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를 선택하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7,6-11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7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 없이 직접 갚으신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너희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어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이니,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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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오로지 주님께 봉헌된 백성이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율법을 실천하고 약속에 충실하며 진실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제1독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죄 제물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 안에 머무르며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제2독서). 누구나 삶의 등짐이 있고 멍에가 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예수님께 배우고 성실히 살아가면 어느덧 짐은 가벼워지고 멍에는 편해진다.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리십니다. 이 감사의 내용은 역설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을”(마태 11,25) 감추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곧 치유와 자비, 새로운 시대가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 낯선 일일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1,25), 곧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을 읽어 내지 못합니다. 켜켜이 쌓아 온 삶의 방식과 그에 따라 이미 몸에 밴 자기만의 논리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철부지들”(11,25)이 그 세상과 가깝습니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이해가 아니라 신뢰가 먼저 일어나는 자리, 그곳이 철부지의 자리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11,27). 이는 단순히 권력 선언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친교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는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이에게만 열립니다. 25절에 나오는 ‘드러내다’는 그리스 말에서 ‘계시’의 동사형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철부지들”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밝히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더 많이 노력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나아가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가능합니다. 내 눈의 들보를 들어내 사람을, 세상을, 그 고유함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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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날입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의 바탕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지니신 한없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고자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어(창세 1,26-27 참조) 그 사랑의 충만함을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애틋한 마음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시는 계약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제1독서 참조). 비록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과 맺은 계약에 불충실한 모습을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품으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십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 배반을 바로잡아 주리라”(예레 3,22).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아드님의 파견으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제2독서는 하느님을 사랑이신 분으로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요한 1,14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며 연민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애로운 마음을 꼭 닮은 아드님의 성심을 공경하는 오늘, 우리는 특별히 사제들이 성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아, 각자의 소임지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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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를 꿈꾸는 학생들을 양성하면서 답답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양성을 담당하는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본디 가르치고 기르는 처지에서는 배우는 이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이 스스로 깨치고 성숙해질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려고 애를 씁니다. 열두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던 예수님께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그분께서도 제자들을 ‘철부지’라고 부르고 계시니 말입니다.
사실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철없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마귀를 쫓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악령에 시달리는 아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논쟁을 하는가 하면,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에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런 철부지 제자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은 놀랍습니다. 한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니 말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적인 지혜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입니다. 비록 철없고 부족하지만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때 그분의 권능이 그 사람 안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정녕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2코린 12,9)해야 할 철부지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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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우리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바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요, 그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마음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인격의 중심을 이루는 실체입니다. 또한 마음은 나 자신의 감정, 에너지, 판단뿐만 아니라 나의 내밀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내 감정과 표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드러내는 사랑이 진짜인지를 가려내는 기준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그분의 마음은 스토아학파의 사랑도, 플라톤의 사랑도 아닌, 부드럽고, 섬세하고, 심오한 사랑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린이의 순수함에 기쁨을 느끼시고, 순수한 젊은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죄인들과 병자들과 과부들 같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분 마음의 정수는 그분의 죽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갈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충만함을 얻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상처받은 마음은 창에 찔린 예수님의 마음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인간의 신비가 하느님의 신비를 만나는 거룩하고 초월적인 장소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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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에는 우리의 ‘마음의 길’에 대해서도 각별히 생각하게 됩니다. 문득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이 말한 ‘마음의 논리’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철학 책 『팡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단상은 퍽 인상적입니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를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안다. 마음이 어느 것에 충실한지에 따라 보편적 존재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에는 냉담해진다. 당신은 마음을 거부하고 이성을 택하였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 때문인가?”
이 말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이기심의 덫에 갇혀 살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할 것인지는 ‘마음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새겨 봅니다. 파스칼의 생각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이성만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서도 진리를 알게 되며, 더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알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자주 어둡고 무디어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데 무력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사랑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 때만이 비로소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아 뵙습니다. 우리 마음의 길이 사랑을 향할 때만이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면서 확실하게 알려 줍니다. 파스칼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와 정신을, 그리고 그들의 모든 업적을 함께 모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의 사랑의 움직임을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다. 사랑은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 성심을 마음에 품으며 저의 마음도 그 사랑의 질서가 당기는 힘에 깊이 이끌리기를 성체 앞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편안한 멍에이며 제 마음에 미혹과 이기심이 아니라 ‘진리’라는 가벼운 짐을 지어 주시리라는 점을 믿기에 그분 앞에 머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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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송아지가 어미젖을 갓 떼고 나면 목에 고삐를 매어 끌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얼마쯤 자라면 코를 뚫어서 코뚜레를 걸게 됩니다. 힘이 세진 송아지를 다루기 쉽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 반쯤 지나면 소는 멍에를 메는 훈련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짐을 나르다가 멍에에 익숙해지면 본격적으로 크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논밭을 갈게 됩니다.
이렇게 일소가 되어 죽을 때까지 워낭을 달고 멍에를 메고 일을 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농촌의 풍경이지만 지난날 우리 농촌의 일소들은 순하고 충직하게 자신의 멍에를 메고 일생을 하루같이 일하며 살았습니다. 일소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 냅니다. 이로써 일터와 사람과 떼려야 뗄 수없이 엮여 있던 삶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렇게 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일소가 코뚜레를 걸고 워낭을 달고 살듯, 자신의 삶의 멍에를 묵묵히 메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삶의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 낼 수 있을까, 사는 동안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나아갑니다.
어느 누군가는 요즘은 눈치 빠르고 남을 속이며 약삭빠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삶의 멍에를 메고 소처럼 정직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진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연과 사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참으로 하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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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잘 보이는 동편에 오동나무를 심었습니다. 딸이 걷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란 오동나무를 잘라 버립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이상하였습니다. ‘그럴 바에야 심지를 말지.’
그러나 오동나무는 다시 자랐습니다. 잘려 나간 자리에 싹이 돋고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또 잘랐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이 참으로 이상했지만 너무 진지한 모습에 입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동나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늘을 향해 자라났습니다.
혼기가 찬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딸의 나이와 똑같은 그 오동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완전히 베어 버렸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시집갈 딸의 장롱을 만들어 주며 말하였습니다. “얘야, 두 번 잘라 준 다음 자란 오동나무야말로 진정 단단한 재목이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란 나무는 속이 비어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단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먹을 때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먹고 자란 자식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절로 성숙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중학생 때, 부모님께서는 전축을 사 오셨습니다. 전축은 ‘전기축음기(電氣蓄音機)’의 줄임말로, LP(레코드판)를 재생하는 턴테이블, 라디오, 앰프, 스피커 등이 하나로 통합된 오디오 시스템을 가리키는 옛 표현입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엘피판을 턴테이블에 올려야만 했습니다. A면을 다 들으면 B면으로 뒤집어서 세심한 손길로 바늘을 얹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또 내구성이 약하고 먼지에 대한 취약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CD(compact disc)가 등장했습니다. 간편한 데다 음질도 깨끗하고 선명했습니다. 이 CD가 음악시장을 완전히 평정할 줄 알았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CD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디지털 음원의 등장과 인터넷을 이용한 음원 스트리밍으로 전체 음반 시장이 급격한 속도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예전의 엘피판이 자연스럽고 풍부한 소리를 낸다며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또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인 분이시기에 그분께 집중함으로 인해 사랑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 바로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또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 직무를 더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세상을 윽박지르는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이를 어루만지는 온유함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는 겸손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멍에’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농경 문화에서 ‘멍에’는 보통 두 마리의 소가 함께 끌었습니다. 어린 소가 멍에 메는 법을 배울 때, 힘센 어미 소와 한 멍에를 매게 하여 어미 소가 사실상 모든 짐을 감당하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라’는 것은 새로운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한 멍에를 매시고 내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시겠다는 사랑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삶 안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결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거룩하신 예수님 성심 안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편하고 내 짐은 분명 가벼워집니다. 특별히 사제 성화의 날인 오늘, 사제직이라는 멍에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에 무척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성화를 위한 여러분의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고통을 동정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신과 같은 일입니다(호러스 맨).
운명하시면서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 다시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공경에 대한 근거는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 금요일 오후 세시,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십자가형은 형 집행 방법 중에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체력이 좋은 사형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틀 사흘까지 견딥니다. 집행관들도 피비린내 나는 사형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사형수들의 얼굴을 유심히 봅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적당한 때가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립니다. 그럼 체중이 아래로 쏠리고 심장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즉시 운명하게 됩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어서, 유다인들이 군사들에게 빨리 좀 처리해달라고 청합니다. 집행관들이 먼저 좌도와 우도의 다리를 꺾고 난 다음, 예수님 다리도 꺾으려고 봤더니, 이미 운명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 사살 차원에서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뭐가 나왔을까요?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님의 옆구리, 곧 예수님의 심장,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은 죄로 인해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을 의미합니다. 피는 새로 태어난 백성을 양육하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많은 분이 사제인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 성찬의 전례 시작 때, 포도주에 물을 살짝 부으시던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포도주가 너무 독해서 물로 희석시키는 의미인가요?”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사제들은 포도주잔에 물을 살짝 첨가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사 경문에 살짝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미사 집전 사제는 포도주잔에 물을 넣으면서 마음 속으로 한 문장을 읽게 되어있습니다.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물은 인성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결국 포도주에 물을 넣는 행위는 죄인인 우리의 인성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곧 예수 성심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한국에서는 소풍과 수학여행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압사 사고 이후, 안전과 책임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학교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려는 노력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시간’입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경쟁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시험과 평가를 통해 학생들은 끊임없이 비교되고 서열화됩니다. 그러나 소풍과 수학여행에서는 달랐습니다. 성적순으로 줄을 서지 않았고, 점수로 평가받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친구의 새로운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도 학창 시절 소풍을 가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응원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교실에서는 성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소풍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풍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풍과 수학여행은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의 공간도 아니고, 규율의 공간도 아닌, 관계가 살아나는 공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사랑입니다. 평가하기 전에 사랑하시고, 판단하기 전에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학교처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에서만 가르치신 것도 아닙니다. 길 위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소풍과도 같고, 수학여행과도 같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고, 때로는 실패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평가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시 불러주시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마음, 부족해도 품어주시는 마음,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입니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음악회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소풍과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나 실력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재능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를 응원하며 기뻐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노래를 잘하고, 누군가는 악기를 잘 다루고, 또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묵묵히 봉사할 것입니다. 그 모든 모습이 소중합니다. 그 모든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바로 그런 다양성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서로를 비교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잘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점수로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신앙은 평가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며,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비교하기보다 격려하며, 평가하기보다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본당이, 우리 가정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누군가에게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성심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를 평가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당신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저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넘겨주셨으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하느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넘겨주셨으니
믿음으로
믿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희망을
넘겨주셨으니
희망함으로
희망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사랑을
넘겨주셨으니
사랑함으로
사랑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빛을
넘겨주셨으니
빛남으로
빛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넘겨주셨으니
기뻐함으로
기뻐하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움을
넘겨주셨으니
고움으로
곱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드러움을
넘겨주셨으니
부드러움으로
부드럽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곧음을
넘겨주셨으니
곧음으로
곧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품음을
넘겨주셨으니
품음으로
품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눔을
넘겨주셨으니
나눔으로
나누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돌봄을
넘겨주셨으니
돌봄으로
돌보게 하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살림을
넘겨주셨으니
살림으로
살리게 하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성심, 곧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우리도 본받고자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멍에는 농기구 중의 하나로서 소와 주인이 하나가 되어 바르게 경작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멍에가 있기 때문에 주인이 원하는 데로 소는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주신다는 것은 바로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짐의 경우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구원을 향한 여행을 떠나는 데에 있어서 챙기고 가야할 꼭 필요한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짐 안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양식이 있고, 도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늘 언제나 멍에와도 같이 주님과 늘 연결되어 함께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짐을 지고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베푸시는 예수 성심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
김웅태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 사제 성화의 날 — 2026년 6월 12일
제1독서: 신명기 7장 6-11절
제2독서: 요한 1서 4장 7-16절
복음: 마태오 복음 11장 25-30절
1. 시작하며: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열린 피난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록이 더욱 푸르러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인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울러 오늘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교회의 목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늘 무언가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립니다. 직장에서는 유능함을, 가정에서는 완벽한 부모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깊은 피로와 영적 목마름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우리 모두를 당신의 거룩한 마음, 곧 성심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2. 조건 없는 선택과 하느님의 참마음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께서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크고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신명 7,7-8)
주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훌륭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작고 약했기 때문에 그들을 품어 안으셨습니다. 상처 입고 약한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가는 부모의 사랑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먼저 마음을 기울이셨습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그 하느님의 본질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 4,8.16 참조)
이 사랑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찾아내고 사랑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고 길을 잃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심으로써 당신의 성심을 온전히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며,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입니다.
3.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 만난 쉼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멍에에 짓눌린 우리를 부드럽게 부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앞날에 대한 염려일 수도 있고, 경제적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노화와 질병, 부부와 이웃 간의 갈등, 혹은 “더 완벽해야 한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스스로의 채찍질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지친 일상속에서 예수 성심이 주시는 위로를 잘 보여주는 한 교우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늘 책임감에 짓눌려 살아가던 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인정받는 직원이어야 했고, 가정에서는 든든한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여야 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한 채, 늘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하며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져 무작정 성당 성체조배실로 향했습니다. 어두운 조배실 안에서 그는 제대 옆에 모셔진 예수 성심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상처 입었으나 여전히 따뜻하게 타오르는 예수님의 심장이 그날따라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하지만 강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에서 늘 너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느라 얼마나 피곤했느냐? 여기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지친 모습 그대로,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너는 나에게 소중하다. 애쓰지 말고 내 성심 안에서 잠시 쉬어라.”
그는 그날 오랫동안 굳어 있던 어깨를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문을 나설 때,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참된 안식을 체험했습니다. 예수 성심의 온유함이 그의 거칠어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분의 겸손함이 그의 불안을 평화로 바꾸어 준 것입니다.
4. 온유하고 겸손한 성심을 본받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예수님의 멍에는 우리를 옥죄는 속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한 수레를 이끌며 걷는 사랑의 동반입니다. 주님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온유함과 겸손함이라는 영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온유함은 상대방의 연약함을 다정하게 품어 주는 힘입니다. 겸손함은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의 발을 씻겨 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입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마음을 닫기보다, 상처를 품어 안고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신 예수님의 성심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또한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교우 여러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제들도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인간입니다. 때로는 외로움에 지치고, 사목적 한계 앞에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이 착한 목자 예수님의 성심을 더욱 깊이 닮아 갈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와 영적인 기도로 함께해 주십시오.
교우들의 기도는 사제들을 성화시키고, 성화된 사제들은 다시 교우들을 거룩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5. 마치며: 성심의 샘터에서 길어 올리는 평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거룩한 심장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 성심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아내신 사랑의 심장입니다.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오늘날 교회의 성사들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씻어 주고 먹여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여정이 유독 고단하고 지칠 때마다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예수 성심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근심과 상처, 두려움과 피로를 그분의 사랑 안에 맡겨 드립시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성심,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주님의 성심을 찬미하며, 이 거룩한 신비를 우리 삶 속에서 기쁘게 살아갑시다. 아멘.
마음이 주님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살지 못합니다. <요한 4, 7-16> 6월 1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 생각, 주님 말씀, 주님의 행위를 따른다 해도 마음 안에 주님 살아 있지 않으면 참믿음으로 주님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으로 산다 해도 마음이 주님을 떠나 있으면 주님 중심으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얼굴이 곱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다.”라는 말처럼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가 진, 선, 미를 따른다고 해도 마음이 없으면 거짓이고 악이고 추함입니다.
가끔 방송에 패널로 나와서 나라의 중대사를 논하는 사람의 말을 듣다가 진실과 사랑이 없는 사람,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 마음 빼앗긴 사람의 말은 횡설수설하며 말의 중심을 잃고 진실과 사랑이 없는 헛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채널을 돌리는 일이 있습니다.
믿음을 갖고 주님 중심으로 살고 살아야 할 사람이 권력에 아부하고 돈 받고 자기 체면을 내세우며 말하는 사람은 진실과 사랑을 말하지 못합니다.
마음은 한 사람의 인품을 증명하는 기관입니다.
어느 날 ‘마음은 사람의 어느 곳에 있을까?’하고 스스로 알아보다가 마음 현존의 장소는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생각과 말과 행위부터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워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미사 때 복음을 들으며 머리, 입, 가슴에 십자가를 놓으며 주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부르짖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두게 됩니다.
오늘 주님이 하느님으로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믿음, 희망, 사랑을 따라 살라고 하시며 주님의 마음을 내주시는 예수성심의 날입니다.
저는 주님 따라 살며 주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살려고 수도자에 사제까지 된 이유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하듯이 주님 따라 살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 마음을 내 안의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서 진실하고 사랑하며 살기 위하여 살고 있으며 믿음을 사는 모든 이가 주님의 겉모양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나의 깊이, 넓이, 높고 낮음이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마음을 살려는 사람은 주님 생각에 젖어 살고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이 사시던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이라고도 하면서 일어나는 일에 부정적이거나 배격하거나 잊고 산다면 아니,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거룩함을 빛낼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마음이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있기를 기도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진실과 사랑을 증명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렇게 육지 끝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요. 이처럼 바다는 낮고 넓기에 모든 것을 다 자기 안에 받아들여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바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낮춰 겸손해지실 수 있었고, 당신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이들을, 심지어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원수들까지 다 당신 안에 품으실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당신을 닮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참된 안식을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는 이유는 비단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아 바다와 같이 낮고 넓은 마음으로 차별 없이, 조건 없이, 끝까지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버지 뜻에 순명하여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당신 것으로 삼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과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그 상처로 말미암아 우리를 낫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들의 허물과 잘못까지 다 당신 탓으로 돌리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시 돋힌 말과 생각 없는 행동으로 당신 가슴에 대못을 박아 피가 철철 흘러도, 끝까지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닮고, 어머니의 사랑을 닮는다면 나에게 잘못했다고 해서 형제를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혔다고 투덜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형제가 죄를 지었음에 함께 마음 아파하며, 그 죗값을 함께 치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참된 안식은 그런 사랑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고 주눅든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편안하게 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남이 먼저 나의 쉼터가 되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내 마음 안에 다른 사람이 쉴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겸손함은 나를 낮추는데에 머무르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과 사랑으로 높여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마음을 제대로 느끼고 닮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당신 심장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 심장에 배신의 비수를 꽂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서 구원을 가리는 장막을 걷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잘못들을 쏟아 부었지만, 그분은 심장에서 피와 물을 쏟아 우리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가, 우리를 생명의 양식으로 양육하는 성체성사가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
박성재 엠마누엘 신부님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냐’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땅에 계신 아버지는 늘 걱정하셨습니다. 정답 없는 세상을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걱정 속에서 신앙과 세상살이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늘 계산을 요구합니다. 얻을 것이 있어야 움직이고, 승산이 보여야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 밖에 서 계십니다.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이처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드러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대로 손익을 따져 움직이는 사람보다, 손해인 줄 알면서도, 아니 손해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그렇게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낸다고 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초대는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에게 배우고, 내 멍에를 함께 메자고 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습니다. 지친 마음을 다시 가다듬어 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떠올립니다. 손해 보는 자리에서, ‘철부지’라는 말을 듣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더 선명하게 만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희망해 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 성심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지혜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복음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불안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깊은 갈증에 대한
참된 해답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니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성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언제나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성심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을 만납니다.
사제 성화의 원천 또한
바로 예수 성심에 있습니다.
예수 성심은 사제의 마음이
머물러야 할 자리이며,
사목의 출발점이자
성화의 샘입니다.
사제 성화는 신앙 공동체를
살리는 힘이며,
교회 쇄신은 무엇보다도
사제의 성화에서 시작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품으셨고,
겸손함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셨고, 십자가는
그 사랑이 이룬 완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사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사제 성화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듣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예수 성심을 닮아 갈수록
교회는 새로워지고,
세상은 더욱 따뜻해집니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앞으로 뻗어서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을 손의 감각으로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계속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상시에 보던 것처럼 잘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떠올려 보십시오(요한 9장). 그곳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선천적 백내장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수술해서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앞을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형태만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공간 능력 파악을 위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씩 보이는 수준을 뛰어넘는, 즉 시간을 뛰어넘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많이 주실까를 고민하십니다.
문제는 늘 우리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엄청난 분인데도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도 하찮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사랑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힘센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에 큰 희망을 갖고 주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그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정녕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벽돌이다(롱펠로우).
예수 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 성심, 곧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다시 말해서 그분의 우리 인간을 향한 애끓는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과 심장이 어떠한 것인지를 마태오 복음사가는 명쾌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골자는 이것입니다. 이 세상살이 하느라 죽을 고생인 우리 각자를 향해 주님께서 활짝 열린 팔로 우리를 열렬히 환대하시고 따뜻이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예수님의 추종자요 대리자로 살겠다고 약속한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환대와 위로를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 죄인을 향한 각별한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 성심을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상호 통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야 하고, 다시 또 되돌아가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이겠지요.
한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에 불이 붙고, 밤잠도 제대로 잘 못 이루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조금도 그 사랑을 눈치 채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짝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그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우리가 아무리 그분께 대들고 반역해도, 우리가 그렇게 배신을 때려도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불꽃을 태우고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 성심은 우리의 반역과 배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에서 우리 교회가 탄생되었고,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습니다.
그 부서진 예수 성심에서 7가지 성사가 흘러나왔으며, 그 성사는 큰 강이 되어 메마른 사막을 비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 성심 성월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단 한 가지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 성심께로 기꺼이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것!’
구원의 샘물은 어디에서 퍼마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너무 간단합니다. 매일 거행되는 성체성사에 참석하면 됩니다. 매일의 영성체를 통해 가능합니다.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물을 길으리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성심 신심이야말로 매우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탁월한 방편이며, 현대 사회에 적합한 신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가장 효험있는 학교입니다.”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죄로 죽은 인간을 깨끗이 씻고, 새 생명을 주는 세례의 물과 새로 태어난 백성을 먹여 기르는 성체성사를 상징합니다. 예수 성심은 성체성사의 원천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성체성사로 드러난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팩스가 한 장 왔습니다. 한국에서 저의 강론을 읽는 분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시각장애인이라서 아내가 남편에게 저의 강론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는 분이 매일 강론을 보내 주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요즘은 강론을 보내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팩스의 요지는 어떻게 하면 매일 저의 강론을 볼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보내 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에 오면 매일 강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난 5월 LA에서 레지오 강의를 할 때에도 매일 저의 강론을 읽는다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처음 만났지만 반가운 마음에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금도, 은도 없습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러자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매일 강론을 나누지만 제가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을 만큼 높은 인격과 덕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사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뉴저지 가톨릭 회관에서 특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꽃동네’의 창설자인 오웅진 신부님의 ‘팔순축하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 60회의 생일을 지냈으니 오웅진 신부님은 저보다 20년 먼저 태어났습니다. 신부님은 군에서 복무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군부대 인근에 ‘공소’를 세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오웅진 신부님께 비용을 주셨습니다. 아직 사제가 되지도 않았을 때인데 오웅진 신부님은 공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은 사제가 되기 전에 이미 ‘공소’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1999년 10월 1일에 저는 오웅진 신부님의 땀과 열정으로 세워진 ‘공소’의 본당 신부로 갔습니다.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 수녀님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께서는 기꺼이 두 분의 수녀님을 파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수녀님들과 함께 저의 사제생활 중에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은 사제들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산상수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슬퍼하는 이, 평화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자.”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사제로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억눌린 벗들이 기댈 수 있는
아버지처럼 든든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슬퍼하는 벗들이 안길 수 있는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지친 벗들이 쉬어갈 수 있는
그루터기처럼 넉넉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외로운 벗들이 머물 수 있는
고향집처럼 포근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살맛 잃은 벗들이 맛들일 수 있는
찰진 밥처럼 맛깔스러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젖은 벗들이 말릴 수 있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땀 흘리는 벗들이 식힐 수 있는
바람처럼 살가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메마른 벗들이 적실 수 있는
개울물처럼 시원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헤매는 벗들이 찾아갈 수 있는
오솔길처럼 정겨운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갈라진 벗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울타리처럼 넉넉한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나날이
주님의 사제로서
주님을 닮아
주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사제가 되어가렵니다
‘생명의 빵’ 이야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충북대 농대 산림학과 교수들과 함께 괴산 소수면에 위치한 눈비산(설우산)마을을 찾았다. 영농법인이다. 새로 개설된 임도를 따라 눈비산의 8부능선까지 차로 올랐다. 호두나무, 밤나무, 두릎나무, 다래나무, 목백합과 전나무 군락지, 대왕 참나무. 각종 다양한 나무들과 산채들이 서로 공생하며 자라나고 있었다.
산 정상까지 오르니 자연 냉풍이 시원했다. 수목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영농법인 눈비산 마을이 산림 전문가를 초대해 미래 생명체험장 조성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업과 교육’이 앞으로의 생명교육을 주도할 것이라는 농업비전을 서로 이야기 했다.
생명체험장 실현, ‘한살림’영농조합 회원들이 직접 생명가꾸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도록 하고 있는데, 더 많은 인원이 찾아오도록 지역 체험장 인프라를 구축 활용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
성체성사, 생명의 빵, 십자가의 제사,
이런 거룩함의 단어들은 수고로움, 희생과 사랑 없이는 이해도 쉽지 않다. 직접 생명을 일구며 구체적으로 살지 않으면 알아듣기조차 거북하다. 생명에 대한 사랑의 수고로움을 각자가 직접 체험할 때, 거룩함의 마음도 생성될 것이다.
예수성심, 예수님의 거룩함의 마음,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삶이 우리 마음 안에 담겨 녹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밀알 하나가 썩어 생명이 자라기 시작하고 수확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들고 반죽해 효소넣고 부풀려 빵을 만들어 불 속에 굽고 일련의 수고로움을 통해 직접 만든 빵을 앞에 놓아 보라. 보고 기뻐하고 빵 맛, 더 좋은 빵 맛을 볼 것이다. 이런 일련의 수고로움으로 ‘생명의 빵,‘ 성체를 받아 모신다면 빵에 담겨진 맛, 예수성심도 더 빨리 이해되고 응용되리라.
’생명의 빵‘ 아무런 수고로움도 없이 받아만 모시는 성체가 사람에게 경건성만 강조되고 피가되고 살이되는 삶을 갖지 못한다면 고고한 단어들이 이해되고 응용하는 것은 어려워지지 않을까? 예수성심을 담은 성체성사는 이론이 아닌 구체적인 삶이어야 한다. 수고로움의 십자가 없이 얻어지는 빵은 배고픔만을 달래줄 뿐 그 이상의 깊은 의미는 갖지 못한다. 요즘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수고로움 없이 받아 먹는 빵의 의미는 무얼까? 수고로움을 통해 빵을 만나게 해야한다. ’농업과 교육‘은 생명교육의 좋은 장면이 될 것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멍에와 짐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면 멍에는 농기구 중의 하나로서 소와 주인이 하나가 되어 바르게 경작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멍에가 있기 때문에 주인이 원하는 데로 소는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주신다는 것은 바로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짐의 경우는 마치 먼 바다를 여행하는 데에 있어서 바닥짐처럼 우리 삶의 중심을 잡게하는 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구원을 향한 여행을 떠나는 데에 있어서 챙기고 가야할 꼭 필요한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짐 안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양식이 있고, 도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늘 언제나 멍에와도 같이 주님과 늘 연결되어 함께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짐을 지고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 때 비로써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을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소개하십니다. 이어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여기에서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은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즉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철부지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또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이들이지요.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위에서 말한 교만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는 이들이지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이들의 삶이 고생이고 그래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인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지요. 쓸데없이 고생하지 말고 쓸데없이 무거운 짐을 매지 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가 예수님께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지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우리의 삶을 걱정해주시고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오기만 하면 짐이 가벼워지고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지혜롭기보다 슬기롭기보다 철부지 어린이가 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부모로부터 많은 것을 받지요. 부모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알지요.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롭다해도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철부지임을 고백해야 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것임을 약속합시다. 아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요소를 의미하였다. 예수성심은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의 보물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프랑스 파레이 르 모니알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 공경과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대축일로 지내오고 있다. 이날은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사제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완덕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무리들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이런 어린아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 앞에 가장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른 어린이는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시해 주셨다. 바로 예수님 당신의 아들 자신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가 실천하면, 그만큼 큰 기쁨과 위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려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김종오 신부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오.11,25)
머리카락 숫자도 모르는 우리는 자주 많이 안다고 착각합니다. 뭘 좀 모릅니다. 세상을 좀 모르는 것은 흉이 되지도 않지만, 아는 것이 자랑도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을 잘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됩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몰라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좀 모르더라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올바로 알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도 알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우리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고백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모든 지혜의 시작입니다.
자신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거짓 자아에 속아서 살기 때문입니다. 거짓 자아는 우리가 성장하면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익힌 자신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기술을 능숙하게 익힌 자신을 참 자아로 착각하면 모든 관계를 왜곡시키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밝지만 자신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더 많습니다. 세상을 모르는 바보는 귀엽지만, 자신을 모르는 바보는 어리석습니다.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음은 삶을 공허함으로 채웁니다.
자신을 알고자 탐구하는 과정은 잃어버린 우리의 순수함을 찾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름다운 우리의 참 자아 안에 불어넣어주신 순수함의 질그릇에는 선과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깨진 순수함의 질그릇을 안고 계시는 상처 입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기적처럼 사랑밖에 모르는 철부지가 됩니다.
예수성심대축일을 축하 드리며, 주님 마음으로 가득한 날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현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길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도 전해집니다.
거룩한 예수 성심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닮아가고 성화되는 것 처럼
아버지의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burdened.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 따르겠다고 다짐하게 되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제1독서인 신명기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가 많고 잘나서가 아니라, 수가 적고 보잘 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 당신 백성과 맺으신 약속을 소중히 여기시고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내 새끼가 어디가서 무시당하고 핍박 받는건 견딜 수 없는게 부모 마음이듯, 당신 백성이 이집트인들에게 핍박받으며 고통받는 모습을 도저히 두고 보실 수 없어서 당신의 놀라운 권능으로 이끌어내시고 해방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 마음을 몰라주고 불평과 불만을 일삼으며 배신과 우상 숭배로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도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한 없는 사랑입니다. 당신 마음에 드는 이를 먼저 선택하여 사랑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조건없이 차별없이 사랑해주시는 공평하고 공정한 사랑입니다. 당신께 내어드린 사랑은 천배로 풍성하게 갚아주시면서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한 미움과 배신은 그 한 사람을 직접 벌주는 걸로 끝내시는,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가 넘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온유함’과 ‘겸손함’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그저 화를 잘 내지 않고 성격이 온순한 정도를 넘어서, 타인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곧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우리의 슬픔과 아픔, 고독과 절망, 걱정과 두려움을 알아주시는 마음인 겁니다. 당신의 ‘형제’, ‘자매’인 우리가 고통 속에 신음하는걸 보시는게 마음 아파서, 어서 빨리 참된 위로와 안식을 주고자 하시는 연민의 마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시는 방식은 우리가 세상에서 봐온 모습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권력자는 굳이 어떤 문제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이 사람의 고충을 해결해주라’고 지시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시고 고통도 시련도 함께 받으시면서 그것을 이겨낼 방법을 알려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시지요.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길을 알려주시고 ‘니가 알아서 가라’고 등 떠미시는 무심한 분이 아니라, 우리 손을 잡고 함께 걸으시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시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기에 힘들고 어렵지만, 두렵고 떨리지만 그분과 함께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걸으려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그분의 행동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배워라”라고 하신건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주님으로 모신다면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나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먼저 묻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겁니다.
인간에 대한 열정과 희생
유상혁 세례자요한 신부님
언젠가 예수 성심 이콘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성심 이콘을 보면 예수님의 가슴에 ‘심장’이 있습니다. 그 심장에서 몸 전체로 피를 보냅니다. 모든 양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심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지치고 힘들어 멈추고 싶을 때도 있을 듯한데, 자녀들을 위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심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심장을 감싸고 있는 ‘가시관’입니다. 이 가시관은 살아 있는 심장을 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어려움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받아내는 듯합니다. 몸 전체에서 어느 한 곳이 많이 아프면, 다른 곳의 고통이 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그 모든 고통을 받아들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심장 위 ‘불꽃’입니다. 예수님의 이 거룩한 불꽃은 우리 마음 안에 열정을 불어넣습니다. 열정의 지향점은 사람들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이유로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열정을 통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평화를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오늘을 살아갑니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습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문득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주시는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성 요한 사도는 오늘 두 번재 독서에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2-13)
어제 저녁 성전에서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내려오는데, 문득 제 머리 속에 이런 깨달음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간적인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노예처럼 붙잡혀 있다고 여기던 죄악이 사실 우리의 탓이 아니라 악마가 우리에게 주는 굴레라면, 우리가 믿음과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굴레는 용서라고 하는 사랑이구나!’
권력자는 힘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사용하라 <마태 11, 25-30> 6월 16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무엇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각대로 사용하면 불의가 되고 진, 선, 미를 따라 사용하면 모든 이에게 유익하고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고 기쁘게 합니다. “나는 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박사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진 것이 많아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고 교만과 자만심으로 살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하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으로 떨어집니다.
오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고 가장 큰 자비를 베푸시러 오신 주님의 성심 축일을 지내며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같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을 묵상하면 하늘과 땅의 주인이며, 힘의 원천이고, 모든 것을 갖고 계시며,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십니다. 그러면 평화를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운명은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악한 마음은 악을 만들어 내고 선한 마음은 선을 만들어 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쉽게 스트레스받아 참지 못하고 사람이 행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합니다. 포악한 행위는 상처를 내고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까지 합니다.
교만과 폭력으로 가난한 이 무시하고, 힘없는 자 억누르고 자유를 빼앗고 평화를 상실하고, 기쁨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성찰하고 내 마음을 살피는 기도와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이름 있는 날 우연히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의 성심 축일과 생일이 일치합니다. 주님 마음을 갖고 새로 태어나서 살라고 생일과 일치된 날입니다. ‘어떻게 지낼까? 지인 불러 멋있는 점심 대접받을까?’ 하다가 우리 수도원에서 아무 직책 없이 제일 힘들게 병실에서 지내는 신부님을 제가 초대하여 단둘이서 점심 먹기로 마음 정하고 청원하니 승낙하여 큰 기쁨으로 점심 식사하기로 정했습니다. 사는 동안 영육 간에 건강하도록 기도 부탁합니다.
오늘 사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병든 사제 힘 실어주고 나이 들어 힘없는 제가 은총 속에 살도록 기도하면서 모든 사제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니, 바라고 바랍니다. 우리는 국회의원이 아닙니다. 그런 대접 받고 살려고 하지 말고 가장 낮은 자로 살며, 가난한 이 안에 살고, 그들을 위로하고 자유, 평화, 기쁨을 주는 하느님의 종으로 함께 사는 사제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심장
박동소리 만큼
뜨거운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매일매일
당신의 사랑을
먹이며 마음을
키우십니다.
우리의
심장을 깨우는
예수 성심이
있습니다.
살과 피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
알게 됩니다.
심장의 울림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 성심이
바로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맛본 사람은
예수님 심장을
이미 맛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맛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사랑의 길을
걸어갑니다.
심장으로
사람이
되어갑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성심이십니다.
예수 성심에서
복음말씀이
선포됩니다.
마음에서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 성심에서
사제들이
성화됩니다.
아름답고
맑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성심에서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살리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제의 삶을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십니다.
심장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삶입니다.
피를 돌게 하듯
우리를
살게 하시는
예수 성심께
우리의 삶을
봉헌합니다.
심장의 화음이
공동체의
화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쁨으로
안아주시는
예수 성심이
계십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깨우십니다.
성심의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며
차오르는 마음의
시간입니다.
마음에서
다시
사제의 길을
찾는 시간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예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절실한
마음으로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성제 안에서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만나는 뜨거운
사랑 오늘입니다.
바로 위의 형과 저의 나이 차이는 네 살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놀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형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저는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저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하교 시간의 차이로 인해서 집에 오면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 근처에 다른 집이 없어서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많이 외로웠을까요?
아닙니다. 혼자서도 놀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넓은 마당을 혼자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지면서 놀았습니다. 집 안에서도 제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이 많아서 혼자 있어도 즐거웠습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이게 뭐예요?” 하면서 묻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기심이 많으면 외로울 수 없고 그래서 매 순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호기심을 잃어버립니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질문을 더는 하지 않으면서 그러려니 합니다. 어쩌면 호기심은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이고, 기쁘게 지금을 사는 지혜가 아닐까요?
우리의 주님께 대한 호기심은 어떤가요? 이 호기심을 가지고 주님을 알아가면서 희망을 품고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호기심 없이 ‘그러려니’ 합니다. 또 ‘이럴 거야’ 하면서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둬버리기도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희망과 기쁨도 찾지 못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이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그 내용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슬기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지혜는 단지 지혜처럼 보이는 것을 지녔을 뿐이라고 하시지요. 그에 반해 악에 물들지 않은 사도들을 철부지라고 표현하십니다. 나이가 어려 철부지일까요? 아닙니다. 죄와 사악함에서 철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악에 물들지 않는 순박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대한 호기심 없이 ‘그러려니’ 하지 않으며, ‘이럴 거야’ 하면서 자신의 틀 안에 주님을 가두지 않습니다.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면서 주님을 알기 위해 계속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지요. 이 마음을 본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린 악에 물들지 않는 순박한 모습, 호기심을 갖고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두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만이 주님 마음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제임스 M.배리).
나는 겸손하니 내게서 배워라(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중에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높이 올라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웅장한 건물을 세우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바닥에서 터부터 닦으십시오.
이것이 겸손입니다. 아무리 웅장한 건물을 짓고 싶더라도, 크고 높은 건물을 짓고 싶을수록 터를 더 깊게 파야 합니다. 건물은 짓다 보면 높이 올라가지만,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처럼 건물도 높이 올라가기 전에는 낮으며, 탑은 굴욕을 겪은 뒤에야 올라간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의 말씀처럼 우리도 겸손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편안하나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자매님이 저에게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중년 자매님이었는데 집도 넉넉하게 잘 살고 자녀들도 말썽 안 부리고 성당 잘 다니며 남편도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서도 착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무슨 일로 밤에 혼자 앉아 눈물을 자주 흘린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허한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해서 다 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편해야 합니다. 몸은 잠을 자면 되고, 영혼은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음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도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몸은 물질로 되어 있어 물질적인 환경에서 쉴 수 있고, 영혼은 정신적이라 정신적인 환경 안에서 쉴 수 있지만, 마음은 영적이라 영적인 관계 안에서만 쉼이 가능합니다. 영은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영국의 문인 부르크가 미국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부두에는 전송객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거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전송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서운함을 느낀 부르크는 부두에서 놀고 있는 한 어린아이에게 “얘야! 내가 네게 6실링을 줄 테니 내가 저 배를 타고 떠날 때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6실링을 받은 아이는 정말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르크는 고백합니다.
“돈 받고 흔드는 손을 보고 나는 더욱 큰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사랑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안에서만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내가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쉬게 해 주는 마음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의 쉼터가 되어주지 못했다면 누구도 나의 쉼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뉴스에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차 안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호흡이 멈춘 할머니를 구 강대 구강 호흡법으로 살리려고 하는 장면이 찍힌 것입니다. 손자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의 어려움을 겪고 의식을 잃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손자는 100% 자신도 바이러스에 전염될 것을 알면서도 구강 대 구강 호흡으로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운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손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자가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 줄 알았을까요? 그만큼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할머니도 손자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을 자신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을 취하시겠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처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처는 결국 할머니가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른 사람 마음 안에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의 스승이셨습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항상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고 상대가 더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입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우신 교회에서 안식을 누리셨고, 우리는 또한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가, 아니면 화를 내고 심판하는 마음으로 대하는가. 내가 먼저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마음 쉴 곳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비가 그친 날 오후였습니다. 산책길에 새를 보았습니다. 새는 지렁이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새는 지렁이를 몇 토막 냈습니다. 그리고 처마 밑에 있는 둥지로 날아갔습니다. 둥지에는 어미 새를 기다리던 아기 새들이 있었습니다. 어미 새는 토막 낸 지렁이를 남김없이 나눠주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먹이를 주는 어미 새를 직접 보았습니다. 처마 밑에 있는 둥지는 안전해 보였습니다. 비를 맞을 일도 없었습니다. 서남향으로 지어졌습니다. 손도 없는 새가 부리로만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를 모아 아기 새를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언젠가 아기 새들은 둥지를 나와서 자신들만의 세상으로 날아갈 것입니다. 세상 모든 새는 이렇게 어미 새의 보살핌을 받으며 날 수 있었습니다.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어미 새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5년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강의를 듣고, 고백성사를 보고, 은경축을 맞은 사제들을 축하합니다. 무엇보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먼저 하느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까?”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산상수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슬퍼하는 이, 평화를 베푸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베풀어라.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송아지를 잡자.”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과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새끼 두는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내어 주십시오. 겉옷을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내어 주십시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사제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워야 합니다.
2001년 사제성화의 날이었습니다. 경기지역 사제들은 의정부 성당에 모여서 하루 피정을 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체험사례 발표를 부탁하였습니다. 사제가 사제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무척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선배들은 제가 살아온 날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은 저의 허물과 실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배 사제들은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은 사목 체험을 편하게 이야기 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약간의 강사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있었던 사목체험을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저의 발표는 교구청에도 전해졌고, 다음 인사이동 때 저는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발표는 그 뒤로 저의 사제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습니다. 해외 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고, 다시금 교구청에서 일하기도 했고, 지금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020년 사제성화의 날입니다. 오늘 하루 피정하는 마음으로 지내려고 합니다.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
김기환 베드로 수사님
오늘 복음에서 에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시고 마지막에서는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멍에라고 하는 것은 소를 끌고 밭을 갈때 소 어깨에 메는 한글 시옷처럼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즉, 쉽게 말해서 멍에라고 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나 삶에서 무겁게 느껴지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말할때 멍에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면 오히려 그 짐이 가벼워 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번째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고생한 삶을 산 이후에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고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있을수가 있는 것이고 두번째 의미로서는 이 세상에서 다가오는 삶의 고통과 괴로움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때문에 좀 더 가볍게 다가올수 있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들과 삶들 지금은 무겁게 느껴지고 힘겹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고와 고생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진 삶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그분의 수난을 되새겨 볼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어려움들을 위로 받고 그 멍에가 가벼워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어떠한 이유로 인해서 크나큰 고통이 다가왔을때에 나에게 있어서 지금 이 고통이 너무나도 참기 힘들고 그 무게가 크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을 함께 할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멍에가 위로받고 가벼워질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로 부터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당할고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당할때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옷벗김 당하시고 알몸으로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마음으로 함께 할때 우리의 멍에는 무겁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멍에 즉, 예수님의 멍에는 가벼워 질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는 방법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전 유기서원기때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전 수업을 마치고 수도원으로 가는 중 새가 새똥을 쌌는데 하필 그것이 제 머리위에 떨어졌습니다.그 똥이 이마에서부터 뺨에까지 흘러내렸습니다. 전 순간 느낌은 더럽고 역겹고 비위가 상했지만 또 한편으로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얼굴에 침뱉음당하시고 조롱당하셨던 복음 말씀이 떠오르면서 제 마음은 순간적으로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수난에 대한 사랑과 감동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똥을 맞았을때의 더럽고 비위상하는 멍에가 예수님의 수난과 침뱉음 당하셨던 조롱을 기억할때 예수님의 가벼운 멍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는 방법은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은 지식으로 다가가는것과 마음으로 다가가는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으로서는 아무리 신학과 영성을 공부했더라도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결국 신앙인과 비신앙인과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식적으로는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마음으로 믿고 하느님과 함께 하였다면 분명 그것은 큰 차이를 보여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생활 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신자들 누구나다 신학 영성 공부를 할수 있고 성지순례 갔다오고 성당에는 평일미사와 주일미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마다 성경과 묵주 성화와 성상들도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만큼 깊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수백년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말그대로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미사도 기도도 신학과 영성공부는 할수가 없었고 성지순례는 꿈도 꿀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깊은 신앙을 가지고 순교를 할수가 있었던 것은 비록 배운것은 많이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에수님께 다가가고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머리로 기도하고 믿고 신앙하기 보다는 마음으로 함께 할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성심, 곧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우리도 본받고자 기도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의 사제들이 주님의 거룩한 성심을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에 더욱 충실히 임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를 당신께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멍에와 짐은 어떤 의미인가? 안식을 주시는 것은 좋은 데 우리가 왜 멍에와 짐을 가져야 하는가?
멍에는 농기구 중의 하나로서 소와 주인이 하나가 되어 바르게 경작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멍에가 있기 때문에 주인이 원하는 데로 소는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주신다는 것은 바로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짐의 경우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구원을 향한 여행을 떠나는 데에 있어서 챙기고 가야할 꼭 필요한 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짐 안에서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양식이 있고, 도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늘 언제나 멍에와도 같이 주님과 늘 연결되어 함께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짐을 지고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면서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에 풍덩 빠지는사랑의 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입당송).
장엄한 대축일 미사에 들어서면서 울려퍼지는 입당송은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한 눈에 조망하게 해 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그건 바로 "주님의 마음속 계획", 즉 섭리이고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신명 7,7).
제1독서에서는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시작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겁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 경험이 있다면 이 말씀의 세기와 농도를 알아들을 겁니다. 마음은 전부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마음에 딸려오는 것에 불과하지요.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사랑을 알게 된 우리는 하느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자녀입니다. 사랑의 존재가 된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신 분을 압니다.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되다니요... 사랑의 신비이고 사랑이 일으킨 기적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과 우리는 서로 안에 머무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모조리 다 주었으니 이젠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전혀 구색이 안 맞는 두 존재의 일치가 가능한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누구도 가리거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리 모자라고 불결하고 못나도 무시하거나 소외시키거나 못마땅해하지 않으십니다. "다 오라"는 초대는 사회에서 전화번호도 묻지 않은 채 진심없이 남발하는 '언제 한번 보자'는 식의 빈말이 아닙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래 이 말씀을 얼마나 자주 마주쳤는지요! 하지만 잠시의 위안으로 스쳐보내고는 정말 진심을 다해 전력질주하여 그분 마음으로 달아든 기억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런지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 초대를 하신 예수님은 진심이셨지만, 이 말씀을 별로 안 친한 이들 사이에 영양가 없이 오가는 인사치레 정도로 흘려듣고 잊어버린 것은 우리 쪽이 아니었는지요...
그분의 마음은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넓습니다. 우리 모두, 온 세기와 역사와 나라와 종족에 딸린 모든 이를 다 받아들이고도 남을 크고 넉넉하고 선선하고 부드러운 마음! 그분은 그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우리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오기만 기다리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리라"(영성체송).
주님은 당신 마음, 그 사랑의 바다에 풍덩 빠져 마음껏 헤엄치며 사랑을 만끽하라고 하십니다. 사랑 밖에는 거칠 것 없는 완전한 자유와 희열의 바다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바다인지 바다가 나인지, 내가 사랑인지 사랑이 나인지, 내가 주님인지 주님이 나인지 구분조차 모호해집니다.
쩍쩍 갈라지는 가뭄 논바닥 같았던 영혼도 주님 마음 안에 머무르면 사랑의 물이 오르고 윤기도 차오르지요. 생명의 물은 나를 적셔 되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속에서 "강물처럼 흘러나"올 엄청난 수원지를 이룹니다. 그토록 넓고 선하고 충만한 주님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차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사랑의 바다이신 예수 성심께 온전히 잠겨 사랑이 되는 큰 축제일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교회의 지향에 합하여 저를 포함해 모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아멘.
짐을 져 보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여름이면 보리단 묶어 지게지고 땀흘렸던 기억들, 땔 나무를 구하려 높은 산에 올라 땔감을 구해 지게를 메고 높은 산을 내려왔던 기억들, 참 무거운 짐을 졌던 시절은 절대빈곤 시절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짐을 졌던 그 덕분에 우리는 어려움을 넘었다. 동력은 사랑이었다.
수차례 히말라야를 오르며 ‘세르파’족들의 짐꾼들을 본다. 옛날 우리도 짐을 지고 저렇게 살았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꺼냈다. 높은 산을 오를 때, 저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산을 편하게 오른다는 생각에 그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물질에 얽매지 않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서 사명으로 여겼다.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 놓으며 그들이 땀을 훔칠 때의 여유와 환한 웃음이 왜그리 행복했던지? 함께 오르던 학생들이 그 모습 바라다 보며 나에게 물었다. “신부님, 저들은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며 행복해 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짐도 없이 편하게 산을 오르며 힘들다 짜증부리며 불평이 가득한가요?”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세르파’족의 짐꾼을 보면서 예수님을 떠 올렸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메고 나에게 배워라. 오히려 내 멍에는 가볍다.’ 그들의 목적은 오르지 인간 사랑이다. 고통은 상대가 목적을 이뤄내는 기쁨으로 상쇄된다. 그들의 몸과 피는 우리에게 양식이 되고 불평을 하던 학생들이 행복의 큰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성화되어 간다.
땅이 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땅을 하늘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의 짐 다 짊어지시고 높은 선을 오르셨다. 나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보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공감하고 추구해야할 모든 사회적 가치를 많은 이들이 잃고 아우성친다. 오르지 경쟁과 반목, 부익부 빈익빈, 이해득실, 교만과 시기, 질투로 무거운 짐만을 다른 사람에게 덮어 씌우고 있다. 지금 우리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들을 위해 잃어버린 양 한마리는 그리 소중하지 않다. 그냥 죽으면 그뿐인 세상이다. 왜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소중히 여기셨을까?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아유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반에서 죄인 하나,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소중히 여기셨다. 이점이 우리가 찾아야 하고 회복해야하고 추구해야할 공통의 가치여야 한다. 예수님의 목적은 생명가꾸기와 구원이었기에 혼자 감당하기에 엄청난 짐을 홀로 지셔야 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본다.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싶어 ‘지극히 거룩한 예수 성심 대축일’을 성대히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르파’족의 짐꾼과 히말라야를 걷다가 학생이 마음을 바꿨다. 머리 가꾸고 얼굴 분칠하고 부자로 살면서 불평을 했던 학생이 추구해야할 인간으로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성화된 것이다. 그는 오늘 사랑의 길을 살고 있다. 오늘 또한 ‘사제 성화의 날’이다. 어디서 어떤 체험으로 우리들도 성화될 동력을 찾아야 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2020. 6. 19. 금)(마태 11,25-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의 ‘고생, 무거운 짐, 멍에’를 인생살이의 고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모두’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내 뒤를 따라라.”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계명을 뜻하는데, 예수님의 계명이 실제로 멍에라는 뜻은 아니고,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계명이 멍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멍에를 벗겨주는 열쇠’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고통스러운 멍에를 벗기고 편한 멍에로 바꿔 주겠다.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멍에를 벗겨서 편안함을 주겠다. 모든 짐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는 “내가 주는 멍에는 편안함이고”, 즉 “내가 주는 것은 멍에가 아니라 해방이고” 라는 뜻이고, “내 짐은 가볍다.”는 “내가 주는 짐은 가벼움이다.”, 즉 “내가 주는 것은 짐이 아니라 안식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무거운 멍에를 벗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벼운 멍에를 감수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새로운 멍에를 메는 것이 아니라 ‘멍에를 벗기는 열쇠’를 얻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편안해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아무리 가벼워도 짐은 짐일 뿐입니다. ‘안식’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라는 새로운 멍에와 짐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멍에와 짐을 완전히 없애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참 평화와 참 행복과 참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만이 그 구원과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그것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과 안식은 죽은 다음에나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 저쪽 세상에 갔을 때나 우리를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언제인지 모르는 ‘나중’에 안식을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살이를 참고 견디는 생활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실제로 누리고 있는 구원과 안식 덕분에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예수님과 어떤 사마리아 여자의 만남이 연상됩니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여자였으니, 그의 인생은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인생이었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또 “무거운 멍에를 메고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를 꿰뚫어보셨고, 그 여자를 그것들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그 여자는 예수님 덕분에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갈증과 고생과 짐과 멍에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 여자가 어떤 유혹을 받아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긴다면? 그러면 더욱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더 무거운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경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고, 벳자타 못 가에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 자기 힘으로는 못 속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멍에와 짐을 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고, 그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인생살이의 멍에와 짐을 벗겨 주셨고, 참된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또 구원과 안식의 완성에 도달하라고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했습니다. 그는 몸의 건강은 얻었지만, 영혼의 안식은 얻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멍에와 짐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고, 그 멍에들과 짐들을 벗겨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공경하고 경축하는 대축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지만, 나누지 않으면 기름 없는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안식은 혼자서만 누릴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누릴 때에만 참된 안식이 됩니다.
“너희는 하느님 소유의 백성이니라” - 성체성사의 실천 ⓹ 예수 마음을 닮는 길
이기우 신부님
⒈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낸 다음 금요일인 오늘,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것은 금요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요일이기 때문이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던 요일은 목요일이었지만 바로 이 때 이 십자가의 신비를 앞당겨서 당신의 몸과 피에 일치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실 당신의 몸을 빵에 일치시키시고는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몸에서 흘리실 당신의 피를 포도주에 일치시키시고는 “받아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다.” 하고 말씀하셨으며, 이 두 마디의 말씀 끝에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⒉ 여기서 말씀하신 바, 그분에 대한 기억은 공생활 동안 행하신 수없이 많은 일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 초점은 그 일들에 담긴 그분의 마음을 기억하라는 데 있었습니다. 또 그분이 행하라고 명하신 것들 역시 일차적으로는 그분이 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그 핵심은 그분의 마음을 닮는 데 있습니다. 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을 닮지 못하면, 일에 대한 기억과 행함은 반쪽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마무리하는 전례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⒊ 이렇게 예수 성심을 닮고자 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일들은 모두 파스카 과업을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파스카 축제일에 맞추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이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예수님의 마음이 이토록 간절했던 까닭은 그분이 공생활 동안 파스카 과업으로 행하신 그 수많은 일들을 바야흐로 당신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물려주어야 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다섯 가지로 추려 볼 수 있습니다.
⒋ 첫째는 성령께서 당신을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천명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건 사십 주야 단식을 사탄의 유혹 속에서 무사히 마치시고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셔서 회당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당신의 소명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셨습니다. 당신의 공생활 활동이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에 따라 이루어질 것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천명하신 말씀이 메시아로서 예수님 생애의 큰 방향이 되었습니다.
⒌ 둘째,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찾아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던 그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웃음과 행복을 나누어주셨고, 위로와 치유와 안식을 선사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 나오는 진복팔단과 루카 복음 6장에 나오는 행복선언에 그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던 그 정성으로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은 그분이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분을 모함하고 시기하며 급기야 죽일 음모까지 꾸미며 적대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항하여 열두 제자를 불러 모아 장차 교회를 이룰 주춧돌을 마련하시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이 파스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고 아둔한 모습으로 자주 야단을 맞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몰이해 자체가 예수님을 힘들게 했지만, 그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기다려주셨습니다.
⒍ 셋째, 예수님께서 만나신 가난한 이들은 대부분 고통을 달고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커녕 지옥과도 같은 고통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육체적인 질병이나 장애 또는 정신적인 아픔으로 고통받고 있기도 했고, 무시당한 나머지 극심한 소외감으로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고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 치유와 위로의 복음선포 과정에서 숱한 기적들이 일어났고 지옥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해방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눈먼 이가 보기도 하고,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였습니다. 나병이나 중풍을 앓던 이들이 깨끗하게 낫기도 했습니다. 또 자식을 잃고 슬퍼하던 어버이들을 보고 함께 슬퍼하시던 그분은 죽을 지경으로 위독하거나 심지어 이미 죽은 아들딸들을 다시 살아나게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듣고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체험하게 된 이들은 기꺼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이 교회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⒎ 넷째,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을 반대하고 방해하려 한 세력들은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들의 배후에서도 사탄이 조종하고 있었거니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유다 광야에서 그분을 유혹하다가 실패했던 바로 그 사탄이 이미 마귀나, 악령으로 불리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고 그렇게 마귀 또는 악령에 들린 이들을 그분은 많이 만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마귀를 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맞서셨으며 쫓아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귀에 들렸던 많은 이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런 구마의 복음선포는 역대 어느 예언자들도 하지 못하던 기적이었는데, 적반하장 경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마귀의 편에 서서 그분이 마귀들렸다고 모함을 해 댔습니다.
⒏ 다섯째,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을 벗어나 전국 방방곡곡과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인 마을에까지 그들을 파견하시어 당신이 하시던 복음선포 활동을 사람들 안에서 하게 되자, 함께 하시던 성령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깨닫고 터득했습니다. 한 번은 열두 명, 또 다른 한 번은 일흔 두 명을 파견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물론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이나 권세를 부리던 사두가이들은 스승도 무시했던 판에 그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일 리가 없이 거부했지만, 도처에서 이 복음을 받아들인 토박이 지지자들이 생겨났고 예수님께서는 귀환한 제자들의 이러한 보고를 받으시고 매우 이례적으로 성령에 가득차서 기뻐하셨습니다. 땅에 묻혀 있던 보물을 발견한 농부의 심정이나, 잃었던 은전을 되찾은 여인의 심정으로 기뻐하셨고, 이 기쁨을 제자들도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9. 이러한 다섯 가지 파스카 과업의 특징 안에 예수 성심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이들이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었고, 이 교회가 새로운 인류의 누룩이자 겨자씨가 되었습니다. 이 예수 사건을 탁월하게 드러내는 비유는 식물의 광합성 작용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태워서 빛과 열을 내보내는 태양 덕분에 식물들은 이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 그리고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과 합성을 하여 자신의 생장을 위한 양분을 만들어서 꽃과 열매를 냅니다. 그리고 공기 중에는 산소를 발산하여 동물들과 사람들이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실로 이러한 식물의 광합성 작용이 지구의 생태계를 지탱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성심으로부터 기운을 받아 영적 광합성 활동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함으로써 새로운 인류가 숨을 쉬고 있으며,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으로 바치는 애덕 행위들 덕분에 세상의 부패가 방지되고 있는가 하면, 그리고 식물이 이 작용으로 자신의 생장을 위한 포도당 같은 양분으로 꽃과 열매를 냄으로써 동물들과 사람들을 먹여 살리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광합성 활동으로 이룩해 낸 영성으로 인류 문명을 이끌어나갈 진리의 빛과 정의의 힘과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기운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 성심이 새로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셈입니다.
⒑ 요컨대, 신명기 7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수 성심과 이를 섬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효로가 아니라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기운으로 그 존재이유를 삼습니다. 그런데도 이 길을 막아서는 자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친히 대적하실 것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요 멸망뿐입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하느님께서 직접 갚으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의 역할을 맡아서 하려고 들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를 지키는 데 충실하면 됩니다.
또한 요한 1서 4장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이 계명과 규정과 법규는 사랑과 자비의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따라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고 알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빛을 비추어주고, 사랑의 힘을 나누어주며, 사랑의 영성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1장에 비추어 보면,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의 결과로 되찾은 이들을 두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복음을 알아보거나 알아듣지 못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마음을 두지 말고, 오로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그 이름이 드러나는 것만을 기뻐하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안식과 평안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향과 마음을 지니셨기에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 고달픈 복음선포 활동을 하시면서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장담까지 하셨습니다. 당신의 멍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도, 그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 장담과 큰 소리가 빈 말이 아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복음을 선포하고 난 다음의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분처럼 하느님께 되돌아온 가난한 이들을 두고 함께 기뻐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함께 가자 우리 감싸주십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성심 대축일 오늘을 사제성화의 날로 1995년부터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들은 특별히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명상하며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과 위로의 말씀은 인류를 향해 재연돼야 합니다.
예수님이 대신 지시는 멍에는 인류구원을 위한 십자가 죽음 길이십니다.
우리위해 죽음의 길 무거운 십자가 사형틀 지실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힘겹게 사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합니다.
마스크 쓰고 다니는 걸 보면 코로나19 죽음의 멍에 지뢰밭 길 같습니다.
주춤하며 간격두지만 하늘은 늘 열려있어 함께 가자 우리 감싸주십니다.
예수 성심聖心의 사랑과 삶 -온유와 겸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의 원천이신 우리주예수/당신은 온갖기쁨 희망이시고
감미와 새생명의 은총샘이며/참되신 우리맘의 기쁨이시네
예수여 그사랑은 고마웁게도/내마음 포근히도 쉬게하시니
언제나 한결같은 만족주시며/갈망에 애타는맘 품어주시네.”
참 아름다운 예수 성심 대축일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입니다. 참 좋은 예수성심 신심입니다. 참으로 예수 성심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도 성화되어 예수 성심이 되어, 예수 성심의 감미로운 사랑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지내는 모든 축일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 성월 한 복판 중심에 자리잡은 참 아름답고 고마운 축일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우리 요셉수도원의 예수 성심의 사랑 가득한 ‘예수성심자매회’ 회원 자매님들께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예수 성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은 결정적으로 환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예수 성심은 우리가 끊임없이 배워야 할 하느님 사랑의 샘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환히 드러납니다.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의 믿는 이들 모두를 향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이어 주님은 이런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때 하느님의 축복이 있음을 알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모든 문제는 우리의 무지에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우리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답하여 열렬히 항구히 하느님을 사랑하며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성심을 통해 끊임없이 선사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우리 향한 예수 성심의 사랑을 역설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향한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선물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예수 성심의 하느님 사랑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를 먼저 초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환대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초대에 응답하여 겸손과 온유의 당신 성심의 사랑을 배울 것을 촉구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 성심의 삶입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과 삶을 끊임없이 배워 익힐 때 참 안식이요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뀝니다. 교황님은 6월 기도지향이 담긴 영상메시지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 성심께 자신을 내어 맡길 것을 촉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어려움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민 가득한 길을 따라 그들과 동행하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연민의 길이 그리스도의 성심께로 가까이 이끕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애틋한 사랑의 혁명으로 우리 모두를 맞아들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 성심께 자신을 내어 맡겨 생명의 길을 찾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 성심을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예수성심의 사랑을, 삶을 살라고 선사된 축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이 환히 드러났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은 또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교황청 성직자성은 2020년 사제성화의 날을 맞아 발표한 묵상자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사제들’이 되새겨야 할 5가지 덕목을 깊이 묵상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비단 사제들뿐 아니라 예수성심의 삶을 살아가야할 모든 신자들이 마음에 새겨야할 감사, 자비, 연민, 깨어 있음, 용기의 5가지 덕목입니다. 각 덕목에 대한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1.감사;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셨다(마태11,25).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질이고 목자의 존재 방식이다. 사제는 감사를 의미하는 성찬례의 거행을 통해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성심에 동화된다.
2.자비; 사제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에게 다다르시어 악에서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3.연민;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연민으로 자기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직접 다가가 어루 만지는 사제야말로 참으로 좋은 본보기이다.
4.깨어 있음; 현실에, 교회에, 우리 자신에 대하여 실망했을 때, 우리는 달콤한 슬픔에 젖어 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슬픔은 불만과 적의를 품게해 변화와 회개를 위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 버린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있으며 힘있는 말씀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깨어 노력해야 한다.
5.용기; 용기있는 마음을 지켜나가려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두 유대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째, 예수님과 이루는 유대요, 둘째, 형제들과 이루는 유대이다.”-
비단 사제뿐 아니라 예수 성심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의 5가지 덕목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예수 성심의 사랑과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게 해 주십니다. 끝으로 예수성심의 사랑을 집약한, 미사중 깊고 아름다운 감사송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어, 저희를 위하여 몸소 자신을 바치시고,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아멘.
당신께 생명의 샘이 있나이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의 저서에서 (Opusculum 3, Lignum vitae, 29-30. 47)
구원된 사람아. 너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분이 누구이시고 얼마나 위대하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여 보라. 그분의 죽음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분의 돌아가심에 하늘과 땅은 애곡하며 굳은 바위도 산산히 부서지나니.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교회가 생겨나고,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 나오도록 했도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 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샘물처럼 솟아 올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도다.
그리스도의 벗이여, 일어나 “동굴 입구의 벼랑에 둥지를 둔 비둘기처럼 되어라.” “자기 집에 들어 있는 참새처럼” 그 안에 끊임없이 깨어 있고, 정결한 사랑의 비둘기처럼 새끼들을 거기에 숨기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거기에 네 입술을 대어라.” “에덴 한가운데서 흘러 나와 네 줄기로 갈라져” 사랑으로 타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흘러 퍼져 온 땅을 적시고 열매 맺게 하는 강물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아, 네가 누구이든 간에 열렬한 갈망으로 생명과 빛의 이 샘으로 달려가 마음의 깊은 데서 나오는 힘으로 그분께 외쳐라.
“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여! 오, 영원한 빛의 순수한 광채여! 당신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이시고, 온갖 빛을 비추어 주시고 동녘이 처음으로 밝아 오기 시작하던 때부터 당신 신성의 옥좌 앞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꺼지지 않는 광휘 속에 보존하는 빛이십니다!
모든 인간의 시야에서 감추인 샘에서 흘러 나오는 영원하고 다다를 수 없으며, 맑고, 달콤함 물이여!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그 높이는 잴 수 없으며 그 폭은 광대하고 그 해맑음은 때 묻음을 모릅니다.”
그 샘에서 “하느님의 도성을 즐겁게 하는” 강물이 흘러 나와 “환희와 찬미 소리 드높던 그 가운데서” 우리가 찬미의 노래를 당신께 부르고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게 됨을” 체험으로 확증하게 되는도다.
<사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제는
하늘빛을 땅에 드리우도록
땅기운을 하늘에 들어 높이도록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곱게 잇도록
부르심 받음 사람입니다
사제는
여린 마음과 작은 몸으로
하느님께서 정성껏 빚으신
온 누리 보듬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한 몸 추스르기 버거워도
하느님 사랑 가득 담은
함께 사는 세상 가꾸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저 홀로 머물 울타리 허물어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 가득한
여리고 찢긴 거친 세상 담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홀로 거룩함의 꿈에서 깨어나
더러운 것 깨끗하게 하고자
온 삶 아낌없이 던지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손길 닿은 세상 모시되
세상에 짓눌리고 세상이 버린
하느님의 작은 이 품도록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제는
제 살기 위해 벗을 희생시키지 않으며
벗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약하고 추하고 부족한 사람이기에
주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몸과 마음에
핏빛 사랑의 상처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순간부터 끝 모를 마지막까지
앞서 가시고 함께 하시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용기 내어 또 한 걸음 내딛는 이
바로 주님의 사제입니다.
지금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품이다.
최민석 신부님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일이다. 내 인생에서 돈이나 세상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만으로도 나 얼마나 행복하고 벅찬지 모른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
장미는 좋은 사람에게는 향기를 뿜어 주고 나쁜 사람한테서는 향기를 거두겠다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이 등불을 밝혀들고 밤길을 걸어가는데 그가 악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에게서 빛을 거두지 않는다.
장미와 등불처럼 사랑은 있는 그대로 존재를 살리고 빛나게 한다. 한 그루 나무가 얼마나 속절없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젊은이와 늙은이, 고상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여자와 남자, 짐승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심지어 저를 도끼로 찍어 넘기려 하는 자에게조차 나무는 그렇게 더 이상 ‘나’ 없이 제 자신을 그에게 내어 준다.
사랑은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5)
내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순수의식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장미와 등불과 나무가 그 맑고 순결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나타내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긴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가 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는 사랑이다. 내가 하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억지를 부리고 사랑을 날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내가 하려는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인간의 죄는 악의에서 빚어지는 게 아니라 무명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어야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는 아무도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나무처럼, 장미처럼, 등불처럼 그냥 내어줄 뿐, 그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돌려받고자 하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있는 그대로 그냥 본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 아래서도 그 어떤 비난도 책망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의식이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서 제가 사랑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등불은 등불을 비추는데 골몰하여 제 빛이 남에게 무슨 혜택을 주는지 마는지 그런 것에는 아예 생각이 미치지를 않는 것처럼 말이다. 장미가 향기를 뿜어내는 것은 그 향기를 맡고 좋아하는 누가 있든 말든, 향기를 뿜어내는 일 말고 다른 무슨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나무가 그늘을 내어주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 준다.
향기도 빛도 그늘도, 누가 다가오면 생겨났다가 아무도 없으면 거두어지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있느냐 없느냐,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에 상관없다. 사랑은 언제나 그렇다. 사랑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사랑에는 목적이 없다. 향기도 빛도 그늘도 누가 저희들한테서 무슨 혜택을 입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그냥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이다.
자기네가 무슨 좋은 일을 한다든지 누구에게 무슨 덕을 끼친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것들의 왼손은 정말로 제 오른손이 하는 일을 모른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마태오 25,37)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다. 사랑은 온전한 존재의 자유이며 평화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직 사랑만이 실재할 뿐이다. 다른 것은 모두 허상이다.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 나도 너도 모두 그리스도 사랑의 다른 모습이다. 우리 사이를 오가는 말도 사랑의 다른 모습이다.
나는 없다. 주는 나도 받는 너도 주고받는 물건도 없다. 이는 주는 나도 사랑이고, 받는 너도 사랑이고, 주고받는 물건도 사랑이라는 거다. 그렇게 깨닫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경지까지 갈 수 있다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받아들임’의 멍에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멍에는 말이나 소가 무거운 것을 끌고 가도록 가축의 목에 거는 나무 막대를 말합니다. 가축이 그 막대를 끌고 가면, 거기에 줄로 연결된 수레나 쟁기가 뒤따라 끌려가는 식이지요. 그러다 보니 수레나 쟁기와 비교해 멍에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가축의 몸에 얼마나 잘 맞는지에 따라 일이 고되게 느껴지는 정도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비단 물리적인 멍에만이 아니지요. 심리적인 멍에, 다시 말해서 그것이 남의 일인지 아니면 내 일인지, 또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따라 힘든 정도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억지로 하는 일은 고달프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은 힘든 줄 모르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모두 나름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맡겨진 책임, 남모르는 상처들, 질병의 고통, 경제적 어려움, 말도 안 되는 오해들, 관계의 껄끄러움 등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초대하십니다. 남들 시선이나 처벌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메는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선한 뜻을 믿는 ‘받아들임’의 멍에를 메라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그대로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의미를 찾을 때, 무게는 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지금으로부터 1350여년 전, 신라의 승려인 원효는 선진 불교를 접하고 더 많은 배움을 얻기 위해 저 먼 당나라 경주로 유학길에 오릅니다. 길을 가던 도중 밤이 깊어 어느 동굴에서 묵게 되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랐던 원효는 마침 근처에서 고인 물을 발견하고 그 물을 마셨습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원효는 자신이 전날 밤 마신 물이 해골 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임을 알게 된 후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저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제 밤이나 오늘 아침이나 똑같은데, 어찌하여 어제는 단물 맛이 나던 것이 오늘은 구역질을 나게 하는 것일까? 바로 그것이다. 어제와 오늘 사이 달라진 것은 저 물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이다. 진리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구나!”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 속에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으면 어떠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으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더라도 불평과 불만만 가득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메신 멍에는 결코 메기 편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어깨에 짊어지신 십자가는 당신을 세 번이나 넘어지게 할 만큼 크고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어깨에 멍이 들게 하고, 그분의 온 몸에 상처를 낼 정도로 거칠고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유연하며 열려있는 마음입니다. 겸손함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마음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은 유연하며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어떤 것을 주셔도 불평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서 당신 자신을 한 없이 낮추셨기에 당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추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들을 지니고 계셨기에 그토록 무겁고 불편한 멍에를 가볍고 편하게 여기며 번쩍 들 수 있는 힘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자 “예수 성심 대축일”을 기념하는 오늘, 마음 속에 온유함과 겸손함을 간직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의 고정관념 속에 갇히지 않는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내 뜻을 하느님께 강요하지 말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큰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나 자신의 삶을 다시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겸손과 온유함이다. <마태 11, 25-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의 마음을 사랑하고 마음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하십니다. 오늘 사제 성화의 날, 가난한 마음을 지니고 살면 성화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겸손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3, 2-5, 제자들의 발 씻기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으면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필립보 2, 3에 기록되어 있으며, 주님은 마태 23, 12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탁하고 하느님에게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겸손한 이의 기도는 “자기의 존재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항상 하느님 존재에 속해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느님을 찾아 만나는 행위입니다.
어느 날 과천 성모영보 수녀원에 피정 지도하러 가서 준비도 없이 큰 공동 방에서 추운 겨울 유리창은 비닐로 막고, 바람 부니 떨어져 나간 방에서 일주일 가난하게 고생하며 약간의 불평을 갖고 말없이 지내는데 공동 방 벽에 창설자 선 로렌조 신부님의 유언장을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성서 배우면서 존경하던 분이었습니다. “자매 여러분! 항상 마음을 합심하여 어려움을 잘 참고, 모든 고통에 인내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서로 모였으니 끝까지 겸손하며 가난하게 하느님의 사랑으로 남에게 봉사하고 서로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피정시키러 갔다가 한 수 배우고 아무런 불평 없이 참고 견디다 돌아왔습니다. 전에 포콜라레 운동할 때 끼아라 루빅이 적은 글에 “겸손은 우리의 마음을 이끄는 매혹적 덕이다.” 이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 사람은 근본적으로 가난하고, 약하고, 무시당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마태 5, 5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땅을 차지할 것이다.” 시편 37, 11 “보잘것없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태평세월을 누릴 것이다.” 부드럽고 순한 것은 몸을 보존하는 장본이요, 억세고 날카로운 것은 화를 부르는 원인이 됩니다.
온유한 사람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만 구하고, 하느님 자비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바라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북쪽이 가난하고, 약하고, 문제가 많아 위기에 빠진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억세게 나가고 강한 말로 “폭파한다. 불바다로 만든다.” 하면 결국 자멸하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죽기 싫으면 우리말 들어라” 하면 점점 더 어려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같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대화의 길로 나와야 합니다. 국제 사회나 만족 사이나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대화에 나올 때 서로 도우며 죽음의 고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주시는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성 요한 사도는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2-13)
어제 저녁 성전에서 주님의 기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내려오는데, 문득 제 머리 속에 이런 깨달음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인간적인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노예처럼 붙잡혀 있다고 여기던 죄악이 사실 우리의 탓이 아니라 악마가 우리에게 주는 굴레라면, 우리가 믿음과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내 스스로의 굴레는 용서라고 하는 사랑이구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에게는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의 성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향해야 할 곳은
예수님의
성심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사제들을
성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의
참마음입니다.
마음이 마음을
치유하고
마음이 마음을
이끕니다.
예수님의 성심으로
사제의 첫마음을
되찾게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수 없이
상처받으시는
예수 성심이시여,
사제들의 첫마음을
되찾아주소서.
코로나 19로
두렵고 아프고
지친 마음을
치유시켜주소서.
예수 성심은
오늘도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아 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