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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6년 6월 9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일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6.06.09|조회수13 목록 댓글 0

제1독서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7-16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지내던 7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게 하시고, 그 성읍의 한 과부를 부르시어,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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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식량으로 음식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한 시돈 지방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 하느님께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 너희의 착한 행실로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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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시돈의 사렙타 마을에 사는 한 과부를 찾아간다. 그 과부와 아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처지였다. 그러나 주님의 보호로 그 과부의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이르시며 그 역할을 다하라고 가르치신다. 제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어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며, 등불은 숨겨 놓는 것이 아니라 켜서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 이처럼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환히 밝혀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행복 선언으로 인간의 부족함을 드러내신 뒤, 곧바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한 번에 규정하십니다. 신앙인은 가난해도, 부족해도 이미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고 “세상의 빛”(5,14)입니다. 이 말씀은 격려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선언입니다. 소금과 빛은 스스로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이를 향합니다. 소금은 녹아 사라지며 맛을 내고, 빛은 어둠을 밝혀 다른 이들이 볼 수 있게 합니다. 
소금은 고대 세계에서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었습니다. 정화하고, 보존하며, 제물과 함께 바쳐졌고,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소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것이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움’을 통하여 경고합니다. 제자들이 행복 선언에서 드러난 삶의 방식, 곧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소금이지만 소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쓸모없음은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자기 본성과 정체성을 배반한 결과입니다.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는 행위는 제맛을 잃은 소금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5,16)를 찬양하게 하려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서 6장이 말하는 위선적인 드러냄(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등경 위의 빛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끝내 숨겨지지 않아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으니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보다, ‘무엇을 위한 마음’을 지녀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인, 자연스러운 오늘의 ‘나로서’ 살아갑시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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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음식의 맛을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타락과 멸망을 막고 더 나은 세상, 더 맛깔나는 세상을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기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9,50) 하고 이르십니다. 또한 콜로새서의 저자는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4,6)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빛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빛은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둡고 차디찬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초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녹일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지고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그 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내 앞길만, 내 가정만, 우리 교회만 비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이를 환히 비추는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이가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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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느 강연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연자가 목 부분이 부러진 낡은 바이올린 하나를 집어 들고 단상 위에 올라 물었습니다. “이 악기의 가치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웃었고 몇 사람은 목 부분을 고친다 하여도 수십 달러 정도밖에 받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바이올린 안쪽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자, 이를 들은 모든 이가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는 ‘1723년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은 전 세계적으로 600여 대가 남아 있으며, 보존 상태에 따라 몇십 억 원이 넘는 고가에 팔리는 명품 악기라고 합니다. 강연자는 참석자들이 그 바이올린을 돌려 볼 수 있게 맨 앞줄 첫 사람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이올린을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숨죽이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옮겨 가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하였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바이올린이 형편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바이올린을 만든 이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태도를 바꾸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때로는 우리 자신이 어디에도 쓸데없고 볼품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분께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의 작품이 바로 우리인데 어찌 우리가 명품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어둠에 덮이지 않고 참멋이 드러나도록,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고 살맛이 나는 곳이 되도록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지어내셨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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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유다 임금 아합과 왕비 이제벨에게,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을 거스른 대가로, 큰 가뭄과 재앙을 치를 것을 예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내의 물이 말라 죽을 위기에 놓인 엘리야에게 사렙타 성읍의 과부를 찾아가도록 명합니다. 그러나 사렙타 성읍의 과부도 밀가루가 거의 떨어져 가서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예언자와 과부의 목숨을 보존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속에 있던 그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기심과 방탕, 증오와 폭력으로 어두워져 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힘은 믿음의 길을 따르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신앙인의 선행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빛이 됩니다. 

소금은 짠맛을 냅니다.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인생을 살 만한 것으로 바꾸는 맛을 냅니다. 신앙인의 순수함, 이 세상을 초월한 자세와 이상은 하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닙니다. 신앙인의 믿음은 이 세상의 더러움에 갇혀 부패되지 않으며 썩지 않는 생명과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고 생명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불멸의 소금’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도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을 허무하게 살지 않고, 비참에 빠지지 않게 하는 가치를 보여 줍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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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작정입니다.” 사렙타의 한 과부의 마지막 탄식이자 절망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죽을 것 같다,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 죽도록 밉다.” 죽는다는 말을 죽자 하고 많이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말 속에는 죽음의 절박함을 느낄 정도로 사는 게 힘들고, 사람이 밉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죽음의 그늘 속에서 빛이 되어 주고, 살맛 나지 않는 내 인생에 소금처럼 간을 맞춰 줄 사람은 없는지 찾는 게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이 내게 소금과 빛이 되어 주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내가 인생의 무의미와 허망함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소금이 되어 주고, 죽음의 절박함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래도 살 만한 이유를 느끼게 하는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란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 헌장, 1항)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 사람들과 무관하게 우리만의 ‘방주’에 모여 구원을 누리는 ‘자족 공동체’가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렙타의 한 과부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처럼, 교회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도록 파견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신앙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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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 상권 17장은 엘리야가 시돈 지방 사렙타 마을의 한 가난한 과부를 찾아간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 만남은 엘리야가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매우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과 대결하는 장면(1열왕 18,20-40 참조)이 연상시키듯, 하느님의 거룩한 분노를 전하는 강철처럼 굳건하며 불같이 강렬한 예언자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찬찬히 읽으며 그의 처지를 떠올려 보면 엘리야 예언자가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하고 고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다섯 번째 산』에서 이 사렙타 마을에서의 만남을 중심으로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와 성숙의 과정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탁월한 상상력을 지닌 작가가 아니더라도 조금만 공감한다면, 우상을 숭배하며 사악한 권력을 휘두르는 임금과 왕비에게 엘리야가 하느님 진노의 표징인 가뭄을 예언한 뒤 얼마나 큰 위험에 놓였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철저한 고독감과 무력감, 두려움을 느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한 가운데 우상을 숭배하는 예언자 수백 명과 대결하겠다며 대담하게 임금 앞에 나아갔습니다(1열왕 18,16-19 참조).

그런데 이 결정적 사건 이전에 엘리야 예언자는 다름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와 그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과부의 아들의 죽음이 보여 주듯 그들의 가장 비참한 고통에 함께했습니다(1열왕 17,8-24 참조).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예언자의 힘을 가난하고 힘없는 이와 이루는 깊은 연대 안에 불어넣어 주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니 당신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정화하고 밝히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수신자가 주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허위를 이기는 예언자의 힘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또한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을 통하여 살아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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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일본의 작가 미쓰하라 유리의 『길』이라는 시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짧고 쉬운 시들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권 사 두고 보좌 신부로서 사목지에서 만나는 청소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절판되어 더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최근 한 신자에게서 이 책을 선물받고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 시집에는 ‘길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맨 처음 길을 걸은 사람 훌륭해/ 험한 길 처음으로 걸은 사람/ 이름을 외울 가치가 있을 만큼 훌륭해/ 그 오롯한 자세/ 정말 아름다워/ 허나 그 뒤이어/ 이름 따위 안 남을 줄 알면서도/ 꾸준히 길을 밟아 다지며 걸어간 이들의/ 소박한 걸음/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의 요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자신과 가정을 돌보기에도 벅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가슴 깊이 와 닿을 수 없는 이상일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위의 짧은 시가 노래하듯,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삶은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처지에서 가능합니다. 어떤 이가 먼저 길을 내는 몫을 맡았다면 다른 이는 그 길을 걸어가고 따라가 줌으로써 그 길을 넓히고 다지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일들, 우리를 통해 하실 일들에 미리 제한을 두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에 신뢰하고 감사하며 응답하는 것이 참행복의 길일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표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영주에게 얽매여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고, 둘째는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 지금까지 진 빚을 탕감해 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슬람교도의 땅과 재물을 약탈해서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터운 신앙심 때문에 전쟁에 참전한 것 같지만, 위의 세 가지 불순한 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 4차에 걸쳐 전쟁했지만, 제1차 십자군 전쟁만 성공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슬로건을 걸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내용의 전쟁에 절대 함께하실 리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전쟁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 자국의 이익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폭력보다 평화를 원하십니다. 힘으로 누르는 폭력보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모범적인 우리가 되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마태 5,13)

 

순수한 소금 자체는 짠맛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사해 주변에서 구하던 소금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암염입니다. 습지에 노출되어 소금기가 다 빠져나가면 짠맛 없는 하얀 가루만 남게 되어 길가에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동화되어 복음의 가치(짠맛)를 상실하면, 존재 이유를 잃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마태 5,14)

 

신앙인은 세상 위로 높이 드러나 길을 잃은 이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거룩한 모범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 그래서 폭력까지도 합리화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분명해집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처럼 세상에 유익을 주고, 최종적으로 그 모든 선함의 방향이 하느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태양 아래 있으면 피부를 그을리지만, 성체 앞에 있으면 성인이 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만히 저를 돌아보니 제가 좀 싱거운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말에 진실성이 없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실없는 말, 애매한 말을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을 햇갈리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주 다짐을 합니다.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좀 진중해지자고. 비록 우리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음식 속으로 완전히 녹아 들어가 음식을 맛갈지게 만드는 소금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맛에는 참 여러 가지 맛이 있습니다. 매운맛, 신맛, 단맛, 쓴맛...다양한 맛이 우리 미각을 즐겁게 합니다. 그런데 모든 맛의 배경이 되며, 다양한 맛을 조화시키고 어우르는 재료는 아무래도 소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때로 보관이 잘못되거나, 지나치게 오래 방치해 놓으면, 소금 고유의 짠맛이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짠맛이 사라진 소금, 그거 어디에 쓰겠습니까?

눈이 내린 후 얼어붙은 빙판길에 뿌리면 도움이 되려나요?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쓸모없는 존재,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공공단체, 도무지 존재의 이유를 모르겠는 모임,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으며, 자기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공동체...바로 예수님께서 강력히 경고하시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습입니다.

별것 아니지만, 몇 가지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새삼 소금의 위력을 실감합니다. 물 조절을 실패한 나머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밋밋하고 심심한 라면 먹는 것은 고문입니다. 간 조절이 안된 매운탕, 소금 없이 먹는 삶은 계란...참 고역입니다. 어떻게든 소금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것 같고 요란스럽지만 실속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합니다만, 결실이 없습니다. 이웃들에게 주는 것이라곤 씁쓸함이요 쓴 맛입니다. 요란한 괭가리에 불과한 삶입니다.

그러나 소금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자신이 이미 빛과 소금인 줄 모른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전쟁이 끝난 1945년 독일,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직 건축가였습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마을을 보며 그는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보수도 없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한 달이 지나자 이웃 열 명이 함께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마을 전체가 일어났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남자의 행동은 역사가들이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된 정신의 뿌리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모두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생명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이 아닌 선언으로 말씀하십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세례로 이미 그 본성을 받은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내가 빛이고 소금인 줄 모르면 내가 빛나야 하고 맛을 내야 하는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호주 근처 태평양 한가운데, 서울 용산구만 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섬 전체를 뒤덮은 인광석 덕분에 나우루는 갑자기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소득이 만 달러일 때, 나우루는 3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병원비·교육비 무료, 세금 없음, 신혼부부에게 집 무상 제공, 매년 생활비 지급.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기름이 떨어지면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샀고,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어 종업원이 짐을 실어주길 기다렸습니다. 공무원도, 노동자도 전부 외국인이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그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인광석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항구를 만들어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사람도, 고기 잡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땅은 채굴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우루는 호주의 원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에서 치유하신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군대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를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님은 허락하셨고, 돼지 떼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마귀를 받아들인 돼지는 스스로 빛이 될 수도,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무언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존재를 만듭니다. 우리 안엔 무엇이 들어오셨을까요? 빛과 소금 자체이신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만 믿으면 그대로 살 수 있습니다. 나우루의 이야기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빛과 소금인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요?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이었습니다. 한 졸업생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5분 30초 동안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 전원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 자폐로 인해 말을 할 수 없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5개월까지 재잘재잘 말을 하던 아이였지만, 불과 일주일 사이에 모든 언어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혼자 분노를 삼켰습니다.

여섯 살 때 타이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표현한 단어는 'AGONY', 괴롭다는 말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지 묻자 그녀는 적었습니다. "NOT TALKING."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0 만점에 4.0, 완벽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타이핑으로 음성변환을 해 연설했습니다. 그 연설의 끝은 이렇습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하느님은 이미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내가 빛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처음엔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자기 삶 전체를 내어 3,100만 명에게 소금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 누군가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누가 있습니까?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 자녀를 이미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로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믿게 되면 이러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과 소금이기를 거부하면 바로 버려져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삶은 나우루가 증명했습니다. 반면 생명을 주는 삶은 엘리자베스가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을 살겠습니까? 빛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 빛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에 맛을 더하는 소금의 역할이 무엇일까만 찾으면 됩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말고 ‘내가 빛인데 어떻게 빛나야 하나?’, ‘내가 소금인데, 어디서 녹아야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되었으니 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증명할까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물론 하느님께도 쓸모있는 존재로 남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명칭(名稱)’과 호칭(互稱)‘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명칭은 주체가 ‘나’입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초등학생 때 ‘반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내가 반장이 되려는 이유를 발표하고, 친구들이 투표해서 반장으로 선출되면 그때부터 선생님도 친구들도 ‘반장’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저는 신용 협동조합 ‘업무 이사’를 했습니다. 명칭은 업무 이사이지만 하는 일은 신학교 매점의 ‘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서품받은 후에 저의 명칭은 ‘보좌 신부’였습니다. 교우들은 저를 보좌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작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8년의 보좌 신부 기간을 지낸 후에 교구는 저를 본당 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뒤로 저의 명칭은 주임 신부,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있을 때는 ‘교육 담당 신부’라고 불렸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가 교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을 때는 ‘성소국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주가톨릭 평화 신문에서 일할 때는 ‘사장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호칭은 나의 행실과 행동으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때로는 나의 외모와 말투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신학생 때 친구들은 저를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은 싸움에 능했고, 관우와 장비처럼 도원결의했던 동지는 아니었지만, 제갈공명과 더불어 유비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판매부 사장도 하였고, 타종 반에서 삼종기도를 치기도 했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이런 외적인 활동을 보면서 친구들이 그런 호칭으로 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직책이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동과 행실이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그 행동과 삶이 독선과 독재의 길을 걷는다면 국민은 그런 대통령에 대한 호칭을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부르곤 합니다. 그런 대통령을 ‘광인(狂人)’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도 부하직원들은 상급자의 행동과 행실에 따라서 그에 걸맞은 호칭으로 부르곤 합니다. ‘천사,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악마, 욕심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호칭’에 대해서 궁금해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하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왔다.’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옳게 대답하였다. 내가 너를 반석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호칭을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살립니다. 빛은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힙니다. 소금과 빛은 겉으로 드러나는 명칭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가졌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의 희생과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소금과 빛>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ㄱ)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ㄱ)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내님
뜻대로



벗에
스미어

 


녹아
사라져도



맘껏
살맛나니



내게는
기쁨과 행복이요



내님께는
감사와 찬미라네



내님
뜻대로



벗을
비추어



끝없이
흩어져도



한껏
빛나니



내게는
기쁨과 행복이요



내님께는
감사와 찬미라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은 바로 모든 음식의 맛을 내는 맛의 원천적 재료입니다. ‘인간은 금 없이는 살 수 있다. 만약 음식에 이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람은 정말 살 맛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으로 음식을 보관했을 때 썩지 않게 보관할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인간의 체액에 존재하며, 삼투압 유지를 도와주면서 사람의 건강에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런 소금의 특징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맛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전하는 사명, 그리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더 이상 부패 되어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사명, 그리고 인체의 건강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이듯이 모든 이들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투신하는 사명을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감광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진 인화지와 같은 원리인데 이 감광지는 주로 청사진을 만드는 데에 쓰이면서 빛을 받으면 변색하는 성질이 있는 종이입니다. 저는 그 청사진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곧 빛은 하느님, 감광지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감광지에 어떤 물체를 올려놓느냐가 참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감광지에 돈을 올려놓을 때 우리의 모습은 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모습에 주님의 모습을 올려놓을 때 우리의 모습은 주님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로 우리가 주님의 빛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전할 때도 주님을 앞세우고 나아갈 때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면서 참된 사랑의 청사진이 그려지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는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러니 가끔은 스스로 ‘정신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 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송영진 모세 신부님
1)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

(2)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런데 이 두 가지는 따로 떼어서 구분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면, 그 삶이 곧 신앙의 증언이 되고 복음 선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신앙인 자신이 먼저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나 혼자 착하게 살고 신앙생활 잘해서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자기 혼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관심이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은, 등불로 모든 사람을 비추라는 예수님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신앙인은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했던 별처럼(마태 2,9)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 말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다.’는 신앙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3) 13절의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는 ‘탈렌트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8-30).”

 

여기서 ‘쓸모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도,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 버려진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 멸망한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은 그냥 쓸모없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과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다시 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인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그렇게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쩔 수가 없다.” 라는 말씀일 뿐이고, 구원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제 맛을 잃은 소금’에서 ‘본래의 맛을 찾은 소금’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4) ‘쓸모없다.’ 라는 말을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신앙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신앙인답게 살면서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즉 신앙인의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생색낼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쓸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음식의 맛은 소금이 냅니다. <마태 5, 13-16> 6월 9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빛은 분별력을 갖게 하고, 소금은 음식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도 다른 이를 바로 살게 하고 멋있게 살려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사람, 싱거운 사람은 친교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사는 사람에게 주님은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은 거룩한 삶이고 소금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빛을 잃고 어둡게 사는 사람, 아무하고도 관계없이 살려는 사람 빛과 짠맛을 잃은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리려고 하면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하듯이 희생 없이 세상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사람답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려는 사람은 진, 선, 미의 길을 따라 살고, 멋있고 사람의 가치를 지니고 사는 사람은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요사이 실수든 고의든 부정선거로 어지럽고 불안한 세상이 되어 밤잠을 자지 않고 재선거를 부르짖는 소리에 마음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어둡고 싱거워진 세상이 되어 빛도 없고 희생하는 사람도 없어서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길 잃은 국민이 되고 멋없는 세상이 되어 갑니다. 진실과 사랑을 잃은 세상은 힘없는 사람이 살기 어렵게 되고 나라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권력, 재력, 능력이 있어도 빛이 없고 싱거운 세상은 삶의 본질을 잃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은 장님의 세상이고 소금이 짠맛을 잃은 세상은 기대고 의지하지 못하는 병자 같은 세상입니다. 힘에 눌려 노예처럼 살고, 가난하여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세상은 아사자만 만들어 냅니다.

빛이 되려면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하고, 소금이 되려면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손해 보지 않고 이기심에서 욕심만 차리고 시기·질투로만 사려는 사람은 그 어둠 속에 헤매고 맛없고 싱거운 세상에 살게 됩니다. 교회가 빛을 잃고 재미가 없으면 빈 깡통이 되어갑니다.

믿음을 사는 사람은 진실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서 모든 이를 구원의 길로 나가도록 기도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소금’과 ‘빛’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이 두가지는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들이지요. 먼저 소금은 음식에 적당한 간을 맞추어 맛을 낼 뿐 아니라, 재료 안에 섞여 들어가 그것들을 ‘발효’시킴으로써 음식을 썩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금 속에 들어있는 ‘나트륨’이라는 성분은 우리 몸 속에 있는 전해질의 균형을 맞추어 생명을 유지하는데에 꼭 필요하지요. 한편 빛은 어둠을 밝게 비추어 우리 눈이 어떤 대상이 지닌 본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며, 그 자체로 생물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이 우리를 ‘소금’이자 ‘빛’이라고 하시는 건 우리가 주님께 있어서, 그리고 세상에 있어서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은 대단한 힘이나 특별한 능력 같은 게 없다면서, 남들 뒤에 숨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듭니다. 자신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대단한 일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건 자기 말고 다른 이에게 시키라고 떠넘기기도 하지요. 그렇게 자신에게 맡겨진 빛과 소금이라는 소명을 외면하며 사는 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 말씀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마음에 꽂힙니다. 내가 평소에 하는 말과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할 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의 부족함과 잘못 때문에 하느님까지 싸잡아 욕먹으시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는 못난 사람이 하느님께 민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주님 뜻을 따름으로써, 사람들이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야 합니다. 그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말씀 안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고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하느님께서 보시기 좋게 만든 세상 속으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 맛 나게’, 삶이 주는 참된 기쁨과 보람의 맛을 느끼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이, 사랑에서 비롯된 희생과 헌신으로 나를 태워 아직은 세상이 아름답고 살만 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우리의 소명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참 많은 탈렌트와 은총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로부터 세상에 파견된 나는 쓸 모 있고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빛과 소금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님
우리에게 참으로 익숙한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친숙한 일상의 사물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소금은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가르침을 주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이 지위와 형편을 막론하고 모든 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늘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금과 빛에 비유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관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고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듯, 우리 역시 말씀의 실천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소명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의 행복과 구원을 향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참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금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녹여
다른 것의 맛을 살리고,
생명을 보존합니다.

자기봉헌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합니다.

소금은 말없이
모든 음식에 스며듭니다.

너무 많으면 짜고,
너무 적으면 싱겁습니다.

한 줌의 소금은
적은 양이지만
음식 전체의 맛을
바꿉니다.

내어줄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감사와 은혜라는
소금의 맛을

잊어버리면
삶의 방향을 잃게 됩니다.

작은 감사가 큰 은총을
다시 살립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이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녹여 세상을 살리는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그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1,093개의 미국 특허가 그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남긴 발명품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밤을 환하게 했던 전구의 발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발명품을 남겼고, 인류에 지대한 발전을 이루게 했던 그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가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특허료만 해도 상당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가 연구소를 차리고 또 회사도 운영했지만, 늘 빚에 쪼들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명과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핍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채워 있어야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족함이 있어야 이를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자기 변화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부족함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변화의 방향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소금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음식의 맛을 내는 것뿐 아니라, 음식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소금이기에 소금으로 계약을 맺곤 했습니다(민수 18,19; 2역대 13,5). 어떤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한 가치를 의미할 때 맺는 계약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은 세상과 하느님께서 맺은 계약안에서 보존되고, 또 그 세상의 ‘맛’을 더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빛 역시 중요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세상 창조 때, 빛이 처음으로 창조되었으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도 불기둥이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존재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 줄 모르고 삽니다. 약간의 고통과 시련에 쉽게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포기하면서 “나는 안 돼. 능력이 없어.” 등의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는 소중한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 주님을 떠올리면서, 어떤 일이 있어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걸 걱정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 걸 걱정해야 한다(공자).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틈만 나면 매운탕을 끓이고 생선을 굽다 보니, 간 맞추는 데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생겼습니다. 요리하는 데 있어서 간을 잘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실감합니다.

 

음식의 간을 맞추는 데는 아무래도 소금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식문화가 얼마나 단조롭고 심심하겠습니까? 아무리 다양하고 맛갈진 갖은양념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소금이 딱 받쳐주지 않으면, 그 요리는 밋밋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금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도록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 5장 13절)

 

비록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음식 안으로 스며들어 음식을 음식답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 소금이 지닌 염분으로 인해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존재...

 

세상 의미 없고 쓸데없는 것 중 하나가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입니다. 장소만 차지할 뿐, 그 어디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살 수 있겠느냐?”는 말씀은 어떤 면에서 아주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유하지 않고 옳은 일에 목 마르지도 않는다면, 자비와는 거리가 멀고, 의로운 일과는 담을 쌓고 살아간다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괴롭히기만 한다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짠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오 복음 5장 13절)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한 소명이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하거나 게으르게 될 때, 언젠가 하느님 대전으로 나아가게 될 때 참으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야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 하지 않을 때 무엇이 되는지 안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병원비와 교육비, 해외 유학 경비까지 공짜인데 국가에 내야 하는 세금도 없으며 결혼하는 부부들에게는 집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매년 생활비까지 1억 원씩 나눠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살면 정말 행복할까요?

과거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면서 이와 같은 혜택을 국민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결국 지금은 파산하여 호주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나우루 공화국’입니다. 

 

서울의 용산구 정도의 크기인 호주 근처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엔 만 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1798년 유럽인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이 섬나라는 다른 섬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이 이 섬나라를 발견하여 무기와 술을 제공하자 이들은 서로 작은 땅을 차지하고자 싸웠고 인구가 3만 명에서 1/3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나우루 공화국이 갑자기 잘살게 된 것은 바로 새 똥 덕분이었습니다. 앨버트로스라는 새 똥이 쌓여서 만들어진 인광석이라는 물질이 나우루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는데, 인광석은 질 좋은 화학비료의 원료가 되는 물질이어서 1970년부터 인광석을 수출하여 큰돈을 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80년부터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일본이 만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나우루 국민이 얼마나 사치스럽게 살았냐면, 일반인들이 개인 전용기를 타고 피지나 하와이, 싱가포르로 매일 같이 쇼핑과 외식을 하러 갔고 심지어 도로도 별로 없는데 고급 차를 타다 기름이 떨어지면 그냥 차를 버리고 새 차를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좁은 섬에 여객기만 9대에 주유소는 29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안 되는 거리도 차를 타고 다녔으며 마트에서 쇼핑하기도 귀찮아서 차를 몰고 마트 앞에 가서 전화하면 종업원이 물건을 들고나와 차에 실어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나우루에서 일하는 공무원까지 모두 외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천국이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몰락은 금방 찾아왔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광석 광산의 채굴량이 감소하였고 머지않아 인광석이 바닥날 참이었습니다. 정부는 바닷가에 항구를 만들어 국민이 일하게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나우루 국민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우루 국민은 그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바닷가에서 해수욕이나 즐기고 있었습니다. 일할 사람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인광석 채굴로 사라졌습니다. 물론 장년층이 아니면 농사짓는 법도 고기 잡는 법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나우루에서는 수입산 가공식품만 먹는다고 합니다. 

 

정부는 부랴부랴 인광석 채굴량을 줄이고 여러 사업도 시도해 보았지만, 이미 늘어날 대로 늘어난 국민의 소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나우루 정부도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서 정부 예산을 개인들이 수시로 횡령하였으며 마구잡이로 투자해 줄줄이 말아먹었습니다. 경제부 장관도 자신은 경제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할 정도였습니다. 

해외 부동산을 사들여 임대업을 하고 스위스처럼 은행을 만들어 검은돈을 은닉하는 조세회피처 사업도 했지만, 9·11 테러 이후 나우루는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되어 그나마 들어오던 돈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호주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빛은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 세상에 맛을 줍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은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왜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 지방에서 ‘군대’라는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한 적이 있으십니다. 그 마귀들은 자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허락하십니다. 

돼지 떼는 스스로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의지로 세상을 밝히고 세상에 맛을 주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이끄는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남이 주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는 삶입니다. 나우루 공화국 사람들은 천국을 돼지 떼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돼지 떼는 자신들이 공동체를 위해 어떤 희생도 하지 않기에 공동체 의식도 없습니다. 군대지만 떼거지지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도 유지되려면 각자가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가정도 가정의 유지를 위해 각자가 얼마나 많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합니까?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위해 서로가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하면서 짐승에서 벗어난 공동체입니다. 세상의 재화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천국의 삶입니다. 

 

2022년 5월 10일 미국 플로리다 주 롤린스 칼리지 졸업식장에는 4.0 만점에 4.0 졸업 평점을 받은 미국 여대생의 졸업 연설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5분 30초 동안 침묵을 지켰고 한마디 없이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졸업생들은 모두 일어나 손뼉을 쳤습니다. 무슨 사연일까요?

이 여학생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봉커’입니다. 그녀는 언어능력을 상실한 자폐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아주 호기심 많고 마음 따뜻한 아이였습니다. 말도 재잘재잘하며 활력이 넘쳤습니다. 적어도 15개월 무렵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만에 모든 게 변해버렸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듣고, 입을 다물고 바닥에 머리를 찧곤 했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못 알아듣고, 입을 다물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습니다. 부모로서는 보기 무서웠고 그녀를 잃은 것 같았습니다. 

여섯 살까지 아이가 뭘 느끼는지 뭘 원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분노가 끓어오를 때 자기 손으로 자기 얼굴을 때렸습니다. 부모로서 이런 아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보다 큰 고통이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엄마는 자폐아의 의사 표현을 도와준다는 사람을 만나 엘리자베스에게 타이핑 교육을 해보았습니다. 한 달에 일주일씩 다섯 달을 배우고 그녀가 처음 표현한 단어는 ‘AGONY’(괴롭다)였습니다. 여섯 살 아이는 자폐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그녀는 자폐 때문에 무엇이 가장 괴로운지 표현하라는 말에 “NOT TALKING”(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부모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정상적으로 이어 나간 그녀는 대학에서 4.0 만점을 받아 연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한 글자씩 쳐서 음성변환을 한 그녀의 연설을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자폐증 증상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또 신경운동의 문제로 혼자서는 양말을 신지도, 셔츠 단추를 잠그지도 못하죠. 자는 자폐인이지만, 운 좋게도 글씨를 통해 의사 전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덕분에 침묵의 감옥에서 벗어나 저의 영웅 헬렌 켈러 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과 마찬가지로 저도 꿈이 있죠. 그것은 모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전 세계 언어 장애 자폐인이 3,1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침묵의 감옥에 갇혀 있죠. 저는 그들이 침묵의 고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소리를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2차 대전 때 나치 암호를 해독했던 알란 튜링을 인용하며 연설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을 해내는 사람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됩시다. 빛이 됩시다. ‘빛이 있으라!’ 감사합니다.”

[출처: ‘4.0 만점에 4.0! 완벽한 졸업 평점을 받은 미국 여대생의 놀라운 비밀’, 유츄브 채널, ‘마따 TV’]

 

디팩 초프라는 자녀들에게 “먹고 사는 거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웃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말합니다. 

“저는 돈 버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인류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을 소진하는 사람이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마음에서 우리는 천국의 백성 자격이 있음을 증명받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필라델피아 랭커스터에 있는 극장에서 성극 ‘다윗’ 공연을 보았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처음 가보았습니다.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무대도 크고 화려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그동안 공연했던 작품들도 알 수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혼자 가기에는 부담이 되지만 단체로 가면 운전에 대한 부담도 없이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버스들이 공연장에 있었습니다. 일하는 직원들도 버스가 주차할 수 있도록 안내하였고, 버스 안에서 공연 티켓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있는 다윗의 이야기를 멋지고 아름답게 연출하였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이야기,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긴 이야기,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도망 다니는 이야기,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야기,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시키는 이야기, 바세바를 취하고 바세바의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 다윗이 회개하는 이야기, 목자이신 주님께 의탁하며 하느님께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소감발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년에는 ‘모세’를 공연한다고 하는데 내년에도 오고 싶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돌팔매를 던져서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을 보면서 돌이 마치 묵주 알 같았다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면 어떤 악의 세력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사울과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욕심 때문에 바세바를 취하였고, 바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하였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똑같이 죄를 지었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사울은 비참하게 죽었고, 다윗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윗은 회개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공연의 주인공은 물론 다윗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공은 하느님입니다. 공연 중에 시편 23장과 51장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비록 지옥의 길을 간다할지라도 주님 함께 계시니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아쉬울 것 없습니다.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죄를 지었지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나를 용서해 주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용서 받을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으니 더더욱 주님을 섬길 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뭄이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과 기름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요청을 합니다. 마지막 남은 밀과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를 위해서 주고, 남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음식을 먼저 남에게 주고 남은 음식을 아들과 함께 먹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엘리야는 사렙타 과부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주었고, 비가 내릴 때까지 과부의 집에는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었습니다. 현실의 삶에서 우리는 편안하고 쉬운 것을 택하려고 합니다. 많은 것들 중에서 조금 나누는 것도 아까워하는 세상입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Winner takes all)’는 말이 당연시 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To give is happy than to receive.)'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빛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기 마련입니다. 빛은 그래서 밝고 깨끗해야 합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생기를 넣어 줍니다. 소금은 녹아야 합니다. 녹아서 다른 것들과 하나가 됩니다. 비록 본 모습은 없어지지만 다른 것들이 맛을 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 역시 드러내주고,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밝고 환하게 비추고, 세상에 참된 맛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제 맛>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을
더욱 맛내려고


제 맛을
고이 지닌 것이니


제 맛을
하나도 잃지 않되


세상에
기꺼이 뿌려지리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세상에 소금이 없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 '놀체인양업' 어린이들이 김밥 만들기를 했다. 엄마가 해주던 김밥이 어린이들에게 맛있는 김밥으로 기억에 있었을 것이다. 그 김밥말이를 직접 해보는 놀이였다. 김밥말이 내용물을 시장에서 손수 구입하고 김밥을 만들었다. 제법 모양을 갖춘 김밥말이가 끝났을 때, 한접시 가지고 와서 나에게 먹어 보란다. 한입 넣어보니 맛이 갔다. "왜요, 신부님?"하고는 자기들도 김밥 한입 넣었다. 아이들은 실망하는 느낌이 역역했다. '어, 왜 이리 김밥이 맛이 없지?' 문제의 원인을 한참 후에야 알아냈다. '아하, 소금' 한 아이가 외치고 있었다. 소금을 넣지 않았던 것이다.
한 어린이가 '맛은 소금이지,' 그 날은 소금을 구하지 못해 맛없는 김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에서 히말라야 소금, 중국 운남성의 차마고도에서 얻어낸 소금, 키르키즈스탄 내륙 이스쿨 호수의 소금광산, 그 소금은 그 해변가의 소금과는 비교가 안 될만큼 귀해서 소중했다.


소금은 짜다. 짠맛이 맛을 낸다. 소금이 음식에 적당히 녹아나면 감칠맛이 된다. 감칠맛의 원인은 소금이다. 주변에 소금 같은 사람이 있다. 맛내는 사람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길바닥에 버려 짓밟힐 따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맛을 내는 사람,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하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과연 나는 예수님의 맛을 내는 소금인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감으로서 맛이 없던 것이 맛이 있어집니다. 예전에 병원에  환자방문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이 병원 밥이 너무 맛이 없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병원 밥에는 염분을 최소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도 계속 소금이 없이 음식을 먹으라고 한다면 참 맛없는 식사를 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 음식 속에 소금이 녹아들면서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소금이 녹지 않고 결정 그대로 있다면 마치 돌을 씹는 것과도 같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이 녹아들고 사라지면서 하느님 사랑의 참 맛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신이 녹지 않으려고 할 때 하느님 사랑의 참 맛이 아닌 자신의 욕심의 쓴맛이 나버리고 맙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 맛을 보고 곧바로 뱉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욕심의 쓴맛이 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모습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모습은 녹아들어 참 맛을 내게 하는 소금과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녹지 않아 쓴 맛을 내는 욕심의 결정체인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세상은 말씀 안에서 서로 대화하고 말씀으로 인하여 존재합니다.
말씀으로부터 사랑과 조화가 옵니다.
말씀은 인간 안에 거처하시며 그분의 진리는 사랑입니다.
(솔로몬의 시)
당신 말씀의 사랑과 진리가
오늘의 우리의 삶 안에 드러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이근상 시몬 신부님

희랍말은 나, 너, 그와 같은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아도 동사의 어미변화에 이미 주어가 담겨 있는 언어다. 그러니 굳이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아주 특별히 주어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때 주격인칭 대명사를 쓰는데, 번역을 하자면, ‘다름아닌 바로 내가, 당신이, 그가’로 하는게 그 어감을 살리는 요령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렇게 인칭대명사가 쓰이는 문장들이다. 세상에 소금이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대라는 말씀, 세상의 빛빛이 있는데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그대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하나. 믿는 이가 소금이나 빛의 역할을 하기위해서, 소금이 되거나 빛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미 소금이 되었고, 이미 빛이 되었다. 그건 자격이나 노력으로 달성한 역할이 아니라 은총으로 믿는 이에게 주어진 사태. 그러나 복음에 따르면 소금은 자기 몫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빛 역시 산 위에 자리잡은 고을처럼 드러나는게 더 자연스럽지만 함지에 자신을 가둘 수 있는 모양이다.
소금 역할도 빛의 역할도 다 버거운데, 우리가 이미 빛이요, 소금이라는 이 사실은 난감하다. 우린 시시때때로, 아니 참 많은 순간, 사실 매일 소금의 자리, 빛의 자리에 있다. 따로 찾아가야할 자리가 아니라 눈만 뜨면 바로 지금 여기.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세상의 소금이며 또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소금과 빛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제일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먼저 소금이라는 것은 맛을 내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과거 세상에서 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 전쟁까지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소금은 우리들의 생활에서 중요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소금이 되지 않는다면 짓밟힐 것이라고 경고를 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님뿐 이지요. 제자들에게 이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은 어둠을 사라지게 하지요. 빛은 나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주 유익한 것이 빛이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이 이런 빛이라는 것임을 알아야 하지요. 나만을 위한 빛이 아닌 모두를 위한 빛 즉 메시아의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빛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산위의 고을은 예루살렘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가 드러났지요. 이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의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들 자신과 그리고 다른 이들의 죄가 드러나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의 삶의 목표 혹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즉 우리들이 빛이 되는 것이 우리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한 것이어야 함을 잊지 맙시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빛 그리고 소금인 것을 알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멘!

 

 

 

꽃자리.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정체는, 존재이유는,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예외없이, 차별없이 누구나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소금이 아니라 세상속의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격리된 빛이 아니라 세상속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소금이라면, 세상을 떠난 빛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각자 고유의 삶의 자리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하기에 달렸습니다.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탓할 수 없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제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누구나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이라는 선물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선물이 끝까지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한 과제의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변질되지 않고 빛 바래지 않고 늘 선물로 살 수 있습니다. 

 

똑같이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으로 선물처럼 주어진 삶이지만 이런 과제 수행의 노력이 없으면 소금은 변질되어 맛을 잃게 되고, 빛도 서서히 잃어가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습니다. 크게 비범한 일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세상의 중심인 바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꽃자리로 사는 것입니다. 각자 꽃자리로 살 때 언제나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제 주고 받은 반가운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어린 6남매를 데리고 자주 수도원에 피정을 오는 40대 중반의 아버지와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오늘 저희 집 장녀 박예현 라파엘라(초등 5학년)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를 읽고 쓴 독서일기’입니다” 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다음 같은 짧은 독서일기입니다.

 

“2022.6월5일(일)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293쪽-317쪽

오늘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를 다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수철 신부님은 매일 같은 시간에 기도하고 일하시면서 자작시도 지으시고 책을 쓰셨다는게 대단하시다. 강론도 쓰시고 여러 가지 일을 하실텐데 시간을 알뜰하게 쓰시나보다. 나도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겠다.”

 

초등학교 5학년생이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를 독파하며 이렇게 독서일기를 썼다니 놀랍고 감동적이라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맏딸! 정말 잘 두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과 형제님 여덟 식구의 가족 사진도 글도 나누니 모두 즐거워하더군요. 정말 좋은 아빠와 엄마에 자녀들이라구요!”

 

바로 이런 화기애애한 성가정이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평생 시종여일始終如一,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사셨습니다.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적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면 예수님은 더 기뻐하실 것이며 효과도 클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도 개인에 대한 말씀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적이자 개인적입니다. 제자공동체를 향해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예로든 여덟 식구의 성가정은 물론 우리 열두명의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공동체가 바로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의 오아시스, 세상의 천국인 여기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고 맛나게 하는 소금입니다. 이런 소금이 맛을 잃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맛이 갔다!” 음식이 맛이가면 버리겠지만 사람이 변질되어 맛이가면 참 대책이 없습니다. 주변을 밝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을 어둡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밝혀야 할 존재가 빛을 잃어도 참 문제입니다. 

 

어떻게 평생 맛을 잃지 않는 소금으로, 빛을 잃지 않는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유일한 단 하나의 방법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았기에 사렙다 과부 가족을 살리고 자기도 삶으로 명실공히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꽃자리에서 나날이 주님을 닮아가는 꽃자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희 요셉 수도 공동체가 주님을 닮아 꽃자리 공동체가 되어 세상의 소금같은 존재로, 세상의 빛같은 존재로 살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수도원의 중심인 성전에서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라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빛이 되어 살 때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끊임없이 많은 이들이 빛을 찾아 수도원에 올 것입니다. 말 그대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빛인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가 아니라 발광체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라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빛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주님을 닮아갈수록 빛나는 반사체, 세상의 빛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결론같은 주님의 말씀이 이를 명쾌하게 정리해 줍니다.

 

“이와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의 거룩한 꽃자리,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여기가 구원의 꽃자리, 진리의 꽃자리, 생명과 빛의 꽃자리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수도공동체를 날로 주님을 닮은 꽃자리 공동체로, 세상의 중심,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인 꽃자리 공동체로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지난 4월 21일 부활시기 썼던 꽃자리란 제 자작시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음지도 양지든 자리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꽃자리이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성전옆 북향 그늘진 외딴곳

 늘 거기 그 자리 

 1년 꼬박 기다렸다가 때되어 피어난

 샛노란 하늘 사랑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공동체다

 

 외롭지 않다

 눈물겹도록 고맙고 반갑고 기쁘다

 살아있음이 경이驚異요 찬미와 감사다

 

 꽃처럼 폈다 꽃처럼 지는 인생이고 싶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 안에서!” 아멘.

 

 

 

세상의 소금과 빛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음식을 맛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방부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신이 지닌 참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으로 가득 찬, 참된 지혜로 가득한 마음을 의미한다. 그 소금이 우리 마음에 뿌려지면 지혜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이런 마음을 소금에 비유하는 것은 소금의 좋은 맛과 신선함 때문이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을 썩지 않게 맛나게도 못하는 것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건강하지 못하고 활기가 없으며 하느님 보시기에도 아름답지 못하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13절) 우리가 믿음과 지혜를 버린다면, 우리는 당장에 이단에 빠지거나 믿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악의 세력에 넘어가 제맛을 잃고 믿음의 은총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세상의 빛”(14절)은 참되고 영원하신 분으로부터 비추어져 그들도 어둠 속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태양이시고 이제 빛줄기 같은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 지혜의 빛을 쏟아 주셨다. 우리는 진리의 빛을 보여줌으로써 오류의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달아나게 해야 한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 등불, 빛은 교회 안에 머무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신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15절) 등불은 아버지와 아들이 켜고, 그 등불은 말씀이다. 말씀의 등불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길을 알려주도록 빛을 내는 것이다. 등경은 생명의 말씀을 지닌 교회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지닌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함지라는 것은 악덕으로 등불이라는 덕을 감추는 것인데, 빛을 피해 어둠으로 숨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한다.

 

예수님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즉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남이 보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행이 알려지도록 두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삶을 보도록, 빛나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추지 마라.

     김현 F.살레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루카 10,3 참조)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은 소금과 빛의 원칙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녹는 삶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십시오!” 세례 때 부활초에서 옮겨진 빛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소금도 되고 빛도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빛을 받아 소유한 사람입니다. 하늘의 소금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러니 존재의 싸움에서 승리하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은 보관되거나 숨겨져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부딪히고 끙끙 앓더라도 관계를 맺고 드러나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부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상황과 처지에 따라 축소되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니어서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랑을 소금통에 보관해 두거나 함지 속에 기어이 감출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피곤하게 엮이고 싶지 않아서, 나선다는 핀잔을 듣기 싫어서 그 어려운 일을 해 냅니다. 혹시 새어 나갈까 봐 노심초사하며 여러 겹 싸매어 등불을 감춥니다. 나의 노력으로 벌어들인 빛이 아닙니다. 은총으로 간직하게 된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내 것처럼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선물이 아닙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천주교 신자들은 누군가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잘 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뭇 부담스러워 집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실제로 남들보다 먼저 지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럼 어떻게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 5,13-15)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 라고까지 덧붙이십니다.

어쩌면 더 잘 하고, 더 많이 하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특별히 별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일상에서, 묵묵히 꾸준하고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며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다짐이나 의무감에서 오는 부담보다는 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내어 맡기고, 오늘을 복음의 정신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로도 빛과 소금의 큰 몫을 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 복음의 정신과 교회의 가르침을 세세히 전부 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해도 다 수행하지 못하겠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하나씩 복음의 빛을 따라 걸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빛이 되어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함승수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소명', 들을 때마다 참 부담스러운 단어입니다. 세상사에 찌들고 지친 나머지 주님 사랑 안에서 편안하게 쉬고 싶어서, 나를 이런 저런 일로 자꾸만 괴롭히고 못살게구는 사람들을 피해 주님 품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뭐 그리 지키고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은지 참 부답스럽습니다. 게다가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소명'이라는 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히기까지 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신앙생활이란걸 괜히 시작했나 싶습니다. 차라리 주님도 복음도 모른 채 제 맘대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부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제 소명을 못하는 소금이 버림 받는 것은 그가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금이 아니었다면 짠맛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당할 일도, 매정하게 버려져 짓밟히고 상처받을 일도 없을 겁니다. '소금'이라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큰 탈렌트를 받은 특별한 존재이기에 그만큼 더 큰 기대와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말이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특별한 존재가 된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소명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신앙생활 못하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담그면" 그 장이 주는 깊은 맛을 느낄 수 없고, 그 장을 이용해 만드는 수많은 요리들도 맛볼 수 없게 되지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귀찮음, 힘듦, 괴로움, 억울함, 무미건조함 같은 '구더기'들을 잘 걷어내고, 주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장'을 잘 숙성시켜야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이라는 참맛을 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 구원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약속받은 선택된 존재이기에 하느님은 그만큼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십니다. 그걸 억울하게 여기며 엇나가려 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성당 다닌다는 사람이 그래?’라는 말을 듣는 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지고 가기에 버거운 십자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내 삶을 지탱하는 '부목'이기도합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가며 한 번이라도 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구원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등경 위에 두라'고 하십니다. 등경 위에서 자신을 태운 불꽃으로 남을 비추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 이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귀찮고 싫은 일을 참아가며 하고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힘겹게 참아내는 것이 결국엔 내 신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잘 타오르도록 '산소'를 공급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억울하고 귀찮다고 사방이 꽉 막힌 함지 속에, 이기심과 나태함이라는 답답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 숨으면, 잠깐은 편해질지 모르나 결국 신앙생활의 의미와 기쁨이라는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내 구원의 등불이 꺼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나 혼자서는 세상이 될 수 없지만 다른 이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고 배려하고 나눔으로써 그들이 '살 맛'나게 만들어주면 내가 있는 곳이 '살 맛 나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 혼자 독야청청 빛나서는 외롭고 공허할 뿐이지만, 나의 이해와 관심, 용서와 포용으로 다른 이를 밝게 비춤으로써 나와 그 사람이 지닌 참된 아름다움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함으로써만 그 존재 이유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빛과 소금의 본질은 너를 위해 존재한다. <마태 5, 13-16> 6월 7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행복의 길을 선포하신 다음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 이르십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 변함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하는 말처럼 다른 것과 섞여야 그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짠 것이지만, 음식에 들어가 맛을 내고 썩는 것을 방지하고 물건을 단단하게 하고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아기가 어머니 태 안의 양수 속에서 10개월 살다가 세상에 나오면서 소금 없이 생명이 보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소금 자체는 사라져 버립니다.

빛도 어둠을 비추고 사라져 버립니다. 촛불, 등잔불, 횃불, 전깃불도 전구를 갈아야 하고 태양도 태양의 흑점은 언젠가 사라져 지구의 끝 날이 온다고 합니다. 태양의 빛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 되듯이 모든 빛은 자기 몸을 태우고 빛을 비추고 사라져 없어지지만, 소금이 싱거워지고 등불을 등잔 밑에 두면 빛은 빛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소금이라 하시고 빛이라 하신 것은 소금 아닌 빛이 아닌 것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바로 하려면 사랑의 의미를 알고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너를 위한 내 희생의 결과로 맛이 나고, 멋이 되고, 썩지 않으며 단단하게 됩니다. 빛이 빛을 내려고 자기를 희생하여 어둠을 없이하여 보고 움직이며 생명이 됩니다.

권력과 재력, 온갖 명예를 갖고 있어도 다른 이를 위해 쓰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가진 모든 것은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처럼 주먹 쥔 손안에 넣고 힘으로 다른 이를 억누르고, 나누지 않고, 자기 자랑거리로만 생각하고 산다면 모든 것이 싱거워진 소금 같고 등잔 밑의 빛과 같습니다.

소금이 맛과 멋이 되고 썩음을 방지하고 단단한 물건을 만들고, 빛이 빛으로 어둠과 삶의 활력소가 되려면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독재자의 횡포, 자본가의 독점욕, 명예가 자기 것인 양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진실과 사랑의 삶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각자는 소금과 빛으로 자기 역할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반성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만 행복하고 자기만 편하고 안락하면 좋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하루를 산다면, 옆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나는 나대로 산다면 싱거워진 소금이며 등잔 밑의 빛이 됩니다. 빛이 빛으로만 있고 소금이 소금으로만 있으면 발에 밟히는 소금 같고 빛바랜 쓰레기같이 됩니다.

오늘 소금과 빛으로 역할을 잘하도록 기도하면서 보람 있는 날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타인과 공존하며 상생하는 멋진 하루 응원합니다.♡

혼자 독식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하나를 가지려고 필요 이상의 것을 너무 탐하다가 모든 걸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금이 없으면
참맛을 낼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신앙의 정체성은
우리들 실천이다.

실천이 없으면
신앙은
부패될 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실천이
참된 소금이다.

절절한 기도와
마침내 녹아야
하나되는
봉헌의 참된
삶이다.

소금이
만들어가는
신앙인들의
삶이다.

십자가의
아픔 없이는
성장 또한 없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소금의 길은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사랑의 길이다.

소금이
되지 않고서는
사랑이 될 수 없고
빛이 될 수 없다.

소금은
회개를 통해
소금이
되어간다.

소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다.

사람들 속으로
소금이 되어오신
예수님이시다.

소금이
되는 법을
배우는
우리들 삶이다.

소금을 만나고
소금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은 완성된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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