승진도 하자면 준비할 것들이 많아 지금은 ‘행복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복할 시간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며 지옥같은 ‘현재’를 견뎌내다가 결국 단 한 순간도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마음 속에 ‘부자’라는 목표를 품고 사는 우리가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가졌지만 더 가지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가 될 지 모를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합니다. 그러다보니 나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인 주님을 영영 자기 안에 맞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어린이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많은 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만 함께 있으면 충분하지요. 마찬가지로 욕심이 없고 순수한 마음,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여러가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하고 귀한 ‘한 가지’면 충분하지요. 그만큼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실 자리가 넉넉하게 있고,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미 행복하다는 분명한 ‘선언’인 동시에, 어떤 조건과 상황에 처해있던지간에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누리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행복’이라는 개념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서 얻는 만족이나 흡족함을 말하기보다,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강조하지요. 그렇기에 세속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바라게 되어 늘 ‘제자리 걸음’만 반복할 뿐입니다. 반면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충만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 만물이 다 그분의 것이기에,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건 결국 온 세상을 내 안에 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유 안에서 불완전한 행복을 찾지 말고,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완전하고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데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참된 행복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님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오랜 냉담을 풀고 용기 내어 찾아오신 신자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죄를 세세하게 성찰하여 고백하기보다는, 오랜만에 주님 앞에 섰다는 멋쩍음과 미안한 마음을 먼저 표현하곤 합니다. 고해를 들은 뒤 앞으로의 다짐을 여쭈면, 대개 미사와 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곤 합니다. “신앙생활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데 너무 ‘열심히’만 하려 애쓰지 마시고, ‘행복하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행복만을 바라듯,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녀인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익숙함과 의무감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의 본질을 잊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온전한 행복을 누리도록 부르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는 참된 행복의 길이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갑니다. 결코 슬프고 지친 얼굴로 의무나 규정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행복 선언’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된 행복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시는 하느님 곁에 머물며, 그분께서 선사하시는 참된 기쁨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흐려진 우리 마음을
다시 맑게 비추어 보는
정화의 시간입니다.
먼저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맑아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집니다.
마음의 정화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며,
하느님을 뵙는 것은
그 여정의 완성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힐수록
우리는 현재의 진실을 놓치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합니다.
깨끗한 마음은
세상 한가운데서도
욕심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맑은 마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세상의 욕망과 두려움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해질수록
사람을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과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무는 마음입니다.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하느님을 알아보는
맑은 마음의 행복한 여정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유명한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알고 계신 분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두 수도승이 길을 가다가 폭우로 개울의 물이 많아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울을 넘어갈 수 있도록 놓인 돌이 잠겨 있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개울 앞에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 두 수도승 중의 한 명이 이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걸어 넘어갔습니다.
그 후 두 수도승은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계속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엽니다.
“왜 그 여인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는가? 우리 수도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자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넜던 수도자가 말합니다.
“나는 몇 시간 전에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업고 있는가?”
우리 역시 이 수도자처럼 상황을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또 내려놓으려는 의지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마음속에 짊어지고 다니는 과거의 짐이 또 얼마나 무겁습니까?
과거는 현재를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를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쁜 기억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력은 하루가 지나면 64%를 잃어버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98%를 잃어버릴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계속 되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되놰야 할까요?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금방 이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행복 선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있기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계속 되뇌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망으로 계속 되뇌고 있다면, 결국 하느님 나라는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만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이란 외로운 두 영혼이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이를 조금 먹게 되니 슬슬 지난 세월을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주님께서는 제게 수도자요 사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같이 부족하고 비천한 사람에게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언제나 말단이요 바닥이었는데, 수도자요 사제란 신분만으로 급격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능력도 경험도 일천한데, 관리자요 책임자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지속적인 겸손의 덕을 유지했으면 좋았을 텐데, 젊은 혈기에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보잘 것도 없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은연중에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며 부끄럽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위로부터 신호가 오더군요. 주님께서는 강력한 철퇴같은 충격 요법으로 저를 바닥으로 내려치셨습니다. 그 바닥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도록 혹독한 고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요즘은 조금 나이도 들었겠다, 쓰라린 체험도 했겠다, 철저하게 제 자신을 낮추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다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형제를 바라봅니다.
신기하게도 자세를 낮추니 세상만사가 은총꺼리들입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거리들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따지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 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는 얼굴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올라가서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또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습니까?
반면에 폭풍 속 같은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니 추락할 위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서있으니 심신이 편안해서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 맡기고 나니 그렇게 행복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희망이기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행복은 이 법칙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리차드’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지만,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정비소를 차려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슬퍼 보이는 한 여성이 리차드의 정비소 앞을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는 그녀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리차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누네’라는 이 여성은 감정에 북받쳐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리차드와 가까운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차가 없었기에 걸어서 출퇴근했고, 매일 리차드의 정비소를 지나친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군인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얼마 전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의 끔찍한 고통 끝에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하지만 누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린 두 자녀를 위해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저도 곧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어요….”
리차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누네를 매일 초대하여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 대 선물하고 사비로 등록까지 해 주었습니다.
“나는 감옥에도 갇히고, 노숙자로도 지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난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 사장이 매울 울면서 가게 앞을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인생을 바꿔 놓는데’, 포크포크, 유튜브]
리차드는 세상의 작은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빛이 되려면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며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또한 의로움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리차드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잃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때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은 때입니다. 여기에는 딸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말씀 안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게 가장 핵심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늘 나라를 차지해서 행복해지고, 자비로워지면 자비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은 반드시 되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이 우주적인 법칙으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면 됩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법칙을 믿음이, 행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해지면 반드시 채워주실 것임을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가 그 상징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당신을 만나려면 받았으면 내어놓아야 하는, 아니 내어놓기 때문에 또 물을 받게 되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아담과 하와는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도 바치지 않아 행복을 잃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서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가뭄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부족하지 않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1열왕 17,3-4)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들이 아닌 행복을 약속하는 영원한 약속을 믿고 우리도 가난해지고 자비로워지기로 모험 해 봅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배달하며 어렵게 살던 학생이 성공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간단한 말인데,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학생들도 강의를 들으면서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간단하면서도, 쉬운 성공의 방정식 같았습니다. 학생이 예습과 복습을 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오락실과 컴퓨터 게임을 가까이하고, 놀기에 여념이 없으면 학생의 앞날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수도자가 기도하고, 정결을 지키며,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수도자의 앞날에는 악의 유혹이 기다릴 것입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신용도는 떨어졌고, 외환위기를 겪었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넘었다고 축배를 들었습니다. 무리하게 해외에 투자하였고, 해외 여행하면서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였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빨간불이 들어왔는데도 외면했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헐값에 외국 기업에 넘겨야 했습니다. 20%가 넘는 이자를 감수하면서 대출받아야 했습니다.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아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대출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지낼 수 있도록 전세를 마련했습니다. 27년 전의 일입니다.
교회에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역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자도 줄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가오는 도전과 위기를 외면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따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낡은 것이 있다면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과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면 안 되듯이 교회가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가치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예배, 나눔과 희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가정에서는 기도와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참된 행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참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교회가 부와 권력에 취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나눔과 비움을 실천할 때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받는 박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빼앗거나 움켜쥐지 않으며
함께 마음이 가난한
행복
서로 슬프게 하지 않으며
함께 슬퍼하는
행복
서로 거칠게 대하지 않으며
함께 온유한
행복
서로 내치거나 버리지 않으며
함께 자비로운
행복
서로 불의의 제물 삼지 않으며
함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행복
서로 더럽히지 않으며
함께 깨끗한
행복
서로 짓밟지 않으며
함께 평화로운
행복
서로 하느님을 핑계 삼지 않으며
함께 하느님을 따르는
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시며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행복을 선언한 여덟 부류의 사람들은 당장에 그리 행복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어 가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시편의 첫 장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어떻게 해서든지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주시는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및 따르는 이들을 향해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이 진복팔단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녀가 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팔단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돈이나 권력을 멀리하면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이들입니다. 2. 슬퍼하는 이들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의가 아닌 죄만 있음에 슬퍼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3. 온유한 사람들은 복음을 깨달은 이 특히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엎드릴 줄 아는 이들입니다. 4.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의로움이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필요함을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5. 자비로운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자비를 받았음에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입니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온전히 하느님을 향해 있는 이들입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평화를 실현 시키는 이들입니다. 8.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꽉 찬 이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님으로 믿는 이들을 향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대로만 산다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새로운 교회에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계명들의 특징은 모두 하느님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에 그리고 자신 안에 의로움이 없음에 슬퍼하는 이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려야 함을 고백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를 통해 다른 이들을 더욱 사랑해야 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거저 주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받았으면 꼭 무엇인가를 주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이 하느님을 향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거저 주시는 것이며 주었다고 받으려하지 않는 분이심을 잊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 메달리는 것 뿐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사람들은 늘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얻기 위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을 찾아 다니고, 또 애써 도전하고 성취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3-12)
오늘 산상수훈을 들으며 말마디라도 두 개 더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회개하는 사람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죄에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고, 예수님 말씀 때문에 당당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내적으로 영적으로 풍요롭게 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요한 15장),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사람(요한 6장)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그를 찾아가 함께 살게 되므로, 기쁨과 행복 속에 살게 될 것입니다(요한 14장).
올 하루도 주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고 평안하소서.
아멘.
행복은 어려움 뒤에 따라 오고 주님과 함께입니다. <마태 5, 1-12> 6월 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상은 고해다.“ 우리는 고통의 바다에 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이 길을 달리지 않으면 저 높은 승리의 고지에 오를 수 없습니다. 피땀이 나도록 일하지 않으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을 맛볼 수 없으며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합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가 수도자로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은 그 많은 시련을 넘어 이겨내고 당하는 일을 지혜롭게 해쳐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이 이끄셨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당하는 시련과 고통을 피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했으면 70년의 수도생활은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고 당하는 고통을 피하고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행복론을 듣고 깨우치면 행복은 고통 어려움 뒤에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늘 알게 됩니다.
수련 때 성가 연습을 하는데 소리가 커서 실수도 하고 소리를 잘못 내니 성가 가르치던 신부님이 “야 그레고리오야, 소리 좀 작게 내고 따라 해라.” 면박을 받고 사람 대접 못받는다는 생각에 ‘여기 못살겠네‘ 하다가 참고 넘기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시계가 필요해서 스위스에서 오신 장상의 서랍에 있던 그 많은 시계 주시라고 청했습니다. 얼마 전 받고 나온 형제의 말을 듣고 청했는데 ”너 줄 것은 없다.“ 하니 섭섭해서 고민하던 중 수련자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 왜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냐고 하셔서 이야기를 했더니 다시 겸손하게 청하라 하시기에 청하니 못난 시계지만 받고 신학교 졸업 후까지 사용했습니다. 손목시계가 아니고 주머니에 넣었다 뺏다 하는 시계였습니다.
신품성사 때 필요한 것 없느냐고 했을 때 시계가 입에 붙어 ”시계“ 하니 열 개나 받아서 나머지는 나누어 준 일이 있습니다. 넘어야 할 고개는 12고개도 넘습니다.
오늘 복음에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외로운 사람, 목마른 사람, 용서하는 사람, 순진하고 께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정의를 위해 박해받는 사람, 모두가 시련이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행복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하시고 능하시고 자비로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모든 고통은 자기 안에 있으며 자기를 떠나 주님에게 향하여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얼마 전 수도원 떠나는 사람에게 수도원을 떠나도 하느님 떠나지 말고 주님 의지하며 살라고 말을 전하면서 떠나보냈는데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주님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주님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이어서 행복의 근원이시며 행복 그 자체이십니다. 성부와 성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을 하며 행복의 근원이신 주임과 함께 살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찾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행복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참된 행복의 조건들은 하나 같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자비로우며, 박해를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런 이들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게 것입니다. 행복보다는 불행에, 슬픔과 절망에 더 가까워보이는 겁니다. 꼭 그런 처지가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거라면 굳이 행복해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행복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래 의미는 ‘축복 받았다’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의미가 좀 달라집니다. 행복과 축복은 그 의미가 다를 뿐 아니라 각각의 상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주체도 다르지요. 행복은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만족을 느끼는 것”을 뜻하며 그 상태를 만드는 주체가 인간입니다. 그러나 축복은 “복을 내리는 것”을 뜻하며 그 주체가 신적 존재 즉 하느님입니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엔 ‘행복’하기 어려운 안좋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면 ‘축복’받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은 행복을 자기 만족에서 찾으며 그 조건을 외부에서 채우려고 합니다. 다른 이들이 최고라고 여기는 재물, 명예, 권력 등이 그 조건이 되지요.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양심을 속이기도 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누리는 진정한 복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면, 세상의 것들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기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것들입니다. 재물에 휘둘리지 않고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영적 가난,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마는 자기 처지에 대한 슬픔 어린 탄식, 하느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순명하며 따르는 온유함, 숫자로 드러나는 조건의 평등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공평함과 공정함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지혜로움, 남들이 겪는 슬픔과 아픔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며 돕고자 하는 자비심,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느님 뜻에 맞는 의로움을 따르고자 하는 굳센 용기... 하느님께서는 이런 미덕을 지닌 이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복을 내리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각각의 복을 내리시는 ‘시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다른 축복들을 받게 되는 건 미래의 어느 때,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는 축복은, 즉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섭리 안에서 살게 되는 축복은 ‘지금 즉시’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그 때부터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얼마나’ 받아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믿음’에 달려있다면, 우리가 그 복을 ‘언제’부터 누릴 수 있는가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조건부 행복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예비신자들에게 꼭 묻는 말이 있습니다. “왜 세례를 받으려고 하세요?” 하느님의 초대를 느끼는 환경은 다양하지만 답변은 의외로 비슷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요.” 평화로움을 갈망하는 각자의 상황에 대한 사연을 듣다 보면,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분명 필요한 선물을 얻도록 가르쳐주신다는 확신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군중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신 참 행복 선언은 우리 마음에 깨지지 않는 평화로움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으로 널리 알려진 비결입니다. 세상이 설명하고 있는 행복이란 어떠한 조건이 채워짐으로써 충분한 만족과 기쁨이 주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결국 그 조건들을 찾아 채워가는 일들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참 행복의 첫째 선언은 채워가는 마음이 아니라 비우는 마음, 마음의 가난함에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행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정하고 채워가는 ‘나’를 내려놓고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뢰를 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우리 모두가 세례 때에 청원하고 답했던 한 가지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여러분의 예전 다짐을 오늘 여기서 다시 상기시켜 드립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변하지
않아야 할
마음은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느님보다
우리가
너무
커져버렸기에
우리가 바라는
행복도
그만큼 멀리
있습니다.
행복에 다가서는
길은
우리가 집착하는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장 중요한
마음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가난을
실천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가난한 마음을
되찾아주십니다.
가난한 마음은
조화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진정한 행복은
가난하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행복입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하느님이십니다.
삶의 모습을
우리의
안과 밖을
바꾸어 놓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가난하신 하느님과
우리는 한몸입니다.
하느님과
한몸이며
한마음이
행복한 오늘의
가난한
마음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반대편에 있는
참된 행복입니다.
가장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영화를 잘 보지 않아서 극장을 간 지도 꽤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시절 때만 해도 극장을 수시로 찾았습니다. 학생이라 돈이 없는 관계로 개봉관이 아닌,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에 두세 편을 볼 수 있는 극장에 가서 온종일 영화를 본 적도 많았지요. 또 지금처럼 좌석제가 아니었기에 똑같은 영화를 2~3번 본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좋아했던 저였습니다.
당시 왜 그렇게 영화에 빠졌을까 생각해보면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극장에 붙은 영화 대형 그림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 이 그림판은 ‘꼭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 대형 그림판을 볼 수 없습니다. 또 당시처럼 인기 있어 화제가 된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필요 없이 예약만 하면 편하게 그 시간에 맞춰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분명히 지금보다 불편했던 환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불편했던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고통과 시련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런 기억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선언’을 발표하십니다. 이 행복선언의 첫 마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를 경멸하고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이가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행복선언은 우리 세상에서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대신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누리기 바라는 이는 땅에서 받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늘 나라의 영광에 부합한 지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이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은 종종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쳐서라도 피하려고 노력했던 변화에서 온다(앤절링 밀러).
편애
자식 중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아이가 있다는 어느 형제님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편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이 대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특별히 더 눈길이 머무는 아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편애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편애를 받는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면 커서 보복을 꿈꾼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리 분석가 알베르트 괴레스는 ‘악은 잘못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편애라는 잘못된 행동이 나중에 가족에게 복수를 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완전히 똑같은 사랑은 주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러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큰 후회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나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어떤 청년과 대화하던 중 제가 조금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행복하려면 이래 저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청년은 자신은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다섯 번째라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최고 가치가 행복이었고 그것이 바뀐 적이 없었기에 그런 반응은 저를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니라면 우리는 자아의 욕구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자녀의 성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나는 그 가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도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행복을 허락해도 되고 어쩌면 나의 행복이 나를 만들어주신 분께 가장 효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행복해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저를 찾으며 몇 시간을 돌아다니셨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저를 발견하셨는데 제가 트럭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엄마를 찾겠다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찾아다녔다면 그 하루 동안의 행복은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찾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멀리 안 가고 주위에서 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찾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찾아오셨다면 주님은 항상 제 곁에 계시고 저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가난한 행복은 잊고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저의 책상 앞에는 “나는 공부하는 기계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지내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행복하여지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취업 걱정해야 했습니다. 취업하면 행복할까요? 그 나름대로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삶의 형태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자는 많이 가졌지만,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마치 어린이처럼 부모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마구간은 겉보기에는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마구간 자체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마음이 부자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풍족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가난해 보이는 부부는 맞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많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영영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에게 자녀들이 다 참혹하게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네 잎 클로버에 얽힌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포탄이 지나가서 목숨을 건지게 되어 ‘행운’이라는 꽃말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짓밟으며 ‘미래’의 행운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발밑에 이미 행복할 조건이 깔려있음을 알고 행운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결국, 네 잎 클로버도 행복해지자고 찾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이 발밑에 있는데 뭐하러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할까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 발밑에 그분이 항상 깔려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합시다. 내가 행복하면 그분은 행복하게 머무는 나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것은 1995년 10월입니다.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교구에서는 보좌신부들에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은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취항하면서 교회에 홍보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지순례를 많이 가는 편이지만 그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 복음화학교 담당신부를 하면서 공동체 회원들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함께 했습니다.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고, 하느님의 은총이고, 제게는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카타리나 성당이 있습니다. 들어가는 문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순례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던 아인카렘,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나자렛, 첫 번째 표징을 보여주셨던 가나, 거룩하게 변모하셨던 타볼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저녁을 함께 드셨던 다락방, 밤 세워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 베드로가 회개했던 닭 울음 성당,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곳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신 곳이 많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곳,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 보신 곳,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 그리고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곳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두려워마라! 왜 믿음이 약하느냐? 내가 있지 않느냐?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2005년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기억입니다. 참된 행복 선언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순례오신 분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선포하시겠습니까?’ 저는 마리아의 행복선언, 요셉의 행복선언, 아가다의 행복선언, 안드레아의 행복선언을 들었습니다. 순례에 오신 분들은 모두 저마다의 행복선언을 하였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자리에 따라서 행복선언도 내용이 달랐습니다. 현실적인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아픈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 남편이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 자녀가 혼인을 하는 것, 자녀가 취직을 하는 것, 봉사하는 단체가 잘 되는 것, 성전 신축이 잘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행복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전쟁이 없는 것, 남과 북이 일치를 이루고 통일이 되는 것,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것, 병든 사람이 없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행복을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발전과 성장이 모든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겁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암인 줄 알았는데 오진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오늘 새벽에 눈을 뜬 사람들,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하루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행복선언’을 하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는지요?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여러분의 행복선언을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한지, 어떤 점이 다른지도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비움, 나눔, 희생, 봉사, 평화, 가난’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에 채울 것은 적어지지만 하늘나라에 많은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초의 불을 다른 이웃의 초에 옮겨 주어도 내 초는 잃은 것이 없지만 세상은 더 밝아지듯이 우리의 희생, 나눔, 헌신, 비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만큼 더 환해지고 밝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행복이 아니라 삶을 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이 무엇인지
무엇으로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행복하고픈
마음마저
내려놓는 거야
행복을 좇아
나풀거리는
가벼운 삶이 아니라
행복마저
유혹할 수 없는
삶을 살기 위하여
믿음 희망 사랑으로
살림 섬김 의로움으로
옹골찬 삶을
삶이란
행복이라는 잣대로
잴 수 없는 것
살아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다만 삶이니까
<참 행복>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2020. 6. 8. 월)(마태 5,1-12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3-6).”
‘행복하여라.’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행복론’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입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과 참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행복이 아니라 ‘참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면(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영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이(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은, 몸은 부자로 살아도 마음이 가난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만 온전히 섬기려면 마음이 재물에서 온전히 떠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낙타와 바늘구멍’의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마태 19,16),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9,21).
그러나 그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마태 19,22).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9,2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어떤 슬픈 일을 겪고 있으면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하느님을 찾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 라는 약속의 말씀 그대로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위로가 아닌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들은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어떤 슬픈 일을 당하고, 너무 큰 슬픔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술이나 마약이나, 어떤 세속적인 수단에 의지해서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 잠깐 동안 잊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점점 더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들을 잊어버리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온유한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 5,44).”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사람들, 비폭력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뜻하고, ‘땅’은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만일에 권력과 폭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쪽 세상에서 어떤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그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여기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즉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면서 남을 억압하면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대단히 단호한 말씀입니다. 거스르면 안 되는 엄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무력과 폭력은 반대하지만, 현실적으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온유함만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온유함’은 불의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로마 12,21). 어느 한 시기만 보면 폭력이 비폭력보다, 또 악이 선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비폭력이 폭력보다, 선이 악보다 더 강하고, 결국에는 선이 이깁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선’을 뜻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이 온전히 실현되기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갈망한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악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고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고, 선한 사람들은 고생만 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왜 심판을 미루시기만 하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묵시 6,10).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은 ‘회개’입니다.
우선 먼저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면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하는데, ‘나만’ 회개하고 남들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고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참된 행복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참 어렵고 힘들고, 고난 받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8년에 현대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말씀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를 선포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우리도 역시 참된 행복을 살아가면서 거룩한 신앙인이 되기를 권고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거룩한 신앙인이 되는 길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우리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진정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거룩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행복한 사람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를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는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더 높은 곳, 하느님께로,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가르침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면 누구든지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이 말씀은 가난이 아니라, 겸손이 복되다는 의미이며, 참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여기서 슬퍼한다는 것은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죄악을 두고 슬퍼한다는 뜻이다. 열심한 마음과 책임감 때문에 세상의 불의와 죄인들의 죄를 두고 슬퍼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앞으로 올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온유한 사람은 온화하고 겸손하며 잘난 체하지 않고 믿음에 충실하며 모욕을 당할 때 참는 사람이다. 복음의 계명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그들은 약속된 땅, 산 이들의 땅, 하느님의 유산을 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의로움에 배고프고 목말라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행하여야 한다. 의로움에 주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의로움에 따라 적극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이는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후한 상을 받는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자비롭지 못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다. 우리는 구걸하는 거지를 본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도 거지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구걸하는 동안 우리도 구걸을 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우리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앞의 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풀고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고 시샘하지 않으면서도 간음이나 방종 같은 죄에 빠져 사는 사람이 많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안이 깨끗해진 사람이다. 이런 이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랑의 행위의 목적이요 끝이다. 하느님을 뵙게 되면 어떤 것도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평화가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 있어, 이해와 이성이 지배하는 이 평화의 나라에는 다툼이 없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하고 의로움을 위하여 세상의 박해와 육신의 고통, 나아가 죽음까지도 이겨내라고 하신다. 순교자들은 믿음의 의로움과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의 박해를 견딘 분들이다. 이들에게 위대한 희망, 곧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부당하게 욕을 먹는 이들은 하늘에서 복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11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절) 이런 박해와 비방 속에서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헛된 영예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땅에서 듣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 관해 뭐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보다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실지에 대해 마음을 쓴다.
이 여덟 가지 행복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시키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자.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깨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산을 올라보라. 일용할 양식만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을 오르실 것이다. 제자들이 다가와 준비운동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여시고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 팔단을 가르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거리가 멀다. 행복선언은 산넘어 산이다. 말씀의 도가 강해진다. 역시 좁은 문이다. 어째튼 모든 어려움 물리치고 정상에 올라 서야한다.
예수님께서의 행복선언을 제자들에게 낱낱이 보여주며 사실 것이다. 아니 사셨다. 세상에 계셨지만 하늘을 사셨다. 그 결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이루셨다.하느님께 오늘을 맡기고 하느님을 향해 산을 오르며 살자.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0주간을 시작하는 오늘부터 연중 제21주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태오 복음을 묵상합니다. 오늘은 제2의 모세로 산 위에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당신 자녀로 부르신 주님의 궁극적인 바람이 무엇인지 담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수 차례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축하처럼 들리기도 하고 명령이나 권유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안에 위로와 축복이 가득하다는 점입니다.
이민족의 압제와 가난, 율법주의의 부담감에 짓눌려 살던 당시 이스라엘 민중에게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관점의 전환을 일으킵니다. 아마 누군가는 '아, 나도 행복한 거구나!' 하는 자각을 선물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행복이 꼭 성공과 재물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가난, 슬픔, 온유, 정의의 부재, 자비, 마음의 순수, 평화, 박해."
사실 예수님이 전하신 행복의 조건은 세상 눈에는 매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세상은 대개 이 덕목을 버리고 반대 조건을 쟁취하라고 부추기지요.
적어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부유하고, 높이 오르고, 타협에도 능하며, 건강하고, 주위의 인정과 찬사를 받아야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어느새 인간의 행복은 외적 조건에게 고삐와 칼자루를 내 준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진정한 근원이 어디인지 잊어버린 듯하지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섬긴 불같은 예언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이곳을 떠나 ... 숨어 지내라"(1열왕 17,2).
엘리야는 그가 전한 하느님 말씀 때문에 박해의 표적이 됩니다. 예언자의 운명이지요. 그런 엘리야를 주님께서 숨겨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1열왕 17,6).
아무리 예언자가 하느님과 통교하고 그분 말씀을 전달하는 귀인이라 해도, 예언자도 사람입니다. 먹고 마셔야 살고 위협과 공격에 움츠러들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와 같이 육신을 지닌 존재지요.
주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보내신 빵과 고기는 그를 지탱하는 영육의 양분입니다. 정신을 지탱해 줄 보호와 지지의 표상이기도 하지요. 거기에 더해 시내의 물은 깊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외딴곳에 고립되어 숨어 있는 처지이지만 하느님은 엘리야를 물 곁에 두십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만물을 살게 하고 꽃과 열매로 풍요롭게 하지요. 또 시들시들 말라 죽어가는 것을 되살립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물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물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지금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물리적 빵과 고기, 심리적 위안을 위한 메신저(까마귀), 그리고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게 해 줄 주님의 현존(물)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 비추어 보니 어쩌면 엘리야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 같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박해 받으며 정의에 목말랐지요. 오직 말씀만이 그의 사명이었으니 악에 대적할 어떤 힘도 행사할 줄 몰랐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에서도 자유롭지도 못했고요. 게다가 주님이 기억해 주시지 않으면 육신의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는 고립된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주님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에 사로잡힌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열정은 자기 재물이나 성공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과 방향성을 같이 했지요. 분명 그는 성령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지금 행복하시지요? 행복하다면 세상 눈에 행복합니까, 주님의 눈에 행복합니까? 육적으로 행복합니까, 영혼까지 행복합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주님과 함께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위로와 돌봄을 체험하며 성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누리는 상태이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하늘 나라가 벗님의 것입니다. 아멘.
참행복 -행복은 발견의 은총이자 선택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찾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늘 들어도 감미로운 오늘 아침 성무일도중 시편 말씀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웃을 때 얼굴은 그대로 꽃같습니다. 하여 보속 처방전 말씀에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 “웃어요!”라는 말마디입니다. 그대로 이웃에게 전염되는 행복의 바이러스, 웃음의 바이러스입니다. 하여 행복한 분들을 보면 저절로 사진을 찍게 되고 어제도 어느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사진 찍어 다음 말마디와 더불어 전송해드렸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부부예요. 늘 멋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평범한 연중시기가 좋습니다. 6월 초록빛 생명의 계절에 걸맞는 초록빛 제의 색깔도 편안합니다. 늘 초록빛 영성으로 참행복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라는 산상설교의 서두인 참행복 선언입니다.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산상설교중의 참행복 선언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톨스토이는 물론 종파를 초월해 간디, 불교의 성철스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세의 십계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입니다. 모세의 기본적 십계명만으로 참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참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마지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도 ‘행복하게 살았느냐?’는 하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예수님도 산상설교의 서두에 참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은 발견의 은총이요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발견되는 행복이요, 또 선택해야 하는 행복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에, 탐욕에 눈멀어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앞에 놔두고도 보지못해 불행을 사는 어리석은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깨달아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행복들입니다. 얼마전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하루에도 눈으로는 수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등산하는 불암산입니다.
-“수십년/평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덥든 춥든/흐리든 맑든/비오든 눈오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늘 한결같다
불암산/나도 그렇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말없는 위로와 힘이되는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바로 불암산이 상징하는 바 우리가 늘 찾고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행복의 샘, 위로의 샘이 되시는 하느님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행복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바로 참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의 원천임을 깨닫게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깊이에서는 참행복의 하느님을 찾습니다. 자주 고백성사 보속 처방 말씀으로 주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이런 보속 말씀을 받으면 어떤 분들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 말씀이라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도 참행복의 뿌리에는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한자가 누굽니까? 한결같이 결핍된 자들입니다.
1.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슬퍼하는 사람들, 3.온유한 사람들, 4.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자비로운 사람들, 6.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여덟가지 행복한 사람들이라 선언받는 사람들 한결같이 결핍된 자들입니다. 각자 참행복 점수를 계산해 봐도 좋겠습니다. 20점은 기본점수로 하고 8개 참행복 항목별 10점 만점에 도합 80점, 합하여 100점 만점에 몇점쯤 되는 지 미사후 조용한 시간에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처럼 결핍된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채워주시는 희망의 하느님이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궁극의 희망을 하느님께 둘 때 참행복이요,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하느님을 만날 때 이뤄지는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며칠전 읽은 교황님의 교회의 부유함에 대해 나눈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데 교회는 왜 그렇게 부유합니까?”
“교회란 말마디는 너무 포괄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부에, 돈에 속하는 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의 마음이 거기에 집착한 탓이다. 그가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가난해지게 된다. 동시에 복음에 따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를 잘 관리하는 부자들도 있다.
그러나 교황이, 주교가, 사제나 수도자가 부유하다면, 그것은 교회에 스캔들(걸림돌)이다. 누구든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려면 모든 부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가난한 마음a poor heart’을 지녀야 한다. 부를 관리하도록 불림을 받았다면 개인적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말했다. 가난은 ‘생명의 어머니mother of life’이니 타인을 위한 ‘자아의 선물the gift of self’인 ‘너그러움generosity’을 낳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너그러울 수 있고 부자가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부유함이 주는 참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도 분명 하느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셨습니다. 참 행복을 위해서는 주님이 ‘삶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아야 함을 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가 참행복한 사람입니다. 외적으로는 가난의 극치이지만 하느님의 배려중에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며 특별 피정 시간을 갖는 내적으로는 참 행복한 부자 엘리야입니다. 다음 아름다운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가난한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진리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을 찾는 우리 모두 참행복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아멘.
불행합니다. 행복하려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불행합니다. 북한독재에 휘말리는 사람들! 세상이 다 그런 줄만 알다니.
불행합니다. 포악한 사람들! 자신 힘만이 세상에서 위대한 줄만 알다니.
불행합니다. 속이는 사람들! 들어날 잘못 자기에게 돌아올 걸 모르다니.
불행합니다. 남을 괴롭힌 사람들! 그 원한 하늘이 듣고 넘길 줄 알다니.
불행합니다. 마음 지저분 엉큼한 사람들! 악마가 조정하는 줄 모르다니.
불행합니다. 무서운 무기만 만드는 국가들! 그 힘이 평화라고만 알다니.
불행합니다. 인생존엄 하늘과 직결된 걸 모른 채 우쭐대며 사는 사람들!
불행합니다. 하늘과 이웃 사랑 안 해 죽어 영원히 증오만 받게 될 것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참행복이란?'
김성민
어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내재되어 있는 지극한 사랑의 신비를 묵상한 삼위일체 대축일이었습니다.
미사 강론에서
"나는 나다."(I am who i am)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신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아들에게 사랑을 주시는 '성부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시는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의 사랑'과 주고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사랑'과 이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마태5,1-12)은 진복팔단(眞福八端), 곧 참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공생활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첫 말씀입니다.
참행복이란 무엇일까?
참행복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어디일까?
단순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참행복이요, 그런 참행복이 이루져야 하는 자리가 바로 나의 삶의 자리가 아닌가 하는 묵상을 해 봅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좋든 싫든 크고 작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는 잘 주고, 잘 받고, 잘 나누는 이 사랑의 관계가 잘 이루어진 '참행복의 모습'이 우리 안에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3,1-5,3: Funk 1,215-219)
여러분은 아무와도 비교될 수 없도록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남에게 가르친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말만으로가 아니라 참된 원의로써 또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내적 외적 힘을 얻게 나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사라지고 난 뒤에 나는 참다운 신앙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계시면서 자신을 더 많이 보여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의 설득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미워할 때 하느님의 능력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 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맹수들을 유인해서 그들이 나의 무덤이 되게 할 뿐 아니라 내가 죽어 아무에게도 폐가 되지 않게 맹수들이 내 몸의 어떤 부분도 남겨 두지 말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세상이 내 몸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나는 베드로와 바오로같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고 나는 한 죄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내가 고통을 겪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인이 될 것이며 그분 안에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사슬에 포박되어 헛된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시리아에서 시작하여 로마까지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밤이나 낮이나 싸우고 있습니다. 즉, 나는 열 마리의 표범과 같은 군인들에 의하여 결박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혜택을 베풀면 그들은 더 포악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학대를 받으면서 나는 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내가 그만큼 의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나 때문에 마련된 맹수 떼를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그 맹수들이 나에게 성급히 달려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맹수들이 겁을 먹어 달려들지 못한 경우가 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달리 나를 급히 잡아먹도록 유인하겠습니다. 그리고 맹수가 만일 거절하면 나는 강요하겠습니다. 나를 용서하십시오.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는 내가 알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나는 제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아무것도 내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질투해서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도 좋고 십자가도 좋고 맹수의 무리도 좋으며, 사지를 짓이기고 찢어도 좋고, 배를 갈라도 좋으며 팔다리를 자르고 온 몸을 난도질해도 좋습니다. 가장 잔인한 형벌도 좋습니다. 다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잘 풀리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경제적인 이익이 많이 돌아오면 행복하게 여깁니다. 또 좋은 일이 생기면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오늘 행복이라고 느끼는 일이 내일도 행복일까요?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일 수도 있을텐데, 그 때도 오늘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올라가셔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그리고 덧붙여 결정적으로 이상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자 요인이자 모범으로 주님과의 연관성을 제시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11-12절)
오늘 사회적으로 현세적으로 잘 안 풀리는 일들이 불행스럽다고 여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일이 진리와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좋아 보이고 기뻐 보이고 편안해 보이는 오늘이 내일도 참 행복일지 확인해 봅시다. 아울러 오늘의 행복 속에 그리고 그 진리의 끝에,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끝에 예수님이 계신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차지해야 할 나라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저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었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매운맛이 당길 때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밖에서 식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자극적인 맛을 찾게 됩니다. 근데 우리가 어렸을 때 맛있게 받아 먹었던 이유식은 사실 심심하고 부드러운 음식입니다. 이와 같이 삶의 지혜도 어쩌면 단순하고 담백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 가르쳐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채우고,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 행복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며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죠.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가 차지하게 될 그 나라는 힘으로 싸워 얻게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함께 지고 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행복의 여정은
가난한 마음의
여정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는다.
목마름이
있기에
생수를 찾듯
하느님을 찾는다.
결핍과 가난이
오히려 행복의
시작이다.
사랑이
행복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의
마음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행복이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다.
행복은
예수님같이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가난한
관계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던 것들이
실은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날 때
행복으로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한
삶의 목적이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행복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이신
하느님께
집중한다.
행복은
하느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