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8,20-39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29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
32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34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35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36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엘리야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자, 온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부르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존 율법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이루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본디 의미를 끝까지 찾아, 목적지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은 ‘참된 의미를 밝힌다’는 뜻으로, 율법을 철저히 따르거나 빈틈없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뜻하고 의도하는 바를 그리스도 에서 밝히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율법의 규범과 실천은 늘 그대로 이어 오지만, 더 이상 형식적으로 되풀이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고, 율법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참조). 그러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5,18)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희생 제사와 관련된 율법들처럼 율법의 어떤 규정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처럼 어떤 규정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됨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유연성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든 지키든, 누구나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5,19 참조). 율법은 단죄의 도구가 아니라 하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는 하느님 자비의 도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삶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예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논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어기는 이에게도 율법의 이름으로 사랑과 연민과 자비를 전하였으면 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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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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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주 하느님의 권능을 청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함께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며, 하느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체험하여 알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주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시편 16[15],1)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구약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십자가의 신비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이시며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된 율법과 계명, 십자가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며 하늘 나라를 위한 보화를 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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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반’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독일의 고속 도로 이름입니다. 우연히 이 도로에서 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길이 잘 닦여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운전자들이 추월선과 주행선을 확실하게 지키기 때문에 안전하게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기회에 이집트에 갔습니다. 땅이 넓은 곳이라,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고속 도로가 어느 정도 잘 닦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운전자들은 차선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속 도로임에도 무단 횡단을 하는 이들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균 60킬로미터 정도밖에 달릴 수 없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의 운전 상황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로 사정이 약간 다르기는 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도로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로 규칙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줍니다. 그리고 그 규칙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니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하고, 힘이 없는 사람도 당당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사랑을 담아 그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율법 안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아니라 온전하고 자유롭게 하느님 나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징검다리로 삼게 해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든 이민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말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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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는 양다리를 걸치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불로써 번제물을 사르는 기적’을 보여 줍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따르면서도 세속적인 욕구를 추구하여 바알 신을 섬기는 백성에게 회개하여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도록 표징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는 사람은 작은 계명을 어기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잣대로 계명들을 해석하며 표리부동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표와 이상이 하느님 나라의 삶임을 명확히 인식하므로 끊임없이 그 길을 걸어갑니다. 뒤돌아서거나 딴 길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선물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분노하거나 야박한 말을 하여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근심 걱정이나 괴로움은 물론, 자신의 공적까지도 숨기며 하느님에게만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일치하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됩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구원의 등불로 삼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좋은 몫을 얻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는 하늘 나라의 큰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은 기도 중에 아기 예수님을 기쁨과 감격으로 품에 안았습니다. 성인은 우연히 이를 숨어서 보았던 집주인에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청했습니다. 성인은 특별히 어린이의 벗이 되었고, 아프거나 다친 아이들을 치유해 주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않도록 숨어 다녔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성인을 본받아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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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예언자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양다리를 걸치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신 하느님에 대한 충성보다 당장 세속적 욕구를 채워 줄 바알 신에 대한 믿음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 신앙 때문에 율법의 까다로운 조문들을 지키며 살기보다는, 비옥한 땅과 풍성한 수확을 보장해 주는 토착 신 바알의 축복이 이스라엘 백성의 세속적 욕망을 채워 주기에 더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비슷합니다. 교황님이 ‘새로운 독재의 형태’라고 지칭한 자본주의라는 우상이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무한히 자극해서 삶의 정신적 가치나 종교적 의미를 변두리로 몰아내고 있습니다. 윤리적 계명과 교회의 지침들은 자유로운 인간 삶과 성장을 방해하는 지난 시대의 낡은 유물로 취급받습니다.
종교는 죽음을 넘어 영생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희망을 말해 주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버릴 수 있는 수행의 길을 강조해야 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종교가 이타적 희생과 절제의 수행보다 인간의 욕망을 더 자극하고, 축복을 구하는 세속적 방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은 율법의 정신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이 지금의 내 삶에 불편함을 주고, 멍에처럼 나를 굴레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하느님과의 인연과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느님이셔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삶의 나침반이자 지침임을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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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율법에 충실한 것과 하느님께 충실한 것은 다르지만, 그렇다고 하느님께 충실한 것이 율법 규정을 완전 무시하고 없애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모세의 율법을 주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요즘 세간에서는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또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법과 원칙을 무너뜨리고 가볍게 여기는 듯합니다. 법이라고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법이나 정의에 어긋나는 법은 폐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법만 지켜야 합니다. 법은 약하고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법이 그런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자의 편에 서 있다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러한 법은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법조인들은 언제나 평형 감각을 유지하고, 중용의 덕으로 법의 잣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은 독재자들과 강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흉기로 돌변하고, 약자들을 더욱 억누르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폭군들과 독재적 지도자들은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사리사욕만 채우고, 자리를 보전해 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경직된 무서운 율법을 자애로운 사랑의 율법,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법으로 완성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율법 본래의 기능을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당신 자비의 은총으로 사람을 돌보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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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지 말라는 법’을 ‘하라는 법’으로 바꾸셨습니다. ‘소극적인 법’을 ‘적극적인 법’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누구도 율법에 관해 ‘쓴소리’를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펼치신 것입니다. 당연히 율법 학자들은 경악합니다. 언제 또 무슨 말씀을 하실지 불안해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법 조항을 염두에 두신 것은 아닙니다. 계율의 숫자나 글자가 그분의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율법의 근본정신’에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한 자 한 획’이 아니라 율법 전체에 변화를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당연히 율법도 쉬워야 합니다. 일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라면 ‘주님의 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 겉모습에 매달리면 본질을 망각하게 됩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었습니다. 우주와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행위’가 율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언제라도 ‘사랑의 개념’을 우선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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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난히 율법에 얽매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그들에게 민족의 구심점은 신앙이었고, 그 신앙을 받쳐 주는 기둥이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큰일은 언제나 법으로 금지하거나 명했습니다. 더욱이 율법은 하느님 앞의 맹세였습니다. 따라서 법을 어기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 학자는 율법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임무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곧 불변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지를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라는 법보다 하지 말라는 법을 만들기 쉬운 탓이었는지, 당시에는 금지하는 법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금지 사항이 많은 법일수록 사람들은 거기에 더 얽매이게 됩니다. 율법은 차츰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어 율법 지상주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지 말라는 법을 하라는 법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 그분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하라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언젠가 아주 난처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잠시 쪼그려 앉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았다가 일어나는 순간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터진 것입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바지가 터졌다고 이제 쓸모가 없다며 벗어 던지고 팬티만 입고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터진 부분을 가리고 근처 편의점에서 옷핀을 사다가 터진 부분을 메웠습니다. 이제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이 바지를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실과 바늘로 터진 부분을 꿰맸습니다.
우리는 자기 것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쓰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고가의 만년필이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어느 날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고장 났다고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어떻게든 고치려고 온 힘을 기울였고, 현재 잘 고쳐서 잘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고쳐서 잘 쓰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버리시지 않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구원의 길에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완성한다’의 그리스어는 원래 빈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듯 ‘가득 채우다’, ‘목표에 도달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그릇을 깨뜨리러(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진정한 의미를 가득 채우려 오셨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외면적인 규정 준수에 얽매여 있는 율법을,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율법을 원래의 목적대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큰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 노력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용감한 사람에게 행운과 불운은 왼손과 오른손과 같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한다(성 시에나의 카타리나).
작은 것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양승국 스테판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께서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작은 사람들을 어여삐 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귀여겨 들으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고 대단한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여기심을 잘 드러내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 사람들 시선에 작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사람들, 어린이들, 장애인들, 환자들, 노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사람들 눈에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작은 직무들, 일상의 작은 봉사, 설거지, 쓰레기 분리 수거, 배수로 청소, 담당 구역 청소...등등을 별것 아닌 일, 보잘것없는 일로 여기고 적당적당히 넘겨버리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입니다.
살아보니 확실히 느끼겠습니다. 이 세상에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소중합니다. 작은 일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룹니다. 큰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청 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대통령이나 대도시 시장, 교구장이나 관구장이 해내는 일들을 홀로 해낼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분들은 큰 틀만 짜고, 방향한 제시합니다. 지지하고 격려하고 고무만 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일은 작은 사람들이 해냅니다. 그들의 협조와 헌신이 없다면 그 어떤 결과물도 창출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헌신하고 있는 작은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가 일상 안에서 자주 만나는 작은 사람들, 결코 작은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위대한 조력자요, 하느님의 협력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경제 이론 중에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다 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지혜입니다. 한곳에 모든 것을 투자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손실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산 투자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은행에서도 고객의 투자 성향을 묻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도 있고, 안정적인 투자도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안정적인 투자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분산할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하나 정해야 길을 안내합니다. 목적지를 여러 곳으로 설정하면 결국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조금, 세상도 조금 붙잡으려 하면 결국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한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오직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고,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숫자로 보면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의 차이로 인해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근의 미국과 이란 사이의 충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군사력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다시 협상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완전한 평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긴장과 불안 속에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은 힘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평화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평화는 신뢰와 명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 수가 많고 시설이 좋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공동체도 있습니다.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살아가며 많은 제약 속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작은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더 잘 알고, 더 깊이 나누고, 더 따뜻하게 함께합니다. 장례가 나면 모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도 세상의 성공이나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투자는 분산하는 것이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모을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시작됩니다.
엘리야처럼 혼자 남은 것 같아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의 방향을 다시 정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랑입니다.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직 주님을 향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전쟁과 갈등 속에 있는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기꺼이 오롯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믿음을
믿음만을
믿으십시오
희망을
희망만을
희망하십시오
사랑을
사랑만을
사랑하십시오
기쁨을
기쁨만을
기뻐하십시오
슬픔을
슬픔만을
슬퍼하십시오
품음을
품음만을
품으십시오
나눔을
나눔만을
나누십시오
돌봄을
돌봄만을
돌보십시오
섬김을
섬김만을
섬기십시오
살림을
살림만을
살리십시오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단순히 율법만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율법을 넘어서 그 율법 이전의 본질적인 삶, 곧 사랑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때로는 복음적인 삶이 아닌 율법적인 삶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저 교회의 의무를 지키고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 자기 안위를 삼는다면 우리는 율법적인 삶에 머무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교회의 의무도 지키지만 나아가 일상의 삶 속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참된 사랑을 전하는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사랑으로 완성되는 하느님의 법
김웅태 신부님
복음: 마태오 복음서 5장 17-19절
1. 시작하며: 사랑의 법으로의 초대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총 속에서 평안히 시작하고 계시는지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참 많은 규칙과 법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신호등의 빨간불에서 멈춰 서야 하는 교통법규부터 시작해서, 직장에서의 사규, 가정 안에서의 보이지 않는 약속들까지 말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규칙들이 우리를 얽매고 피곤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해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성’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법의 완성’이 결국 ‘사랑의 완성’임을 깨닫고, 우리 삶에서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2. 일상의 예화: 레시피와 어머니의 손맛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요리책에 적힌 레시피를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소금 5g, 간장 한 큰술, 물 500ml, 불의 세기는 중불로 10분.”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요리를 망칠까 봐 저울과 타이머를 손에서 놓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분명 규칙에는 완벽하게 맞았지만, 왠지 모르게 깊은 맛이 없고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저울이나 타이머를 거의 쓰지 않으셨습니다. 눈대중으로 양념을 넣으시고, 불도 대충 조절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자녀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파를 조금 더 썰어 넣으시고, 피곤해 보일 때는 달콤한 맛을 조금 더 가미하셨습니다. 먹는 이의 상태와 마음을 온전히 헤아려 요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요리책의 규칙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규칙이 담고자 했던 최종 목표, 곧 먹는 사람의 행복과 건강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던 수많은 율법과 계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법을 주신 이유는 백성들을 얽매고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로부터 지켜 주시고, 하느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신 사랑의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은 잊어버린 채, 글자 그대로 지켰는지 아닌지만 따지는 굳어 버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굳어 버린 마음에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불어넣으시며, 율법이 본래 향하고 있던 참뜻을 완성하고자 하셨습니다.
3.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은 사랑의 길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은 일시적인 제약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고, 참된 생명과 자유로 인도하는 은총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죄의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외롭고 고단한 나 홀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마음 안에 머무르시며, 율법의 문자적인 얽매임이 아니라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한 번 더 따뜻한 눈길을 건네며, 소외된 이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4. 우리 삶에서의 실천: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는 길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는 비결은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 사랑의 법을 매일의 소박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실천해 나가는 데 있습니다.
● 가정에서 배우자의 잔소리가 들려올 때, 화를 내기보다 그 안에 담긴 걱정과 애정을 먼저 읽어 내는 것.
● 직장에서 까다로운 동료를 만났을 때, 판단하고 선을 긋기보다 그의 상처와 힘겨움을 한 번 더 헤아려 주는 것.
● 공동체 안에서 작은 봉사를 할 때, 생색내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느님께 기쁘게 봉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의 문자에만 갇힌 태도를 넘어, 삶으로 주님의 법을 완성해 가는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5. 맺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청하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법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참된 자유로 인도하는 은총의 이정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신뢰를 두고,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 안에서 고요하고 부드럽게 이끄시는 보호자 성령께 귀를 기울이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법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모든 자리에서 주님의 살아 있는 복음이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아멘.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율법을 존중한다는 차원을 넘어, 그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당신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충만히 드러내셨음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율법은 은총의 도래를 예고하고, 은총은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은 마치 교사처럼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Contra Faustum, 19,7 요약) 즉, 율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따라오신 이들을 은총 안에서 충만히 채워 주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작은 계명조차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은 큰 것에서도 충실하다. 그러나 작은 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큰 계명도 가볍게 여길 위험이 있다.”(Hom. in Matth. 16 요약)라고 경고한다. 작은 계명 안에도 하늘 나라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역시 이와 일치한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계명을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랑 안에서 계명을 지켜야 한다.”(40, 42항 참조)
율법은 억압을 위한 족쇄가 아니라, 사랑을 가르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외적 준수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내적 정신, 곧 사랑과 자비를 살아내라고 하신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작은 계명 안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작은 친절, 작은 희생, 작은 순종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성 베네딕토 규칙서의 첫머리에서 말하듯, “작은 시작이라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점차 완전함에 이른다.”(Prol. RB 요약) 우리는 작은 계명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작은 계명도 하느님 나라를 담고 있기에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교부들은 작은 것의 충실함이 큰 것의 충실로 이어진다고 가르쳤다. 교회의 가르침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1) 여기서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려고(또는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서 완성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망치고 있다고 오해했고, 유대교 중심의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오해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에는, “유대교를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 것은, 겉으로만 철저한 것, 즉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바로 그 위선이 유대교를 망친 주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철저하셨던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성전 정화’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요한 2,13-17).”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사제들에게는, ‘파스카 축제’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를 잘 지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또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제사용품들을 판매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위선이 파스카 축제를 망치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에게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거나 그저 몇 마디 말로 비판하는 것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충 적당히 넘어가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에서 보여주신 그 열정과 철저함과 단호함은 파스카 축제 실행과 하느님의 뜻 실천을 완성시키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위선자들은 눈에 보이는 십일조는 잘 냈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위선자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을 나누고, 작은 것은 무시하면서 안 지킵니다.
19절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들과 율법들 가운데 하나라도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분류해서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로마 3,21ㄱ.22).”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7-28).”
율법주의자들은(위선자들은) 외적인 율법 준수만 강조하다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자들이고, 하느님 없이 율법만 지키다가 하느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서 율법 실천의 완성에, 즉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구원의 완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생명의 빛’입니다(요한 12,46).
내가 사는 이유는 하느님 뜻을 하나라도 완성하는 것이다.<마태 5/14-19>6월10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은 땅이 없이는 허공이고 땅은 하늘 없이는 지붕없는 집과 같습니다. 하느님 저를 통해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고 저는 하느님 뜻을 받들어 땅위에 온갖 생명이 살아 성장하고 열매 맺게 합니다.
그럼으로 믿음 희망 사랑의 뜻을 받아 실천하며 사는 것 하늘과 땅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믿음으로 하느님 뜻 찾고 희망으로 목표를 정하고 사랑으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 나는 율법이나 예언들을 페하려 오시지 않고 완성하려 왔다.” 하심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며 완성자로 살아야 바르고 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성경을 모르고 살았지만 천자문을 통해 하늘과 땅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삼강오룬을 통해 인간의 바른 삶을 살고 사람 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성경안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이 바른 삶의 목표입니다. 사람은 말로만 배우는 것 아니고 보고 들으므로 참 삶을 배워 익히고 각자의 양심안에 사는 길을 찾아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진 선 미의 길을 알고 살려고 살아 왔습니다. 믿음만이 진실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 아니고 사람 다웁게 살려면 양심을 따라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게 합니다.믿음은 이모든 삶을 분명하고 확살하게 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은 본능 적으로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 없이 땅이 없고 땅이 없는 하늘도 존재 의미를 상실합니다. 주님을 믿는 것 지붕 밑에 사는 삶이며 자유와 평화와 기쁨의 원천입니다. 성경을 펴들고 하 마디 한 말씀 속에 선을 행하도록 이끌고 주님 말씀 따라 살고 그 뜻을 이루어 사는 것 모든이의 행복입니다. 하늘과 땅이 있듯이 땅에 사는 우리는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것 참 삶입니다.
아침 일어나 성경구절 볼 때 마다 성령의 풍요로움을 느끼고 깨우쳐 주심을 감사하며 읽으며 놀라게 합니다. 율법이나 예언자의 말씀 하나라도 익히고 실천하려면 성경 들고@ 보는 시간이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성경 보며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바른 양심의 삶을 살게 되고 행복한 하루를 시작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마음에 색이고 행복한 하루 시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자 율법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 속에 담긴 정신은 잊힌 채, 규정으로서의 의무와 책임만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종살이를 끝내주셨으나, 그들은 스스로 율법에 얽매인 종살이를 다시 시작한 셈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에 짓눌리지 않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제인 제가 미사를 마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봉헌하지 않는다면, 미사는 거룩한 제사가 아닌 고단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우들 또한 쉬고 싶은 마음을 안고서 그저 의무감으로 주일 미사에 참례한다면, 그 시간은 기쁨이 아닌 고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될 뿐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이제는 형식적인 준수를 넘어 마음을 다해 말씀을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실천의 여정 안에서 하느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을 맛보시길 희망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보통 ‘예수님’하면 율법에 얽매이거나 허례허식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떠올립니다. 그건 그 당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정결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죄인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자기들을 옭아매어 힘들게 만드는 율법이라는 ‘멍에’를 없애주러 오신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시니,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건 율법조항의 가짓 수를 늘리거나, 율법을 적용하는 원칙을 더 엄격하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율법을 왜 주셨는지 그 ‘이유’와 ‘뜻’을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을 그저 ‘글자 그대로’ 지키는데에만 연연함으로써,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괴롭고 부담스러운 ‘족쇄’처럼 여겨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타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딱딱한 글자로 새겨진 율법의 차가운 정의에,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 융통성을 부여함으로써 율법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율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뜻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금지하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건 그들이 당신께서 바라시는대로 올바른 길을 잘 걸음으로써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율법 역시 사람들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족쇄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살도록 격려하는 ‘원동력’이자, 그들이 하느님 나라까지 무사히 다다르도록 이끄는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어린 자녀가 첫 걸음마를 뗄 때 부모는 아기가 넘어진 횟수보다 걸음을 내딛은 숫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구원의 여정을 걷는 과정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져 죄를 지은 횟수보다, 우리가 당신 나라를 향해 몇 발이나 내딛었는지 그 걸음수를,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 거리를 보시지요. 그러니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계명과 율법을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무기’로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생각하며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완벽에 덧칠하는 사람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하루도 또 잘 지내셨죠?
오늘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뒤흔드는 아주 엄중한 선언을 하십니다."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조차 자기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조작하는 아주 위험한 풍조에 빠져 있습니다. 귀에 쓴 약은 뱉고 달콤한 사탕만 삼키려는 것이죠. 많은 이들이 고해소 안팎에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신부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지옥 이야기를 하십니까?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설마 사람을 그런 곳에 던지시겠어요? 지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팍팍한 세상에 십일조가 웬 말입니까? 마음이 중요하지 꼭 물질을 바쳐야 하나요? 화가 날 때는 참지 말고 터뜨려야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하는 가짜 복음의 실체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하느님의 법을 교묘하게 지워버리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판관이 되어 하느님의 법을 재판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조작 성향이 초래하는 영적 파국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문학적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입니다. 독재를 권력을 잡은 돼지들은 자신들의 편의와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동물들이 처음에 피로 써 내렸던 위대한 칠계명을 하나씩 교묘하게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어기고 자기들이 침대에서 자고 싶어지자, 밤중에 슬그머니 글자 몇 개를 덧붙여 고칩니다.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라고 말이죠. 술을 마시고 싶어지자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 뒤에 "지나치게"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도달한 최종 수정안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기괴한 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글자 한두 개를 고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타협과 조작이 결국 농장 전체를 처참한 노예 지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 영혼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 화는 내도 되겠지.", "이 정도 십일조는 안 바쳐도 하느님이 봐주시겠지."라며 한 자 한 획을 고치기 시작하면, 우리 영혼의 법전은 순식간에 사탄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완벽한 설계도에 인간의 속된 손을 댈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사건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바로 스페인 보르하 성당에서 일어난 예수님 벽화 복원 사건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고귀한 얼굴을 담은 19세기의 명작 『에체 호모』가 세월이 흘러 조금씩 떨어져 나가자, 히메네스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좋은 의도로 붓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직접 예쁘게 고쳐놓겠다는 생각이었죠. 결과가 어땠습니까?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원숭이를 닮은 우스꽝스러운 괴물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선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위대한 작품에 손을 대어 더 낫게 고칠 수 있다'는 무서운 교만이 명작을 처참하게 파괴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율법을 내 입맛대로 수정하려 드는 행위가 정확히 이와 같습니다. 자비라는 이름으로 지옥을 지우고, 형편이라는 이름으로 십일조를 빼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원숭이 모양으로 짓밟는 영적 히메네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율법은 단순한 규칙의 모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이자 사랑의 설계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는 아주 작은 점 하나처럼 보입니다. 획 하나가 삐져나오고 안 나오고에 따라 단어의 뜻이 '하느님'에서 '우상'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를 하느님의 완벽한 모상으로 빚어내기 위한 신성한 틀입니다. 이 틀을 내 육신의 편안함에 맞추기 위해 찌그러뜨리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닮은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조작하는 것은 하느님보다 내가 더 지혜롭다고 믿는 영적 교만이며, 스스로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혹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는 자로 낙인찍는 자해 행위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법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지키기 고통스러울지라도, 한 자 한 획도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게 순명하여 영원한 승리를 거둔 위대한 인간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성 토머스 모어입니다. 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교회의 결혼 인연을 전면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려 했을 때, 영국의 모든 권력자와 주교들까지 국왕의 뜻에 맞추어 교회의 법을 적당히 수정하고 타협했습니다. "왕의 결혼 하나 눈감아 준다고 나라가 망하겠느냐,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서약서에 서명 한 줄만 하면 만사가 편하다."라며 모두가 한 획을 지우고 타협의 붓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단 한 줄의 서약도, 단 한 자의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융통성 없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의 율법을 단 한 획도 조작하지 않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양심의 성인으로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신앙은 내 삶의 형편에 맞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편집하는 뷔페가 아닙니다. 율법의 완벽한 설계도에 내 핑계와 타협이라는 인간의 가짜 붓칠을 더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침몰할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해서 자주 넘어지고 다 지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릴지언정, 말씀의 한 자 한 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님, 제가 부족하지만 이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하고 처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 순명과 경외심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완전한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안아 주실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 하나 정리를 못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도 주님께서는
미완성의 자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삶을
일깨워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결코 형식과 구분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치라도
실제 우리의 삶에서
구현되지 못한다면
불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율법의 참뜻을
완성하셨습니다.
계명에 머물면
울법이지만,
사랑이 되면
완성입니다.
더 많은 규칙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율법의 형식에 갇힌
우리들을
다시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마음의 중심이 되면
계명은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삶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됩니다.
미완성의 자리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이끄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참된 완성은
날마다 사랑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어느 자매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전의 젊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도 많이 늙었네요.”
무엇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요? 자매님의 삶일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자매를 거의 30년 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50대 초반이었던 자매님은 80대 할머니가 된 것이고, 저는 20대의 풋풋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50대 중년이 되어 만난 것입니다.
자매님을 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그 흐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 바뀌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이기시고 또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큰 착각은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구약 시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해방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억압과 구속하는 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팽배했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정신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좋은 사람을 보면 그를 본보기로 삼아 모방하려 노력하고, 나쁜 사람을 보면 내게도 그런 흠이 있나 찾아보라(공자).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과 헌신은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골에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도시에서 사무직에 종사할 때는 조금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종이나 씨앗을 뿌리면서, 잡초를 뽑거나 예초기를 돌리면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니, 그 안에 얼마나 ‘작은 것들’ ‘소중한 생명’들이 숨어있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물웅덩이에는 벌써 뭔지 모를 작은 알들이 우글우글 거립니다. 적당히 부드러워진 땅속에는 새끼 지렁이들이 꿈틀꿈틀 댑니다.
이웃 밭과의 경계선으로 심어놓은 나무 가지 마다에는 수많은 작은 꽃들이 보송보송 매달립니다. 바닥에는 아주 작은 노란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오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작은 것’들의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만 타고 다닐 때는, 흙을 손에 묻히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할 눈부신 광경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개발 논리, 속도전에 젖어 살아와서 그런지 너무 큰 것, 빠른 것, 대단한 것, 뛰어난 것, 앞서 가는 것만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 평범한 것, 소박한 것, 가족적인 것, 일상적인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신앙생활 안에도 많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 안에서도 뭔가 대단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특별한 분위기만 선호합니다. 말씀 좋고 ‘기도빨’ 세다는 곳만 순례합니다.
본당이나 단체들 강의를 다니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특강은 한 번씩 분위기를 바꿔주는 외식이나 간식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명강사라 할지라도 반짝 한번 왔다 가는 것입니다. 특강 한번 듣는다고 뭐가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 간식이나 외식이 아닌 주식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일의 미사입니다. 매일의 아침 저녁기도, 이것 역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매일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기도, 습관처럼 드리는 묵주기도, 수시로 바치는 화살기도, 매일의 꾸준한 작은 봉헌, 일상적인 십가가의 수용, 이런 것들이 사실 신앙의 기본이자 근간입니다.
여기저기 특별한 곳, 대단한 곳, 신기한 곳, 줄기차게 찾아 다녀봐야 그 끝은 언제나 허탈함이며 공허함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작은 것, 일상적인 것들을 중요시 여기고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그러자 나타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러자 필립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보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타나엘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 하나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보다 더 큰일을 하실 수 있다.
2달 전쯤에 봉사자 한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본당에서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해서 성령의 밤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댈러스에서 그게 가능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한번 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성령 기도회를 보았습니다. 지구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당 차원에서 성령 기도회를 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봉사자는 찬양 팀을 만들었고, 악기 봉사자들로 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찬양 팀의 이름을 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라우다떼(찬양하다)’로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었고, 봉사자는 찬양 팀과 음악 밴드와 함께 멋진 찬양의 밤을 신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댈러스에 뭐 대단한 게 있을까?’라는 저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찬양의 밤을 마치고 저는 봉사자에게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앞으로 찬양 팀과 음악 밴드가 함께하여 ‘음악 피정’을 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는 450명이 넘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바알의 예언자들이 엘리야를 이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알의 예언자를 물리치시고,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골리앗은 큰 칼과 갑옷을 입었습니다. 다윗은 볼이 불그스레한 청년이었습니다. 손에는 돌팔매만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처럼 배움이 많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처럼 하느님의 계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부들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갈릴래아의 어부들과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비록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교회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교회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역사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다만 그러하게 하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불신에는
이유가 있고
믿음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믿음일 때까지
다만 믿게 하소서
절망에는
이유가 있고
희망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희망일 때까지
다만 희망하게 하소서
증오에는
이유가 있고
사랑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사랑일 때까지
다만 사랑하게 하소서
거짓에는
이유가 있고
참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참일 때까지
다만 참되게 하소서
악에는
이유가 있고
선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선일 때까지
다만 선하게 하소서
추함에는
이유가 있고
아름다움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아름다움일 때까지
다만 아름답게 하소서
죽임에는
이유가 있고
살림에는
이유가 없으니
온 누리
살림일 때까지
다만 살리게 하소서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 시대에 당시의 율법학자들에게 율법의 의미는 수천 개의 규례와 규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그저 지키는 데에 급급한 형태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율법의 규정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겼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법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법을 통해서 참된 방향이 제시되어지고 그로 인해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고 집고 넘어가야 하는 그 법이 지향하는 것은 구원이 되어야 하는 데 구속이 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역사 안에서도 그렇게 법을 이용하여 사람을 통제하거나 구속하고, 법망을 피해서 온갖 비리를 추구하는 모습들이 종종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법의 완성은 사람의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안에서 율법의 참된 완성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법 위에 사랑이 있어서 그 사랑으로 모두가 어우러지는 세상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세상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천국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에수님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율법 혹은 예언서를 폐지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즉 종교 지도자들이지요. 그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율법을 페지하고 자신들이 많든 규칙을 사람들이 지키게 하였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요. 이러한 말씀을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이유는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을 위해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 고민으로 시작해야 올바른 신앙인으로 성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바쁜 하루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
자연과 언어 사이에 있는 간극 곧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우리는 쉽게 감지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은 연속성,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지는 상태나 성질을 늘 함유하고 있지만, 이를 표현하는 언어는 불연속성, 분절성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과 언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처럼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핵심인 율법과 예언의 정신은 신약에도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동시에 신약에 와서 불연속성도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까닭은 구약의 율법은 낡고 화석화된 언어라면, 신약의 복음은 살아있는 자연 곧 생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하고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는 구약의 핵심인 율법과 예언의 근본이자 본질인 ‘사람과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충실한 계약 곧 자비와 사랑은 변할 수 없기에 이어지겠지만, 본래의 의도와 정신이 사라진 채 율법주의적인 문자는 파기하시겠다는 의도를 표명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셔서 율법과 예언을 통해 하느님 당신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셨지만, 세상과 사람은 당신의 뜻을 거역했기에 마침내 당신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 구원계획을 완성 곧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율법은 한계를 지닌 인간의 언어, 불연속성이라면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 곧 예수님의 존재와 삶 자체이기에 단절과 분절이 아닌 영속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사랑으로 사람이 되신 당신의 강생과 당신의 파스카로 말미암아 세상과 사람의 구원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완성은 율법 준수, 문자라는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실천에 있지 않고, 율법의 근본인 하느님의 모상적 존재인 사람을 구원하고 사랑하는 일, 곧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13,10)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13,34)하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의 실행이 곧 완성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매개이며 본질입니다.
사실 율법이 필요한 때가 있었죠. 사도 바오로는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갈3,24)하고 가르치면서도, 아울러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로3,20)하고 선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5,19)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23,4)하고 말씀하신 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던 율법 학자들처럼 ‘입술’로만 살지 말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의 삶을 살라고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5,19)하고 확언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존재의 크기는 바로 율법과 복음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존재와 삶으로 실행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중심은 사람이며,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달려 있기에 무엇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유효한 까닭은 바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영속성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이를 예수님은 당신 존재와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고 그 흔적을 따라 성령과 함께 뒤따라오기를 지금도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25,4)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구약의 신법은 한 자 한 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늘 법인 신법을 더욱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 받으려면 십계명을 잘 지키라는 말씀이죠.
하늘에서 가징 시시한 사람대접과 큰사람대접 차이가 준법정신 이죠.
바로 모세를 통해 내린 십계명은 절대 변치 않는다는 하느님 가르침.
이는 종말까지 확실히 지켜야하고 이를 하나도 어기지 말라하셨어요.
더구나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요약해서 기도형식으로 가르쳐 주셨죠.
인간사는 방법에 대해 하느님이 제대로 설정해주신 점에 감탄합니다.
가톨릭알림 말: 십계명과 주님의 기도대로 살면 내세에 큰사람 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점을 하나를 들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를 들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과 구별 짓게 하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하시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복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계명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선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고, 그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그리고 내일 우리가 기념하게 될,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는 일입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사랑의 원의’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를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지키고 가르치며,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닌 행실로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들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십일조와 같은 계명들을 소홀히 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십일조가 구원의 핵심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며 구원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지만 닿으려고 해서는 작은 계명들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 참사(1986)를 생각해봅시다.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 씰 때문에 비행 73초 만에 부서져 탑승한 우주비행사 7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저온에서의 O-링 성능에 대한 공학자들의 경고를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작은 것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집에 못 가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타닉 침몰(1912)도 그렇습니다. 선박은 여러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지만 고속으로 계속 주행했습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강철 리벳의 품질이 표준 이하여서 충돌 시 선체가 더 쉽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치로 인해 ‘가라앉을 수 없는’ 선박이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고 이에 따라 1,5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목적지가 하늘나라여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계명들을 무시하다가 결국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이루어 낼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부자들이 해 놓은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영국에 “펜스를 관리하면 파운드가 스스로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Take care of the pence, and the pound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란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잘 관리하면 큰 돈은 저절로 관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승호 회장도 “자식(동전)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모(지폐)가 잘해줄 리 없다.”라고 말합니다. 김승호 회장이 자신의 회사 앞의 노숙자에게 지폐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놀라서 지폐와 큰 동전들만 가지고 작은 동전들은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동전들을 주워서 회사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작은 돈에 충실한 자신을 보며 큰돈들이 들어올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들이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그냥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커다란 부를 이루어내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계명을 지키게 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잔 다르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려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이 ‘세심증’을 겪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성인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사제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전사, 사제,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작은 존재여, 나는 선지자들과 박사들처럼 영혼들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온 땅을 여행하여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모든 땅의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소명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만 살았음에도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더 하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는 목적, 곧 위대한 성인·성녀가 되는 사명으로 살아갑시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우리가 어렵게 살던 때에는, 제사를 올릴 음식마저 제대로 마련할 여유가 없어서, 그야말로 정화수 한 잔 떠 놓고, 조상님께 예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차마 마땅히 올려야 할 제사상마저 차릴 수 없는 형편에는, 마음만으로도 정성을 바쳐 목욕 재개하고 정화수를 올렸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에서 그런 영상을 보게 되면, 지금도 손을 모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 열왕기 상권 18장 20절부터 39절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누가 진정 사람들에게 비를 내려주고, 농사를 잘 짓게 해주는 하느님인가를 시험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시합을 합니다. 바알 예언자들은 하루 종일 기도해도, 불도 비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삼년이나 기근이 든 상태에서, 황소를 제삿상에 올려놓고는, 설사 불이 내려와도 사그라지고 말 정도로, 물을 잔뜩 부어 마치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습니다. 번제물이 타오르게 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오로지 믿음만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그 옆 도랑의 물마저 다 말라버릴 정도로 태우고 난 후,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누가 진정 능력 있는 하느님인가를 드러내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어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19절)라고 하심으로써, 마음으로 올곧고 진실하며 성실하게 주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어, 주 하느님을 바라보고, 현실에서 주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 우리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갑시다.
꽃은 열매를 맺고 결실은 거두어야 한다.< 마태 5/17-19>6/12.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봄에 온천지에 핀 꽃들은 결실을 맺으려면 암술이 숫 수술을 만나고 온갖 영양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벌이나 나비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오시어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하느님 뜻을 완성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사건은 세상에 시작한 모든일을 직접 오시어 완성하시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완성이 길에 “시작이 반이다.”란 뜻과같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두어들이지 못합니다. 아니 결실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완성을 위하여 시간이필요하지만 어느 세 시간이지나 어렵고 힘들다는 일들이 이루어져 누리고 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일이 눈앞에 노여 있고 그 해택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율법의 완성을 위하여 오시었다고 하시며 율법의완성은 사랑이이라 하십니다. 묵상을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랑없이는 아무도 자유와 평회와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힘있게 달리는 기차도 철로가 없으면 달리지못하고 아무리 철로를 잘 노아도 힘이있는 기차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손벽도 마주 처야 소리가 나고 영장이 있어야 바위가 조각품으로 남듯이 우리는 너와 내가 서로 합치하여야 뜻을 일치하여야 결실이 나옵니다. 정치도 여야가 있어야 안전과 발전이 있지만 내가힘이 있다고 독주하면 된일도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어떤 공동체도 하나의 법이 있어 질서를 짜라 진선미가 발전하지만 법이없고 법을 무시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제대로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무질서 부정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가 불완전한 공동체에 불완전하게 사는 것은 사랑이 없는 곳에 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영원한 존재로 존재하는 힘은 성부성자성령이 사랑으로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 되어 많은 결실을 맺으며 살려면 율밥의 완서인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가정안에 모든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보여주고 증명해주지 않으면 따라오는 아이들이 사랑을 모르고 형제간에 사랑 없이 살고 후에 가장을 이루어도 사랑없어 쉽게 이혼의 길을 하게됩니다. 교육 중에 가장 필요한 교육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온전이 내어주는 삶입니다. 70년을 이 수도자로 살 수 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아멘. 하고 산 힘이었습니다.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이루고 살 때 율법을 사랑하며 완성됩니다.
각자 안에 율법이 살아있어 원성되기를 기도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격언은 진리라고 하기에 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늘 힘이 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머리로 아는 것을 제대로 활용할 때 나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힘이 됩니다. 스스로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스스로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음을 알면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머리로 알고만 있으면 그 앎이 나에게 오히려 병이 됩니다. ‘이걸 빨리 채워야 하는데’, ‘이걸 빨리 고쳐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마음의 짐이 되고 죄책감이 되며 나중엔 이상과 현실 사이의 큰 괴리감 때문에 절망과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율법이나 예언서의 완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물론 예언서들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613개나 되는 수많은 율법 규정들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해서 그 어려움을 핑계로 제대로 실천도 해보려 하지 않고 이런 저런 단점들을 들먹이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는건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도 아닙니다. 예언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가는 올바른 길로 이끄시려고 당신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주신 안내 메시지입니다. 또한 계명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불안함이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당신 사랑에만 집중하며 기쁘게 살 수 있게 하시려고 건네주신 이정표이지요. 그런데 그 계명을 더 완벽하게 지키겠다는 열의로 만든 수많은 율법 규정이 그 근본 정신을 가려버렸습니다. 수백 가지나 되는 조항들 하나 하나를 글자 그대로 지키기에도 버거워 정작 하느님 사랑 안에 제대로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십니다.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는, 그래서 나태함과 게으름에 쉽게 빠지는 우리는, 하기 싫거나 어려운 것이 있으면 단점을 찾아내고 핑계를 대며 그것을 아예 안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만, 그래서는 우리 삶에 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지 않고 ‘완성’하겠다고 하십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 완전하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자비에서 우러나는 융통성으로 경직되어 있는 법과 규정을 보완하듯, 당신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율법의 부족함을 채우심으로써 사람들이 그 율법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정확히 말하면 마지못해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말씀과 계명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경외심으로 기꺼이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 숨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참된 기쁨을 누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섭리를 알아봄으로써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굳은 확신 속에서 참된 행복까지 함께 누리게 되지요. 그러니 하느님 말씀과 계명을 스스로 지키는 ‘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제도의 완성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예전 학교에서는 널찍한 책상 하나를 두 학생이 나누어 썼습니다. 기다란 책상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하기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새 학년이 되면 새 짝꿍을 만나고 새로운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모든 학생이 책상 가운데 줄을 긋게 됩니다.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지지 않아도 자기 영역을 가지려는 인간의 본능이 발휘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혹은 다른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하니까 서로 합의된 중간선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만들어놓은 이 규칙이 나중에는 두 사람이 싸우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자는 의미였으나, 나중에는 불필요한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율법은 하느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단죄하고 옭아매는 도구로 전락하였습니다. 본래의 취지가 훼손되면 다시 그 의미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교회에도 여러 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제도가 그렇듯, 교회의 제도도 그 자체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제도에 너무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면, 자칫 신앙생활이 경직될 수 있습니다. 제도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나약하고 허술한 인간 제도를 완성시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완성의 가르침을
만남과 만남
관계와
관계에서
배우는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완성이 있습니다.
피어나고
거두어들이시는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무수히 반복되는
쓰러짐과 일어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십자가의 지혜를
배우는 낮아짐의
여정입니다.
낮아짐의 여정을
감내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계명
완성하러 오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속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완성되는
더 큰 가르침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가르침의 완성을
주님 친히
몸과 피가 되어
오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만납니다.
일치가 완성을
이끌고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사랑은 오히려
십자가뿐입니다.
폐지와 완성의
이론적인 구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이 길에서
더 큰 가르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모든 구원의
완성입니다.
회개와 용서로
우리의 죄까지
지워주시는
완성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실천을 하고
있는 지를
스스로 묻는
시간입니다.
완성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힘찬
발걸음과 함께
새 날을 시작합니다.
신부가 되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선배 신부님께서 저를 자기 본당에서 특강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담되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신자들 앞에서 특강을 합니까?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너를 위한 거야.”
당시에는 만만한 후배라고 부려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초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진짜로 저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남을 가르침으로 인해 자기 공부가 됩니다. 저 역시 많은 강의를 통해 제 생각들을 정리하고 제 안에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었던 울렁증 같은 증세도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계속 똑같은 강의를 할 수 없으니, 쉬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만해서 부려 먹은 것이 아니라, 저를 성장시켜 주신 귀한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로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해주셨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지요.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셔서 진정한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율법은 그 모든 권위를 계속해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우리는 모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은 율법은 주님의 권위를 받아서 세상에서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만약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안식일만 강조할 것이고 겉으로 보여주는 예식만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새로운 모습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알베르 까뮈).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잡신 문화와 우상숭배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알 예언자들의 무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헛된 신을 믿고, 그 신을 불러내느라 안간힘을 다하며 쌩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가련함을 넘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번제물로 준비한 황소 앞에 조잡한 제단을 쌓습니다.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목청이 터져라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이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응답도 없자 바알 예언자들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끔찍하고 기괴합니다.
다들 다리가 성한 예언자들이었는데, 일부러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 주변을 돌았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바알 신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차원에서 그랬는지, 아무튼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연출합니다.
멀쩡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칼과 창으로 찔러댔습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바알 신을 불러내느라 생쑈를 다하는 예언자들이 모습이 가련하기까지 합니다.
바알 예언자들의 기괴하고 유치한 행동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잡신 문화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 역시 입으로는 유일무이하신 하느님, 천주의 창조주, 절대자이신 하느님만 흠숭한다면서 실제로는 다양한 잡신과 우상에 빠지고, 그에 의지해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물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잡신에 의지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길일이요 매일이 축복과 구원의 날입니다. 따라서 아무 날이나 이사를 가도 되는데, 굳이 거금을 주고 이삿날을 정하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머무는 그곳이 하느님의 성전이요 명당입니다.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님 모실 명당을 찾아서 전국 산천을 돌아다닐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오로지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며 최선을 다해 몰입하는가에 따라 우리 미래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자녀가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어야 하는지 점집을 찾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은 이제 주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손길 안에 온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가엾이 여기시며 당신 따뜻한 품에 꼭 안고 계십니다.
따라서 남아있는 분들이 고인들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채 못 다한 사랑의 실천을 대신 채워드리는 것, 그것이 고인을 향한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1932년 LA 올림픽 때 이반 펠레 선수는 뜀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저건 나도 하겠다’라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의 양학선 선수의 모습을 보면 가히 신기할 정도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면 이반 펠레 선수는 연습을 게을리했던 것일까요? 그는 그 해 올림픽의 2관왕이었습니다.
1908년에는 남자 다이빙 경기에서 공중 2회전이 금지되었습니다. 너무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10살만 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시에는 그런 기술들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 대단한 존재인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못 한다고 믿으면 못 하고, 한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만들어준 분에게서 옵니다. 이 지상에서 나를 만들어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기지도 못할 때부터 이미 우리를 향한 꿈을 꾸고 계십니다.
피카소의 어머니는 피카소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군인이라면 장군이 될 것이다. 사제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나는 화가이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피카소가 무엇일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명품이 될 것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모님의 기대, 부모님의 믿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기대라고 하면 어떤 말로 바꿀 수 있을까요? ‘계명’, 곧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가 목적이 아닙니다. 계명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성장해주기를 바라서 내려주시는 규정들입니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새의 발만 수천 번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수천 번의 그림을 통해 새의 발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새의 발만 봐도 그 특징을 잡아내어 바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주시는 지시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넘어진 숫자보다 걸은 숫자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는 부모는 자녀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효도하고 싶다면 더 완전함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불완전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호락호락한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만드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최고의 작품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셨다면 최고의 걸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세리 선수를 쫓아다니던 아버지는 박세리 선수가 그냥저냥 한 선수가 되기를 바랐을까요? 김연아 선수를 쫓아다니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최고가 되기를 원하고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일점일획도 거스르지 않으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작품이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모습이 되어가려는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창의력’입니다.
미국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에서 연주자는 단 한 음도 연주하지 않습니다. 공연장의 소리로만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존 케이지는 음악이 듣는 것만이 아니라 행위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장에 존재하는 모든 소음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이런 짓을 했다면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음악가입니다. 음악가가 이런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은 최고라는 자존감입니다. 이미 최고이고 최고가 될 것이기에 자기 스스로 모든 과정을 시험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최고를 만듭니다.
모든 자수 성공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그렇게 성공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 두려움 없는 용기가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고 실제로 그들을 최고로 올려놓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정 회장은 우리나라가 한창 포항제철을 밀어주고 있을 때 그 철을 이용해 커다란 배를 만들어 팔면 이윤이 많이 남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기술, 돈, 수요였습니다. 배를 만들 기술도 없었고 조선소를 지을 돈도 없었으며 당연히 배를 사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루어 냈습니다. 우선 기술부터 자문받아야 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영국의 조선 기술 기업 ‘애플도어’의 회장이었습니다. 이제 기술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소를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애플도어 회장은 ‘버클레이 은행’을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라 했습니다.
정 회장은 조선소를 지을 백사장이 찍힌 사진만 들고 무작정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정 회장은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1,500년도부터 이런 배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1800년도부터지만 우리가 쇄국정책을 해서 그렇지 그 기술은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버클레이 은행 사장은 웃으며 추천서를 써 줍니다.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우선 돈을 빌려줄 때 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수출보증기구에서는 조선소를 지어도 배를 살 사람이 없으면 차관을 갚을 수가 없으니 수주계약을 먼저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정 회장은 너무 당연하고 합리적인 말이어서 조선소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을 들고 배를 살 사람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정 회장처럼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 해운업자 선박왕의 처남 ‘리바노스’였습니다. 그는 26만 톤 두 척을 현대에 주문했습니다. 이 주문서를 수출보증기구에 알렸고 차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돈과 기술력으로 5년 뒤에 전달할 선박을 2년 6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기업에는 어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창의성을 발휘하게 했고 그 창의성이 결국 성공에 다다르게 한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유일의 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뜻, 곧 계명만 잘 따르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 꾸시는 꿈을 반드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참 효도의 길은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러기를 바라는 이의 율법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결심이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창의력도 뛰어납니다. 믿는 대로 되는 과정에 창의력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같은 기대를 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빗자루질하더라도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처럼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계명은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빗자루질하던, 요리하던, 봉사하던 그곳에서 최고가 될 것을 결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미 그러한 결심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에 보답하는 일은 그분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아주 작은 그분의 계명까지 꼭 지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6년입니다. 당시 캐나다에서 영화 ‘300’을 보았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가 수백만의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 용맹한 군사가 왕을 중심으로 단결하였고, 페르시아 군이 들어오려는 길목을 장악했습니다. 페르시아 군은 여러 번 공격했지만 실패하였고, 스파르타 군의 용맹함에 고무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싸움은 숫자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잘 훈련된 군사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군사를 하나로 묶어줄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수나라의 군대를 맞이해서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화해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수나라는 자신들의 수와 힘을 믿고 계속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적은 군사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강을 둑으로 만든 뒤 수나라 군대가 강으로 들어오면 둑을 열어서 공격하는 수공을 펼쳤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살수대첩’입니다. 맞습니다. 싸움은 숫자와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야 예언자만 남았습니다. 바알에는 450명이 넘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누구의 신이 강한지 증명하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나무로 제단을 쌓고 소를 바치는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도 나무로 제단을 쌓고 소를 바치는 것입니다. 강한 하느님께서 먼저 제단을 불사르고 제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450명이라는 숫자를 믿고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리고 제단 주위를 돌면서 바알의 신에게 청하였지만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가득 부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친 황소를 제물로 받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이었습니다.
2022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러시아는 엄청난 군사와 화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였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3일이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5달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러시아의 군인과 국민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서 군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에는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이 있었습니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를 도와줄 그리스 연합군이 있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에게는 자유와 민주를 수호하려는 이웃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이웃국가들은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이번 전쟁의 부당함을 이야기하였고, 평화적으로 전쟁이 마무리 될 수 있도록 호소하였습니다. 이미 세상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힘 있는 강자가 약한 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전쟁도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고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본당 사목도 비슷합니다. 신자수가 많고, 공동체의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성당도 있습니다. 본당신부와 보좌신부가 있어서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사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미사 시간을 정하는 것도, 친교를 나누는 것도 미국 본당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 신자 수가 작기에 사제를 모시는 것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랑이 넘치는, 친교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의 공동체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작은 공동체이기에 매주 친교를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 작은 공동체이기에 장례가 나면 모두가 와서 연도를 합니다. 작은 공동체이기에 모두가 빠지지 않고 전례에 참석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에 대한 열정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랑하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다만 사랑하라
스스로를
벗들을
모든 이를
다만 사랑하라
더 깊게
더 넓게
더 오롯하게
다만 사랑하라
까닭 없어도
아낌없이
주저하지 말고
다만 사랑하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다음은 오늘 매일미사 전례의 본기도이다.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오늘도 하루종일 하느님과 함께 했다. 나는 하느님께서 어디계신가 하고 찾아 나섰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헐벗고 비천한 사람들, 죄인들 속에 숨어 계셨다. 나는 예수님께서 나그네 살이하는 사람들 속에 계셨는데, 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는 숨어계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분이 아니고 완성하러 오신 분' 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함으로 숨어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찾게 해주셨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심을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하도록 도와 주셨다. 머리로성 자의적인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 가슴으로 율법의 완성이 이루어짐을 알려주셨다. 하루가 기쁘게 지나간다.
<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완성은 단순히 그것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웃을 만났을 때 율법의 조항 중에 정결례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 죽어가는 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여관에 맡겨주면서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차원에서 율법의 완성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복음적인 삶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단순히 율법만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율법을 넘어서 그 율법 이전의 본질적인 삶, 곧 사랑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때로는 복음적인 삶이 아닌 율법적인 삶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저 교회의 의무를 지키고 성당에 다니는 것만으로 자기 안위를 삼는다면 우리는 율법적인 삶에 머무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기본적으로 교회의 의무도 지키지만 나아가 일상의 삶 속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참된 사랑을 전하는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우리는 고통에서 구원을 청합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고통중의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히브 13,5)
나의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속에서도 우리를 구해 주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당신의 계명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당신의 규정은 우리의 갈 길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율법의 완성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고통과 근심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하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하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당시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사이들의 가르침과 다르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예수님을 향해서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라고 말을 했던 것일까요.
먼저 여기에서 나오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입니다. 즉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율법인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시의 율법과 예수님의 시대에서의 율법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그대로이지만 예수님의 시대에서는 하느님께서 손수 알려주신 그 율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사람들이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정신인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당시의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계명을 폐지가 아닌 완성하시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계명이 미완성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지요. 하지만 이는 미완성의 개념이 아니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는 일이 없기를 강조하십니다. 즉 율법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율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 자신에 맞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것은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폐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은 먼저 나 자신이 지키는 것이고 후에 말과 함께 삶으로써 실천한다면 그 자체가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자체가 예언서들을 완성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분을 믿고 그분의 삶을 따라 살아 가는 우리들 역시 완성하는 일에 참여라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셨다. 그리고 파스카 신비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계명도 하늘나라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님의 전사.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시편16,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바로 마음에 와닿은 시편 화답송 두 구절입니다. 이래야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제가 강론시 가장 애용했던 말마디는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영적전쟁이고 우리 수도자들은 예외없이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살아있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전사, 기도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비단 수도자만이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전사이고,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이, 교회의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전우애戰友愛와 학우애學友愛, 형제애兄弟愛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해왔습니다.
바로 주님의 전사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그 유명한 엘리야 예언자로, 구약의 에녹, 모세와 더불어 승천한 인물로 꼽히는 분입니다. 오늘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의 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참으로 사느냐 죽느냐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회전大會戰입니다.
주님의 전사이자 예언자인 엘리야 1명과 바알 예언자들 450명의 대결입니다. 1:450이니 분위기로 보면 바알 예언자들이 엘리야 예언자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전혀 주눅든 기색이 없고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을 촉구하는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그러나 백성은 눈치를 보노라 묵묵부답,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세상과 하느님께 양다리를 걸치고 사는 참으로 약하고 무지한 인간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온갖 노력을 다해도 바알의 반응이 없자 이들 바알 예언자들을 놀리는 여유만만의 엘리야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이어 등장하는 주님의 전사,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엘리야의 목숨을 건 절박한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기도는 이렇게 진실하고 간절하고 절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정말 목숨을 건 절박한 기도입니다. 문득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조치훈이, 목숨을 걸고 축구를 한다는 박지성이, 목숨을 걸고 책을 만든다는 박국용 미카엘 출판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바로 그 출판인이 급기야 생각해낸 제 졸저 제목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였습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온힘을 다해 영적전투에 임하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이래야 영육의 건강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마침내 하느님의 통쾌한 응답에 감복感服한 백성들의 고백입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엘리야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끝난 전투였지만 계속 이어질 엘리야 예언자의 평생전투입니다. 역시 죽어야 끝나는 우리의 영적전쟁입니다.
엘리야에 버금가는, 아니 엘리야를 훌쩍 뛰어넘는 주님의 전사가, 하늘나라의 전사, 사랑의 전사가 바로 오늘 복음의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역시 엘리야처럼 승천하심으로 빛나는 승리의 전사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사실 모든 율법이 사랑의 정신이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에 정말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율법은 물론 계명과 말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단호한 율법 사랑인지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느낌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단호하고 엄중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대로 율법사랑을 통해 표현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전율戰慄케 합니다. 참으로 어느 작은 계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참으로 사랑만이 어느 율법도 소홀함이 없이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수록 율법의 정신에 정통함으로 모든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마태복음의 여섯 대당명제를 통해 업그레이드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을 입증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사랑할 때 율법의 사랑 정신이 한눈에 보이고, 분별의 지혜도 생겨 율법의 사랑 정신 따라 사랑을 살게 되니 말 그대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하는 일들은 모두가 무죄이며 율법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경지를 드러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Ama et fac quod vis)”는 명언이 생각납니다. 공자의 나이 70 종심從心에 이르렀을 때,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라는 고백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나이 70을 넘으면 삶자체가 사랑이라 하는 모든 일이 사랑의 법도, 사랑의 율법, 사랑의 계명에 벗어나지 않았다는 고백인데, 70을 훌쩍 뛰어 넘은 제 자신을 부끄러이 뒤돌아 보게 하는 공자의 고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전사는 사랑의 전사입니다. 삶은 사랑의 학교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서 죽을 때까지 사랑을 배워야 하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학생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평생 전사, 사랑의 평생 학인입니다.
지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때 교황님은 깊고 감동적인 강론을 해주셨는데 주제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성령의 학교에 앉읍시다(Let us sit at the school the Holy Spirit)”, ‘성령의 학교’란 말마디가 참신했습니다. 새삼 사랑의 학교는 성령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사랑의 학교, 성령의 학교에서 주님께 예수성심의 사랑을 배우고 성령을 충만히 받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운전을 하다가 고속도로에서 과속측정 카메라가 나타날 때마다, '왜 이렇게 카메라가 많아?'하면서 브레이크를 밟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차량의 계기판에 과속을 가리키는 숫자가 나타내기에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가속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저 자신에게 자문해 봅니다. 그나마 그 카메라라도 없었다면, 또는 고속도로의 속도 제한을 지금 내가 달리고 있는 속도로 올려준다면, 내가 과속하지 않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어떤 때는 자신이 죄를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그냥 그렇게 무난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규정과 규범을 구체적으로 맞춰 보면, 자신이 그것을 다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렇고 보면, 규정과 규범은 나를 옭아매고 억죄는 사슬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켜 주는 보호막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형제들 사이에서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선의로 제정한 규칙들을 성실하고 충실히 지켜,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서를 향상하기로 합시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까지 시간과 방법이 필요하다. <마태 5, 17-19> 6월 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것의 시작은 미미하나 시간과 방법을 통해 자라고 완성되어 갑니다. 겨자씨가 땅에 들어가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각자의 마음에 심어져 싹이 트고 자라서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 자비롭게 되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거룩하게 되고, 하느님이 사랑으로 완성하신 것같이 사랑의 완성자가 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이 말씀으로 하느님을 닮게 되어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써 주님의 말씀이 더욱 빛나 하느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리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율법의 완성자로 왔다.” 하십니다. 주님은 시작한 일을 완성하시며 그 완성의 자리는 믿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수덕 신학의 기초는 완덕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첫째는 정화의 길. 둘째는 일치의 길, 셋째는 진실과 사랑의 완성입니다.
정화의 길을 가는 사람은 양심이 깨끗하고 처음 주신 율법과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령에 따라 사는데 선의 길을 악이 방해를 놓고 악으로 유인하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악으로 유인하는 욕망을 극복하고, 온갖 유혹에서 빠지지 않는 자유를 누리고, 악과 어울리지 않고 선을 행하는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일치는 양쪽이 깨끗하게 정회되어야 서로 일치의 길을 가게 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주는 삶은 깨끗한 마음, 가난한 마음, 순수한 마음, 일치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을 때 바로 듣고, 바로 깨닫고, 바로 말씀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 모든 말씀이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세상 끝날까지 남아있습니다. 보고 듣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고 하나 되게 살려고 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인 것처럼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진실과 사랑은 정화와 일치를 지속시켜주는 원동력입니다. 완성된 결실을 얻고 누리려면 진실과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완덕에 이른 사람은 코린토 전서 13장에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하나같이 실천하면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사랑의 절정을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것같이 십자 나무에 달린 주님의 몸과 같이 우리도 기도와 미사를 통해 봉헌되고 완성됩니다.
모든 씨앗은 하늘과 땅의 힘으로 자라고 성장해서 열매를 맺어 나무에서 익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되듯이 우리도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주님의 힘으로 기도 속에 성장하여 결실을 보도록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기 살아있으면서 양심 안에 심어놓은 하느님의 법을 생명의 말씀을 통해 자라도록 깨어 주님을 찾아 만나고 사랑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따먹고 또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규칙과 사랑은 늘 함께
김현 F.살레사오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율법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관계가 똑바로 서 있으면 행동은 알아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규칙은 다 이유가 있고 좋은 뜻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규칙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하지 마라!’ 하고 제한을 요구한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존중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처음에 간결했던 규칙은 시간이 흐르면서 많아졌고 정신보다 우선시되고 죄책감과 두려움을 가르치는 경직된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보호받고 있다는 은혜로움보단 자신을 비하하는 목록이 되었습니다. 노력해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제자는 규칙을 존중하지만 규칙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사랑에 대한 책임 때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규칙을 깨뜨릴 때가 있음도 압니다. 그것이 제자의 충실함입니다.
"(계명을)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기계나 컴퓨터 따위의 사용 방법이나 기능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을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물건을 새로 사면 일단 이 매뉴얼을 꼼꼼하게 읽어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다루어 망가질 일이 없고, 그것이 지닌 기능과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뉴얼'이 그 물건에 연관된 모든 내용들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사용할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땐 매뉴얼만 붙들고 있어서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먼저 사용한 선배들이나 전문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해야 합니다. 또한 직접 부딪혀 보고 실패를 경험해가며 적당한 응용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체득한 '노하우'는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보다 유연하게 대처하게 돕는 나만의 소중한 자산이 되지요.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직접 부딪혀 노하우를 찾는 것보다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적당한 정보를 찾아내는데에 더 익숙합니다. 궁금한게 있으면 일단 스마트폰부터 꺼냅니다. 예전엔 포털사이트에서 '문자'나 '사진'정도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유튜브'라는 만능도구가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궁금한 내용을 찾아보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까지 세세하게 다 알려줍니다. 압축된 정보 속에서 내가 필요로하는 내용만 쏙쏙 빼먹을 수 있는 겁니다. 그 영상을 올린 사람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맞는지, 그가 하는 말이 검증된 내용이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영상에 담긴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단시간 내에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그만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시, 연애, 취업, 관계, 삶의 의미와 가치 등 모든 것을 유튜브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유튜브라는 매뉴얼에 의지해 살다보니 고민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그 중요한 과정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제 멋대로, 자기 편한대로만 행동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이들만 점점 늘어나고 있지요.
더 큰 문제는 이런 '매뉴얼 지상주의'가 신앙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계명의 내용을 글자로는 아는데 그 계명이 왜 있는지 그 이유와 의미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의무를 안지키면 고해성사 받아야 하고 벌 받는다니까 일단 지키기는 하는데, 교회에서 그런 의무들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의무를 잘 지키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저 계명을 특별히 어기지만 않으면, 혹시 어기더라도 남들 눈에 드러나지만 않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계명에 담긴 이유와 의미에 대해 숙고하지 않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만 지키는 형식주의는 주님의 말씀과 뜻마저 구원이라는 결과를 내기 위한 일종의 '매뉴얼'로 여겨 정성과 마음이 결여된 '의무'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상태가 이쯤되면 계명의 본질인 '사랑'을 언급하는게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미 내가 구원에 이르는 '최단경로'를 찾아놓았는데,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하지마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어 놓았는데, 굳이 본질과 정신을, 이유와 의미를 들먹여가며 '그것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부담을 주는게 귀찮고 싫은 겁니다. 하지만 '매뉴얼'은 어디까지나 '매뉴얼'일 뿐입니다. 본질과 정신이 빠진 글자 그대로의 계명실천, 더 잘하려는 정성과 노력 없이 그저 어기지만 않으면 되는 최소한의 율법 준수에 머물러서는 하느님 나라 입구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려면 '주일미사에 빠진 죄'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이외에, 사랑과 정성이 부족해서 저지른 나의 실수와 잘못들을 찾아낼 수 있는 '깨어있는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적극적인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생명이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율법과 예언서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생활의 길이
올바르면
우리들 삶도
올바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올바른 생활의
질서는 모순된
우리의 삶까지
치유한다.
사랑이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아프게
진단하신다.
자발적인 참여와
올바른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사랑의
성숙으로
사랑을
성화시켜
나가야 한다.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삶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꼭 필요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의 정신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계명의
깨어있는 삶이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이 여정도
중요하다.
율법과 예언서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을
사랑으로
들어 높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은
생활의 질서가
필요하다.
공동체는
이 사랑의 생명이
모여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생활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여정을 통해
인격을 폐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시는
분임을
깨닫게된다.
공동체와
개인 모두를
살리는
사랑의 정신이다.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다.
완성을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
어느 형제님으로부터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예측을 합니다. 경제, 정치, 문화……. 그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예측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번 본 것을 가지고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을까요? 선거 때 보면 선거 전에 여론 조사를 몇 차례 합니다. 예측을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단 한 번의 예측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정확한 예측만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며 말합니다. ‘너무 어려워.’, ‘안 될 거야.’, ‘못해’, ‘나는 부족해’, ‘소용없어. 그래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야.’ 등의 예측을 자신을 향해서 합니다. 그러나 이 예측이 틀렸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문가들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50% 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의 앞뒤를 맞추는 것보다 더 낮은 확률입니다. 이 낮은 확률을 왜 맞다고 생각하면서 단정을 짓습니까?
이런 잘못된 예측은 하느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하느님 양 끊임없는 예측을 하면서 그것만 맞다고 단정 짓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음을 말입니다.
예언서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예언서와 율법의 정신이고, 따라서 이 사랑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랑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예측은 사랑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대한 잘못된 예측을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적대적인 모습을 취했고, 그 적대적인 모습이 후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섣부른 예측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시련은 결국에는 축복이 되기 마련이다(리처드 바흐).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종 “그 사람은 ~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즉,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할 일을 뒤로 미뤄요.”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 화장실을 갑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오줌싸개’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화장실 가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행동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 행동을 보고서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음을, 대신 행동 자체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율법은 사랑이라는 완전한 걸작과 같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거의 지옥이 없는 것처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있다고 하시는데 왜 어떤 분들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고해 성사를 할 때 어떤 신부님은 저에게 자신과 화해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성욕이 올라올 때는 굳이 막으려 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시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루카 11,42; 마태 23,23)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제가 십일조에 대해 말하면 마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치는 듯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마치 지옥도 없다고 말하고, 화를 내도 되고 성욕도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십일조와 같은 것들은 개신교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자비로운 사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왜 율법에서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될까요? 모든 율법을 하나로 모으면 ‘사랑’이란 한 자가 나옵니다. 즉, 율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총합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표현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니 율법 자체는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모자이크나 훌륭한 작품에서 어떤 한 조각이 빠지면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율법이라도 어기거나 또 그래도 된다고 말하면 하느님의 모습을 그만큼 훼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사람이 가져간 작품은 무언가 빠져있거나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율법 가운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지키고 나머지는 바꿔버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보다 나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까지도 자기 뜻대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5천 명의 시민이 사는 스페인 북부 작은 시골 마을 보르하의 한 성당에는 19세기 화가 엘리아스 가르시아의 벽화 ‘에체 호모(여기 사람이 있다)’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붉은 망토를 걸치고 가시관을 쓰고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매우 정밀한 걸작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메네스라고 하는 할머니가 성당 청소를 하다가 습기 때문에 벗겨진 그 그림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려진 예수님께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벗겨진 부분을 물감으로 덧칠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수님의 얼굴을 마치 원숭이처럼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화가의 손녀에게 소송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습니다. 물론 이 사건이 신문에 나자 오히려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 시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하느님의 법을 우리가 수정할 수 있다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있다고 믿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셨다면 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그러려는 노력을 시작합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가 그린 하느님의 법을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런 식으로 하느님의 법을 망쳐놓았고 그것을 가져간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율법은 하느님 본성인 사랑을 그려낸 걸작입니다. 거기에 인간이 손을 댔다가는 훼손만 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봅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처음 외국에서 지낼 때입니다. 2005년이니까 15년 전입니다. 한국에서 당분간 지낼 수 있는 돈을 가져왔습니다. 교구에서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돈을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분명 지갑에 돈이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지내는 두려움, 외로움 때문에 잘 쓰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은행 계좌도 만들었고, 한국 성당에 주일미사를 도와주었고, 강의를 다니면서 시간도, 여유도 생기면서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입니다.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두 번째 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월급도 나오고, 한국에서 쓰던 카드가 있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여유롭게 돈을 쓰고 있습니다. 성격 탓인지 아직도 몇 번씩 생각해보고 마트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는 합니다.
군자는 중용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소인도 중용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군자의 중용이 시의적절한 중용이라면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의 중용이라고 합니다. 군자는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범람해서 갈 수 없다면 강물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소인은 약속했으니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위험에 처합니다. 군자는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알아보는 겁니다. 큰 기둥은 문을 부수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쓰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지만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만 못합니다. 재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올빼미는 밤에는 작은 벌래도 볼 수 있지만 대낮에는 산도 보지 못합니다. 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소인은 열심히 달리지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쓰임과 재능과 본성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도 중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알았지만 율법의 진정한 쓰임을 몰랐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지만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의미를 몰랐습니다. 단식하고 기도했지만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단식과 기도의 진정한 가치는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표와 시대의 흐름을 아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에게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재능을 보셨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의 재능을 교회를 세우는 재능이 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닫혀졌던 하느님의 모상을 사랑으로 깨우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중용의 삶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 때 보는 세상은 예전에 보는 세상과는 다른 법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무기탄의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틀’을 넘어 시대의 징표와 흐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앞에 시의적절한 중용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심판과 비판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구속과 억압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자유와 용서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솝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우가 사냥꾼에게 쫒기다가 나무꾼을 발견하고 자신을 숨겨달라고 간청을 하자 나무꾼은 자신의 오두막에 그 여우를 숨겨주었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사냥꾼이 와서 여우가 어디로 갔는지 묻자 나무꾼은 말로는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손으로는 자신의 오두막을 가리켰습니다. 하지만 사냥꾼은 그 손짓이 무슨 뜻이지 모르고 떠나갔고, 잠시 후 사냥꾼이 떠나간 것을 확인한 여우는 서둘러 오두막을 나와 떠나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구해주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가는 여우를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만약 당신의 몸짓과 태도가 당신의 말과 일치했다면 감사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자칫 잘못하면 오늘 예화 속에 나오는 나무꾼의 모습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없이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사랑을 살지 못할 때, 남들의 희생을 이야기하지지만 자신이 희생하지 않을 때,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자신이 정의롭지 못하고 불의와 타협할 때 우리는 그 나무꾼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사도로서 말과 행동이 일치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율법의 완성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율법은 사람의 구속하는 덫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을 강제하는 수단으로의 법, 피동적이고 quality를 조금도 지니지 못하는 법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유를 선물하자.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 방종할 때라도 언젠가 그들은 자유를 알고 성장과 성숙을 스스로 만들 때까지 함께하고 기다려주고, 행동이 수준이하일 때면 내가 그 수준으로 낮아져 그들의 잘못된 사고와 행동을 올바로 하도록 끌어올려 주자.
나는 학생들을 결코 강제하지 않겠다. 사랑으로 다가가 학생들을 존중하고 신뢰하겠다. 이를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 받고 이해하고 응용했다. 율법을 일점 일획도 폐지하려 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법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음을 예수님께서 보고 이를 학생들에게 적용했다.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안 될 때라도 인내하며 믿고 희망하며 사랑했다.
학교에 심은 나무들이 제법 커나고 신록이 우거질 때, 푸르른 동산답게 훌쩍 성장한 학생들에게 아름다움이 찾아왔다. 학생들의 제멋대로의 자유,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어른들의 통제가 필요없게 되었다. 진정한 자유를 통하여 사랑하는 법을 살기 시작했다. 하늘 창공을 나는 학생들이 된 것이다. 꿈의 학교, 학생들에게 quality가 높아지자 틀이 없어지고 창공을 마음껏 비상했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하는 법을 예수님께서 배웠다. 사랑의 법, 성령이 충만한 법, 자율이란 법이 공동체의 추구 가치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하느님 나라를 조성되어 갔다. 열매가 생겨나 행복한 학교가 되어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한 하느님으로 온전히 살아계신다. 천주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하늘 법은 하느님사랑 이웃사랑이 골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 법은 하늘땅이 없어지기 전까지 항상 실행된다는 주님 말씀입니다.
세상 법은 사람 목숨 끊어지면 하나도 실행 안 될건데 대단한줄 압니다.
하늘법과 세상법이 마찰된다면 저는 세상법 떠나 하늘법의 편 들겁니다.
하늘 법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당연 숙명적으로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하느님사랑 이웃사랑이 골자며 모세 십계명, 주님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늘 법 지킬 인생이란 걸 가르쳐주는 곳 예수교 외에는 없습니다.
이 하늘 법이 최상의 최고 법이고 다른 법은 전부 탄생의 우연법입니다.
탄생 우연법에 인생 걸어 불안해 말고 하늘 법 지켜 하늘큰사람 됩시다.
응답하라 1987 - 거룩한 변화의 실천 ⓷ 대결과 완성
이기우 신부님
2012년 이후 케이블 티브이에서 방영한 드라마들 중에서 비교적 높은 시청율을 기록했던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리 멀지 않은 2,30년 전의 과거인데도 불구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한 추억을 소환시켜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시도했던 방식을 빌려서 1987년을 소환해 보려는 까닭은, 오늘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87년 6월 민주항쟁은 오늘날까지 이 때 개정된 헌법의 체제로 30년을 지탱해 왔을 정도로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하게 민주화의 여정을 불완전하게나마 걷게 만든 ‘87년 체제’의 전환점이었습니다.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항쟁이었습니다. 전두환의 4·13 호헌발표,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항의 시위가 연일 발생하자, 6월 29일에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에로의 개헌이 이루어지긴 했습니다. 이후 양김의 분열로 또 다시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의 정부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군사독재 정치는 더 이상 기승을 부릴 수 없었으며, 삼당합당으로 이 불의한 권력과 손을 잡았다가 1998년에 외환위기를 야기한 김영삼 정부가 끝내 몰락한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로써 1961년에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로 군사독재가 들어선 이후 27년만에 본격적인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습니다. 박정희가 짓밟은 4·19 혁명 이후로 38년, 6·10 민주 항쟁 이후로는 11년 만의 일입니다.
지식소매상인을 자처한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표현했듯이, 제헌 헌법에서 이미 주권재민의 원칙을 천명했으나, 우리의 노력 없이 얻어진 민주주의의 대가를 후불제로 그것도 11년 동안의 저항으로 톡톡히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국민의 정부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민주 정부의 정통성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부 시절 단절되는 듯 했으나, 2016년과 2017년 사이의 한겨울에 연인원 1천 7백만 명이 쏟아져 나온 촛불혁명으로 다시 이어져 현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33년 전의 6월 민주 항쟁의 맥을 이었습니다.
이렇게 후불제로나마 민주주의의 열매가 맺기까지 국민적 저항의 싹은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801년부터 무려 백 년 동안 가해진 천주교 박해는 한겨레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피지배계층이 독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도 완전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지배계층에 저항한 첫 사태였습니다. 이 저항의 움직임은 1894년의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가, 나라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강탈당한 뒤 이천만 동포 가운데 이백만 명이 참가한 1910년의 3·1 독립만세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연합국에 의해 타의로 주어진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에 저항하는 제주 4·3 민중 항쟁이 1947년에 일어났고, 1979년에 부산 마산 시민항쟁과 1980년에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벌어졌던 저항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일어났었습니다.
마침내 권력을 농단하던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몰아낸 이 2016년의 촛불혁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역사에 있어서도 서양 선진국들을 따라잡은 모범국가가 되었습니다. 1801년부터 시작된 백 년 간의 천주교 박해 이후 2016년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백여 년 이상 동안이나 이런 불의에 저항해 온 역사의 흐름을 되집어보고자 1987년의 민주 항쟁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보았습니다.
1987년 6월,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민주항쟁은 명동성당 들머리 언덕에서 며칠 동안 진행된 농성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때만큼은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명동성당이 국민과 시민의 편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 자리잡은 이 명동 땅이 민주화의 성지라고 한때 불리울 수도 있었던 데에는, 이 자리를 파수꾼처럼 지키던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항쟁 지도부와 참가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군 부대를 투입해서라도 이 항쟁 열기를 진압해 보려던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중항쟁의 비극을 기억하던 미국의 만류로 포기해야 했고, 또 다시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명동 성당 들머리 언덕에서 철야 농성하던 시민과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려고 했었습니다. 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치안 담당자들에게 김 추기경이 한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투쟁하고 시위하다가 결국 이곳 성당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내쫓겠는가? 그런 이들이 어떻게 범법자인가?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정부당국이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으나 당신들이 여기 들어와 학생들을 집아가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 그렇게 되면 전국의 신부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구속을 각오하고 맞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가서 지시한 사람에게 내 말을 전하라.”
성체성혈의 성사에 담긴 사랑의 희생정신은 대단히 고귀한 가치이지만, 이는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의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훼손하고 파괴할 때, 사랑이라는 최고선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이들이 마땅히 들고 일어나서 일단 정의라는 공동선의 가치부터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정의는 사랑의 보루요, 사랑은 정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하시는 하느님께서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위해 희생하려는 의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 역사를 이끄십니다.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부족하고 잘못되어 있는 상태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가르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법을 폐지하고 당신의 독자적인 법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하느님 법의 실천’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의 ‘율법주의’는 잘못된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겉으로만 보면 계명들과 율법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완벽한 신앙생활로 보이지만,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만, 또 형식적으로만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잘못된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계명들과 율법들을 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율법주의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잘 지키고, 교무금 잘 내고, 판공성사 잘 보고, 단체 활동 잘하고...
그러나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복을 받아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겉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은 없는...
그런 모습도 율법주의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법은 영원하다는 뜻이고, 또 아무도 그 말씀과 법을 마음대로 폐지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폐지와 개정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그 권한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음식에 관한 율법들을 예수님께서 폐지하셨는데(마르 7,19), 그 율법들의 바탕이 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폐지하신 것은 아니고, 이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을 올바르게 바로잡으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경우를 보면, 원래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었던 제3계명을 우리 교회는 주일을 지키라는 계명으로 바꾸었는데,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안식일보다 주일이 더 중요한 날이 되었기 때문에 주일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정하신 하느님의 뜻과 주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뜻을 모두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본래 ‘안식일의 정신’은 쉴 틈 없이 일만 해야 하는 노예들도 쉴 수 있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4-15).”>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중요하니까, 똑같이 지켜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해서, 덜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안 지키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자기 혼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그것을 시킨다면, 그것은 더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율법주의의 반대쪽에 편의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형식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들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편의주의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가, 아닌가? 를 판단하는 것은, 신앙인 자신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여기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라는 표현 때문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신경과민증에 걸릴 정도로 세심하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시는 것은 아닌가?” 라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고, 인간들이 마음대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분류하고, 무시하는 것을 금지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 라는 말은, “인간들이 자기 마음대로 가장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하나”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장 작은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라는 말씀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 쏟아서, 계명이 큰 것으로 보이든지 작은 것으로 보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계명들을 모두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작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무시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자세는 ‘정성’입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섬긴다면, 정성을 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앙생활에 정성이 없다면 그것도 사실상 형식주의이고, 율법주의입니다.
무대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가들은 음 하나라도 틀리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집중합니다.
만일에 한 음이라도 틀리게 연주하면, 그 연주 전체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바로 그렇게 집중하고, 바로 그렇게 정성을 다 쏟아야 하는 일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말씀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고 선언하십니다. 기존 종교 지도자들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예수님에 대해 의구심과 의혹이 술렁이기 시작하던 차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은 절대 가치를 지닙니다. 다만 해석과 적용 과정에서 가중된 부수적 규정들에 본질적 정신들이 가려져 버렸지요.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이 사랑이며,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임을 몸소 보여 주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마태 5,18).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시한을 언급하신 걸 보니, 율법이 영원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율법도 변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당신에 대해 예언한 바를 모두 이루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희생제사를 바치십니다. 사랑만이 그 동기이고 목적이지요. 이제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 이스라엘이 새 계약을 통해 주님의 백성이 됩니다. 율법은 이 모두를 준비하고 지탱하지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그러나 여전히 여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맞이할 새 예루살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성전이 없다고 합니다. 성전이신 분이 현존하시니 그렇습니다. 이어 묵시록 저자는 그 도성에 해도 달도 필요없다고 하지요. 빛이신 분이 계시는 그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율법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이신 분이 현존하시는 앞에서 조례나 판례를 뒤적이는 건 좀 우스꽝스러울 것 같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으니 이제 율법은 사랑이 되어 존재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사랑의 완성이시니까요. 예수님은 인간인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지키는 바를 가르치는 존재가 되길 바라십니다. 곧 사랑하고, 사랑을 전파하는 존재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제1독서에서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매우 극적인 장면이 벌어집니다. 사백오십 명의 바알 예언자들과, 단 한 명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와의 대결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엘리야가 먼저 온 백성에게 묻습니다.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당장 이득만 된다면 적당히 다른 우상들을 기웃거리며 섬기는 행태에 도전장을 내미는 겁니다. 절뚝거린다는 표현은 두 다리의 균형을 잃은 모습을 희화한 것이지요. 앎과 삶, 지식과 실천, 신분과 태도가 통합되지 않으면 겉보기엔 제대로 걷는 듯해도 실은 영혼이 절뚝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연중 제10주간 화요일)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도 같은 의미의 권고를 서간에 담았습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라"고 하셨던 권고의 다른 표현으로 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믿음과 실천의 일관성, 통합입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이 둘을 아우르며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1열왕 18,36).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표징이 제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자신과 거기 모인 모든 이에게 선포합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그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말씀에 따라 행하는 존재일 뿐임을 명확히 합니다. 말씀을 사는 사람의 근본 정신이고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알게 된 사랑을실천하는 사람이지요. 그 자신이 곧 복음입니다. 말씀과 함께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엮어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고 나누며 말씀의 향기를 퍼뜨리는 벗님은 진정 "하늘 나라의 큰사람"(마태 5,19 참조)입니다. 아멘.
요르단을 건너감
오리게네스 사제의 ‘여호수아서에 대한 강론’에서(Hom. 4,1: PG 12,842-843)
계약의 궤는 요르단까지 백성들을 앞서 갔습니다. 사제와 레위들이 멈추었을 때 강물은 마치 하느님의 봉사자들에게 예를 표하듯 흐름을 멈추고 우뚝 일어나 양편으로 갈라져 쌓여서 하느님의 백성이 안전히 건너가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옛적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이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성세성사로 요르단을 건넜습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더위대하고 더 고귀한 것들을 약속하셨으며, 당신께로 이르는 공중의 통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의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십시오. “그때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의인을 섬기기 때문에 의인은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의 입을 빌어 의인에게 약속하시는 바를 또 들어 보십시오. “네가 불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내가 너의 주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나 의인을 안전히 받아들이고 모든 피조물이 그에게 마땅한 봉사를 바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어떤 일들이 옛적에만 일어나고 현재 듣고 있는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상징적으로 여러분에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상의 어둠을 떠나 하느님의 법을 들으러 나올 때 출애굽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비자 반에 들어가 교회의 계명을 지키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홍해를 건너 사막을 통과하며 거기에 장막을 세우고 멈춰서 매일 하느님이 선포하시는 법을 듣고 주님의 영광을 계시하는 모세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에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의 영신적 샘으로 나아와 레위 앞에서 허용된 이들에게만 알려진 그 위대하고 거룩한 입문 성사를 받게 될 때, 사제들의 인도로 요르단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땅에서 예수님은 모세를 이어 여러분을 받아들이시고 여러분에게 새 여정의 지도자가 되십니다.
그렇게 많고도 위대한 하느님의 업적을 상기할 때 바다가 여러분을 위해 어떻게 갈라졌고 강물이 어떻게 일어나 우뚝 섰는지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다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바다야, 너 어찌 도망쳤더냐, 요르단아, 너 어찌 거슬러 흘렀더냐. 산들아, 언덕들아, 숫양과 어린 양처럼 너희는 어찌하여 뛰놀았더냐.” 하느님의 대답은 이러할 것입니다. “땅은 주님의 면전에서, 야곱의 하느님 그 면전에서 소스라쳤도다. 주님은 바위가 못이 되게 하시고, 차돌을 샘솟게 하셨도다.”
<치유법>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픈 곳이 있어요
아픈 곳이 없으면
아프지 않겠지
아픈 곳을 없애요
한 곳 없애고
또 한 곳 없애고
아무 것도 없어요
아픈 곳이 있어요
아픈 곳보다
더 아픈 곳이 있으면
그곳은 안 아프겠지
더 아픈 곳을 만들어요
아픈 곳보다
더 아픈 곳
그보다 더 아픈 곳
점점 더 아파요
아픈 곳이 있어요
아픈 곳과
아프게 한 것은 달라
아프게 한 것을
아픈 곳에서 없애요
아프게 한 것을
찾아내서 없애는 것이
힘들고 오래 걸리지만
마침내 말끔히 나아요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미국에서 성당을 지을 때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고지식한 성전건축위원이셨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하나 하나 다 말을 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관청과 건축업자 사이에서 비용과 절차가 더 늘어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냥 모른 채 넘어가도 될 터인데‘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주위에서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적당히 넘어갑시다.”라고 말렸지만, 그분은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게 하려면, 지금 세세히 하나하나 다 점검하고 채워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라고 하시면서 꾸준히 그렇게 하나하나 코치코치 다 채워나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어떻게 집을 짓던 다 지어집니다. 또 세세히 하나하나 다 챙기고 따져서 짓는다고 해서 가장 좋은 집을 짓는 것만도 아닐 수 있습니다. 기획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경험과 지식, 기술의 정도 이상으로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식과 기술 그리고 경험의 수준에 따라 지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집을 짓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고 그로 인한 결과가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정성과 노력을 다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그 집에 대한 애정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성껏 관리하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주거하는 집이라기보다는, 경우에 따라서 사업의 담보로 잡을 소유물로 여길 수도 있고, 여차하면 팔아버리고 말 상품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집을 짓는 만큼이나 우리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얼마만큼 두고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내 오늘의 하루가 내 인격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가?
내 오늘의 하루가 내 삶의 질을 어느 정도 굳건하게 자리 잡게 하는가?
내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는 내 삶이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설사 현세에서는 주위와 비교해 볼 때 슬퍼하거나 후회스러울지 몰라도, 마지막 날,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잣대가 아닌 주 에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관점에서 나는 슬퍼하거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몇 년 전 부산 벡스코에서 <진로 진학 박람회>가 열렸습니다. 행사장은 나중에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본인의 진로를 탐색하고, 입시정보를 얻고자 하는 많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거기에는 직업 체험 부스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님이 직접 지도하는 공예 체험장도 있었습니다. 체험 부스의 특성상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면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리 신청자를 접수하여 참가비 오천원을 받고 공예 소품을 제작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참가한 모든 아이들이 2시간이라는 긴 시간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참여했으며,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보람을 느끼고 돌아갔지요.
하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된 주최 측에서 참가비를 받으면 안된다고 안내하여 그 이후로는 무료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참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습니다. 신청자들 대부분이 하는 둥 마는 둥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모두 자리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커피 한잔 값 정도 밖에 안되는 적은 금액이지만, 미리 참가비를 내고 신청한 사람이 책임감을 갖고 한 작업과 무료로 자유롭게 임한 사람이 한 작업 사이에는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 큰 차이가 생긴 것이지요.
대학생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체험학습을 갈 때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단돈 만원이라도 비용을 내고 신청할 때에는 빠지는 학생이 거의 없지만, 완전 무료로 자유롭게 참여하라고 할 때에는 본인이 신청을 했다 할지라도 아침에 일어나기 싫거나, 또는 그냥 가기 싫다는 이유로 빠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 결과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대절한 버스가 텅텅 빈 상태로 출발하게 되지요. 참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체험부스 신청비 오천원, 체험학습에 들어가는 버스비 만 원, 이것은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동기와 목적의식을 고취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돈까지 내가며 신청한 일이니 설렁설렁 허투루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닌데도,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최선을 다해 임하게 되고, 그 결과 좋은 결과까지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오늘의 복음말씀을 읽어보면 가슴 한켠이 참으로 찔리게 만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둥 마는둥, 설렁설렁 해서는 그 참된 기쁨과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괴로운 시간이 될 뿐이지요. 그러나 스스로,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행복과 ‘하느님 나라’라는 상급까지 얻게 됩니다. 그러니 기왕 주님의 뜻과 계명을 지킬 거라면 마지못해서 소극적으로 말고, 기꺼이 적극적으로 기쁘게 지켜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전사. -기본에 충실한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여정중 잊지 못할 추억은 전혀 순례길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힘껏 걸었고 새벽 2시에 일어나 언제 어디서든 매일 강론을 써서 아이패드를 통해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이어 도반형제와 미사를 봉헌하고 새벽 5시 넘어 어둠중에 이마에 헤드랜턴을 하고 순례길에 올라 오전 내내 걸었습니다.
배낭을 메고 출발할 때는 마치 전장에 출전하는 주님의 전사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걸었을 때는 80리 32km 오후 2시쯤 하루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참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신기했던 것은 최종 목적지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워질수록 뛰다시피 할 정도로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많이 되뇌었던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 시편 구절이었습니다.
객지에서 공부하던 시절 어머니 계신 고향집에 가까워질수록 역시 뛰다시피 빨랐던 발걸음도 생각납니다. 지금의 처지가 비슷합니다. 80평생을 한 생애로 계산하여 인생 경주로 생각한다면 거의 막바지의 최종 목표지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요즈음 더욱 마지막 전력질주할 때임을 느낍니다. 죄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때로는 밥먹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이, 노는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습니다. 넘어지거나 주저앉거나 다치거나 함이 없이 힘껏 달려 마지막 목표지점에 도착할 때 비로소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여기서 새삼 생각하는바 삶의 바탕이 되는 기본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주님의 전사-기본에 충실한 삶’입니다. 제 주변에도 이런 기본에 충실한 분을 많이 만납니다. 특히 예수성심자매회 회원들을 보면 거의가 얼마나 가정생활에, 부부생활에 충실한지 모릅니다. 바로 이런 기본에 충실한 삶이 바로 영적 삶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어제는 수도형제를 통해 주문했던 ‘수덕신비신학’이란 책을 받았습니다. 수덕의 바탕위에 신비요 수행의 바탕위에 관상입니다. 수덕, 수행의 바탕이 없는 영적 삶은 말그대로 사상누각, 모래위의 영적 집일 것입니다. 하여 불가의 삼학三學의 순서도 계정혜戒定慧입니다. 계율을 충실히 지킬 때 마음의 고요와 깊이의 안정이 있고 여기서 피어나는 은총의 지혜라는 것입 니다. 흡사 우리 영적 삶의 정화-조명-일치의 단계와도 흡사합니다. 탐진치貪瞋癡의 인간을 다스리는 데에 철저한 계율 준수의 수행이 우선임을 봅니다. 하여 방장 큰 스님이 있는 불가의 대찰에는 율원律院, 강원講院, 선원禪院이 구비되어있습니다.예전 수도원 초창기 아빠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영성이전에 기본부터, 일상의 상식이나 양식부터 충실하라. 어줍잖게 묵상하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 풀이나 뽑아라. 머리만 깎으면 도사인가. 내 당신들을 아는데---. 기본도 되지 않고 무슨 영성생활이라고---기본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되어 있어 야지.”
기본도, 기초도 부실한 영적 삶의 폐단을 지적한 것입니다. 분도회 영성의 특징도 기도와 성독과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기본에 충실한 삶위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문득 어느 타계한 유명 정치인이 생전 묘비명을 물었을 때, “잘 놀다 간다”라는 대답의 인터뷰에 참 기발한 묘비명이라 생각하며 웃었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치열하게 살되 잘 놀다가는 기분으로 기도도 성독도 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선배 수도사제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가 전사라는 말마디를 맨 처음 알게된 것도 ‘평화의 전사’인 분도회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글에서입니다. 그 신부님은 당신을 찾아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냐의 수도자들의 질문에 한결같이 답하셨다 합니다.
“규칙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면 규칙이 날 지켜줍니다. 아주 평범하나 자명한 진리입니다. 살아갈수록 일상의 기본과 기초가 되는 규칙에 충실한 삶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안에 숨어있다 합니다. 지도자는 디테일이 강해야 한다 합니다. 아주 섬세하고 자상하며 주도면밀周到綿密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충, 얼렁뚱당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의 이해는 자명해집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단호한 예수님이신지요. 율법은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깊이 보면 사랑의 율법입니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어떠한 세부 사항도 소홀히 다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사실 정말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한다면 어느 율법하나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디테일에 강할 수뿐이 없습니다. 내적 무너짐은 아주 작다 생각되는 것을 소홀히 할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디테일이 강한 분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매사 기본에 충실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좀 그렇습니다만 기본基本이나 본질本質이란 한자는 일본日本말이고 기본이 강한 일본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됨을 봅니다.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요, 가장 큰 자입니까?
바로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평범 자명한 진리이지만 너무 잘 잊고 지내는 우리들입니다. 이러면 됐다가 아니라 늘 기본으로 돌아가 언제나 초보자의 수행자 정신으로 살아야 함을 봅니다. 이런 수행의 여정과 함께 가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제1독서 열왕기상권의 엘리야 또한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하느님의 전사이자 예언자인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 450명과의 결전에 승리한 엘리야입니다.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사백오십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엘리야는 참으로 기본에 충실했던 분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주저없이 ‘기본의 승리’, ‘믿음의 승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거듭된 엘리야의 간청에 하느님은 응답하시어 엘리야에 승리를 안겨 줬고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비굴하고 비겁했던 백성들도 얼굴을 땅에 대고 부르짖으며 고백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전투지만 얼마나 피말리는 상황이었는지요. 그러나 엘리야의 영적전쟁은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우리 역시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 우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본에 충실한 주님의 전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아멘.
하느님은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시는 분 <마태 5, 17-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누구나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려면 시작보다 더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도 당신의 말씀으로 시작한 우주의 시작과 사람을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 완성하지 못한 것을 오늘 시간까지 완성의 단계를 거칩니다. 오늘도 세상 끝까지 이 일은 계속되어 가지만 주님이 오신 후 완전한 마무리를 지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창시자가 세상에 오셔서 그동안 미완성품으로 제시하신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믿는 사람에게 완성됩니다.
주님은 우선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하나이신 진실과 사랑이신 분, 자비로우신 분,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고 어떤 악이든지 물리치시는 분,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봉헌하시고 세상 끝까지 미사 전례를 통해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모든 일을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 모든 교통 법규가 운전자를 속박하기 위해 있지 않고 운전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뜻에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법은 약자를 억압하고 골짜기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 어린이와 약한 자를 보호하라고 하십니다. 끝에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율법의 완성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매시간 어디서나 사랑을 실천하면서 율법이 완성되어 갑니다. 세상 끝날까지 없어지지 않는 주님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입니다. 힘이 있다고 힘으로 사람을 대하고, 돈이 있다고 돈으로 사람을 대하고, 명성이 있다고 명성을 무기로 보잘것없다고 무시하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율법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주의 기도를 드리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는 기도는 본래 거룩하신 분을 드러내는 기도보다 우리 율법의 완성을 위해 하느님의 빛을 받아 빛으로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기도하는 것이며, 이 기도의 완성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 큰 사람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누구보다 자유, 평화,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매시간 이루어지는 일 안에서 어디서나 살아 움직이는 곳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아 빛으로 세상을 빛나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사라져갑니다.
오늘 우리가 잊고 있는 것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운전을 할 때 자꾸 조급한 마음이 생깁니다. 양보하며 차분하게 길을 가기보다, 거칠어지고 빨라집니다. 언제부턴가 기본적인 것들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남들을 손가락질하긴 쉽지만, 자신을 돌이켜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날 운전을 처음 시작할 때와 너무도 변해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랫동안 사고도 없이 베테랑 운전 실력을 갖췄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는데, 다른 것을 잘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안식일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율법도 가벼이 여기는 듯 보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 조항 하나하나에는 충실했지만, 익숙함에 젖어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킬 뿐 그 정신을 살지 못했습니다. 기본을 잊어버린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뒤집을 수 없는
삶의 질서가
있습니다.
생명에도
폐기할 수 없는
생명의
기본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일회용 관계가
아니듯 일회용
율법이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기본으로 지켜야 할
삶의 질서속에서
서로의 자리를
빛나게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을
되찾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모호한 율법이
아닌 선명한
사랑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생명의
고유성을
되찾는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완성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단 한순간도
주님 사랑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주님께
우리자아를
의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