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21ㄴ-26; 13,1-3
그 무렵 21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따로 세우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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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마태 10,7)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와 자비의 손길이 이제 제자들의 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은 이성적 설명이나 설득보다 구체적 치유와 자비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제자들이 행하는 기적은 하늘 나라의 선물이므로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 빠른 인간 세상의 논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지요. 복음의 논리는 값이 없기에 값진 것이고, 그 기쁨은 대가가 없기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자들은 가난하게 파견됩니다. 금, 은, 돈, 자루, 두 벌 옷, 신발,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파견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이 약한 모습으로 길 위에 서며, 그 자체가 하느님만을 신뢰한다는 예언자적 표지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1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고 대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일꾼에게 필요한 것을 책임지신다는 충실함을 드러냅니다(6,25-26 참조).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마땅한”(10,11) 사람을 찾아내 한 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능동적이고 열린 마음입니다. ‘마땅한 사람’의 열린 태도는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가난한 제자가 먹거리와 머물 곳을 찾을 수 있는 하나뿐인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서로 열려 있고 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 나라의 부유함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파견되어야 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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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11,26)라고 전합니다. 이 일은 초대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저 지지자나 추종자만을 뜻하기보다 그리스도라는 주인에게 속한다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모범을 따르며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위하여 죽을 다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분을 넘어 복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실제를 규정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순교하러 가는 길에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도록”(『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3,2) 기도를 청합니다.
삶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성인은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14,2)이라고 말합니다. 초기 순교자들은 재판을 받으면서 신원을 묻는 말에 “내 이름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답하며,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자녀의 성(姓)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같은 성을 가진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함과 형제자매로서 우리 사이의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존귀한 이름”(야고 2,7)의 값을 하도록 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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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시고 이어서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은 주님께 거저 받은 권한과 능력을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거저 사용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한과 능력의 은사는, 그들이 완수하여야 할 직무적 사명과 긴밀히 연관됩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권한,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 있습니다. 저마다 지닌 은사(카리스마)와 재능(달란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공동체를 위해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은사와 재능은 그 사람의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받은 고유한 하느님의 선물로 서로 봉사하며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선물은 그 자체로 선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명이 되지만, 가끔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높이는 데 그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선물을 사용하는 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은사에 생명을 주고 그 은사가 참됨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선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13 참조).(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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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는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흩어진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르나바는 제자들이 맨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어 사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는데,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내린 것에 기뻐하며 그들이 주님께 충실하도록 격려합니다. 더욱이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요한 다섯 설교 가운데 하나로 ‘파견 설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도록 명하십니다. 사실 이는 모두 예수님께서 몸소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과 사명을 열두 사도들이 계속 이어 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거저 받은 것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룬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힘만으로 이룬 것은 얼마나 될까요?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 시간, 가족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게 된 믿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사랑과 기쁨, 희망,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먼저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세상 모든 형제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 그리고 주위 형제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 위로와 나눔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축복과 평화를 빌어 주는 것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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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정녕 위로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둘 생각으로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흘 동안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불신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찾아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정식으로 선교사가 되지 못한 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바오로는 비로소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바로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모든 신자가 바오로를 두려워할 때 바르나바만이 그를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인도해 줍니다.
또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었을 때 그곳과 가까운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외로움 속에 있던 바오로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소아시아 일대를 함께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렇듯 바르나바는 바오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건넨 은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어떻게 ‘위로의 아들’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밝힌 본문이 없습니다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아마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을 두고두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바오로에게 다가가 그를 믿어 주고 인도하였을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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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성 바르나바는 비록 열두 사도에 들지는 않았지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사도로서 인정을 받은 분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였던 성인은 바오로 사도와 마르코와 함께 복음을 선포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분입니다.
그런 성인을 기념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과 동일한 내용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이제 당시 사람들 사이에 이미 실현되었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욕심이든, 명성이든 어떠한 욕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원칙은 사도 시대에 그대로 지켜졌고, 자신들의 이익을 찾지 않는 이런 자세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어서,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고, 여행 보따리, 여벌 옷, 신발이나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신발과 지팡이처럼 예수님 당시에 여행을 할 때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마저 포기하라는 말씀대로,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일지라도 복음을 선포하고자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를 기념하면서, 성인의 전구를 청하고, 우리도 복음을 안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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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온 표징을 보여 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표징들은 ‘치유와 구마’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날 때 몸과 마음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악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새로워지고 평화와 구원을 얻는 모습을 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에 보람을 느끼지만, 보답을 원하거나 인정받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은총이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의 기본자세는 의탁과 포기입니다. 예비 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탁하며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위로의 아들’ 바르나바 사도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사도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영적인 수확을 많이 거둡니다.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제우스로 불릴 만큼 위엄이 있는 풍채를 지녔으나(사도 14,12 참조),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하느님을 전하는 일에 만족합니다. 바르나바 성인은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여러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보여 줍니다. 굳은 신념과 확신에 찬 그의 외모로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사도의 열성과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르나바 사도가 지닌 사랑의 불꽃이 우리 마음에 타오르도록 전구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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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듣는 최고의 칭찬은 ‘착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마음이 선량하고, 신뢰할 만하며, 사심이 없고,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는 일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착하다는 말이 세상 물정 잘 모르고, 남들에게 속기 쉽고, 자기 몫도 못 챙기는 순둥이를 뜻하는 듯싶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르나바의 착함은 본디 성품 때문만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르고,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소명에 대한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성덕과 믿음의 표양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데 필요한 것은 순례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내 몸에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쓰시도록 내 욕심과 능력의 교만을 내려놓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낼 때마다 제자들이 빠질 수 있는 허영과 자만 때문에 복음의 기쁨이 사라질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화려한 말솜씨나 물질적 기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처럼 내가 받은 은총의 무게를 이웃과 나누고, 내 영혼의 불순물들을 떼어 내고 버리는 영적 수행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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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라는 한마디가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말보다도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착함이 바르나바 사도의 두드러진 면모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이 어떤 사람들을 착하다고 하는지 살펴보니, 과연 바르나바는 그런 말을 들을 만합니다.
사도행전에 소개된 그의 착함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바르나바는 말하자면 “보내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안티오키아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착한 바르나바는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다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고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자신을 내어 줄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둘째로, 그는 다른 사람을 옹호하고 성장하도록 키워 줍니다. 회심한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다른 사도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믿지 않지만 바르나바는 그를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아울러 안티오키아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다시 그가 나서서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데려옵니다. 성령의 파견을 받아 둘이 선교 여행을 떠나지만 이제부터 주도권은 바오로에게 넘어갑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이 이제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바뀌고 바르나바는 보조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제2차 선교 여행 때는 요한 마르코를 데려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바오로와 충돌합니다. 바오로는 마르코가 중간에 복음을 전하러 함께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더 이상 그를 데려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함께 데리고 갑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여하튼 바르나바는 마르코 문제로 바오로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사도 15장) 그가 바오로를 위해 중재해 주면서 인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착한 사도 바르나바! 그는 ‘파견된 사람’인 ‘사도’의 모범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미사 입당송과 본기도의 청원 내용도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고 성령이 충만한 복된 사람이며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한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착하고 훌륭한 사도가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우리도 착한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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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준비할 때면 늘 어떻게 하면 짐을 줄일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산이 높고 산행 기간이 길수록 이런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힘든 산행일수록 목적하는 산을 잘 오르려면 무엇보다 등짐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는 한겨울에 태백산맥을 혼자 종주할 때 칫솔의 손잡이까지도 잘라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험난하고 오랜 산행을 할 때는 작은 무게도 견뎌 내기 어렵습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데 가장 큰 적은 많은 것을 안고 살 때입니다. 가진 것이 많고 얽힌 것이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영성 생활은 거꾸로 갑니다. 하느님을 향한 오롯한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맙니다.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 인간의 영혼은 잡다한 피조물에 포로가 되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의 온갖 무게에 짓눌려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무엇을 자꾸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온갖 불순물들을 떼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더 갖고, 더 많은 인연을 만들어야 삶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버리고 삶을 단순화시켜야 중심이 잡히고 평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빈 몸으로 떠나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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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많이 가지면 망설임도 많아집니다. 이것도 아닌 듯하고 저것도 아닌 듯합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분명 유혹도 적어집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는지요? 사도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있었습니다. 병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물리치는 능력입니다. 기적의 힘과 함께 살았기에 그들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으면’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을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삶이 ‘자유로운 삶’인지 잘 모릅니다.스승님의 말씀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하늘 나라를 선포하려면 먼저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질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사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소유’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자유롭게 살려는 자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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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권능과 사랑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주님의 힘이 함께하십니다. 온전히 비어 있기에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누구나 자신이 체험한 일을 말할 때에는 힘이 생깁니다. 또한 체험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을 더 감동하게 만듭니다. 진실한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전해야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려 했으므로 성령께서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은 긴가민가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확신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에 앞서 신앙생활을 기쁘게 해 나가기로 다짐합시다. 너무 많이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믿음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욕심에서 조금만 자유로워져도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입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모은 참모는 대부분 대통령 자리를 놓고 싸우던 라이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각을 사람들이 ‘적수들이 모인 팀’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뛰어난 정치가들이지만, 링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모아 링컨은 하나의 팀이 되게 했습니다. 그 방법을 역사학자들은 그의 유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겸손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상원의원 선거를 위한 공개 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링컨을 향해 ‘이중인격자’라며 비난했습니다. 이 말에 링컨은 웃으면서 “솔직히 제가 두 얼굴의 이중인격자라면 이따위 얼굴을 내놓고 다니겠습니까?”라면서 스스로 자기 비하를 합니다.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유머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적대자들과도 함께 최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화내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화합의 방법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 겸손이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모두를 포용하시고 이로써 하나의 팀을 만드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철저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철학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행하는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돈, 여행 보따리, 여벌의 옷, 심지어 신발과 지팡이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는 물질적 준비에 의존하지 말고, 선교 여정을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5,12)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안부 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갖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이를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잘 전하고 있을까요?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무신자들이 거부하는 하느님은 감사하게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왜곡된 하느님 상이다(카를 라너).
바오로 사도의 오른팔 바르나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루살렘에 본산을 두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모공동체이자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최초로 정착되기 시작한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큰 관심, 즉 기도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교회는 신생 안티오키아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감독 한 명을 임명했는데, 그가 곧 바르나바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바르나바는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용기를 고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키프로스 출신이고, 직업은 레위계 성직자였습니다.
금수저 가문 출신으로 예루살렘에 금싸라기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용모에 탄탄한 학문, 깊은 신앙 등,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당시의 대세남이었습니다.
원래 바르나바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두 번 씩이나 사도라는 호칭으로 기록될 만큼, 교우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바쳤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그는 초대교회의 한 멤버로서 날개를 달고 열심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로부터 홀대받고 의기소침해 있었으며, 곤경 중에 처해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르소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습니다. 바르나바는 긴장 관계에 놓여있던 예루살렘 모교회 공동체와 바오로 사도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만 1년 동안 의기투합했습니다. 두분의 합심 결과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신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회 공동체 조직도 안정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첫 번 째 해외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바오로라는 큰 인재를 알아봤고 지지한 것이 아닐까요? 바르나바 사도는 지금은 비록 곤경 중에 처해 있지만, 바오로야말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적임자임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고,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했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한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다 세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로 문호가 활짝 개방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와 함께 완고했던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를 설득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이 모든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동안 후배 신부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와서 교포 사목을 시작하였으니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3월에 신부님 본당으로 ‘사순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있는 본당을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좋다고 해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지내며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상 깊었던 것은 기억력이었습니다. 신부님은 12년 전에 만났던 달라스 본당 교우들의 모습과 그때 나누었던 대화까지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의 기억력은 감탄할 만했습니다. 그 비결은 단순했습니다. 기록하고 저장하는 삶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교우들과 함께했던 영상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억은 사람과의 관계를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친화력이었습니다. 예전에 주교님께서 저를 미국으로 보내시면서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적응력과 친화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신부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운동과 음악이라는 자신의 재능을 통해 처음 만난 사람과도 오래된 친구처럼 어울렸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공동체를 살리는 힘은 결국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합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품으로 공동체를 세운 사도였습니다. 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했던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처음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도 바르나바의 헌신과 열매였습니다. 저는 문득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가 떠올랐습니다. 두 선수는 경쟁자였지만, 그 경쟁은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성장시키는 경쟁이었습니다. 그들의 선의의 경쟁 덕분에 피겨 스케이팅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르나바가 먼저 길을 열었고, 바오로 사도가 그 길 위에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바르나바가 감성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면, 바오로는 이성적으로 복음을 정리하고 확장했습니다. 바르나바가 공동체를 품었다면, 바오로는 서간을 통해 공동체를 가르치고 격려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누가 더 위대한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다릅니다. 바르나바도 바오로도 모두 하느님 정원의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서로 다른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루듯, 각자의 은총과 사명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업적이 아니라 겸손이며,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순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의미를 향해, 가치를 향해,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신부님 본당은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본당도 2027년에 설립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두 공동체 모두에게 이 시간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끌어 오신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새롭게 여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처럼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따르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된다면, 두 본당의 50주년은 분명 ‘은총의 50년, 희망의 50년’이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바르나바처럼 위로하고, 바오로처럼 증언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또한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길이 되고, 희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나와 함께 있으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믿음으로
보내시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믿음으로
맞이하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나 아무 것 없어도
나 모든 것 있다네
희망으로
보내시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희망으로
맞이하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나 아무 것 없어도
나 모든 것 있다네
사랑으로
보내시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사랑으로
맞이하는 벗
나와 함께 있으니
나 아무 것 없어도
나 모든 것 있다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사실 나라는 존재와 생명 자체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자라는 과정 안에서도 부모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소유했던 모든 것 역시도 그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기꺼이 거저 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거저 받은 것에 감사하고 거저 줄 수 있는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에게 천국의 삶은 이미 시작되어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1) 여기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말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믿고 회개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마지막 날이 오면 완성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은 ‘말’로도 선포되고 ‘사랑 실천’으로도 선포됩니다.
둘 중에 ‘사랑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받은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선포는(선교활동은) ‘돈벌이’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대가로 돈을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겪었던 일이 연상됩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사도 8,18-20)”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돈으로 사거나, 돈을 받고 파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2)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줄이면, “빈손으로 떠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와라.”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돈벌이’를 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아올 때에도 빈손으로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빈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지고 갈 것은 믿음과 사랑과 자비 등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시는 분이니, 너희는 먹는 일을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너희를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 줄 사람을 찾아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있는 ‘부자들에 관한 지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
신앙생활은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도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과 먹을 것이 있는데도 더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고민하는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정말로 굶주리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남겨 주신 숙제 같은 것입니다.
<굶주리는 처지가 아니고 더 좋은 것을 먹으려고 고민하고 집착하는 경우라면, 또 ‘믿음의 힘’은 안 믿고 ‘돈의 힘’만 믿는 경우라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평화를 누리려는 사람은 있는 것을 공평하게 나누며 산다.<마태10/7-13>6월11일.
이석진그레고리오 신부님
존재하는 것 내것은 없고 모두가 주어진 것이며 서로 필요한 만금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공편한 나눔이 없는 곳에는 평화는 없고 전쟁을 살아지고 없지며 처음만 같지 못하여 고통이나 어려움속에 살게 됩니다. 욕심이 과하면 화가되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정의와 자비를 잃어 버리고 더큰 불의와 무자비 속에 살게 됩니다.
가진 바는 공으로 받은 것이여서 대가를 바라고 내어주는 사람은 실망과 절망 속에 살게 됩니다. 어떤이가 나는 이런 사람이고 대접을 받을만 하다고 살면 교만과 욕심에 살며 따돌림을 받고 외롭게 됩니다. “있을 때 잘해 가진 것 가졌을 때 정의롭고 자비심 가지고 살 때 자비받고 살아갑니다.
선을 행하며 대가를 바라고 행하는 사람 절망합니다. 선행을 잊고 빈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편화를 누리고 살지만 무어ᅟᅥᆺ을 가지고 누리려고만 하면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근심 걱정 속에 평화를 잃고 살게 됩니다.
어떤이가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반듯이 대우를 받고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비를 버리고 이기심으로 살면 마음이 편할 할 날이 없으며 불평 불만으로 살며 회를 면하지 못합니다. 혹시 좋은일 하고 공로의식 속에 살고 있다면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공으로 받은것이지 받아야 할 만한 귄리니 이권을 주장하면 저질머진 짐이 무겁고 평화와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기웠는데 하며 지난 날을 희생하며 응공을 받으려 하면 지난 수고는 하루아침에 살아집니다. 주고받는 것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지 받고 누리려고 산다면 평화를 잃게 됩니다. 우리의 지내는 시간중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어제가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지금입니다. 가장 평화스럽게 살려는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입니다. 친근한 사람은 어제일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 아니고 지금 필요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을 때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정의이며 자비입니다. 세상은 잘란사람 잘란대로 살고 있는 사람 있는 것 주리고 살지만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은 하늘이 온 땅을 덮고 있는 것 같이 보편적이며 실질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도 어느 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만 친교를 가지고 편가름이 있게 사는 사람 언제가 공동체를 떠나게 됩니다. 자기이익만 찾아 사는 사람 공편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바로 적응하며 살지 못하고 불펑하고 떠나갑니다. 수도원도 사람이 없다 하지만 사랑은 내가 먼저 해야 사랑이 있지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내가 머저 사랑하고 살며 평화를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위로와 격려로 서로를 주님께 이끄는 따뜻한 빛이 됩시다.
김웅태 신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싱그러운 초록이 깊어 가는 6월의 오늘, 우리는 ‘위로의 아들’이라 불린 성 바르나바 사도를 기억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두려움과 의심 속에 있던 이들을 믿어 주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길이 더 넓게 열리도록 큰 몫을 한 분이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가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가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도록 격려하였다고 전합니다. 그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누군가를 판단하기보다 믿어주고, 지친 이를 일으켜 세우는 신앙인의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도 누군가에게 작은 ‘바르나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지쳐 있는 이웃 곁에 조용히 머물며, 주님의 위로를 전해봅시다. 우리가 건네는 작은 격려가 주님의 은총 안에서 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성 바르나바 사도의 전구를 청하며, 여러분 모두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주님의 자녀로 오늘 하루도 은총 안에 머무르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늘나라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님
미세먼지로 뿌연 세상을 살아가다가 비 온 뒤 맑은 하늘을 만나는 날이 있습니다.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나는 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의 콩닥거리던 마음이 되살아나 지친 마음이 위로를 받는 듯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하늘이 참 좋았습니다.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만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높고 먼 하늘이 제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와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나의 마음이 나의 하늘이 되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마음속에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나라는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이미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로 지금 내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픈 이를 고쳐주고, 죽어가는 이를 살리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또한 돈도 여벌 옷도 챙기지 말고, 어디를 가든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되었고, 바로 그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현존 안에서 더 이상 두려울 것 없는 충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 먼지가 맑은 하늘을 가리더라도 하느님의 나라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 바르나바의 소명과 정체성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이라고 증언한다. 그의 별명 “바르나바”(위로의 아들)는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요약한 영적 정체성이다. 그는 재산을 나누어 공동체에 봉헌했고(사도 4,36-37), 바오로 사도를 공동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위해 다리를 놓았다. 이 점에서 바르나바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초대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사도들의 덕행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만을 위해 살았다.”(In Acta Apostolorum Hom. 25 의역) 바르나바는 바로 이런 사도의 전형을 보여 준다.
2. 거저 받은 은총과 거저 주는 삶
오늘 복음의 핵심 말씀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이다. 은총(Gratia)은 결코 거래적 보상이 아니라, 무상의 선물이다. 따라서 제자는 그 받은 은총을 다시 무상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받았으니, 그 선물을 다시 아무 대가 없이 주어야 한다. 은총은 나눌수록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충만해진다.”(Sermones de Gratia 의역) 바르나바의 삶은 바로 이 말씀의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3. 사도의 단순함과 자유로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팡이도, 여벌 옷도, 돈주머니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단순히 가난을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자유로움을 가르친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떠난 것은, 인간적인 무기로 무장하지 않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싸우게 하기 위함이었다.”(Hom. in Matth. 의역) 또한 초대 교회의 문헌인 디다케는 참된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탐욕과 이익 추구를 언급하며, 복음 선포자는 청빈과 무상이 본질이라고 가르친다(디다케 11,3-6 의역).
4. 교회의 가르침과 오늘의 적용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은 이렇게 강조한다. “평신도들은 받은 은혜를 거저 나누며, 말과 행실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상을 복음의 정신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3항 요약) 바르나바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거저 받은 자로서, 공동체를 세우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일치를 위해 힘쓴 참된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부르심을 받고 있다.
5.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성 바르나바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받은 은총을 ‘내 것’으로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을 계산하거나 보상과 교환의 차원에서 이해하지는 않는가? 내가 가진 시간과 재능, 재물을 거저 나누며 이웃에게 ‘위로의 아들·딸’로 살고 있는가? 바르나바처럼 우리의 존재가 공동체 안에서 ‘위로와 평화의 통로’가 될 때,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다.
6. 맺음말
성 바르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삶 전체를 거저 내어주며, 복음을 위하여 마침내 피까지 흘린 증인이었다. 오늘 우리도 그의 전구를 청하자. 우리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고, 세상에서 하늘 나라를 드러내며,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작은 사도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바르나바 성인에게 붙여진 ‘사도’라는 호칭이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요. 왜 바르나바 성인은 주님께서 직접 부르시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마티아 사도처럼 기도와 제비뽑기를 통해 따로 선발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사도’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그렇게 된 연유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사도를 뽑는 과정에서 마티아와 함께 최종결선까지 오른 사람이 바로 바르나바이지요. 사실 ‘바르나바’는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성령께 기도한 뒤 제비를 뽑았고, 그 결과 마티아가 선택되어 새로운 사도로 임명받았지요. 그리고 아쉽게도 제비뽑기에서 탈락한 요셉은 열 두 사도단에 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크게 괘념치 않고 그동안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한결같이, 성실하게 복음선포에 힘씁니다. 이처럼 하느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그의 선한 성품이, 다른 사람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그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해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격려하는 그의 진심이,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그의 순명이 그 누구보다 ‘사도다웠’기에, 요셉은 초기교회 신자들로부터 ‘사도’로 인정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며 살았던 초기 교회 신자들이 자연스레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게 된 것처럼 말이지요.
요셉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슬픔과 괴로움을 겪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로부터 큰 위로와 힘을 얻었지요.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바오로였기에 회심 초기에는 신자들이 그를 잘 믿어주지 않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신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받던 바르나바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도와주고 그리스도교 집회에도 데리고 가서 잘 소개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위로와 도움 덕분에 바오로는 ‘박해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지요.
바르나바 사도가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슬픔과 괴로움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실천하면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 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아누린다면 그에게는 기쁨이 되고 나에게는 보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가 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정성과 노력을 알아주시기에, 그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더 큰 기쁨이자 영광이 될 것입니다. 즉 내 사랑이 거부당하는 데서 느끼는 고통이 큰 만큼 하느님께서 더 큰 위안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기에, 언제나 두려움 없이 후회 없이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바르나바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여 참 평화를 누려야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이 고이면 썩고,
흐를 때 비로소
맑아집니다.
우리의 삶 또한
철저히 거저 받음에서
시작됩니다.
맑은 하늘도 거저이고,
시원한 바람도 거저이며,
빛나는 유월의 햇살도
거저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주신 선물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길입니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사랑을
세상에 거저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 성장하고,
사랑을 나눌 때 성숙해집니다.
은총은 움켜쥘수록 줄어들고,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은총은 소유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계산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손해와 이익의 경계를 넘어서는
참된 자유로 이끄십니다.
받은 은총을 기억하는 사람은
감사하며 살고, 감사하는 사람은
기쁘게 나누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참된 사명입니다.
참된 신앙은 거저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저 나누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영국 심리학자 리처드 와이즈먼은 피험자들에게 신문을 나눠주고 빠른 시간에 신문 안에 있는 모든 사진을 세어 보게 했습니다. 대다수의 피험자는 사진의 수를 세는 과제를 완료하는데 약 2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일부 피험자는 다시 검산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신문 두 번째 페이지에 뉴스 기사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던 것입니다.
‘그만 세어 보세요. 이 신문에는 사진 43장이 있습니다.’
이 제목을 본 피험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검산하기 위해 다시 신문을 본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만 세라’는 제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만 세라’는 제목이 있었다고 말하자, 자기가 얼마나 꼼꼼하게 봤는데 그런 제목이 어디 있었냐면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에 지나치게 집중한 탓에 대부분의 피험자가 볼 수 없었고, 결국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할 방법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열린 지각을 가진 사람만이 이 문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일상 삶 안에서 보지도 또 느끼지도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함께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기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떠나는 데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쓰시도록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이 받은 은총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께 집중하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열린 지각을 가지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카고 사제 모임에서 매일 현지 한인 성당 공동체와 미사를 했습니다. 각 본당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어떤 본당은 기도와 영성의 깊이가 느껴졌고, 어떤 본당은 친교와 나눔의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분위기는 대개 그 본당에 있는 신부님의 삶의 방식과 사목 방향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어느 본당은 미사 30분 전부터 교우들이 모여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제의실도 깔끔했습니다. 전례와 관련된 책도 잘 정리되고 있었습니다. 성작과 성합도 서랍장에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 성령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반면 다른 본당은 음악과 친교의 열정이 넘쳤습니다. 평일 미사임에도 성가대가 반주하며 함께 노래했고, 미사 후에는 교우들과 신부님이 자연스럽게 식사하며 ‘노래방’까지 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 두 본당을 바라보면서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라고 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운전하다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가톨릭교회는 2000년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우리는 모두 ‘사도직’에 불리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도들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삶을 통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사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도직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예언자가 나옵니다. 둘째는 제사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봉헌되었고, 성전에서 가르쳤으며,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전례에 함께 하면서 신앙의 샘에서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셋째는 봉사직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는 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걸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가라하시니
당신께서 가시듯
가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믿으라하시니
당신께서 믿으시듯
믿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희망하라하시니
당신께서 희망하시듯
희망하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사랑하라하시니
당신께서 사랑하시듯
사랑하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말하라하시니
당신께서 말씀하시듯
말하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벗하라하시니
당신께서 벗하시듯
벗하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주라하시니
당신께서 주시듯
주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이루라하시니
당신께서 이루시듯
이루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살리라하시니
당신께서 살리시듯
살리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당신께서 가라하시니
당신께서 가시듯
가는 나는
당신의 사도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의 의미는 너희가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았으니 사랑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대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생명부터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을 하나 하나 따져보자면 나의 순수한 능력만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주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 모든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 하느님께 돌려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더 많은 은총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알리는 데에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이 있네요.
필요한 건 남의 병 고쳐 주고 죽은 이 살리고 나병 구마하는 일이네요.
불필요한 건 여행 보따리 여벌옷 신발 지팡이 같은 세상살이 따위네요.
남의 영혼을 위해 전념하고 나의 편리를 위해 걱정 말라는 말씀이겠죠.
하늘나라 갈 영혼들을 걱정하고 물질 세상은 놔두라는 말씀이었겠지요.
무엇보다 영혼의 영원한 행복에 세상 물질 것 다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 삶의 목표를 현세에 두지 말고 영생에 두라시는 것입니다.
평화의 인사는 인생길과 하늘의 문 알려 주는 방향 제시와도 같습니다.
가톨릭알림 말: 주님의 가르침대로 인류가 평화롭기를 간절히 바랍시다.
창조는 무에서 유이며 생명은 공짜로 유지합니다.<마태10/7-13>6월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의 힘으로 하늘이 있고 땅이 있는 것 아니고 공짜로 주어진 것이며 숨쉬는 산고는 공장에서 만들어 내지 않고 태양의 힘도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움직이며 사계절이 있으며 밤과 낮이 있습니다. 햇수 날 수를 세면서 살고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속에 있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만드신 분의 것입니다.
무엇이 존재하는 것 오늘 복음대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 하시며 진실하게 살며 선을 행하고 아름답게 살라 하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보다 낳은 것이 있지만 하늘과 땅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 잘란 멋에산다고 생각하지만 너 없이는 나의존재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질 것 없는 것이라도 너 없이 주어지는 것 없으며 모든 것은 하느님 것이며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마전 까지 중국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 생각하고 자기 멋대로 살던 시진핑이 실각의 상태에 놓아 있어 자기 기족만은 살려달라고 사정 한다는 소문은 진실 외 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일입니다. 모든 것은 부매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리 모든는 가진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마음대로 살지 말고 법대로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삼권의 권력이 한사람 손에 들어간다면 어느 날 몰매를 맞게 됩니다. 법대로 살고 우주의질서를 어기지 말고 길 따라 진리 따라 생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 내어주는 사람 함께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그림을 보면 서울 사람 시골 사람 차별하는 것 보게 되는데 따로 따로 사는 것 아니고 모든 것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만든 길을 가고 주님이 주신 진리를 따라살고 주님의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도 힘이 있어도 가진 것 많아도 우주의 질서를 따르고 자연의 현상에 머물러 살고 하느님 뜻 실천하며 사랑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도 주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은 살도록 기도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의 삶과 신앙을 기념하며 본받고자 하는 축일입니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했던 수많은 일들이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기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그를 ‘위로자’, ‘격려자’, ‘용기를 북돋워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고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 ‘애칭’이 바르나바 자신에게도 큰 영광이자 기쁨이 되었겠지요.
그런데 바르나바가 그런 인물이 된 것은 사실 좀 뜻 밖의 일입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써 레위계 사제 출신이었던 그는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한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과 집착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를 생각하면, 그로 인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면, 그런 바르나바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그 부자처럼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지요. 그러나 바르나바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뜻에 따라, 자기가 소유한 그 많은 땅을 판 돈을 가져다가 주님의 뜻에 따라 잘 써달라며 사도들에게 아낌없이 봉헌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아무 것도 지니지 말고’ ‘거저 주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주님을 따르는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하다 여기며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재물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런 바르나바를 우러러보고 존경합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루카도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할 정도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그를 두고 ‘착하다’고 한 것은 그저 도덕, 윤리규범에 어긋남이 없이 올바르게 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엇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선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기에 그 모습을 보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갖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따른 것이지요.
우리도 그런 바르나바 사도를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을 그저 나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며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우리 모두가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봉헌하고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삼가며 내 삶 전체가 나에게는 기쁨과 보람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모범이 되며,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늘 나라의 꿈을 삽시다. - “꿈의 현실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97,11)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중의 하나로 꼽히는 명연설중 하나는 1963년 8월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텅 DC 링컨 기념관 발코니에서, 20만-30만 청중을 대상으로 한 마틴 루터킹 목사가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일 것입니다. 감동적인 대목 셋만 인용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 나이에 관계 없이 영원한 청춘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그가 지닌 하늘 나라의 꿈에 있습니다. 꿈이 있어야 타락하지도, 변질되지도, 유혹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적으로 날로 새로워지고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꿈중의 꿈, 진짜 꿈이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 역시 믿음의 선배들을 닮아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시키려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역시 오래 전 하늘 나라를 꿈꾸며 써놓은 “꿈 있어야 산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밖에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잎들 다진 겨울나무가 그렇다
그러나 보라!
살아 있지 않은가
봄되니 피어나는 꽃들, 짙어져 가는 신록들
아! 꿈 있어야 산다
꿈있어 겨울 추위 견뎠다
꿈 없으면 죽는다
꿈은 생명이요 사랑이다
가슴에 담았던 하늘 나라의 꿈
활짝 피어내니
파스카의 꽃들이요 신록의 기쁨이다
아름다운 생명이다”<2001.5.6.>
지금도 이런 하늘 나라를 꿈꾸고 실현하며 살기에 마음은 늘 청춘입니다. 어제는 천장암(天藏庵)이자 지족암(知足庵)이라 자칭하는 집무실 출입구에 방충망을 새로 했습니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일꾼들의 솜씨에 감동, 감사했습니다. 이제부터 출입구만 열면 불암산 능선이 한 눈이 들어오니 저절로 하늘 나라를 꿈꾸며 좋아하는 시를 외우게 됩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작년부터 무척이나 좋아했던 자자 애송시입니다. 이어 자주 외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평범한 일상에서 하늘 나라 꿈을 살아야 합니다. ‘비범한 진리는 찰나의 깨달음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축적됩니다.’<다산>. 하늘 나라 꿈의 현실화가 바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하늘 나라 꿈의 원조가 예수님이요 그의 제자들인 우리들 역시 하늘 나라의 꿈을 전수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열두 사도에 이어 바오로 사도와 명콤비를 이루었던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회심후 바오로를 선교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바오로에게 은인과도 같은 사도입니다. 하늘 나라의 꿈에 사로 잡혀 하늘 나라를 살았던 바르나바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심없는 인품이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하늘 나라의 사도 바르나바요, 이름뜻 그대로 ‘위로의 아들 또는 격려의 아들’답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하늘 나라 꿈의 원조인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향한 장엄한 명령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역설적으로 문명의 야만시대요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불행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활짝 열린 빈 통로가 되어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면서’ 하늘 나라이신 예수님을 그대로 전하여 만나게 할 때 놀라운 치유의 기적입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살아 있으나 실상 죽어 있는 사람들이요 온갖 질병에 다양한 마귀들린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늘 나라이신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삶의 치유이자 회복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어 주님은 무소유의 믿음을 통해 자유로운 주님의 통로가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소유냐 존재의 갈림길에서,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고 소유의 쾌락과 부자유가 아닌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선택해 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의식주로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착한 신자들의 환대에 기뻐하면서 온전히 주님의 도구와 통로가 되어 이웃에게 주님의 평화를 선사하며 하늘 나라를 살라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리라.”
에수님을 닮아 그 삶자체가 하늘 나라요 주님의 평화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같은 삶이겠는지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의 일꾼이자 주님 평화의 도구로 살게 하십니다. 일일시호일,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요 하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참 좋은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3-34). 아멘.
심흥보베드로 신부님
복음 사업을 하는 이들은 ‘무엇을 먹고, 얼마만큼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환우들을 고쳐주라고 이르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예수님께서는 선교 활동에 나서는 제자들의 식생활과 선교 활동에 필요한 재물은 미리 준비하지 말고 현지에서 주는 대로 받고 살라고 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9-10절)
예수님께서는 선교지에 가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식생활을 의탁하지 말고, 한 집에 머물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1절)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머무는 집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집이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축복과 평화는 사도들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고 위로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12-13절)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우리의 내일을 주님께 의탁하며 주님의 섭리와 안배 속에서 주님 사랑의 길을 굳건히 걸어 나가기로 합시다.
감사히 받는 마음
이승복 라파엘 신부님
거저 주고 거저 받는 마음은 현대 사회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물보다 거래에 익숙합니다. 거저 주는 것도 싫지만 거저 받는 것도 불편합니다. 거저 받으면 왠지 빚진 것 같아서 똑같이 돌려주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저 주는 것뿐 아니라 거저 받는 것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듯합니다. 선교할 때 돈을 지니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받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거저 주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거저 받기만 하는 것은 불편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저 주기 위해 거저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염치없이 받기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늘 넘치도록 거저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자연의 선물들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거저 받았는지요. 그 모든 선물들을 잘 인식하고 귀하게 여기며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선물들을 잘 알아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받을 줄 아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물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유는 끝내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지배합니다.
집착은
삶의
불안이며
경쟁과 비교로
우리를 이끌고
욕심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우리 사람은
이 땅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총은
그야말로
조건 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하느님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받는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조건 없이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기쁜
복음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계약적 관계가
아닌
은총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전달하는
사랑의
도구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나의 열정도
나의 재능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삶의 임시성은
겸손함과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길러줍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여정이
소유라는
욕심을 비우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채워지는
가장 좋은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비움으로써
얻는
은총의
충만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사 안에서도 유례없는 대단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도 그리 풍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참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가,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놀라운 변화의 속도와 규모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듭니다. 1970년대만 해도 전화나 텔레비전 없는 집도 꽤 많았는데, 이제는 전화는 개인 필수품이 되었고 텔레비전은 극장을 방불케 할 만큼 큼지막합니다.
이런 빠른 변화에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만져서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 없었던 저 역시 빠른 변화에 혼란을 느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OECD 국가 중에 가장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도 뚝뚝 떨어지고 있음 역시 개인의 행복도의 하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풍요로움 속에 정신적 빈곤은 지금의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외적 풍요로움이 실제 행복과는 전혀 다름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외적 성장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장을 위해 더 힘을 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물론 ‘이런 정신적 성장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들 수 있지만, 외적 성장을 멋지게 이룬 우리의 모습은 내적 성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또 다른 나의 성장을 위해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 또 부패를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빛은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바로 우리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또한 등불을 함지 속에 놓아서 비추지 못하는 것 역시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이렇게 짠맛과 밝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부족한 존재이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실수로 만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전능함을 우리를 통해서 높이 드러내십니다. 이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 풍요로움을 넘어서 내적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가장 미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줄기 미풍, 찰나의 느낌, 순간의 눈빛... 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준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저는 정말이지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말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오십니다. 한두 분이 아니라 70명, 80명입니다. 식사도 하시고 주무시고 가시니 할 일이 태산입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보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도착하신지가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할 시간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떠나실 때는 대절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피정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다음에 꼭 오세요!” 하고 인사드립니다.
별것 아닌 노력이지만 형제자매들이 받은 감동이 큰 것 같습니다. 다들 하시는 말씀,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환대받고 배웅까지 받은 적은 없습니다. 촌각의 순간이었지만 작은 천국 체험을 하고 갑니다. 신부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는게 없습니다. 저희 훌륭한 형제들이 각자 자리에서 잘 도와주셔서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는 화장실 청소를, 어떤 형제는 침구 세탁소에서, 어떤 형제는 강의로, 다들 기여를 하고 계십니다. 피정이 잘 되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 형제들 덕분입니다.”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다시 사람이 넘치게 할 유일한 길
전삼용 요셉 신부님
현재 수치상이나 느끼는 바로는 교회가 점점 비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는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 변하지 않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르나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성 바르나바의 성품과 그 열매가 잘 드러납니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의 두 기둥처럼 함께 다니며 큰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씨를 뿌리는 역할이었다면 바르나바 사도는 키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착하고 신심 깊은 인물이었고 그 덕분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오늘 복음의 이 말씀과 같겠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대전의 명물 ‘성심당’의 임영진 대표가 성 바르나바를 닮은 분 같습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버님인 고 임길순 창업주는 성 바오로를 닮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흥남 철수 때 수많은 사람이 배를 타려고 하고 있었는데 오직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만 남아 있었습니다. 임길순 씨는 묵주를 들고 “만약 이번에 살게 된다면 그건 하느님이 살려주신 것일 테니, 남은 평생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때 묵주를 들고 있는 모습을 미군이 보았고 선장에게 알렸습니다. 선장은 ‘레너드 라루’로 후에 수도원에 들어가 현재는 시복 추진 중인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선장은 어째서인지 무기와 차량 등 무게가 나가는 것들을 바다에 버리라고 하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만큼 태우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대전에서 성당에서 받은 밀가루 두 포대로 찐빵을 만들어 팔며 그날 안 팔린 것은 다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보내기로 합니다. 먹고살 것도 없는 형편에서 아내는 “너희 아버지만 천당에 가고 나는 지옥에 갈 거다!”라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 가게를 성당 가까운 곳으로 옮겼고 매일 새벽 미사를 다녔습니다. 그때 자녀들은 종교가 싫었지만, 지금은 손주들까지 모두 할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임길순 창업주는 아들 임영진 대표가 빵집을 잘 운영하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연령회와 같은 봉사만 하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임영진 대표가 “주면 반드시 받게 된다.”라는 아버지의 신념이 열매를 본 것은 철거반이 왔을 때입니다. 당시 성심당은 위반건축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철거반장은 왔다가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임 대표가 말합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철거반장이 어렸을 적에 그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봐요. 그때 저희 아버지가 그분 염부터 입관까지 장례를 치러주는 봉사를 했다는 사실을요. 철거반장이 그런 우리 아버지를 기억해내고는 그냥 돌아간 거죠.”
임 대표는 지금도 매달 3,000만 원어치의 빵을 기부하고, 회사 수익의 15%는 무조건 인센티브로 직원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2005년에 빵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미 동생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빚더미에 앉아있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임 대표의 아내 김미진 이사는 어차피 불을 끄러 가봐야 너무 늦은 상태기 때문에 그냥 성당에 돌아와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빵을 많이 팔게 해 준 것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족회의를 하는데 큰딸 임선은 피식 웃으며 “전, 학교 휴학할래요.”라고 했고 아들은 “전 어차피 입대하려고 했잖아요. 날짜를 앞당겨볼게요.” 라고 했습니다. 다들 착한 가족입니다. 임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살았으니 다들 그런 큰일을 겪고도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임 대표는 가게를 부동산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만이 많던 직원들은 다 나가버렸고 착한 직원들이 모여 “잿더미 속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고 하며 공장을 1월 추운 날씨 속에서 6일 만에 어느 정도 정상화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로 일궈낸 성심당에서 나오는 빵은 왠지 더 맛있었습니다. 임 대표는 말합니다. “우리는 화재를 겪으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답이 무엇인지 한 번 봤어요. 답안지를 본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죠. 위기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죠.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똑같은 방황을 되풀이하진 않을 거예요.”
이 회사는 인사고과에 사랑에 대한 평가가 40%입니다. 둘이 싸우다가 서로 화해했다면 진급 대상자가 됩니다.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직원들은 이렇게 선서한다고 합니다.
“하나,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하나, 우리는 사랑의 문화를 이룬다. 하나, 우리는 가치 있는 기업이 된다.” 이들은 포콜라레 정신에 의거하여 수입의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3분의 1은 재투자로, 3분의 1은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보다 수천 배나 매장이 많은 커다란 프렌차이즈 빵집들보다 수익이 많이 납니다.
저도 본당에 와서 재정의 10%를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 가을부터는 소공동체 시스템 변화를 통해 최대한 가난한 이들에게 자동으로 재정이 흘러가게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돈도 사람도 부족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것이 창업주의 정신입니다.
“주어라, 받을 것이다!” “우리 곁에 불행한 사람을 둔 채로 혼자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론사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부탁을 자주 했었습니다. 인터뷰는 ‘약속 대련’처럼 미리 질문지를 보내기 마련입니다. 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서인지 질문지를 미처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이 메일로 보냈는데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1시간 남짓 인터뷰는 잘 끝냈습니다. 기자는 익숙하게 핸드폰을 녹음으로 해놓고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인터뷰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는 먼저 제 소개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저의 호적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가브리엘의 방문과 마리아의 응답으로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는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욕에서는 신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다면, 이곳 댈러스에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자는 ‘성당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일부 개신교회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방과 비난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가톨릭은 큰 집, 개신교회는 작은 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그 무엇도 이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교회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 의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톨릭교회에서 작은 집인 개신교회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성직자였습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 개신교회의 장점은 ‘자유’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은 교계제도를 통해서 발전하였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질서가 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로 발전하였습니다. 가톨릭에 비해서 개신교회는 그 조직이 자유롭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고, 간단한 쇼핑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있고, 샤워 시설도 있고, 주유소의 기름값이 저렴한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사람들의 입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휴게소는 어떤 휴게소일까요? 직원들이 불친절하고, 음식도 맛이 없고,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물건값이 비싼 곳입니다. 그런 휴게소는 입소문이 나서 파리만 날릴 것입니다. 휴게소가 아무리 좋아도 그곳에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지면 미련 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합니다. 종교는 깨달음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휴게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찾을까요? 종교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때입니다. 종교가 지친 삶에 위로와 용기를 줄 때입니다. 종교가 불의한 세상에 희망을 줄 때입니다. 종교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줄 때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종교를 외면할까요? 종교가 속 빈 강정일 때입니다. 종교가 권력에 야합할 때입니다. 종교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갈 때입니다. 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외면할 때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자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였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놓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제가 이곳 댈러스에서 해야 할 소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사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이 보내시고
빛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빛나는 사람
믿음이 보내시고
믿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믿는 사람
희망이 보내시고
희망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희망하는 사람
사랑이 보내시고
사랑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사랑하는 사람
착함이 보내시고
착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착한 사람
곧음이 보내시고
곧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곧은 사람
화해가 보내시고
화해하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화해하는 사람
평화가 보내시고
평화롭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평화로운 사람
기쁨이 보내시고
기쁨이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기쁜 사람
자비가 보내시고
자비롭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자비로운 사람
섬김이 보내시고
섬기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섬기는 사람
살림이 보내시고
살리고픈 이가 맞이하는
오롯이 살리는 사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거저 받았다니 내가 무엇을 거저 받았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가족,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그 자비하심 안에서 마련되어지고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기본은 바로 하느님의 그 자비하심으로 인해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느님께 ‘감사함’ ‘고마움’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철없이 감사할 줄 모르고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경우 자신이 가진 무엇을 나누려고 할 때 생색을 내거나 그것을 통해 자기 능력을 드러내며 우쭐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가진 것이 자기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인은 봉헌의 기도를 통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와, 저에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주소서.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주님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도로 바치나이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오니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주관하소서. 저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허락하소서. 저는 이것으로 만족하리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사도 바르나바 축일입니다. 먼저 그는 개종하여 하느님의 사도가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와 함께 선교 여행을 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서 저자인 마르코의 사촌이기도 합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는 많이 접할 수 없었지만 그의 성품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바르나바 사도는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또한 사람을 중히 여겼습니다. 1차 선교 여행 중에 마르코가 열정적이지 못한 것을 안 바오로 사도는 2차 선교 여행에 함께 하지 않기로 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하였지요.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마찰이 있었고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르나바는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최초로 외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위에서 말한 대로 성품과 선교 방식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르나바의 선교 활동에서의 핵심은 사람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가득 찬 사람이라 불리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재산을 팔아 공동체에 바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르나바처럼 우리도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실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그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삶 안에 예수님이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할 때 다른 이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할 때 사도들의 삶을 이어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아멘!
김준수 신부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사11,24)
신약의 인물 중에서 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베드로와 바르나바 사도라고 답합니다. 사실 저는 착한 사람은 못되지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약한 사람이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늘 희생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아무튼 사도행전에 의하면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11,24)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성품을 지닌 바르나바이었기에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때, 그를 받아들인 사람이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식 관습(=할례)을 강요하던 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형제들에게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한 사람도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인 베드로 사도를 비판했을 때도, 베드로 사도를 감싼 이가 바르나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첫 전도 여행에서 중도에 전도를 포기한 요한 마르코를 비겁한 사람이라 여겨 그를 두번째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마르코를 자신의 여정에 동행시킨 인물도 바르나바입니다. 이처럼 착하면서도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믿음의 사람, 성령의 사람인 바르나바와 같은 선교사가 필요하고, 바르나바와 같은 사람과 동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총일까, 싶습니다. 그는 참으로 우리 시대가 필요한 아름다운 동행의 모델이라고 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선교 여정 가운데서 어쩌면 자신과 늘 함께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았기에 가진 것, 아는 것 그리고 깨달은 것, 그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러기에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의 여정에서 비우면 비울수록 더 충만해지는 하느님 전대의 무게를 체험했기에 아낌없이 받은 것을 거저 나눠주었으리라 상상합니다. 빈 가방을 가지고 떠나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마음 자세라고 믿습니다. 저의 짧은 베트남 선교 경험에 비춰볼 때 말입니다. 곧 선교사의 마음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10,8) 라는 말씀에 대한 동의와 동감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착한 마음입니까?
바르나바 사도 축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선교사의 자세는 바로 이것입니다. 선교사란 단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외지나 외국으로 파견된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선교사입니다. 인생의 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베푸는 삶(=사랑의 나눔과 실천)을 사는 사람이 곧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늘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인식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일상을 살면서 늘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며 은총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체험하며 이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선교사는 자신의 삶을 비우고 나누어 주려고 할 때 결코 전대가 비워지는 일이 없음을 체험하기에 더욱더 은총의 통로, 사랑의 통로로 불림을 감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선교사가 받은 은총이 아주 특별하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나의 동행을 필요로 할 때 바르나바와 같은 마음으로 동행할 때 참된 하느님의 사람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1, 24:10, 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파견'입니다.
독서에서는 바르나바 사도가 교회로부터 파견 받았음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 11,24)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사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거나 ‘주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이미 와 있는 나라’, 곧 거저 주어진 나라임을 말합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가 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거저 주신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부르심'과 '응답' - "저도 원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1)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응답하셨습니다(루카 1,38).
이 말씀에서 ‘바랍니다.’(‘저는 원합니다.’) 라는 말은, 성모님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순종하셨고 응답하셨음을 나타냅니다.(하느님의 뜻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천사는 성모님께,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자, 너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거부할 수 없어서 복종한 것이라면, 그것은 순종도 응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부르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기를 원한다. 너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느냐? 원한다면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도들을 부르셨을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그렇게 하기를 그들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이고,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주님의 희망에 나의 희망을 일치시키는 일, 즉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식 때의 ‘서약’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교구장이 “......을 하기를 원합니까?” 라고 물으면, 서품 대상자들은 “예, 원합니다.” 라고 답변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나는 ......을 하겠다고 서약(맹세)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 또는 ‘서약한다.’ 라는 말보다 ‘나는 원한다.’ 라는 말이 더 강력한 ‘서원(誓願)’이 됩니다.>
2)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에도, 일방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도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한다. 너희도 원하느냐? 원한다면 가라.”
<역시 실제 표현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파견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그들 자신들도 원했기 때문에, 파견 명령에 기꺼이 응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기 싫은데도 억지로 간 것이 아니라, 가고 싶어서, 정말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선교사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에 넘쳐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데도,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한다면, 그 소식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 될 수 없고, ‘전해 주기 싫은 소식’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3)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으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슨 대가를 바라지 말고 오직 ‘기쁨으로’ 하여라.”가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이지만 수당을 많이 준다니까 한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돈 소식’을 전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금, 은, 구리돈, 여행 보따리, 여벌옷, 신발, 지팡이를 지니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 없어도 불편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 당연히 먹이신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아시는 분이고(마태 6,32), 그것을, 즉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6,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선포하라시며 하늘 힘도 쓰라하신 말씀이죠.
하늘나라의 힘으로 마귀도 쫓고 빈손으로 병고를 이기라는 말씀이죠.
그리고 하늘평화 주라 하신 건 당부 보다 강한 결국에는 선포였어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죠.
그리고 하느님나라의 선포는 그 곳에 평화를 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제사들은 평화의 사도들이며 신앙인 모두도 평화의 사도들이죠.
하느님나라가 세상에 주려는 것은 이 세상의 평화라는 선물인겁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은 세상평화라는 말로 전쟁만 일으키고 있습니다.
가톨릭알림 말: 세상전쟁은 평화를 못 주고 하늘만이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참 좋은 제자들이자 선교사들 - “성 바르나바 사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 믿는 이들의 이중신원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 역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참으로 교회를 사랑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입니다. 바로 성 바르나바 사도가 그러했습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지난 주일 가톨릭신문 20면은 성미술 작가 조광호 신부의 고백과 같은 글이었고 일부 소개합니다.
“저도 교회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했어요. 회화외에도 조각과 판화, 스테인글라스등 필요한 것들을 배우면서 작업을 해요. 컴퓨터 그래픽도 배웠어요. 특히 스테인글라스의 경우는 당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동검도 채플’은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제가 받은 은총을 내놓기 위해서 만들었죠. 교회에 봉헌한 제 삶을 모두 모아 작은 경당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놓기 위한 곳이에요. 24시간 열려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 사람들이 와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로, 누구나 답답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괴로울 때,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성 바르나바 사도처럼, 역시 교회와 주님을 사랑한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인 사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볼 때 다산 정약용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교회의 사람, 주님의 사람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도 공감합니다. 한결같이 진리를 깨달은, 삶의 지혜가 농축된 말씀입니다. 진리의 사도라 해도 좋을 다산입니다.
“비범한 진리는 찰나의 깨달음이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축적된다. 궁리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며 만가지 변화를 섭렵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행하는 도리를 헤아려 말없이 마음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길을 놔두고서 굳이 가시밭길을 헤치는 고생을 노력으로 착각하지 말라. 가을이 깊으면 열매가 떨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만들어진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거친 돌길이나 우거진 덤불속을 헤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선택한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초기 교회 지도자들, 더 넓게는 특정 지역에 그리그도교를 전한 대표 선교사를 뜻합니다. 그래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사도라 부르고, 성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슬라브 민족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를 아일랜드의 사도라 부릅니다. 또 더 넑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우리를 주님의 사도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바르나바가 ‘격려 또는 위로의 아들’이란 이름 뜻대로 얼마나 신도들을 잘 격려하고 위로했던 교회의 사람이자 주님의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이어지는 내용도 그가 얼마나 교회에 충실한 인물인지, 또 사울에 대한 최선을 다한 노력에서 얼마나 좋은 배려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고, 바르나바의 편지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사도가 언제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5세기에 쓰여진 ‘바르나바의 전도 여행과 순교’에서는 키프러스 섬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장면입니다. 우선적 목표가 하늘나라의 선포요 이와 더불어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입니다. 이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명합니다. 이미 예수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이 각처에 있어 제자들을 영접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흔연히 나그네를 환대하는 관습이 있었기에 무소유의 자유롭고 홀가분한 선교 여행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이에 대한 사도들의 참 좋은 보답은 주님 평화의 선물입니다. 무소유와 무욕의 자유로운 삶을 통해 그대로 주님 평화의 통로가 됐던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두 연설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제6차 국제 젊음이들의 성가대들 모임에서 성가대원들에게 한 연설로 그들의 섬김의 활동에서 세가지 본질적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의 형성에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첫째, 조화(harmony)입니다.
교황님은 “음악은 조화를 창조한다. 그것은 누구에나 전달되어 고통중인 이들을 위로하고, 좌절한 이들의 마음에 열정의 불을 붙인다. 음악은 하느님의 조화로운 빛을 반영하는 아름다움과 시같은 경이로운 가치들을 사람들 마음에 가져다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친교(communion)입니다.
교황님은 “합창은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와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여정은 위대한 ’연주회(concert)’의 향기가 될 수 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기여하면서 ‘친교의 교향곡’(thy symphony of communion)’안에서 각자 고유한 풍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 강조했습니다.
셋째, 기쁨(joy)입니다.
교황님은 “여러분은 예술, 아름다움, 영성의 오랜 보물의 관리인들이다. 이기심, 야망, 질투, 분열로 더러워진 세상적 정신상태가 너희들 안에 스며들지 않도록하라. 너희 음악은 점차 하느님께 자기증여의 기쁨이 될 수 있고, 그분의 사랑과 더불어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밝히고 모든 것을 변모시킬 것이다. 너희는 성 아우구스티누의 권고를 채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혀로, 우리의 마음과 입으로, 우리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자.' ”
새삼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조화, 친교, 기쁨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는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둘째는 교황청의 대사들 모임에서 한 연설인데 세부분으로 된 명연설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첫째, 가정(family)입니다.
교황님은 “교황대사들은 인류가정에 속해 있음을 깨달아 우선적 자리에 사랑과 형제애, 함께와 나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놓고 이를 살아내고 전수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로 하늘나라 가정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분열과 전쟁으로 파괴된 비극적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둘째, 희망(hope)입니다.
교황(pope)이란 단어가 흡사 희망(hope)처럼 들립니다. 교황님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우리는 좌절하거나 비관적이 냉소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은 우리 세상 안에 현존하는 좋음을 인정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에 직면할 힘을 마련해 준다. 이런면에서 여러분들은 희망의 표징들이 되어 달라.” 요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평화(peace)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는 양도할 수 없는 존엄성 안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관계의 열매다. 우리가 무관심과 두려움을 제쳐놓을 때, 성장하고 번영하는 영구한 일치로 이끄는 상호 존경의 진정한 분위기도 피어날 수 있다. 여러분은 언제나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peacemakers)이 되도록 노력해 달라. 전능하신 분이 축복하신다” 라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역시 형제애, 희망, 평화 역시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요,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 역시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점차 우리 모두를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우리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주님의 참 좋은 제자이자 선교사로, 즉 조화의 사람, 친교의 사람, 기쁨의 사람, 그리고 형제애의 사람, 희망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삶이 너무 고달파서 약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 신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파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그분이 다시 살아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주위에서 ‘신부님이 기도해줘서 낳았다.’라고 했다면서며,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제가 기도해 드려서 낳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때 낳기를 바라셔서 낳으신 것이니,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열심히 사세요.’라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8)
세상을 살면서 문득 문득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자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정말 아무 능력도 없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몸소 활동하신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만 하고 송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감히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서도, 더 자주, 더 많이, 더 풍성하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도록 간구하며, 기꺼이 우리 자신을 봉헌합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뽑히진 않았지만 교회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통해,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는 삶을 통해 다른 이들로부터 ‘사도’로 인정받은 바르나바 사도를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지요.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그런데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할 사도를 선발하는 사도행전 1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바 있습니다. 거기서 마티아와 함께 최종 단계까지 올라갔다가 아깝게 탈락했던 것이 바로 바르나바인 겁니다. ‘열 두 사도’라는 영예로운 직책을 얻지 못한 것이 인간적으로 매우 안타깝고 속상했을텐데도, 바르나바는 그에 개의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써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자기 소명에 끝까지 충실히 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특히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직 교회 공동체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직면한 어려운 문제 상황들을 그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또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와 주님의 이끄심을 굳게 믿으며 당당하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주님의 현존을 깊이 느꼈고, 그가 믿는 하느님이라면 자기도 믿어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르나바를 중심으로 하여 자라난 믿음의 공동체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모르던 이들이 바르나바와 그 공동체의 삶에서 나타난 복음적 덕행을 보고 감화되어 ‘저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그분의 제자’라고 인정하기에 이른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할 게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그분을 따름으로써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제자도’(弟子道)에 대해 알려주시지요.
첫째,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굳은 믿음을 행동으로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맡기는 의탁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둘째, 받은 것을 움켜쥐고 혼자 누리려 하지 말고 거저 내어주고 나누라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 나아가 그분 뜻에 따르는 순명의 태도가 드러나게 되지요. 셋째로 받는 이의 반응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믿는 구석’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손해볼까봐 두려워서 무엇이든 먼저 받은 다음에야 주고 거절당할까봐 두려워서 좋은 것을 베풀 때에도 소극적이 되지만, 하느님께서 더 크고 귀한 보상으로 돌려주실 것을 굳게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감하게 먼저 내어줄 줄 알고, 당당하게 먼저 베풀 줄 압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우리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그분과 함께 해야만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알게 될 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권력, 재력, 명예로 전해지지 않는다. <마태 10, 7-13> 6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다른 나라를 점령하려면 힘, 능력, 재능이 있어야 점령하고 차지합니다. 다른 사람 위에 우뚝 서려면 권력, 재력, 명예가 출중해야 알아주고 인정받게 됩니다. 주님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면서 힘 자랑, 능력 자랑, 재능 자랑하라고 하시지 않고 오로지 지팡이<힘>와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도 가지지 않고 알아주는 이들 없으면 겸손하게 떠나라고 하십니다.
신학교에서 교회 역사를 배웠는데, 교회는 융성할 때도 있고 땅에 떨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8억 명의 신앙인이 있으며 지구 방방곡곡에 십자가 서 있고, 어디서나 존경받고, 믿음 가진 것 자랑합니다. 잘못된 것을 호교론으로 방어하며 배울 때 사목자로 사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다가, 약점투성이인 역사의 바른 해석을 바라보며 공의회 후 교황님들이 역사의 잘못을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의 말씀을 기초로 두고 살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힘없는 이를 도우려고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를 도우려면 가난한 이가 되고 월등한 지식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공의회 후 사제로 살게 됨을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의 왕, 사제, 예언자가 되었지만, 이는 행세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고 일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신품성사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자로, 일꾼으로 선택되었지, 다스리고 관리하고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제대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자리로 꾸며졌지만, 지금은 같은 원 안에 자리 잡고 마주 보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정치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는 지도자, 나누는 지도자, 함께하는 지도자입니다. 숫자나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얼마나 국민을 사랑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힘이 세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존경과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국회의원의 삶을 살 때 나라가 나라답게 됩니다. 자리 자랑과 다수의 횡포가 아니라 진, 선, 미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는 세력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이를 찾아 위로하고, 극복하도록 힘을 주고, 가난을 이기도록 일으켜 세우고, 병든 이를 고쳐주고, 정신적으로 우울증과 절망을 느끼는 사람을 웃음과 희망으로 이끄는 종교인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거저 주기
김효석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거저 줄 수 있으려면 먼저 거저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저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거저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의 재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저 받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 갖는 것을 축복이라 여기며,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면, 결코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은 모두 거저 받은 것입니다.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 즉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나에게 주어졌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을 알 수 있습니다. 은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은총은 행운처럼 우연히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은 마치 장맛비처럼 하염없이 내립니다. 그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에 따라 은총의 양이 달라집니다. 은총을 많이 담아낸 사람은 그만큼 감사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역으로,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은 은총을 많이 받아 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은총을 담는 그릇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니지 않아서
더욱 분명해지는
삶의 의미입니다.
지니지
않는 것에서
우리의 여행은
시작됩니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기쁨을
선사합니다.
헤매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끄시는 주님과
따르는 우리를
혼동되지
않게하는
물질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되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창조주를
사랑하게 하는
피조물의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갇혀있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무너지고
깨어지면서
깨닫는 삶의
중심입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리면서
우리의
마음도 익어갑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면서
빈손으로 떠나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여행의 마무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여정이 있기에
평화가 있고
내려놓기에
얻게되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self-esteem’이라는 영어를 쓰는 자존감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스스로 가잘 수 있을까요? 옆에 있는 사람이 “너는 참 못났어. 왜 그렇게 사니? 장차 뭐가 되려고 그러니?” 등의 말을 계속하는데도 스스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받아야 괜찮은 사람이라는 감정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존감 고취는 불가능한 일일까요? 어렵기는 하지만 노력에 대한 성취가 모여지면서 스스로 괜찮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커다란 성공만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성취를 이뤄나가면서 또 삶의 자그마한 부분에서 의미를 찾아가면서 자신은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야 지금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명확합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의지가 강해서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고 하십니다.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것을 챙겨주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돈도 지니지 말고,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파견에 대해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파견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성공적으로 복음 선포를 마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 자리는 아니었지만, 주님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마거릿 대처).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바르나바 사도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어갈 직제자들인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선택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누구를 뽑아야 하나, 우리는 즉시 머릿속에 답이 있습니다. 스펙이 좋은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배경이 좋은 사람, 친화력 갑인 사람...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달랐습니다. 당시로는 무장독립투사였던 열혈당원을 제자단에 가입시켰는가 하면 친일파이자 배신자, 매국노인 세리도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진중하고 헌신적인 사람을 사도로 뽑으셨는가 하면, 좌충우돌에 모난 돌 같은 사람도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섰던 박해자 바오로를 사도로 선택하는가 하면,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 바르나바를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르나바 사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사도행전 11장 24절)
사도행전 1장 24절을 통해 우리는 배반자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 한명을 뽑는 과정에서 최종 결선까지 올라갔다가 탈락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르나바는 사도들의 제비뽑기에서 탈락해 열두 사도단에 들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심성의껏 그리스도교 전파에 투신합니다. 그 결과 12사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로부터 바오로와 함께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열두 사도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들의 동역자가 됩니다. 특별히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 지방 복음화에 1년 이상 헌신하였고, 그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특별히 바르나바는 회심 초기 바오로 사도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을 때 그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에 워낙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였기에 아무리 그가 크게 회심을 했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아 힘들었습니다.
그런 순간 바르나바는 정성껏 그를 보필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집회에 그를 모시고 가서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는 아주 끈끈한 우정관계가 형성되어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도 동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사촌동생 마르코를 선교팀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바오로 사도와 견해를 달리하게 되어 결국 바오로 사도와 갈라서게 되어 마르코 복음사가와 키프로스로 돌아오게 되지요.
교회 전통에 따르면 바르나바 사도는 로마, 밀라노 등지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기원후 63년경 키프로스섬 살라미나에서 유다인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통해 순교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바르나바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복음 선포 과정에서 직면한 숱한 난관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태도는 일관되게 긍정적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는 노골적인 적개심, 그리고, 추방 앞에서도 항상 당당했고 기뻐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의 삶 한 가운데 늘 현존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삶, 지칠 줄 모르는 복음 선포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은 수많은 이교도들이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심초기 유다인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하던 바오로 사도를 끝까지 지지해주었으며 그의 복음 선포 사업에 성심성의껏 협조함을 통해 초기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은 모두 은퇴하였지만 피켜 스케이팅에서 자웅을 가리던 선수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아사다 마오와 한국의 김연아 선수였습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아사다 마오 선수가 앞섰으나 성인 무대에서는 김연아 선수가 앞섰습니다. 동계 올림픽은 물론 각종 세계 대회에서 아사다 마오는 김연아 선수의 그늘에 가려졌습니다. 그러나 아사다 마오도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현 시대를 인터넷으로 묶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입니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들이 쉽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으로 컴퓨터를 전화기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모바일을 통한 다양한 어플리케이션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빌게이츠의 우직함과 나눔은 우리 시대의 영웅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혁신과 창의성 또한 우리 시대의 영웅입니다.
한국 가톨릭에는 3분의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두 분은 고인이 되셨고, 지금은 한 분이 계십니다. 저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에게 사제서품을 받았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이 있을 때 교구 사목국에서 3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이 있을 때 교구 성소국에서 5년 동안 일하였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교회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탄생 100주년을 맞으면서 복자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저도 기억합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낮고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깊이와 품위가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선종 1주기를 맞이하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정확한 기억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았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매일 성직자와 신학생을 위해서, 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 북한 교회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은 늘 경청하는 분이었습니다. 교구청 사제들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주었습니다. 무지개의 색깔이 7가지이듯이 세분 추기경님의 영성도 다양하였습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령과 은총으로 가득한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 선수처럼 처음에는 바르나바의 복음 선포가 더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를 부르셨고 교회의 역사에서 아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 사도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감성적이었다면 바오로 사도는 이성적이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고,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공이 결코 작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간 길에 바오로 사도는 신학과 교리의 길을 놓았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간 길에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공동체에게 주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는 우열의 기준이 있겠지만 하느님의 기준에서 보면 사도들 모두 하느님 정원의 예쁜 꽃들입니다. 모두 무지개의 색깔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각자의 영성으로 드러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업적과 능력보다는 겸손과 희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생활은 물리적인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꾸로 흘러가는 연어처럼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약속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 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1,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본명이 요셉이었던(사도 4,26 참조)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복음: 마태 10,7-13: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복음선포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세상은 이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명하여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꺼리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되니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과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하고, 악마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여행 보따리나, 여벌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참조: 탈출 3,5)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의 삶이 바로 그러하였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행하였고,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신 분이다. 주님의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 생명의 말씀으로 바르나바 사도에게 생명을 주었으며 그리고 우리에게도 생명을 줄 것이다.
<사도 – 보내지는 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내는 이의 믿음을 품고
맞이하는 이의 바람을 이루러
오롯이 사랑으로 보내지는 이
앓는 이, 죽은 이. 나병 환자, 마귀 걸린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한계에 직면한 사람들이다. 뛰어 넘어 보려고 하지만 주저 앉은 사람이다. 이들은 낫고 싶어도, 일어나고 싶어도, 깨끗이 되고 싶어도,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도 죽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력으로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모두를 살리는 일은 능력을 거저 받은 사람이 해야할 일이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말씀 하신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느님의 의견을 갖은 자들이 한 곳에 모여 힘을 모아 죽은 자들의 처지를 가엽게 여겨 살펴줄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당신의 능력을 가진 사도들이 하늘의 마음하고 한계의 사람에게 다가가 배품으로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일을 펴는 것이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은 받는 것은 당연한 듯 받으면서 주는 것은 엄청 생색을 내거나 인색한 모습을 살아가곤 합니다. 한마디로 고마운 줄 모르고 자기 생색만 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태양이 없이는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마움을 모르고 자외선 때문에 피부암을 일으킨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에는 비싼 썬그라스를 끼고 폼을 재는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나의 생명, 나의 시간과 공간, 나의 가족, 나의 행복, 나의 인생 등등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거저 허락하신 고마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 고마움을 안다면 우리도 또한 다른 이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 하느님의 일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삶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평화를 빕니다. 🙏
우리의 가정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보금자리가 되고
당신께서 추시는 축복이 가득한 아름다운 가정이 되도록
당신 은총으로 보호하소서.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Without cost you have received; without cost you are to give.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함승수 신부님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40년대 메이저리그 야구단 브루클린 다저스는 최초의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을 영입합니다. 그가 경기에 등장하자 관중들은 죽일듯한 분노를 표출하며 엄청난 야유를 퍼부었고, 상대팀 선수들도 그를 비아냥거리며 기를 죽이곤 했지요. 큰 무대는 처음이라 안그래도 긴장되는데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며 못하기만 바라고 있으니 로빈슨 선수는 잔뜩 주눅들어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팀 내부에서도 기량이 떨어지는 그를 강등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제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잔뜩 주눅든 채 경기에 투입된 로빈슨에게 팀 내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선수였던 유격수이자 리더 '피 위 리즈' 선수가 조용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글러브를 잠시 땅에 내려놓고 그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미소를 지으며 '넌 충분한 능력을 갖춘 선수니 잘 할 수 있다'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넸지요.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과 상대팀 선수들은 야유를 멈추고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경기를 기점으로 로빈슨 선수는 비로소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해 뛰어난 야구실력과 훌륭한 인성으로 동료들과 관중들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핍박과 냉대로 인해 상처입고 마음이 주눅들어 힘겨운 삶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상한 관심과 배려로 지켜봐주고 먼저 손 내밀어주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준다면 그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도 참 기뻐하시겠지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던 그분의 직제자가 아님에도 '사도'라는 호칭으로 불리운 것은 행동과 삶으로 예수님의 뜻과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했기 때문이지요. 사실 '바르나바'는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그에 대한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행전 4, 36)
슬픔과 괴로움에 빠진 이들을 찾아가 정서적으로 위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줌으로써 물질적으로도 위로했던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지요. 그런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활동 초기에 그를 깊이 위로하고 격려해주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미워하고 배척하던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바오로를 찾아가, 그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며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또한 일 년여의 시간을 바오로와 함께 다니며 그가 오해와 불신을 극복하고 공동체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 바르나바 덕분에 바오로 사도는 용기와 힘을 내어 장대한 선교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르나바 사도처럼 성령의 이끄심에 기꺼이 따르겠다는 마음 자세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그런 나를 지켜보는 이들을 주님께 대한 관심과 믿음으로 인도해야 할 중대한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내 것은 없고 주님 것이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 7-13> 6월 1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손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생기는 것이 없고 눈을 감고 있으면 보이는 것이 없으며 입을 놀리지 않으면 전해줄 말이 없습니다. 우리 속담에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잠자는 사람 몫은 없다.” 하였듯이 나가서 일하는 사람 몫은 남겨놓지만, 잠자는 사람의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의식 없이 사는 사람이나 자기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잃고 많은 일을 망치게 됩니다.
이전 세대보다 잘 살고 풍요롭다고 쉬거나 잠을 자면서 의식 없이 사는 사람, 이만하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주하는 사람은 곤란한 일이 닥치면 당황하거나 절망을 느끼고 쓰러져 버립니다. 해야 할 시기에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때를 놓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얼마 전 이건희 씨가 죽기 전 그 많은 재산과 건물, 안락한 생활 속에 마지막 환자복 입고 휠체어 타고 움직이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다가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어간 이야기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죽을 때 가서야 깨닫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주님에게 공짜로 받고 살고 있습니까? 공기를 돈 주고 사는 사람 없고, 보고 듣고 알게 된 것 즉, 깨닫게 된 것을 돈을 주지 않으며 성령의 인도로 진실과 사랑을 살게 되었다고 지불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면 보수를 바라고 은혜를 베풀면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총과 사랑,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듯이 은총 속에 사는 사람은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때 수업받으며 노트를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한쪽은 강의 내용이지만 다른 한쪽은 비워놓고 복습하면서 강의 듣다가 ‘나는 이렇게 전달해야 하겠다.’ 생각이 떠오르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상담하면서 상담료는 받지 않고 간식을 준비하여 나누어줍니다. 제게 있는 것 중 내 것은 하나도 없으며 내 것이라 말하지도 않습니다. 받은 것 있으면 ‘어떻게 나누어줄까?’ 먼저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셨고 우리도 평화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받은 자유와 기쁨도 나누어 주는 의무만 있습니다.
전하는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힘입니다.
어느 날 색을 선택하면서 연령대를 알아보는 게임을 하다 보니 저는 아직 30대에 속한 연령대에 있어 감사하면서 이렇게 살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기도 했습니다.
나이 들고 힘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늘 깨어 있어 손발을 움직이며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는 이들의 신원. -주님의 제자, 주님의 선교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는 순간 문득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정체성의 위기를, 신원의 위기를 겪는 오늘날입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교회나 주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동화되고 속화되어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을 통해 듣는 이구동성의 말은 결국 삶으로 직결됩니다. 사제들의 사제다운 삶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제들의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이 거의 절대적이라 합니다. 참으로 세상에 거슬러 예수님을 닮은 정말 영적, 내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의 삶을, 신원을 환히 비춰주는 본질적 내용으로 이뤄졌습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는 교회에 속한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쫒아내어라.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나 이제나 똑같은 시공을 초월한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그대로 주님의 일을 계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그대로 물려 받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새삼 화두로 부각되는 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 비전이 하늘 나라였습니다. 임박한 하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 몸소 하늘 나라를 살았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 나라 꿈의 상실이, 정체성 위기의 근본적 원인임을 깨닫습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나는 기적이 바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임을 믿습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주님은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주라 명령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비극적 무지의 현실은 그대로 임을 봅니다. 물론 역사의 진보는 믿지만, 여전한 탐욕의 현실에 과연 인간의 진보가 가능한지 문명의 야만시대, 반복되는 역사의 악순환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라 하십니다. 세상에 알게 모르게 대부분 앓는 병자들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병이 신앙을, 희망을, 사랑을 잃었을 때 영혼의 질병에 따라 오는 육신의 질병들입니다. 오늘로서 연중 제10주간이 끝나는데 영성체후 기도 첫 대목이 좋아 마음에 새겼습니다.
바로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로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우리 병을 고쳐주시는 주님의 성체입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병부터 낫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다음엔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라 하십니다. 육신은 살아 있어도 영혼이 시들어 죽어가는,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영혼들을 일으키라 하십니다. 희망을, 꿈을, 사랑을 잃고 무기력하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참 많이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이처럼 생각없이, 영혼없이 희망을 잃고 죽어 사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을 살려 일으키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날마다 미사은총으로 우선 먼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임을 일깨우면서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어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라 하십니다. 현대판 영적 나병들은, 마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그 중심에 자리잡는 온갖 마귀들이요 이어지는 무수한 영적 나병의 질환들입니다.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나 옛 수도교부들이 말한 여덟가지 악덕들인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나태, 허영, 교만을 통해 활약하는 마귀들이요 이와 함께 야기되는 온갖 영혼의 나병들입니다.
참으로 총체적 문제덩어리인 인간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총체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병을 고쳐주는 미사은총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려 일으키시고, 영적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온갖 마귀들을 일소시켜 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새삼 주님 안에 머물러 지내는 관상기도와도 같은 성전안에서의 성무일도와 미사전례가 우리의 총체적 치유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미사에 참석해 치유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명령입니다. 이어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소유의 삶을 명하십니다. 온전히 소유가 아닌 존재의 본질적 삶을, 착한 신자들의 환대에 의지하여 최소한도의 삶을 살라 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철저한 가난을, 참으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한 가난한 삶, 존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 나라에 희망을 두었을 때, 하느님께 모든 신뢰를 두었을 때 가능한 무소유의 삶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무소유가 아닌 무소유의 정신을, 집착없는 무욕의 삶을, 이탈의 초연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한 분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그 정신은 중요합니다. 선교사는 거지가 아닙니다. 이리저리 입맛대로 찾아 다니며 민폐를 끼치지 말고, 마땅한 한 곳에 머물라는 말씀이며, 그집에 머물게 되면 참 좋은 선물인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라 하십니다. 참으로 자신을 비운 삶의 통로를 통해 이웃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평화요, 평화와 함께 가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닮아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빛나는 선교사의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성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열두 사도에 이어 사도라 이름 붙이는 이는 단 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이 두 사도의 관계와 영적 우정이 참 각별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바르나바였습니다.
다음 대목이 바르나바의 인품을 잘 보여 줍니다. 원래의 이름은 요셉이었지만 그 넉넉한 인품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바르나바 이름을 갖게 된 사도입니다. 바오로의 부족한 면을 완전 보완해준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참으로 협조적이며 낙관적인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같은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특히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타르수스에 피신해 있던 바오로를 불러내어 1년간 그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바오로를 교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의 사도’를 교회에 선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덕의 여정에서도 마찰의 순간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은 2007년 1월 31일 일반 알현을 통해 하신 말씀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이 두 사람은 두 번째 선교여행의 시작부터 갈등을 겪었습니다. 바르나바가 요한 마르코를 동료로 같이 데려가려 했던 반면, 바오로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선교여행동안 요한이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인들 사이에서도 대립, 불화, 논쟁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저에게 많은 위안을 줍니다. 성인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성인들도 복잡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덕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덕은 회심과 참회의 역량 안에서 자랍니다. 성 바오로의 후기 서한에서 마르코는 ‘나의 협력자’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용서의 역량이 우리를 성인으로 만듭니다.”
참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두 성인의 관계에 대한 통찰입니다.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합니다. 사실 무소유의 삶보다 더 힘든 것이 공동생활이요 서로간의 관계입니다. 새삼 공동생활의 관계에는 정답이 없음을 봅니다.
서로 끊임없는 회개로 겸손히 자기를 비우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요, 이런 지칠줄 모르는 不退轉의 용기로 한결같이 파스카의 삶을 사는 이가 진정 성인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이자 참으로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꽃으로, 성인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흔들리지 않는 믿음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많은 신자분들이 인생의 고비마다 무속인들을 찾습니다. 무속인들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고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갈팡질팡하던 인생에서 내가 무언가 통제력을 갖게 된 듯한 착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들 신앙 여정은 그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지니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우리가 확실한 믿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체험이 필요할까요. 얼마나 많은 근거가 있어야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그분을 받아들이게 될까요. 실상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매 순간 믿음을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들 삶의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들의 총합을 신앙이라 부릅니다. 때때로 흔들리고, 의심하고, 냉담해지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우리의 방향성이 올바로 상정되어 있기만 하다면 조금 지체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기다림에 능하시고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친구가 파스칼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의 믿음을 갖고 싶네. 그래서 자네처럼 살고 싶네.” 그러자 파스칼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만약 자네가 나처럼 산다면 곧 나의 믿음을 가질 것일세.”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을 대하는
태도 변화가
생명을 바꾸어
놓는다.
거저 받은
가장 좋은
생명이다.
가장 좋은
생명은
가장
가치있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생명에 대한
반성이다.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다시 만나는
복음의 나눔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행동이며
올바른 성장이다.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에
함께하시는
실천의
주님이시다.
욕망의 감소가
나눔의 가치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행위의
참된 시작이다.
참된 행위는
참된 평화를
지향한다.
평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평화를 나누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가장 좋은
은총이다.
삶다운 삶
참다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참다운 삶은
애착과 집착이
아닌
지극한 나눔과
기도와 정성이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실천의 참된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거저 주시는
사랑과 용서를
대면하는
반가운 생명의
시간이다.
생명이란
변명이 아닌
변화가 필요한
복음의
행위이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은 손꼽히는 클래식 연주가로 그의 콘서트는 언제나 매진이고, 거의 시간당 6만 달러 이상을 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1713년에 만들어진 50억 원이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입니다.
2007년, 그에게 워싱턴포스트지가 한 가지 실험 제안을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고 야구모자를 쓴 채 지하철역에서 공연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45분 동안 연주했는데 7명의 사람만 하던 일을 멈추고 딱 1분 동안만 연주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앞을 지나쳤던 1,070명에게 벨의 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조슈아 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요? 1분이 아닌 45분을 꽉 채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앵콜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슈아 벨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 모두는 무관심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자주 놓치는 우리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 부정적인 마음으로 중요한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심지어 내게 해로운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할 것이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은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 말씀을 따라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지키기 힘든 말도 따를 수 있었고, 주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룩한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구두쇠 소리 들으면서 모은 돈을 하늘 나라에 갈 때 모두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모은 돈을 펑펑 쓰면서 살게 될까요?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지상의 모든 보물은 오히려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하나의 짐 덩어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사랑하라.
계속 생각하십시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첫째, 이 일을 왜 하는가?
자신에게 늘 내놓는 뻔한 답 말고,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계속 이대로 산다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엉성한 개념 말고,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지금 사는 대로 살면 당신은 어디에 이를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파고들어야만 자기 방해의 덫에서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내 삶을 방해하는 것은 늘 소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소한 것들이 결혼생활을 파탄 내고, 가족을 찢어놓고, 각종 중독에 빠지게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하면서 정반대의 행동 패턴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 생각하면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 뒤에는 탁월한 조력자 바르나바 사도가 있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뒤에는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카파소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성으로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뒤에는 회개한 아버지 버논 윈프리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나는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나쁜 것이 돌아온다고 느낄 때는?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아마도 이름대로 이웃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주는 것을 받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흔들림 없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하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좋은 것을 주라고 파견받지만 박해와 모욕과 죽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내가 주지 않은 안 좋은 것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잘해 줘봐야 보람도 없다며 잘해주기를 멈춰야 할까요? 그러나 주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만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많은 기적도 행했지만, 또한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바닷가 마을은 안토니오 성인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물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로 다시 갚아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100명이 들을법한 설교인데 1명만 듣는다면 99는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성 프란츠시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행복론은 더 특이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느니보다는 주님께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성인들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법칙을 아셨습니다.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께서 그 대신 더 큰 열매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남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을 나의 목에 칼을 댔다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이웃이 어떠한 반응을 하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면 받아서 좋고, 거부당해도 나는 사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 거부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위안으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 차례대로 합한 값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1+2+3+4+…+99+100’ 이렇게 하나하나 더해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다 더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놀라며 값을 물었습니다.
“5050입니다.”
10살 때 이 문제를 푼 소년의 이름은 19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될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습니다. 가우스는 무조건 1부터 100까지 더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00=101, 2+99=101, … , 99+2=101, 100+1=101”
1부터 100까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더하면 항상 101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이 50개가 생기니 101×50=5050이 나옵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에도 이러한 법칙이 숨어있습니다. 결코, 내가 하는 수고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 끝나지 않습니다. 1밖에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으로 도금된 100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거부당한다면 더욱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결과만 보고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때입니다. 이름이 기억나는 친구가 많지 않지만 유독 기억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름이 ‘박정희’였습니다. 당시 대통령과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박정희라는 친구의 이름을 부를 때는 웃곤 했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친구의 얼굴과 이름이 기억납니다. 매사가 반듯했던 그 친구는 주어진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좋습니다. 제게 세례명을 정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서 신문을 만들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이 지니는 뜻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말 중국에서 처음 코로나19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우한폐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병 앞에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지역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WHO는 공식 명칭을 ‘코로나19’로 정했습니다. 바이러스의 형태가 코로나(왕관)처럼 생겼고, 19번째 변이였기 때문에 코로나19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로나라는 이름 때문에 피해를 본 기업이 있습니다. 멕시코의 대표 주류인 ‘코로나 맥주’입니다. 저는 멕시코에 갔을 때 마셨고, 라임을 곁들여 마시면 상큼한 맥주입니다. 코로나19가 팬데믹(대유행)이 되면서 멕시코는 더 이상 코로나 맥주를 생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맥주를 판매하는 기업에게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운전하다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의 뜻은 무엇인지, 세례명의 성인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하는 건 어떨까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일화 중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마더데레사 수녀님께 이런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가난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거저 줌으로써 그들을 오히려 망치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인간의 품위를 상실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 주신 훌륭한 선물들을 보십시오. 여기 유리 창문이 없어도 우리는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대가 보는 것마다 하느님이 돈을 내라고 하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산소에도 돈을 지불하진 않습니다. 마약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대가 네 시간을 일한 대가로 두 시간의 햇볕을 주겠다'고 하실 양이면 우리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면서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당에 와서 교우들을 만나고, 서로 인사로 악수를 하고, 함께 미사를 드리고, 성가를 힘차게 부르고, 여러 가지 기도모임을 하고, 같이 식사도 하고, 같이 차도 나누어 마시고, 가끔 모여서 성지순례도 가고…….등등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우리는 감사한 줄 모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진정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느님께 그 동안에 베풀어주셨던 모든 은총에 대해서 감사드리면서 또한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이 시대에 우리가 하길 바라시는 사명을 또한 충실히 이루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신앙생활>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2020. 6. 11. 목)(마태 10,7-13)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이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활동 지침’인데, 관점을 바꾸어서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기쁜 소식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소식으로 바뀌었지만(루카 24,46-47; 사도 2,38),본질적으로 같은 복음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구원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이지 세속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속에서 잘 살게 되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한 적이 없습니다. (이쪽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만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중간 경유지에서 멈추어 서는 어리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신앙인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마귀들을 쫓아낸 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해 준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해 준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 할 수도 있고, ‘치유의 은총’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병이 치유되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하고 멈추면 안 됩니다. 바라는 대로 병이 낫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 실망해서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자기가 무상으로 받은 은총을 다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활동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 주는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전달해 주는 활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은 은총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봉헌 예물은 언제나 감사 예물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헌금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셨고, 계속 내려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하느님과 거래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는,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활동비 한 푼 없이 어떻게 선교활동을 하나?” 라고 걱정하면서 간다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는커녕 ‘걱정스러운 소식’만 전해 주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에 연결됩니다(마태 6,25-34).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에게 당연히 먹을 것을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빈손으로 가는 일꾼만이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그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실제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믿음도 없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숙식을 제공할 사람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먹이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도와주실 때도 있고, 천사를 보내실 때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실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도움이 곧 하느님의 은총일 때가 많습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를 보실 뿐이고, 성실하게 일했다면 실패의 책임은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업적을 쌓았는가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루하루 거룩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잘 드러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복음 선포, 치유, 구마 등 하느님의 일을 할 능력을 받아가지고 길을 나섭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에게 그들이 베풀게 될 구체적 능력들은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힘이 아니지요. 그것은 파견하시는 분이 당신을 대신할 이들에게 잠시 맡기신 능력입니다. 곧 파견과 동시에 위임받은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지니지 마라"(마태 10,9).
자기가 받은 것이 제 능력으로 쌓은 것이 아님을 잘 아는 제자들은 앞으로 필요한 것들도 주님께서 그렇게 채워주시리라는 신뢰를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증거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에게 만약을 대비해 무언가 여분의 것을 적당히 챙겨두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사도들에게는 그마저도 주님 손에 다 맡기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1).
"마땅한 사람"의 조건은 저마다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함께 머무르며 일하기에 누구에게는 이런 사람이, 또 누구에게는 저런 사람이 알맞겠지요. 각자의 성향과 소명에 걸맞는 인연을 만나는 일은 하느님께서 안배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르나바와 사울처럼 말이지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사도 11,24 참조)는 친히 사울을 찾아내어 새로운 길에 합류시키고 기꺼이 동료가 되어 줍니다. 사울에 대해 두려움과 의혹이 가시지 않은 이들도 바르나바를 보아서 사울을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떠날 때까지"(마태 10,11).
예수님은 떠남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또 머물게 된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떠날 사람이기도 하지요. 사도의 삶은 순례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축약판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한창 활발히 선교 활동에 전념할 때 성령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둘이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떠나보냈다"(사도 13,3).
그들은 순종합니다. 지상 삶에서, 더욱이 제자의 삶에서 영원한 안주란 없습니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의 뜻이 원하시는 곳 어디로나 떠나는 것이 제자된 삶의 일부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한때 서로에게 "마땅한 사람"이 되어 주었던 바르나바와 사울도 서로를 떠나야 할 때가 올 겁니다(사도 15,37-40 참조). 괜찮습니다. 당장은 갈등과 분열처럼 보일지라도 사심없이 주님의 뜻을 찾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모두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니까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에 자리를 잡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방인 선교는 물론 초대교회의 신학적 기틀을 마련한 바오로 사도를 기릴 때 그의 진정한 파트너, 바르나바 성인도 함께 떠올리게 되지요. 바르나바 성인은 당장 자신이 빛나지 않더라도,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가 꼭 자신이 아니어도 묵묵하고 충실히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진짜 사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바르나바 성인께 우리 모두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에게 기꺼이 손 내밀 수 있고, 그의 곁에서 충직한 협조자로 머무를 수 있는 겸손도 얻어주십사고 청합시다.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기꺼이 나눌 줄 알고, 또 머무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지혜도 청합시다.
성 바르나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인류의 평화운동은 가톨릭정신에서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돈도 옷도 신발 지팡이도 챙기지 말고 즉시 하늘나라 전하라했습니다.
복음 선포는 지금 세상의 정치사회문제 대충 알아봐도 아주 급합니다.
중국 북한 그리고 험악하고 뭉개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그렇습니다.
하늘 모르고 남도 모르고 하늘계명 세상법 속여 가며 개인야욕뿐이죠.
인간세상 아닌 동물인간 식 독재왕국 디밀며 존엄성 자유 망쳐갑니다.
인류의 평화운동은 가톨릭정신 하느님가족정신 없으면 절대 못합니다.
겉으로 보면 볼수록 복잡한 인간을 하느님가족 되게 하기 어렵습니다.
종교박물관 같은 한국 예수 빙자한 야욕문란 막기위해 선교 급합니다.
미션을 향한 순수성이 커갈 때,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비가 내린다. 양서류들이 힘차게 울어댄다. 밤새도록 아름다운 협주곡을 들었다. 피곤이 싹 가신다. 자연음이 풍요롭다. 감사로 가득하다.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축일이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하느님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오르지 사람만이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사울과 만났다. 사울은 은총과 자비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지만 사람 구실을 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바르나바는 은인이 되어 주었다. 바오로의 빈약함과 바르나바의 풍요가 서로 만나 풍요가 풍요를 만든다.
세상을 살면서 순수한 열정으로 길을 떠나보라. 하느님 뜻을 지니고 길을 떠나보라. 그러면 사람 속에 사람을 만난다. 미션은 커가고 평화로 가득하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르나바는 사도의 시작을 알리는 바오로에게 은인이 되어주고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포웅하고 서로 만난다. 하느님과 함께 떠난 선교여행은 미션이 커가며 서로에게 아름다운 동행이 펼쳐진다.
미션을 향한 순수성이 내 안에서 커갈 때,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위해 더 큰 은인을 파견하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10,7-10).
바오로를 위한 하느님의 나팔, 바르나바 - 거룩한 변화를 위한 실천 ⓸ 사람을 알아보기
이기우 신부님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바르나바는 초대교회 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의 믿음과 여기서 우러나오는 활동에다가, 이에 감명받은 신자들의 공동생활을 보고, 가진 재산을 다 바치고 신앙생활에 입문한 사람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기만 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의로움을 위한 십자가를 저마다 짊어질 동료요 형제자매로서 함께 지낼 만큼 인격적 신뢰가 갖추어진 사람들이었으며, 게다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가진 재산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 신용도 갖추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과 신뢰와 신용을 갖추어 온전히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바르나바의 이상이자 꿈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사도단에서는 바르나바를 신입 사도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맡겼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보고 겪었던 공동체를 본받아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반듯한 공동체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장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고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하여 외부로 나아가 선교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즈음에, 그곳 교우들로부터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타르수스로 찾아가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사울은 박해자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벼락 사건 이후 십여 년째 잠심하면서 자신의 소명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동지였던 바리사이들도, 미래의 동지가 될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다 그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바르나바의 역할은 이 만남에서 돋보였습니다. 사울을 사도단에게 소개시키고 신원을 보증 한 이유도 사람됨을 알아보는 그의 안목 덕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벼락 사건 못지않게 사울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울은 로마식 이름으로 자기 이름을 바꾸었고, 신자들 사이에서 바오로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회심하고 나서 그 회심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된 데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선교활동으로 봉사하고자 하였습니다. 회심한 이후 십여 년 동안 잠심하면서 구약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면서 예수는 메시아로 오신 하느님이시라는 확신이 들은 후였기 때문에 망설일 것도 없었고,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의 기본을 배우기도 했기 때문에 모든 준비가 다 되었을 때,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을 시켜 할 일이 있다.”
우선 바르나바의 고향이라서 잘 알고 있던 키프러스부터 시작해서 소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로 선교활동의 큰 방향이 잡혔습니다. 이때 바르나바의 조카인 요한 마르코도 동참시켰는데, 이로 인해 훗날 마르코 복음서가 쓰여지게 되는 기본 체험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바르나바로 인해 사울이 사도단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파견한 선교사로 나설 수 있게 되었고, 그 방향은 소아시아로 잡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안티오키아 공동체 소속의 선교사로서 소아시아와 나중에는 그리스가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도 바르나바의 덕분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복음화의 도구로 삼으신 성령의 계획 속에는 신앙과 신뢰와 신용으로 온전한 믿음을 구현할 수 있었던 예루살렘 공동체의 역사가 바탕이 되어 있었고, 또 박해를 피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적 열의로 가득찬 안티오키아 공동체의 역사가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이에는 갈등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선교여행 도중에 요한 마르코가 동의를 받지도 않고 이스라엘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후의 행적을 보면 요한 마르코는 선교적 소명의식이 식었던 것이 아니라 혼자서 더 많은 증인들을 찾아다니며 취재를 해서 역사상 최초의 복음서를 써 냈는데 이 복음서에는 사도가 된 바오로로부터 배운 십자가의 그리스도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고, 이 사상과 신념을 자신이 지도하던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선교여행을 떠날 때 이 일이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이에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요한 마르코를 이해할 수 있었던 바르나바는 그를 두 번째 선교여행에도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지만, 요한 마르코를 이해할 수 없었던 바오로는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서로 갈라져서 바르나바는 복음이 전해진 키프러스로 가서 공동체를 일구고자 했고, 바오로는 소아시아 내륙 깊숙이 갈라티아 지방을 거쳐 그리스 일대로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를 모태로 로마가 복음화되고 나중에 유럽 대륙 전체가 복음화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 두 사도의 갈등과 분열이 씨앗이 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 일조차도 성령의 계획 안에서 조율될 수 있었던 듯 합니다. 나중에 인생 말년에 이른 바오로가 로마 공동체에 편지를 쓰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고 회고할 수 있었던 사연 속에는 바르나바와의 이 만남과 갈등 그리고 헤어짐이 숨어 있을 것 같습니다.
성령 안에서 바르나바는 바오로를 위한, 하느님의 나팔이었습니다.
<바로 네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로 너를 믿기에
바로 너를 바라기에
바로 너를 사랑하기에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너를 내가 뽑았으니
네가 가거라
세상 속 깊이 사람들에게
네가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네가 고쳐주어라
아픔으로 울부짖는 이들을
네가 일으켜 주어라
짓눌리고 쓰러진 이들을
네가 깨끗하게 해주어라
몸과 마음 찢겨진 이들을
네가 쫓아내어라
불의를 일삼는 악의 무리들을
네가 거저 주어라
네가 내게 받은 모든 것을
네가 지니지 마라
나 이외의 그 모든 것을
네가 빌어주어라
평화를 누릴만한 이에게 평화를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네가 그리 하여라
다른 누구를 찾지 말고
바로 너부터 그리 하여라
다른 누가 없더라도
네가 홀로라도 그리 하여라
복음 선포의 선교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살라고 선물로 주어진 각자 고유의 인생입니다. 과연 얼마나 참 자기를, 몇%나 참 자기를 살고 인생을 마칠까요? 평생 살아도 자기를 모르고 거짓 나를 자기로 착각하여 헛된 삶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중요한 필생의 일이 참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승들은 무엇을 하기 위해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람, 참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승의 평생 과제가 하느님을 찾는 일인 것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없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기는 참으로 요원합니다.
‘참 사람이 되는 것인가’, 혹은 ‘참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가능하겠습니다만 결국은 한 진리에 대한 두 측면의 표현입니다. 이를 하나로 종합하면 참 자기가 되어 가는 과정은 하느님 창조하신 본래의 참 자기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한겨레 신문 21면(조현의 휴심정) 기사가 이채로웠습니다. “성경이란, 삶에 적용해야 비로소 ‘읽었다’할 수 있는 것”이란 ‘읽는다는 것’책의 집필자(강영안)와의 인터뷰 기사가 전면을 차지하다 시피했고, ‘불안감 치유에도 훈련이 필요해’라는 기사와 ‘조울의 강, 우리가 함께 건너야 할 때’라는 기사의 구성이 상징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2016-2018년 3년간 20대 가운데 우울증, 불안장애, 스트레스 증상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이 무려 50만명이었다 합니다.
아, 바로 불안감과 조울증에 대한 근원적 해결이 바로 성경에,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특히 정신질환은 그러합니다. 발병에 앞서 참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함으로 마음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 드리다 시피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방향, 삶의 목표를 견고히 함이 정신 건강의 첩경입니다. 이래서 성경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어제 뜻밖에 전화를 받고 반가웠습니다. “삶이 재미로 사나요. 살아야 하는 의무니까 사는 것이지요.” 이 말을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 재미있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미건조하고 힘든 날들도 대부분이요 이를 견디며 버티며 한결같이 살 수 있음은 바로 삶의 중심과 삶의 의미가 확고하기에 가능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일반 알현시 말씀의 주제도 기도였습니다. 창세기의 야곱을 기도의 모델로 하여 ‘하느님과의 레슬링(싸움)은 바로 기도의 메타포(은유)’라는 내용의 강론이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바로 하느님과의 레슬링시간이요 이보다 정신건강에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더불어 아주 예전 재미있게 인용한 팬티와 팬티천 일화가 생각납니다. 사제생활 초창기때 강론에 인용했던 예인데 수십년만에 만나 자매가 이 일화를 잊지 못한다며 전해 줬습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만 튼튼하다면 패티천은 아무리 낡고 떨어져도 입을 수 있듯이 영혼과 육신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러니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통해 팬티끈같은 영혼을, 정신을 튼튼히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어제 저녁기도와 묵상중 각별한 체험 또한 잊지 못합니다. 시편 말씀의 묵상이 새로웠습니다.
“내 영혼아 고이 쉬라 오직 하느님 안에서, 님께로부터 내 구원이 오나니. 님만이 나의 바위, 내 구원, 내 성채시기에,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내 구원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나니, 하느님은 굳센 바위, 내 피난처시다. 백성들아, 너희 항상 주께 바라라, 당신 앞에 너희 마음 열어 놓아라 우리의 피난처는 하느님이시다.”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기도하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님이 빠질 때 무엇으로 이것을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이래서 하느님 중심 자리에 헛된 우상들이 등장하는 것이며 무수한 정신질환들입니다. 하여 사람은 중심을 잃어 야수가 되고 괴물이 되고 악마가 되고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아닌 어디서 우리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겠으며 하느님 아닌 어디서 궁극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겠는지요?
또 하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로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시편말씀이든 예수님 이름이든 건성으로 바칠 것이 아니라 깨어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 맛보며 바쳐야 겠다는 참 각별한 체험의 시간이었습니다.
참 건강한 하느님의 사람, 참 사람의 모범이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복음 선포의 빛나는 선교사 바르나바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 뜻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바르나바의 빛나는 전인적 인품이 다음 묘사에 잘 드러납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 정말 참 사람의 모범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뿐 아니라 오늘 예수님께 파견받는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선교사, 사도들 또한 참 사람의 모범들입니다. 텅 빈 존재에 말씀 선포와 더불어 치유이적, 구마이적의 능력을 가득 안고 떠나는 사도들, 가난하나 참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강물도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요 고이면 썩듯이, 거저 받은 것을 끊임없이 줌으로 나눠야 맑은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건강한 영적 삶의 비결이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사로 살아가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저절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나누는 삶일 것입니다. 몰라서 독점이지 알면 알수록 나눕니다. 나눌 때 참 기쁨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주님으로 가득차 있기에 무소유의 홀가분한 차림으로 선교여정에 오르는 가난하나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한 사도들입니다. 신자들의 환대의 사랑에 의지하여 치유와 구마, 위로와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 하늘 나라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줌으로 참 자유인의 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문명의 야만시대입니다. 길을 잃은 문명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하나뿐인 우리의 어머니인 지구도 위태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역시 지구가 건강치 못하다는, 병들었다는 반증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쓰레기와 전쟁중이라 합니다.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수도원에서 나가는 쓰레기만해도 얼마나 많은 지요. 문제는 무지의 사람들, 탐욕의 사람들인 우리로부터 기인합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의 사람, 참 사람으로 거듭 매일, 평생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웃으며smile’, ‘느리고slow’ ‘단순한simple’ 3S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선교사, 바로 우리 모두의 신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범한 일상에서 하늘 나라 복음을 삶으로 선포하며, 치유와 위로, 평화의 선교사가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함승수 신부님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 《토비아스의 우물》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다른 동네와는 달리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커다란 우물을 소유한 ‘토비아스’라는 사람이 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거저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비아스는 아들 쥘리안과 함께 먼 길을 떠나면서 우물 관리를 하인 엘제비르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이에게는 거저준다’는 원칙은 그대로였지요.
처음 얼마 동안 엘제비르는 주인의 뜻을 받들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물을 퍼 주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물을 이용하여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자기에게 감사를 표하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엘제비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물을 얻기 위해 매번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엘제비르는 감사인사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예쁘게 보이는 사람에게만 물을 주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주민들은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물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엘제비르의 눈에 들고자 안간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물가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엘제비르는 그도 물을 얻으러 온 사람이려니 하고 거드름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물 주인 토비아스의 아들 쥘리안이었고, 그는 주민들에게 예전처럼 누구든지 마음껏 물을 거저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이제야 기쁨을 되찾게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쥘리안에게 그동안 엘제비르가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의 물건을 이용하여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한 그에겐 물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성토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러나 쥘리안은, 저 사람에게도 물을 거저 주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라며 엘제비르를 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엘제비르는 주인의 조건없는 사랑에 감동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엘제비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나온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거저’ 주셨고, 우리는 그 덕에 어느 것 하나 결핍되지 않고 충분한 삶, 충만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거저 받은 것을 나누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우리들입니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양, 내가 그것을 나누면 대단한 손해라도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내가 그것을 나누면 대단한 희생이라도 치러야 되는 것처럼 볼멘 소리를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다시 한 번 조건없는 용서와 자비를 베풀게 하심으로써 그런 우리를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는 주님을 알게 된 후, 자신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아낌없이 교회 공동체에 봉헌한 사람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실천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선한 행동 안에서 성령의 활동하심을 느꼈고, 그로 인해 마음에 커다란 위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바르나바 사도를 ‘위로의 아들’이라 칭송하며 존경하고 사랑했던 것이지요. 나는 주님을 위해 어떤 것까지 봉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명실상부名實相符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잘 아시다시피 열두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 분이 바로 바오로 사도와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두 분이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 못지않게 교회를 세우고 받치는 기둥이었다고 우리 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바르나바는 우선 교회가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교의 한 지파이거나 유대교의 이단 정도로 여겨지던 교회가 이제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교회로 인정받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저는 불리는 것의 중요함을 오늘 생각해봅니다. 자기가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불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냐 하면 자기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교회가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된 것인데 바르나바가 어찌 했기에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된 걸까요?
우선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우선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덧붙여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착함이 그의 인성이라면 성령과 믿음의 충만함은 그의 영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착한 인성이 바탕이 되었기에 그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 교회도 좋은 평판과 함께 그리스도교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나 우리 주변을 보나 인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 신앙에 열심한 사람이 있는데 이럴 때 그들의 영성이란 괴팍하게 보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가 좋은 평판을 얻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지요.
제가 너무 비하적으로 또는 너무 자학적으로 저를 보는 것인지 모르지만 저는 저로 인해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극히 적고, 저로 인해 수도원 들어온 사람이 없다는 것에 열등감이 있고 부끄러운데 이것이 저의 신앙적인 열성 이전에 인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저를 '마당쇠'라고 불렀는데 저 스스로는 저를 주님의 마당쇠라고 하고 주님의 마당쇠가 되겠다고 하지만 명실상부하지 않습니다.
과거 형제들을 양성할 때 얼마나 많이 도끼눈을 떴으면 형제들이 저를 '도끼눈'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이것이 명실상부 진짜 제 이름인 것이고, 이런 저이기에 복음 선포가 시작부터 벽에 부딪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육신의 형제들이 자주 저에게 충고하기를 자주 웃어주고, 자주 손을 잡아주라고 하는데 이런 것부터 못하며 복음 선포가 되길 바라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위로의 아들'이라 불린 바르나바를 오늘 무척 부러운데, 이렇게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닮으려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 <마태 10, 7-1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첫 번째 전해주신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부르짖은 말씀입니다. 이 말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우리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나라에 살게 하는 복음 전파입니다. 예전에는 어머니로부터 전해주신 믿음의 삶을 하면서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살고 그 나라의 참 행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 믿음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하느님의 나라에 살고 있으며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어야 복음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것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공짜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저 주어야 합니다.
상담 시 저는 기도를 가르치며 주의 기도를 한번 하시라고 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의미를 물어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하면 머뭇거립니다. 어떤 나라일까요? 그 나라는 자유, 평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오신 나라에 살 권리도 있고 그 뜻대로 살아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어떤 나라인지 모르고 기도했다면 올바른 기도의 삶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그 나라에 살 권리가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도 그 집에 들어가거든 “평화를 빈다.”라고 인사하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자유, 평화,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내가 자유, 평화, 기쁨을 느끼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위 하느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내가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기본적 태도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 재물을 탐내지 않는 사람 평화를 누립니다. 상대의 것을 얻으려 하고, 빼앗으려 하거나 자기 것을 베풀지 않으려고 하면 평화는 없습니다. 기쁨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즐기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어떤 경기에 우승하면 반드시 누구하고 함께 즐기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수도 생활의 근본 자세는 하느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실제 그렇게 사는 이가 드물지만 외적으로 순명, 청빈, 정결 서원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한 본질적 자세입니다. 내 것은 없고 모두 하느님의 것이니 자유롭고, 평화스럽고, 기쁨이 넘칩니다.
미사 끝에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 이는 모든 신자의 의무입니다. 미사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을 입고 죄와 악에서 자유를 얻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면서 하느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것은 내 것이 되고, 영성체로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으니 기뻐합니다. 미사는 우리에게 매일 하느님 나라에 사는 은총을 주셔서 복음 자체이신 주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사도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교를 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선교를 할 때, 혹여 내가 잘 못해서 안 되나 보다. 내가 실력이 없어서 안 되나 보다 하는 자책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어던 때는 될 때까지 더 해봐야 하는데, 잘 안 되었다고 실의에 빠져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교 성공의 관건은 우리 선교의 전략과 내 세치의 혀와 몇 번의 선교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이의 때와 사정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주 하느님께서 그 때를 결정하시고 그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서, 오늘 또 내일 이렇게 저렇게 시도하며, 주님께서 때와 상황을 열고 무르익히실 때까지 꾸준하고 진실하게 선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나 주님의 사업을 실망하고 불신하지 않고, 주님의 평화를 잃지 않은 채, 주님 사랑 안에서 주님 사업을 이어나가기로 합시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외국에 가면 입국 심사를 받기 마련입니다. 이민이라도 간다면 미리 그 나라가 제시하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를 선포하라고 명하시며 몇 가지를 당부하시는데, 이를 하늘 나라 입국에 필요한 자세로 묵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첫 번째는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지요. 이는 긍정적인 말을 서로 건네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쟁터 마냥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각박해진 마음이 치유되도록 칭찬의 말을 건네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참 신기해서 아주 작은 눈빛이나 말로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따뜻한 눈빛과 애정어린 말 한마디에 그 상처가 치유되기도 하니 말입니다. 두 번째는 재물이나 지팡이가 아닌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분과 그분께서 만드신 피조물 사이에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 번째는 평화를 빌어주는 것인데, 매일의 삶에서 서로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실천해볼 수 있겠습니다. 입으로만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미소를 보낼 때 서로의 마음도 위로를 얻게 될 테니 말이지요. 이러한 일상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우리가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모되고, 또 그 나라를 선포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를 믿고
살아가는지를
진심으로
묻게됩니다.
지닌만큼 더
자유롭지 못한
이 부르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는
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시간을 놓치지
않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모든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 또한
하느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과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것은
거저 나누는
삶입니다.
삶의 이유가
나누는 사랑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실상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떠나는
순례의 여정임을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