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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6년 6월 21일 (녹) 연중 제12주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6.06.21|조회수21 목록 댓글 0

제1독서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예레미야가 말하였다.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2-15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6-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26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으니, 주님을 찬양하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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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예언자는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는다. 자신을 고발하라는 외침이다.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예언자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그를 붙잡아 주고 있다(제1독서). 아담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는 구원되었다.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살게 된 것이다(제2독서). 진정 두려워할 분은 영혼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그분은 들꽃 한 송이나 공중의 새 한 마리까지도 애정으로 대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믿음의 부족이 두려움을 부른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나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은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피부에 와닿는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박해와 거절을 실감하는 제자들에게 건넨 말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10,26).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는 말씀은, 비밀을 폭로하라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뚫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고통 속에서 배운 말, 상처를 통하여 들은 말은 혼자 듣고서 감내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10,28). 몸은 상처 입고 쓰러질 수 있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참된 가치에는 감히 인간의 위력이나 억압이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위협보다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더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립니다. 이처럼 값싸게 여겨지는 생명의 죽음조차 하느님의 시선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들조차 하느님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버려지는 것, 잊히는 것, 이름 없이 사라지는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거침없이 오셨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침묵하게 하지만, 신뢰는 우리 입을 열어 주고 우리를 행동하게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기억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세상을 향하여 끝내 나아갈 것인지. 그 선택이 우리의 슬픔을 다른 빛으로 바꿉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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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성 마태오의 순교”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태오 가 병사들의 손에 순교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두 가지 장면이 대비를 이룹니다. 한 장면에서는 포악한 병사가 마태오를 죽이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천사가 월계수를 마태오에게 건네고자 구름을 타고 내려옵니다. 한 그림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장면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비참한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을 그린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신앙에 의하여 승리의 월계수가 주어지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이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장면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비극적 죽음이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압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치 씨앗이 땅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씨앗이 죽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싹이 텄다.”라고 말하듯이, 비극적인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승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 속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많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드러내는 믿음에 기뻐하고 계심을 기억합시다.(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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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안에서 교회는 자주 박해와 부딪칩니다. 교회가 살아가는 그 주변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다른 고통과는 달리 의인에게 주어지는 폭력입니다.

이사야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당함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지혜 2,14)고 불편해 하지만, 주님의 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예언자를 박해했던 자기 조상들의 불의를 이어 가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반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계산은 어긋날 뿐입니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1코린 2,8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의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길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늘 새롭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온통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과 가난, 그리고 용서를 외치는 이는 틀림없이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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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두렵습니다. 사는 것이 겁나고 미래는 막연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쓰러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예기치 않던 사건에 말려드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그러한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는지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한다고 나에게 오는 고통이 딴 데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몫의 불행이 있다고도 합니다. 겁내고 벌벌 떤다고 운명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없애 주고 불행은 오지 않게 하소서.’ 이것은 어린이의 기도입니다. 어른은 이러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시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고통과 불행은 인간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없애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는지요? 없애 주기보다는 힘을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어차피 내 몫으로 주어진 십자가입니다. 그분께서 힘을 주셔야 고통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일 때 두려움은 더 이상 무서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만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면 누가 ‘아버지’라 부르겠습니까? 축복만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면 어떻게 ‘정의의 하느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잊지 맙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 몫의 고통과 축복이 있음을.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박사 연구팀은 5년 동안 노년 부부를 추적·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타인을 도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현저히 낮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카네기 멜런대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을 냈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혈압이 낮고, 염증 수치가 낮고, 인지 기능 저하 속도가 느린 것입니다. 기여는 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 급격하게 쇠약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운동량이 줄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뇌가 ‘나는 더 이상 공동체에 기여하지 못한다’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부나 기여는 이렇게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듭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하고, ‘내 코가 석 자’라면서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뜻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더불어 이 세상을 더 의미 있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세상 권력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은 고작 육신의 죽음뿐이고, 그 권력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결단코 손댈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고 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 즉 영원한 심판권자는 오직 하느님 뿐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올바로 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참새와 머리카락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참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는 가장 값싼 고기였습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헐값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생사조차 하느님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가닥에 이르며, 우리 자신도 몇 개인지 모를 만큼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를 다 세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만큼 나를 존귀한 자녀로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사는 사람만이 세상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때로는 세상의 위협과 조롱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한 우리 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일까요?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이 더 큰 이득입니다.

 

오늘의 명언: 한 인간의 참된 가치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가늠된다. 인생의 행복은 하루를 어떤 생각으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최근에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참례 인원이 늘어난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 2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주일 미사 참례 인원이 700명이 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900명이 넘는 때가 많았고, 지난 부활 대축일에는 1,155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교우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가대 모임에서도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원이 늘어서 연습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새로운 성가를 배우고 싶은데 연습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교포 사목의 현실은 점점 고령화되고, 봉사자는 줄어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은 오히려 봉사자가 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고, 교우들의 따뜻한 마음 덕분입니다.

감사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면서 성당 경계를 이루던 나무 몇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나와서 퇴비를 뿌리고, 죽은 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새 나무를 심었습니다. 예전에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영화가 있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나 나타나서 도와주던 정의의 로봇이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그런 형제님들이 계십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묵묵히 나타나서 땀 흘리며 봉사하는 분들입니다. 지난 Mother’s Day를 앞두고 형제님들은 어머니들을 위해서 맛있는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형제님들이 모여서 고기를 썰었고, 정성껏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님들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성모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참 아름답구나.’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인 1996년입니다. 봉성체를 가면 만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갔다 오다가 넘어졌는데, 그것이 큰 병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점점 근육이 약해져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휠체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첫영성체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 늘 기뻐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어느 날 제게 짧은 시 한 편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시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몸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맑고 따뜻했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때문에만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본당도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당 청소를 하는 분들,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분들,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 성가대로 봉사하는 분들, 힘든 교우를 위로하는 분들, 말없이 헌금하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수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도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박해를 받았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고향을 떠나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사제를 만나기 어려웠고, 미사를 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이유는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훌륭한 제도 때문만도 아닙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별처럼 빛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겼습니다. 시련은 예레미야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굳건한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오해받을 때도 있고, 손해 보는 일도 있고, 외로운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지는 십자가라면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힘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땀방울입니다. 묵묵히 감당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런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봉사하고, 기쁘게 나누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빛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중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기도 중에
들릴 듯 말 듯
그분께서 속삭이신다 


들리느냐
지체하지 말고
네 삶으로 외쳐라


귀를 막은 이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기도 중에
보일 듯 말 듯
그분께서 비추신다


보이느냐
두려워하지 말고
너를 살라 비추어라


어둠을 즐기는 이들까지
빛에 잠기도록


기도 중에
알 듯 모를 듯
그분께서 알려주신다


알겠느냐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네 목숨을 걸고 증언하여라


거짓을 일삼는 이들까지
진리에 무릎 꿇도록


기도 중에
느낄 듯 말 듯
그분께서 함께하신다


느끼느냐
아낌없이 남김없이
너를 바쳐 느끼게 하여라


홀로 삶에 맛들인 이들까지
더불어함께 살도록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어쩌면 두려움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다가오는 위험을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안에 영원한 구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사활과 존폐가 언제나 하느님께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피조물들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굴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경외심을 갖고 하느님을 진정 두려워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바로 진리이시고, 하느님이 정의이시고, 하느님이 사랑이시며 하느님이 우리 존재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의 경우 목에 칼이 들어는 위협의 순간에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당당히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며 존재하게 하셨고, 그 하느님께서 나를 살게 하시고, 그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의 길이자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김석주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마음을 굳건히 가지라는 위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시선과 평가, 비난과 박해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과 세상 앞에서 느끼는 공포입니다. 누군가의 비난이 두렵고, 손해 보는 것이 두렵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은 사람의 힘이 우리의 몸을 해칠 수는 있어도,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과 믿음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여기는 공포 심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분 앞에서 바르게 살려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경외하여라.” 신앙은 거창한 말이나 큰 행동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작은 고백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힘들어하는 이에게 기도하겠다는 말 한마디, 조용히 바치는 작은 기도, 신앙인답게 선택하려는 작은 용기가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평가보다 하느님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삶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더 깊이 신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10/26-33>6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제 우리는 또 한분의 형제를 믿음 안에 90여년을 사시다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보내드린 형제의 죽음을 맞이하여 하늘 길 가신 분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하며 정성것 환송하려 가시는 길을 꾸미고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믿는 이의 죽음은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처럼 죽음의 문을 통해 영원한 나라에 자리를 옮기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육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며 이를믿고 사는 사람들의 희망이며 사랑입니다. 믿는 사람은 죽음앞에 슬픈 얼굴과 눈물이 아니라 영원한 길에 들어선 형제가 믿은대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 온갖시련 속에 모든 고통을 벗어버리고 주님 품에 영원한 안식을 얻음을 믿고 수도원을 떠나 보냅니다.

오늘 복음에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 하심 같이 각자의 죽음도 영원한 생명에 비교하면서 육신의 생명보다 영혼의 생명에 마음두고 기도속에 감사 찬미하며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천년 만년 살고자 해도 백년을 넘기는 사람이 5%도 안되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아무리 권력이있고 재력이 있고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육신의 죽음앞에 이길 장사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을 영원이 살도록 마련하신 하느님은 영혼의 영원한 삶을 마련하신 주님 찬미하며 살고 세상의 육신의 생명에 목매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믿음을 사는 것 가장 지혜롭고 힘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순교지의 성지를 참배하며 의식하고 깨우치는 것은 생명을 내어주며 영원한 생명을 받으며 목숨을 내어주신 순교정신을 기리며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육신의 생명 바쳐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믿음을 다짐하는 기회를 가지고 육신을 죽이대 영원한 생명을 어찌못하는 사람을 두려원 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섬기며 믿음 희망 사랑 안에 살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좁은 문은 죽음입니다. 저는 이 좁은 문을 통과한 선배 후배 속에 살며 두려움 없이 그좁은 문을 기쁨 마음으로 통과할 시간 날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김웅태 신부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26.28.31 참조)

왜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거듭 들려주실까요?

그만큼 우리 삶 안에 두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건강에 대한 염려,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생업의 어려움,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와 외로움, 신앙인으로 바르게 살고자 할 때 겪는 부담과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저마다 크고 작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28)

이 말씀은 두려움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큰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았고, 가까운 이들마저 그가 쓰러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사방이 막힌 것 같고, 누구도 자기편이 아닌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절망 속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예레 20,11)

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신앙인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를 생각해 봅니다.

보조 바퀴를 떼고 두 바퀴로 달려야 할 때 아이는 두려워합니다. 넘어질까 봐, 다칠까 봐 몸이 굳습니다. 그때 아이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잘 닦인 길보다, 뒤에서 자전거를 붙잡아 주는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잡고 있다. 앞만 보고 가거라.”

그 목소리를 믿는 순간, 아이는 조금씩 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우리 신앙의 길도 이와 비슷합니다. 삶이 흔들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새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마태 10,29)

예수님 시대에 참새는 아주 값싼 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작은 생명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마태 10,30-3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왜 이렇게 지치고 두려운지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한숨, 말로 표현하지 못한 기도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죄와 죽음보다 더 크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말합니다. 인간의 약함과 죄가 크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은 그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은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은총 안에서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마태 10,32)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 손해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정직하게 살기 때문에 불편할 수 있고, 용서하려 하기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으며, 신앙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세상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을 증언합니다.

큰 말이 아니어도 됩니다. 정직한 선택, 따뜻한 말 한마디, 미운 이를 위해 바치는 기도, 힘든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작은 사랑이 모두 주님을 증언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한 주간 두려움이 마음을 흔들 때, 오늘 복음 말씀을 조용히 되새겨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센 용사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붙들어 주십니다.

아버지의 손길을 믿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나가는 아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믿고 오늘의 삶을 기쁘고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준수 신부님

가끔 아주 오랜 전에 찍었던 제 사진을 보고 놀라는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사실 제 머리의 탈모는 제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하느님도 제 머리카락 숫자를 분명히 세어 두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던 제 머리카락 숫자는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스트레스로,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강했지만 더 이상 셀 필요가 없을 만큼 빠지기 시작했고 이젠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저야 이젠 제 머리카락 숫자에 별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은데 설마 무척 분주하실 하느님께서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두시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마! 아직도 제 머리카락 숫자에 관심을 쏟고 계실까요?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무려 3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예고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는 분명 제자들을 보낼 세상의 현실을 진단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제자들의 내적 상태를 꿰뚫어 보셨기에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고 당부하시면서 위로와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무엇을 말할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약속한 성령이 오면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상황에 적절하게 말씀하시고 이끌어 줄 것이다.”라고 다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린 시절에는 천둥이나 번개, 태풍만 불어와도 놀라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고향 전남 순천엔 한낮부터 엄청난 집중 폭우로 제방이 무너지고, 물이 범람해서 갯가에 있던 집을 피해 높은 빌딩(=국민은행, 당시엔 가장 높은 건물로 기억하지만)으로 피신해서 밤새 내내 두려움으로 떨었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1베3,14)라는 말씀은 체험으로 깨달은 권고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의도는 사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도 요한 역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 4,8)라는 말씀의 요지도 거의 유사합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어 봅시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27,1) 이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짙게 내재해 있다가, 일어난 사건과 생생한 실제 상황에 의해서 우리 의식으로 솟구쳐 오른다고 봅니다. 사람이나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 질병(=건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결혼과 일에 대한 두려움, 취업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 미래와 노후에 대한 두려움 등 어쩌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숱한 두려움을 직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의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이며 이런 한계상황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어 맡기라”라는 성 아오스딩의 표현으로 위로받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마태10, 28)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곧 진리를 아는 것이고 그 앎은 우리를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롭게 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이 진리의 빛으로 비춤으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고, 상대적으로 인간 존재에 비해 하찮은 참새마저 지켜주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두려움은 더 이상 인간을 짓누르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8, 5) 두려움은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겨울 눈이 따뜻한 봄의 햇살로 녹듯이 사라지라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거룩하신 만군의 주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더러운 우리의 입술과 마음을 씻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타는 숯으로 우리의 더러운 입에 대시면서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 7)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심판의 두려움에서 일으켜 세워주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봅니다. 기도를 대신해서 가톨릭 성가 472번 「주님 저 하늘 펼치시고」 가사를 마음으로 조용히 불러 보도록 합시다. 『온갖 두려움과 모든 근심 저 멀리에 던져 버리오며 주님 아름다움 생각할 때 내 마음엔 큰 기쁨이 넘치네. 주님은 저 하늘 펼치시고 태양과 바다 꼿 만드셨네. 그러나 주님의 가장 귀한 선물은 생명과 사랑의 은혜 찬미하리. 아~~ 』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키엣 대주교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하늘나라를 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에 주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삶으로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마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고, 사랑과 체험 안에서 깊이 깨달아지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마음과 영혼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만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밤중에 들려오는 말씀은 멀리서 들리는 외침이 아니라, 함께 가까이 머무는 이에게 건네시는 친밀한 말씀입니다. 귓속말은 마음이 마음에게 전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이며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함 안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님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지붕 위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복음을 모든 이가 듣고 볼 수 있도록 드러내어 전한다는 뜻입니다. 말과 글, 소리와 이미지, 책과 영화, 방송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의 말씀은 전해질 수 있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 노인과 병든 이, 가까운 이와 멀리 있는 이 모두가 복음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담대함이며,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은 육신을 해칠 수는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 세상에 머물 뿐,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은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박해 속에서 복음은 더욱 널리 퍼져 갑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주님을 따르는 이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에 머물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담대히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일은 때로 손해와 희생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는 언제나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하는 이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잃는 것이 있다 해도, 주님 안에서 얻는 기쁨과 생명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고백하는 삶은 결국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주님을 알아야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내 뜻과 욕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삶은 더 이상 두려움에 붙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 자체가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는 증언이 될 것입니다. 말로만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한없이 어지신 주님,

저희가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하게 하시고, 세상의 가치보다 하늘나라의 기쁨을 따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용기 있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과의 친밀함을 묵상해 봅시다.
나는 주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이나 의무로 듣고 있는지, 아니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 머물며 듣고 있는지 조용히 돌아봅시다.

 

2.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나의 말과 행동,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의 태도가 주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이름을 전할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하는 삶을 성찰해 봅시다.
세상의 시선, 손해, 어려움 때문에 주님을 고백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 지 살펴보고, 오늘 내가 담대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한 가지를 결심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반복된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다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사도들과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씀이다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루카 2,34), 박해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항상 동반자처럼 존재해 왔다.

1. 예레미야의 상징성과 그리스도인의 소명
1독서(예레 20,10-13)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당한 고통과 두려움을 증언한다그는 동족으로부터 “공포가 사방에 있다!”라는 조롱을 받고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지만끝내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는다예레미야의 충실함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고하며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운명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다.

2.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신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된다우선심판 때에의 담대함이다숨겨진 것은 드러나고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된다.(26진리의 말씀은 결국 드러날 것이므로제자들은 세상에서 복음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한다그리스도인은 진리를 감출 수 없으며진리를 감추는 순간 스스로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참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사람은 육신만 죽일 수 있지만영혼과 육신을 함께 지옥에 던지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28이는 인간 권력보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곧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일깨운다사람의 칼은 육신을 베지만하느님의 심판은 영혼과 육신을 함께 판단하신다그러므로 인간의 칼보다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섭리 안에서 확신을 갖도록 하자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하느님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다는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존재 전체가 아버지 손길 안에 있다는 약속이다.

3. 고백과 증언의 책임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라고 하신다이 말씀은 박해 앞에서 신앙을 증언할 용기와 순교 신앙의 의미를 드러낸다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약속을 믿고 생명을 바쳤다교회 헌장도 그리스도인의 증언을 이렇게 가르친다“교회는 언제나 박해를 당해 왔으며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의 운명이다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부활의 빛을 드러내는 표징이다.(42)

4. 은총이 죄를 압도한다: (로마 5,12-15)
바오로 사도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죄보다 더 큰 것이 은총임을 강조한다“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죄의 세력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그리스도의 은총은 죄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따라서 신앙인은 두려움보다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5. 신앙인의 삶에의 적용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위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신앙을 고백하는 용기는 인간적 담대함이 아니라성령의 은총에서 비롯된다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삶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성 이레네오는 말한다“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때우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의 증언이 된다.

6. 맺음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 번의 권고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두려워하지 마라진리는 드러날 것이다두려워하지 마라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두려워하지 마라아버지의 섭리가 너희를 붙들고 있다십자가와 부활의 빛 속에서 우리는 담대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그럴 때 교회는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오히려 세상의 구원과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다.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26-33).”

 

1) 26절의 말씀을 앞의 25절,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에 연결하면, 26절은, “누가 진짜로 하느님 편이고, 누가 사탄 편인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사탄과 그것의 추종자들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 편에 선 사람들만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해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26절을 27절에 연결하면, 26절의 뜻은 “너희가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복음 선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박해를 받는 일이 생겨도 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는 활동이고, 이미 확정되어 있는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탄 편에 서 있는 자들의 박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7절의 “내가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활동을 가리키고,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는 제자들의 활동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하셨지만, 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가라고 파견하셨습니다(마르 16,15).

 

2) 여기서 “두려워하지 마라.”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무서운 일을 만나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데,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믿음, 희망, 간절함의 차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두려움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으로 두려움을 참고 견뎠고, 그런 그를 성령께서 도와주셨습니다.

28절의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영혼의 멸망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3)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너희를 지켜주신다.” 라는 뜻인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참새보다 더’ 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베드 1,7). 어떻게 표현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선교활동과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느님께서 전부 다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분”,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니까 힘든 일을 만나도 기죽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는, “그를 구원할 것이다.”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이 연상되는데,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감추는 것은 구원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우리 삶은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갑작스레 터지고, 알 수 없는 미래는 막연하게만 느껴집니다. 불의의 사건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고, 어느 순간 닥쳐온 슬픔과 아픔이 삶을 휘감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근심 걱정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족하고 약한 우리는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앞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걸까요? ‘두려움’의 근본적인 이유는 에덴동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하지요.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그러나 그들이 숨은 이유는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벌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빼앗는 분, 자유를 주시지 않고 속박하시는 분, 용서하기보다 처벌하시는 분으로 왜곡해서 보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두려움의 반대말은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습을 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될 것이고, 백성들은 바빌로니아로 귀양가게 되리라는 슬픈 소식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으로 여겨 그를 ‘매국노’로 낙인찍고 핍박했지요.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깊이 신뢰했던 예레미야는 그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살아계신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굳게 믿으며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할 뿐입니다. 그래서 ‘송사’, 즉 옳고 그름의 심판과 단죄를 모두 하느님 손에 맡깁니다. 자기 기준에 따라 제 손으로 하면 더 큰 폭력을 부르는 ‘복수’가 될 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뜻과 원칙에 따라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힘겨운 삶을 살다보면 예레미야처럼 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당장 얻을 수 있는 큰 이익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부정에 동조하는 우리들입니다. 나에게도 불똥이 튀거나 후환이 닥칠까 두려워 다른 이가 불의를 겪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묵인해버리는 우리들입니다. 당장의 피해나 희생을 두려워하여, 선(善)을 선으로 갚아주시고 악(惡)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 사람이 주는 피해는 두려워하면서 하느님과 그분이 내리시는 판결은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묻으려고 애를 써도 숨겨진 부정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겁을 주고 윽박질러도 감춰진 불의는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사필귀정’(事必歸正), 즉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결국 그분 뜻에 맞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이들은 결국엔 그 따름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참으로 두려워한다는 건 그분께 벌을 받을 게 무서워 마지못해 그분 뜻을 따르는 ‘노예적 복종’이 아니라, 그분께서 이루실 정의와 공정을 희망하며 사랑으로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그분 뜻을 따르는 ‘자발적 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을 굳게 믿는다 해도 그것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주어지는 불이익과 희생은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 결국엔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이끄심을 신뢰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내 앞에 놓인 십자가를 치워주시지는 않기에,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통과 시련은 나 스스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 속에서 ‘망하면 어쩌나’, ‘잘못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 게 사실이지요. 그런 우리 마음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새의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러길 원하지 않으셔도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슬픔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생기지만,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에서는 그분께서 심판하시지 않는 한 누구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고통과 시련은 그 ‘최대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 즉 실패와 좌절로 괴로워하고, 죽거나 다치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 모두가 지옥에서 멸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시니, 사람도 세상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과 육신 모두를 멸망시킬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당장 멸망시켜야 할 그분의 ‘원수’였다면 굳이 그러지 않으셨겠지요. 그만큼 하느님께서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보잘 것 없고 허물 투성이인 나라도 하느님께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 하나도 절대 허투루 흘려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시는데, 정작 나는 나 자신을, 그리고 하루 하루의 삶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요? 앞으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를 생각하며 삼가야겠습니다. 사소하고 평범한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도저히 솟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더라도 자포자기하지 말고 하느님 뜻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사는 기쁨과 보람으로 채우는 것이, 그렇게 하여 나를 보시는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된 두려움, 즉 ‘경외심’입니다.

 

 

 

귀한 존재들의 귀한 증언

     윤석희 미카엘 신부(어농 성지 전담)

우리는 지금 6월 예수 성심 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묵상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랑이었고, 그래서 성체성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처음 성체성사는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가장 처음으로 성체가 주어진 미사는 언제일까요? 1795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께서 이 땅에서 제일 처음으로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 북경에 파견된 밀사가 바로 어농 성지에서 현양하는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순교 복자이십니다.

오늘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안에서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느날 교리책을 열심히 읽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정약전 안드레아는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합니다. 사제가 아닌 일반 평신도가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유항검의 이 말에 다들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특히 이승훈 베드로는 “자신도 모른 채 큰 죄를 짓고 말았다.”며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마음 안에는 천국을 향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교회법으로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과 결단이 윤유일 바오로를 중국으로 파견하게 된 것입니다.

윤유일 바오로는 ‘밀사’였습니다. 특히 ‘고난의 밀사’라 불립니다. 조상제사 문제와 가성직제도에 관해 당시 북경 교구장이셨던 구베아 주교님께 문의합니다. 참으로 더운 여름날 땀이 비 오듯 내려도 옷소매 안에 꿰매진 편지 때문에 소매를 단 한 번도 걷어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참새보다 귀한 우리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신앙인인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이렇게 귀한 우리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한다면 귀한 존재들의 귀한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윤유일 바오로가 그러셨고, 최인길 마티아가 그러하였고, 지황 사바가 그러했습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 또한 그러한 증언을 하며 순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성심, 그 사랑을 안다고 증언하는 순교자들과 같은 신앙을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걷는 길 - 수원교구 하느님의 종 47위]

절규와 침묵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1839~1868)

      백정현 요셉 신부(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총무)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는 1892년 1월 22일, 프랑스의 휴양지 니스에서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산책하던 그날 저녁의 풍경을, 시대를 대표하는 명화 『절규』 속에 담아냅니다. 붉게 물들었던 평화로운 저녁 노을은 그의 그림 안에서 음습한 빛의 검푸른 바다와 섞여 핏빛으로 물결치고, 그를 앞서 가던 친구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되어 어느새 뒤에서 유령처럼 다가옵니다. 온통 왜곡된 배경 속에서, 절망에 빠진 잿빛 얼굴의 뭉크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그는 일기장에서 그날 “자연을 꿰뚫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절규는 손으로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귓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 소리는 외부에서 오는 소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결핍이 우리 안에서 외치는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가난함에서 오는 불안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을까요. 그 불안을 잠재우고 영혼의 고요함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에 머리를 기댄 채 주무시고 계십니다. 사방으로 풍랑이 휘몰아치고 배 안으로 바닷물이 들이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소리칩니다. 내적 침묵 안에 머무르고 계신 주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평화를 내어 주십니다. 그분의 명령에 바다는 잠잠해지고,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인간 존재의 불안은 우리를 물속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존재의 결핍을 채우는 은총은 물 위를 걷게 합니다.

경기도 광주의 양반 출신 조치명 타대오는 본래 귀가 어두웠다고 합니다. 신앙 때문에 죽산 용촌으로 이주해 살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1868년 7월 죽산 포교에게 아내 김 우르시치나와 함께 다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됩니다. 동료 신자와 성물이 있는 곳을 대라는 포교의 으름장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무수한 형벌도 그의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아내 김 우르시치나는 포교에게 “남편은 귀가 어둡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죽산도호부로 끌려간 타대오와 우르시치나 부부는 즉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는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타대오와 우르시치나 부부는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결국 교수형으로 순교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는 세속의 협박과 유혹의 소리에 귀를 닫았습니다. 관헌들의 협박과 회유 앞에서 그가 지킨 침묵은 장애의 결과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에 머무르는 내적 침묵이었습니다. 풍랑 속에서 흔들리던 배 안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그 평화가, 고문과 죽음 앞에 선 하느님의 종의 영혼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의 전구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함과 평화가 내려오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

저희가 세속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내적 침묵과 평화를 살게 하소서.

 

 

 

어농 성지

② 청년을 깨우는 영성의 울림

      이선규 대건 안드레아

순례자가 어농 성지에 도착한 주일 아침, 마침 찬양미사를 준비하고 있던 ‘안다미로 찬양팀’의 연습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활기 넘치는 은혜로운 찬양 소리에 이곳이 ‘청소년 성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울림을 통해 청년 순교복자들의 뜨거웠던 신앙이 200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현재 청소년들의 밝은 미소와 찬양 속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농 성지의 주일미사는 매주 “셈페르쿰, 셀라, 안다미로, 마라나타 찬양팀”의 봉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농 성지는 2007년 청소년 성지로 지정되어 매년 청소년을 위한 여름학교와 복사단 캠프, 그리고 찬양캠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농 성지에서는 20~40대에 이르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순교한 복자들을 현양하고 있습니다. 청년 순교복자들의 순교정신을 배울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영적 영양분을 채우고 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청년 봉사자들이 부족하여 여름 캠프는 성지측의 대관으로만 운영된다고 합니다. 2027 세계 청년대회를 앞두고 청년 봉사자들이 많이 양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어농 성지에는 성지만의 특별한 십자고상이 제단에 놓여있습니다. 이 고상은 유봉옥 제노베파 작가의 작품으로 소나무 원목 하나를 그대로 사용하여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신자석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재단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면 그때서야 예수님의 얼굴이 보입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고개를 떨구신 예수님. 그 수난의 순간 예수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원의 은총과 함께 마치 은은한 미소를 짓고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예수님의 표정이 제각기 달리 보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올려다보는 우리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예수님의 얼굴이 보일지도 궁금해졌습니다.

푸른 자연 속에서 충만한 기쁨을 얻고, 청년 순교자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돌아가는 청소년들이 각자 삶의 자리로 돌아가 또 하나의 작은 순교자이자 신앙의 증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빌어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두려움은 줄어들고
감사가 자라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와 우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성공이나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이미 소중하고 귀합니다.

참새는 참새로서 소중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소중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존엄을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두려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두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두러움보다
먼저 와 있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 있는
우리는 이미 존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평가와 걱정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불안과 경쟁이
일상이 된 이 시대에
우리는 자주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과 역사 안에서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소중한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두려움은 더 이상
삶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힘이 셉니다. 그래서 과거의 휘둘림에 한 대 맞으면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힘듭니다. 과거는 제자리에 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과거는 지금 현재에도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어쩌면 미래에도 그 힘의 위력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로 떠나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언젠가는 이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솔직히 어머니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어떻게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했지만, 혼자 있을 때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됩니다.

 

분명 과거의 일회성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어떤 쪽으로 그 힘을 발휘시키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글과 강의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언제나 제가 쓴 글을 읽으셨고, 이를 위해 컴퓨터도 스스로 독학하셨습니다. 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렇게 움직입니다. 또 자라고 변하고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주님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마음에 따라 움직이며 자라고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판 날에 우리 의지의 숨겨진 양심이 드러날 것이고, 지금은 흐리게 보이는 것들이 모두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 또는 그 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영혼이 없으면 죽고, 영혼은 하느님이 없으면 죽는다.’라는 성 아오스딩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육신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죄를 슬퍼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귀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을 안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과거의 주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하느님 나라 초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행운이란 우연하거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순간에 오랜 노력과 의지의 결정체로 찾아오는 것(노희영).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이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던 독서실에서 적은 글입니다.

“독서실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제일 공부를 잘하는데, 내가 제일 열심히 공부한다.”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제일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이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 안에서도 적용됩니다. 제일 열심히 운동해서 운동을 잘하고, 제일 열심히 노래해서 노래를 잘하고, 제일 열심히 춤을 춰서 춤을 잘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는 열심히 해도 안 된다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분야일 수도 있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효율적인 요령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움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우고 또 가르치면서 앎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섯 곳에 모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파견설교’로 마태오 복음 10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열두 제자를 발탁하심,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훈시 말씀,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 가족이 분열되리라는 말씀, 예수님 추종에 따른 보상.

연중 제12주일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은 파견 설교 가운데 ‘두려움을 떨치고 신앙을 고백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승의 생명은 죽일 수 있어도 영원한 생명만은 죽일 수 없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가지 생명을 다 앗아가실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하찮은 미물인 참새의 생명도 아끼고 돌보시는데, 참새보다 훨씬 귀한 제자들을 돌보시지 않을 것 같으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 작업은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골적인 박해자들과 냉랭한 반대자들,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주님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때로 끔찍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극복이 가능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오 복음 10장 26~27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당당한 대세 종교이지, 캥기는 것이 많아 은밀히 집회를 여는 밀교(密敎)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메시지는 태양처럼 밝은 빛, 모든 이의 시선을 끄는 생명이 약동하는 빛 안에서 전해집니다. 우리 집회는 비밀집회도 아니고 지하 운동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자신들 마음 속에만 깊이 간직하거나 은폐시켜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선포되어야 하고 내 삶을 통해 드러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는 십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손길 한번 닿지 않는 교회 도서관 먼지 낀 영성 서적 안에 잠자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거리에서 울려퍼져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의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자신의 뒤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나는 벌레만도 못하다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이런 나를 향해 절대 그게 아니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0~31절)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입니다. 나 같은 인간, 하느님 안중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다 세어두셨답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만큼 하느님께서 내게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고 허물투성이뿐인 내 일생일지라도 그분께서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것 같은 내 일상생활,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분의 큰 관심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라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소소한 일상생활 전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아무리 무의미해보이고 암담해보일지라도 더 이상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에 보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영양가 있는 일상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심기일전해야겠습니다.

 

 

 

<‘아님 말구’ 정신으로 사랑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군가를 사랑하여 다가가 고백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고백이 거절당하는 ‘두려움’과 싸워야 합니다. 만약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후회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결혼을 일주일 남겨놓고 베트남전에 투입되게 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녀와서 꼭 결혼하자고 약속을 하고 전투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목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그녀를 지켜볼 뿐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약혼녀의 짐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약혼녀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 그러나 끝까지 사랑했노라고 전해주게.”

친구는 약혼녀에게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약혼녀는 한없이 울었지만,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혼인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지만, 또한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멀리서 혼인식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와 혼인하는 사람은 발은 물론이요, 양손까지 절단된 퇴역군인이었던 것입니다.

두 다리가 절단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가가지 못한 이 군인은 얼마나 큰 후회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을지 분별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일단 표현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절당하는 아픔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또한 ‘아님 말구!’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를 그렇게 쓴 것입니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사랑이 집착이 되거나, 혹은 그 두려움 때문에 혼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한마디 말도 못 붙이고 끝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부가 고기를 잡는데 안 잡히는 물고기 때문에 물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그물에 들어오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물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이유는 그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들에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잡히지 않는 물고기 때문에 상처받는다면 그물질은 포기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선포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복음 선포를 하는데 우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멸망시켜도 영혼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혼까지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두려움 없이 증언한다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 선포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님 말구!’ 정신입니다. 

 

선교왕들은 다 이런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무조건 “찬미 예수!”라고 인사합니다. 불교 손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며 한 해에 서른 명 정도를 선교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길거리에서 띠를 두르고 무작정 다가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한 해에도 수백 명 선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오고 싶어도 인도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주저하는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의 어떤 선교왕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사람들을 ‘고구마’로 여긴다고 합니다. 고구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찔러보는 것입니다. 안 익었으면 다음에 또 찔러본다는 마음으로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을 선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유튜브에도 가끔 ‘악성 댓글’을 달거나 ‘싫어요’를 누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싫어요’를 누르는 사람을 찾아낼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왜 찾아내야 할까요? 모두가 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졌는데 호수의 물고기들이 다 그 그물에 들어와 보십시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저는 사실 ‘좋아요’, ‘싫어요’가 몇 개인지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에 휘둘리면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러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악플을 다신 분이 있다면 읽어보고 챙길 것은 챙기고 그분을 더는 댓글을 달지 못하게 차단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것을 읽고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면 반드시 거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이 무서워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주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지붕 위에서 선포되어야 하고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님 말구!’로 대처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고백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면 선포합시다. 그래야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아신다고 증언해 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 타임지에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부고 명단이 실렸습니다. 10만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고인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아직도 매일 확진자가 생기고 있고, 안타깝지만 사망자도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미국의 방송에서 한국의 외교부 장관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한국이 어떻게 코로나19를 잘 막아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국의 외교부 장관은 3T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Test, Trace, Treatment"라고 하였습니다. 검사, 추적, 치료라고 하였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증상이 시작되면 이미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범위한 검사가 필요합니다. 빠른 진단키트의 개발과 신속한 검사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고, 자가 격리 시키는 것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확진자의 동선과 겹치는 지역에 있었다면 자발적인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역 내 감염을 막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자원 봉사자의 참여가 있었기에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사망자의 수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봉쇄와 단절, 폐쇄로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때로 위기와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Lockdown(폐쇄)가 장기화 되면서 미사 없는 신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단체 활동도 중단 되었습니다. 영상으로 미사를 보고 있습니다. 문자로 신자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기름이 없으면 달릴 수 없듯이, 공동체의 친교와 나눔이 없으면 신앙의 열기와 활력이 식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행히 성당 문은 열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성체조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서와 신심서적을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부들은 교리와 신학을 수호하였습니다. 이단에 현혹되지 않도록 교회의 전통과 신앙의 진리를 지켜왔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박해는 점점 심해졌지만 신앙은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한국교회도 박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사제를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를 만나면 공동체는 기뻐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103위 성인이 되었고, 124위 복자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시련과 갈등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모함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의지하였고, 하느님께서 고난과 역경에서 구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시련과 갈등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더 강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갈등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때 일수록 더 굳게 하느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걸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기도 중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중에

들릴 듯 말 듯

그분께서 속삭이신다

 

들리느냐

지체하지 말고

네 삶으로 외쳐라

 

귀를 막은 이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기도 중에

보일 듯 말 듯

그분께서 비추신다

 

보이느냐

두려워하지 말고

너를 살라 비추어라

 

어둠을 즐기는 이들까지

빛에 잠기도록

 

기도 중에

알 듯 모를 듯

그분께서 알려주신다

 

알겠느냐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네 목숨을 걸고 증언하여라

 

거짓을 일삼는 이들까지

진리에 무릎 꿇도록

 

기도 중에

느낄 듯 말 듯

그분께서 함께하신다

 

느끼느냐

아낌없이 남김없이

너를 바쳐 느끼게 하여라

 

홀로 삶에 맛들인 이들까지

더불어함께 살도록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예레 20,10-13)에서는 예언자로서의 내적인 갈등에서 울부짖는 찬미가입니다.

하느님의 꾐에 빠져 예언직을 수락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가라시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명령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하지만(예레 1,7),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날마다 사람들에게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작정해도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의 뼛속에 가두어둔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또 외치고 전하지만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하느님)이 “폭력과 억압”이라고 저항합니다(예레 20,7-9). 이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공포 덩어리”(마고르 미싸빕)라 부르면서 고발하려 하고, 가까운 친구들마저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보복할 것이라면서 예언직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원래 값을 치러야 하지만(탈출 22,1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이 예레미야의 입에서 불이 되게 하시고, 백성은 장작이 되어 그 불이 그들을 삼킬 것입니다(예레 5,14; 23,29)

원래 예언자란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백성들에게 외치는 사람이지만, 마치 시편 저자(38장; 69,8-10)처럼, 이제는 예언자 자신이 백성들의 협박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죽어간다고 하소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겪는 아픔들 때문에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 그리고 사제들과 백성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예레미야가 잠시 잊은 듯합니다. 한참 투정을 부린 뒤에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자기와 함께 계시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그분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데 마치 하느님께서 자기를 유혹하셔서 예언자의 일을 하도록 하셨으니, 자기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복수의 내용은 백성이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고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복음(마태 10,26-33)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하느님 나라)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들로부터 닥쳐올 박해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신(마태 10,14-25) 다음,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밝은 데에서 말하며, 때가 되면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춰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니, 귓속말로 들은 것일지라도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지붕 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26-27절).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0,23). 또한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 받은 심판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을 것이고(마태 10,15),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은 상을 받을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인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듯이, 제자들에게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0,41-42). 제자들이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기(마태 6,26) 때문에 한 닢(하루 빵 값)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당시 가장 가난한 이들이 하루 먹는 육식)도 아니고, 한 마리조차도 하느님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듯이, 결코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주십니다(29-31절). 결국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는 말씀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과 영혼을 모두 죽일 수 있는 분은 악마도 인간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뿐이시므로 박해(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벌을 뜻함)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28절; 신명 10,12.20).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이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이들은 비록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을지라도 불법을 일삼는 이들입니다(마태 7,21-23). 예수님께서도 숨겨진 것이 드러나고, 감춰진 것이 알려질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당신을 모른다고 한 이들에게는 역시 모른다고 하실 것이고, 안다고 한 이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앎과 모름은 곧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도전이므로 영원한 생명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권능을 가지신 분은 임금이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보호하시고 아버지께로 거두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으므로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마음껏 외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늘나라를 마음껏, 공개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제자들이 아니라 제자들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기(마태 10,20)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믿음의 바탕이기도 하지만(구약)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척도(하느님께 대한 사랑)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심판예고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전하라는 것입니다.

 

제2독서(로마 5,12-15)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복음 선포의 이유를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과 화해(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됨)를 자랑하지만(로마 5,11) 아직도 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과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은 구원의 은총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바오로는 아담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형(종말론적 아담: 1코린 15,21)으로 보면서도 그는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죽음을 끌어들였으나, 그리스도의 순종과 십자가의 죽음(계약의 완성)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이 이 세상에 왔다고 합니다. 죽음의 머리인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생명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았습니다(로마 5,18). 하느님을 떠난 결과로 인간을 지배하는 죄의 권세가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준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결과로 인간에게 거저 베풀어지는 은총의 권세는 인간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1)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로마 5,22)이라는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로마 5,5) 때문에 바오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지(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갈라 6,14).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허풍입니다. 그래서 입으로만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면서 “주님!”이라고 부를 때 진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깊은 고뇌와 상처투성이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순교를 겪어야 할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을 전하라면 우리는 즉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뼛속까지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입에서 불이 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의 지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겨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이런 조건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늘 두렵고,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 하면서 먼저 주변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일시적인 부끄러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아니 하느님을 믿는다고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한 적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주님 곁에 머무르려고 애쓸 때 늘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을 죽음에 내놓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분이십니다.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굳게 받아들였는데, 어떻게 이런 분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이런 분의 가르침을 소홀히 다룰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어쩌면 두려움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밀려오는 두려움은 그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안에 영원한 구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존재 자체는 하느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존재의 사활과 존폐가 언제나 하느님께 걸려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굴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세상의 힘에 두려워하며 그것에 굴복하면서 비굴하고 비겁하게 살아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경외심을 갖고 하느님을 진정 두려워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바로 진리이시고, 하느님이 정의이시고, 하느님이 사랑이시며 하느님이 우리 존재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의 경우 목에 칼이 들어는 위협의 순간에도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당당히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경기도 하남에 있는 구산 성지의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순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며 존재하게 하셨고, 그 하느님께서 나를 살게 하시고, 그 하느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의 길이자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선교를 하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복음의 불모지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기에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했다. 선교는 저항이 있는 곳에 위치한다. 이런 곳에서 복음선포는 미션이며 사명이었다. 세속과 싸워 이기며 죽음을 내놓으며 삶의 자리를 잡아야 한다. 선교지역에 파견된 선교사가 왜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겠는가? 죽음과 직면한 노력의 결과는 거의 감지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그렇게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느님의 힘으로 두려움을 넘어 선교역사를 만들었다.

 

그 결과 미션과 사명이라 여기는 복음선교가 삶의 자리를 만들고 선교는 사목으로 바뀌고 미션. 사명이 무엇인가도 모른채 나태해졌다. 지금 교회는 사목의 시대에서 멀어지고 있다. 다시 선교할 때이고 사못자들은 미션. 사명은 다시 새겨 선교사의 의지로 불 태워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다. 급박하다. 선교는 늘 그랬다. 미미하고 발전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들을 통해 복음선교는 왕성하게 드러내 보여주실 것이다. 선교사들은 말씀을 믿고 용맹히 살았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6-28)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2주일>(2020. 6. 21.)(마태 10,26-33)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8-31).”

 

두려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죽음을 (멸망을) 두려워하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육신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든지 간에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음은 일반적인 일이고 보편적인 일인데도,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는 것을 볼 때가 많기 때문이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일이기 때문이고,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고, 저쪽 세상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재의식 속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

어떻든 죽음이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이 무서움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려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요한 14,1), 회개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인데, 우리가 실천한 선행과 사랑을 아주 사소한 일까지 다 알고 계시고,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마태 6,4).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우리 자신은 잊어버리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라는 말씀은,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으로, 우리가 한 일들을 심판 때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 억울한 심판을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참새보다 못한 처지가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27).”

 

언제인지는 몰라도 때가 되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누가 구원받을 선인인지, 누가 심판받을 악인인지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은 틀림없이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에 협력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그 나라를 맞이하게 될 텐데,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충실하게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의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지역보다 더 먼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마르 16,15). 

이 말에 대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라는 지시는 사도들에게만 하신 지시가 아닌가? 모든 신앙인이 다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적인 선교사들이 하는 것과 같은 선교활동을 모든 신앙인이 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하는 일이 아니라, 평소의 삶으로도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곧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하고, 신앙의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상 설교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 라는 말씀은(마태 5,13-16) 사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되어 있는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고백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이 증언과 고백은 말로 하는 것을 포함해서 ‘온 삶’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입니다. 박해 때에는 붙잡혀 가서 재판관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없는 상황에서는 언제, 누가 보아도 신앙인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고백이고 증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종교와 신앙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신원보증을 서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보증을 서 주시니 심판의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 즉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고, 종교와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앙갚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멸망을 선택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마태 12,20)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버리셔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겨레 사랑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⓵ 증오의 굴종에서 화해의 자유로-

      이기우 신부님

⒈ 다시 시작된 연중 시기에 연이어서 맞이했던 대축일들이 말해주는 바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기본자세로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위한 거룩한 변화야말로 예수 성심의 본 모습이요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메시지를 우리네 현실로 향해 선포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민족화해위원회에서는 6·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6월 17일부터 25일까지 한반도에 종전선언이 이루어져 평화체제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9일 기도를 바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시작된 이 연중 시기에 우리의 시선을 겨레의 현실에로 향하도록 재촉합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산하의 이 위원회가 한국의 모든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안한 9일 기도의 지향을 보면 현 시기 한반도의 현실에 관한 상황 인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지향들은, 「⓵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회심을 위하여, ⓶ 북한과 미국,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위하여, ⓷ 한반도의 비핵화와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위하여, ⓸ 경제제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⓹ 남과 북의 복음화를 위하여, ⓺ 이산가족과 탈북민들을 위하여, ⓻ 한반도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⓼ 평화의 일꾼들을 위하여, ⓽ 종전 선언과 평화체제 실현을 위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⒉ 무릇 역사상 인류가 기억하는 모든 전쟁은 종전되어서 평화를 회복한 날에 기억하는 법인데, 유독 이 땅에서 70년 전에 일어난 6·25 전쟁만은 전쟁이 발발한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잊지 말자는 것이었겠지요. 아직도 그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전쟁이 공산세력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며 적화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남한 지배세력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는 북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호 증오를 정치적 지배의 원동력으로 삼아 왔다는 점에서 남도 북도 똑같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은 남과 북은 전쟁 후 지금까지 서로에게 적이었으며, 서로의 법률과 정책과 제도가 모두 상호적대인 진영논리에 기반해 왔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한의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나 세력들은 죄다 종북세력으로서의 혐의를 면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 경쟁상대는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서 죽이거나 감옥에 보냈습니다. 이러한 비뚤어진 정치풍토는 전쟁 이전, 해방 직후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지향하던 김구, 여운형, 조봉암 같이 국민의 정치적 존경과 기대를 받던 인사들이 암살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일로부터 남한의 정치적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남한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던 인사들은 예외없이 군사독재세력들로부터 빨갱이로 몰려서 탄압을 받아야 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해방과 분단 이후 처음으로 민족 화해의 물꼬를 튼 김대중 대통령이었습니다. 없는 간첩을 조작해서 만들어서라도 살벌한 공안정국으로 국민적 지지가 없는 정부를 간신히 유지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사건들이 재일유학생들이나 재미유학생들 그리고 외딴 섬에서 살던 어부들을 내세운 간첩사건들입니다. 이 모든 사악한 정치풍토를 상징하는 것이 그 당시까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6·25 전쟁이 휴전되었어도 총성만 멎었을 뿐, 국민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고 증오에 기반한 가치관이 지배해 왔습니다.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죽여 버리겠다는 이런 증오적 가치관이 지배했던 증오의 겨울왕국이 이 나라였던 겁니다.

 

⒊ 그리고 이제까지 한국천주교회도 이러한 남북 간 상호 증오를 부추겨온 지배세력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형성된 남한 사회의 우경화에 적응하여, 북한에 세워진 정부와 동포들을 무신론 세력으로 규정하고 적대시해 왔습니다. 따라서 북한은 선교가 불가능한, 침묵의 땅이자 무신론 세상이었고 그곳에 얼마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감안하여 그저 침묵의 교회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사실 이 전쟁 이전에도 북한 정권은 천주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았고 따라서 그 어떠한 반성이나 성찰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때는 1995년 무렵부터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정치권과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국민 대다수의 시선은 우경화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먼저, 재야 학계에서부터 해방을 전후로 벌어졌던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발굴되면서 민족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사회과학적 성과로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치루어진 6·25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이 전쟁은 사실상 우리 겨레를 볼모로 잡고 전쟁을 사주한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 야욕의 결과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막연히 북한 동포들만을 원수로 알고 있던 인식에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전쟁을 시작한 북한 김일성의 전쟁범죄가 씻어질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북한 동포 전체가 모두 이 전쟁을 사주하고 지원한 강대국들의 희생자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전쟁으로 달라진 것은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었을 뿐 남이나 북이나 나아진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남과 북 양쪽에서 삼백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수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희생되었고 이산가족이 천만 명 이상 생겨났으며 국토의 거의 산업기반이 파괴되었으며 동족 간에 어마어마한 상호 증오심만 키웠습니다.

 

이 무렵 한국 천주교회는, 구약성경이 알려주는 희년 사상에 입각하여 해방 5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민족의 희년을 맞이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쇄신한 가르침에 따라서 무신론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향적 평가에 힘입어 북녘의 신자들을 일컬어 침묵의 교회라고 부르던 용어를 폐기하고 북한선교라는 명칭도 민족 화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 민족 분단 현실에 대한 이 전향적 분위기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 들어선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전쟁 가능성이 차단되기 시작했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이러한 남북 화해 분위기를 이어받으면서 오늘날까지 6·25 전쟁을 아직도 기념하기는 하면서도 하루빨리 종전선언이 이루어지고 평화체제가 실현되어야겠다는 국민적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⒌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민족 내부에서 서로를 증오하던 분위기가 서로 화해하고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분위기로 바뀐 지도 벌써 25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북 사이의 정세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는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의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나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하려는 약속을 하게 되면서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수립의 희망이 임박했다는 기대감이 높아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 정세를 보면, 아직 그 희망을 실현시킬 날이 오기 어렵고 더군다나 민족 분단에 책임이 있는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그 희망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요원하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속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⒍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통치를 받아 종살이를 한 세월이 36년이요, 하필 그 노예 처지가 풀려나게 된 것이 외세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으며, 6·25 전쟁조차도 형식상으로는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끼리 서로 싸운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지만 사실상으로는 소련 및 중국을 종주국으로 한 공산진영의 대륙 세력과 미국 및 일본을 종주국으로 한 자본진영의 해양 세력 사이의 국제 분쟁을 대리전으로 치룬 것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진 이상, 이 분단 상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해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6·25 전쟁에서 북측은 전쟁 초반에 소련이 제공한 군사장비로 부산을 제외한 남한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남측은 미국을 위시한 유엔 16개국의 참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었다가, 곧 이어 중국군의 개입으로 밀려 내려와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끝에, 현재의 휴전선에서 양측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것만 보아도 외세가 개입하거나 의존해서는 현재의 대립과 분단 구도 이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자주적인 화해 노력이 결실을 거두자면 주변 강대국들의 동의와 협조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남쪽의 대한민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고 남북 사이에 약속한 합의를 실천에 옮기려고 해도, 사사건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미국 정부의 손길을 뿌리치려면 압도적인 국민 여론이 뒷받침되어 주어야 합니다.

 

⒎ 우리가 사는 이 땅 한반도는 전 세계 안에서도 유일하게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자리잡은 탓으로 중국과 일본 이제는 미국까지 상전 노릇을 해 오면서 탐을 내던 노른자위 땅이었습니다. 국력이 약하고 지도자들을 잘못 만난 시절에는 그들의 종 노릇을 해 왔지만, 이제는 국력도 신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훌륭한 지도자를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굴종의 세월은 필요치 않습니다. 땅이 지정학적인 요충인데 사람이 못나면 종살이를 강요받았지만, 사람이 깨어나면 그 반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미국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겠다고 개발한 핵무기 때문에 그동안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받고 있는 경제제재로 말미암아 나라로서의 존립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른 반면에, 남한의 대한민국은 일본을 추월하고 미국과 중국조차도 무시하지 못할 역량을 키워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서 주변 나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생명과 평화의 샘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선진화된 역량으로 북한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역시 우리 남한뿐입니다. 그러니 민족의 화해는 물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진정한 독립의 길은 이제부터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가장 큰 시대의 징표입니다. 독립과 주체성으로 나아가야 할 진리와 평화의 길에 서 있는 우리에게 오늘 미사의 말씀이 커다란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9. 예언자 예레미야가 소개하는 힘센 용사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힘과 기운이 우리에게 맡겨졌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빌자면, 한 사람이 세상에 죄를 들여와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된 시절이 지나가고 하느님을 닮으신 또 한 사람께서 들여오신 은총과 선물이 충만히 내리는 시절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은 사람의 일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최고선에 속한 천상적 가치를 지닌 고귀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비판하거나 분단구도에 안주하려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온 겨레 앞에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행동을 통하여 우리의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실천으로 증언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겨레가 외세가 강요한 분단과 전쟁, 상호 증오심을 떨쳐버리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갖추어 사랑과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일단 예수님의 마음에 들게 살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 하느님? 거짓말 같지만 예수님 진짜일 겁니다.

모르시는 게 없으셔서 사람의 은밀한 마음속도 아시는 하느님이시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다하면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우릴 안다하시겠대요.

 

머리카락 수 아시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

이런 하느님은 예수님의 증언대로 우리를 알고모르고 하시는 분입니다.

일단 예수님의 마음에 들게 살면 하느님의 마음에도 드신다는 겁니다.

 

예수님 탄생기준 서력기원에 연결된 우리 생일 모른다고 하지 맙시다.

예수님의 마음에 들게 살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당연 배워야 합니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밭을 가지고 있는 농부는 무슨 작물을 심을까 생각합니다. 감자나 고구마를 심으면 금방 수확할 수 있지만, 사과나무를 심으면 적어도 4-5년은 지나야 상품성 있는 과실을 딸 수 있습니다. 빨리 수확할 수 있다고 모든 농부가 감자, 고구마, 옥수수만 심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인삼을 심는 농부도 있고, 배나무를 심는 농부도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사과나무를 심고 2년 -3년이 지나도 수확이 마땅치 않다며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옥수수를 심는다면 그 농부는 어리석은 농부이고, 농사를 짓는대로 손해만 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눈 앞의 이익만 쫓으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당장은 내가 신앙과 양심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면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짧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살면서 덜컹거리는 일이 없을 수 없겠지만, 우리가 굳은 심지를 가지고 신앙인답게 살아가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면서 시련과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6).

 

그러나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의 굴곡에 휘말려 엇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 앞에 손해처럼 보이는 것도, 눈 앞에 이익처럼 보이는 것도 다 지나갑니다. 결국 남는 것은 주님 앞에서 진실했던 인생 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카21:19).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믿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나의 인생과 세상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2베드 3:8-9).

 

하느님의 긴 안목에 나의 눈을 맞추면 남을 부러워할 것도, 애태울 것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쉽게 누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도, 또 누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날 비로소 우리 인생이라는 농사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수확할 결실은 하느님을 온전히 차지하는 구원입니다.

보령의 갈매못 모레 위에서 순교하신 조선 천주교회의 제 5대 교구장 앙트완 다블뤼 성인께서는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세에서나 현세에서나 참으로 하느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28.31).

이 말씀이 길지 않은 복음 대목 안에 세 차례나 반복됩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을 준비시키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일, 선하고 진실되고 바르고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늘 세상이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얽히고설킨 관계 안에 이해관계 역시 복잡하게 엉켜있기 마련이라 아무리 훌륭하고 고귀한 가치가 있는 지향이라도 제 이익을 털끝만큼이라도 건드리면 순식간에 적으로 규정해 버리지요. 예수님과 당시 종교 지배층과의 관계가 그러했고, 구약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1독서는 그 대표적 목소리로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려줍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예레 20,10).

믿었던 이가 맞서거나 등을 돌릴 때는 으레 그러던 자들이 그럴 때와 달리 마음이 쪼개지고 산산이 무너내립니다. 살면서 이런 일은 안 겪으면 참 좋겠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물론 예수님도 아프게 받으셔야 했던 상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이기주의와 차별로 가득찬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을 살고 전하는 예언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이나 사도들, 순교자와 성인들의 공덕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따름은 바로 그 위험하고 고독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예레 20,11)

참담한 처지를 토로한 예레미야가 곧바로 주님께 신뢰를 고백하며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힘은 그 운명을 뼛속 깊이, 내장 속속들이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송사는 인간이 맡지만, 예언자와 세상 사이의 송사는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예레 20,1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이 증언은 잘 마련된 곳, 호의적인 군중 앞에서 준비된 내용을 선포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고사하고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 틈에서, 때로는 적대감과 시기심이 가득한 냉소적 눈빛 앞에서 말과 행동과 삶으로 표현되는 증언까지 포함하지요.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라는 증언은 소리를 넘어 온 존재로 발산하는 파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증인이 되고 사도가 되려는 삶은 번번히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한 의식이, 주님 사랑으로 충만해 의기충전해서 달려나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기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겨 지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하고 물러서지요.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15).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하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실존을 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순례길을 걷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새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선사하신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매일 넘어지고 주저앉는 죄스런 우리를 매일 일으켜 세웁니다.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외부적 악의 뿐만 아니라 내면의 어두움을 향해서도 유효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오히려 내편인 줄 알았던 자아 안에 스며든 실망과 좌절입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은 두려움 섞인 한탄에서 시작되어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반증하지요.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아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힘센 용사처럼 현존하십니다. 우리 고통스런 외마디의 단 한 음절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귀기울이시는 분,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당신 부대에 다 담아두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시나요? 주님의 이 자상하고 든든한 격려로 위로받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다가오는 어둠에 힘내어 마주해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우리 바로 곁에 계십니다. 이런 든든한 빽을 지니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과식" 걱정되십니까?

"이리떼에 둘러싸인 양" 같은 상황입니까?

양고기 숯불구이의 맛을 좌우하는 주요 조건 중 하나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양질의 풀을 먹고 자란 양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잘 숙성된 포도주를 곁들인다면 진수성찬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즉, 이 파견은 복음을 선포하는 동안 생명의 위협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면“이리떼들의 밥이 될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당신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격려하십니다(마태 5-9장 참조) 그리고 감추어져있던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이 바로 당신이심을 사도들에게 드러내십니다. 이제 죽음의 위협을 무릎 쓰고 예수그리스도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적 있어야 하고 그분과 완전한 사랑에 빠졌던 절대적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체험을 해볼 수 있을까요? 그 분과의 친교 안에서 특히, 성체 안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하십니다. 이어서“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빵이 되시기 위해 잘게 부서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들을 위해 먹이가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시려고 우리 몸의 한 부분이 되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양식으로 잘 양육된 그리스도인은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호흡하고,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분의 향기를 뿜어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신비체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예수님을 선포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멸시와 학대, 증오와 박해 등의 아픔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순교하겠다고 성급하게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마태 10,23참조) 그러나 주님을 선포하기 위해 순교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면 받아들일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를 생생한 표현으로 설명한다면 “이리떼들의 밥이 되니라”하고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리들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인들을 먹게 되므로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참조)라고 하신 말씀처럼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또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순교자들이 많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심지어 박해자들의 마음속까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의 경우, 사자의 이빨에 찢겨 “하느님의 빵”이 되기를 원했던 매우 용감하고 위대한 순교의 예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강한 힘과 용기와 독창성 있는 복음을 선포하려면 먼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통교의 삶을 살아야 하며 깊은 내면과 개인적인 친교를 유지해야 함은 필수입니다. 그분은 사람으로 오신 메시지시며 동기부여와 원동력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행복을 주시며 영생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당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리스도인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선교의 사명을 지닌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큰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넘치는 기쁨으로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어 다른 형제들과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그는 분명히 다른 형제들도 변화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토록 중요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절대적인 동행을 보장하시며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내 사랑의 기쁜 복음 소식을 선포함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10,26. 28.31/ 28,20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 역시 무엇보다 당신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친교를 새롭게 하시기를 권면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온 인류를 향해 그분 사랑의 복음을 기쁨에 넘쳐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행복이며 주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마태 10,32참조) 아멘.

 

 

 

빨간 날

     가톨릭신문

누구나 달력에 표기된 ‘빨간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달력에 빨간 날이 모여 있는 주간에는 여행이나 휴식을 즐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 해의 ‘빨간 날’, 즉 공휴일의 수를 세어보기도 합니다. 적어도 달력에서 만큼은, 빨간 글씨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줍니다.

 

‘빨간 날’이라는 표현은 생각보다 많은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레드레터데이(Red-letter day)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영어권 국가를 비롯해,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의 유럽 국가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도 ‘빨간 날’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달력에 휴일을 빨간 글씨로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항간에는 인쇄기기의 잉크 특성상 빨간색을 선택했다하기도 하고,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골랐다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달력의 역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인쇄매체가 발달하기 전부터 달력에 붉은 잉크를 사용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중세 이전부터 교회의 달력에는 ‘빨간 날’이 있었습니다.

 

유럽 중세시대의 많은 서적을 보면 첫 대문자나 중요한 단어에 붉은 글씨를 자주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교회의 달력, 즉 전례력에는 교회의 중요한 날, 바로 성인의 축일이나 ‘주님 부활 대축일’과 같은 거룩한 날 등을 빨간 글씨로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빨간 날’에 축제를 지내거나, 성삼위나 성인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이 날들은 기쁜 날이자 기념할 날로 자리 잡아 오늘날의 ‘휴일’에 가까워져 갔습니다. 사실 해마다 정해진 날 휴일을 지내는 일은 교회의 축일 이전부터 있던 관습이지만, 유럽을 비롯한 가톨릭계 국가나 미국 등의 공휴일에서는 지금도 전례주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유래한 이 ‘빨간 날’들을 보내며 하느님을 기억하는 습관을 들이면 더 진한 ‘빨간 날’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수원주보에서

퇴원을 앞둔 환자가 급히 저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병실로 갔습니다. “제가 어느 부위를 수술받았나요?” 농인 환자가 저에게 수어로 물었습니다. 분명히 의료진이 환자에게 수술 전후 설명을 했을 텐데, 환자는 아마 알아듣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을 것 같습니다. 농인 환자의 입원 소식을 들었는데, 업무가 바빠 잊고 있었던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글을 모르면 필담을 나누기도 어려워, 통역자가 없으면 자기가 어디를 수술받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사람들, 이들이 ‘농인’입니다.

 

30년 전 제가 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직원과 옥신각신하다 진료도 받지 못하고 되돌아간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농인이었고, 저는 그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수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 역시 저를 만난 후 수어를 배우고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움과 궁금함으로 시작했는데, 그 호기심이 연민으로 다시 공감으로 이어져, 벌써 30여 년 세월 동안 가톨릭 농아 선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농인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떠났을 때였습니다. 신자들은 강론 말씀에 감동받았는데, 농인 신자들은 봉사자가 수어로 통역하는 강론을 무표정하게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단어와 단어를 치환하는 문법 위주의 통역으로는 농인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어의 뜻만이 아닌 ‘말의 의미’에 중심을 두는 수어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이는 아내가 본격적으로 수어 통역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농인들에게 미사 전례를 통역하기 위해서는 전례와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농인 예비신자들에게 교리 내용을 제대로 통역 하기 위해,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우리 부부의 대화는 성경을 읽고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농인들에게 분명 도움이 되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부부가 하느님 안에 더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우리 교구에서는 온라인 미사에 수어 통역을 제공하였습니다. 온라인으로 미사가 봉헌된다고 했을 때, 농인들이 소외될까 걱정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어 통역 덕분에 농인들도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 거룩히 성삼일과 부활 전례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농인들은 신앙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그에 맞는 도움을 청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농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수어 통역을 하며 지내온 세월 동안, 하느님께서는 저희의 어려움을 모른 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하며 주어진 몫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느님께서 저희를 필요로 하시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갈 힘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 농인 : 청각장애인 중에서 소리로는 의사소통이 불가한 정도를 농(deaf)이라 하고, 수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하느님과의 영적 일체감

     박형주 안드레아 신부님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수없이 많은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기댈 곳이나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느낍니다. 재물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그 재물이 부족해지면 두려움을 느끼고, 권력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권력을 잃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고, 건강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그 건강이 약해지면 두려움을 느끼며, 지적 능력이나 육체적 능력에 기대어 살던 사람은 그 능력이 흔들릴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직면하게 되는 두려움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을 곳에 기대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댈만한 분,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분, 그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즉, 참으로 나를 잘 아시는 분, 참으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 참으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 그렇기에 내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적 일체감’입니다. 내적 일체감이란, ‘관계 속에 존재하는 서로 하나 되는 느낌이며 믿음’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힘이 세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나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는 내적 일체감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슈퍼맨처럼 힘이 세고 거인처럼 키가 크고 몸이 거대해도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이와 아빠의 관계에는 내적 일체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이는 아빠의 힘과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빠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안전함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도 ‘내적 일체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일체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영적 일체감이란, ‘하느님과 내가 하나라는 느낌이며 믿음’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향해 지니고 계신 당신의 사랑과 자비, 당신의 힘과 능력, 당신의 의지와 섭리, 당신의 뜻과 이끄심이 나를 돕고 있으며, 나를 좋은 길로 이끄신다는 느낌이며 믿음입니다. 이 영적 일체감을 통해서 우리는 율법과 죄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삶에서 나를 두렵게 하는 여러 위협 앞에서도 안전함과 평온함을 느낍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영적 일체감’은, 하느님께서 가지신 힘과 능력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느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세상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불안, 세상에서 받는 여러 아픔과 상처, 세상의 오해와 공격에서도 내 영혼에 안전함과 평온함을 전해 줄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선포하라!

     유환민 마르첼리노 신부님

코로나 감염병 시대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안녕하신가요. 지난 몇 달, 코로나바이러스로 미사 전례를 비롯한 신앙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부분도 있고, 새로운 기준이 되어버린 변화도 있습니다. 신앙에 대해, 또 교회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절입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말고 선포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직면하게 되는 곤경의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고 복음의 진리를 삶으로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1독서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 선, 그러나 선포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사람,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과 백성이 처한 위기를 내다보며 야훼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백성이 기다리는 ‘야훼의 날’은 구원과 승리의 날이 아니라 패배와 멸망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 일을 위해’(예레 1,10 참조) 파견 되었습니다.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그가 유다 왕국의 종말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겁내고 두려워하던 그가 왕들과 사제들, 거짓 예언자들, 모든 백성을 거슬러 싸움으로써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는’(예레 15,10 참조)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그를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역경을 이겨낼 힘도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하느님의 말씀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순교하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불충실과 비겁함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박해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삶의 매 순간이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증거해야 할 현장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 불편함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소망이 담긴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 구원의 은총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과감한 포기

     윤태영 토마스(븍음화 활동가)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곧 두 돌이 되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 또한 함께 성장해 가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은데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묵상하며 그 사랑을 체험하기도 하고, 자녀인 우리들이 아버지인 하느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아이들을 통해 배우기도 합니다. 특히, 둘째인 아들은 첫째인 딸과는 또 다른 모습과 행동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새롭게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아들은 호기심이 참 많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면 흥미를 갖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하곤 합니다. 무언가를 손에 쥐고 한참 놀다가도 아빠 손에 새로운 것이 들려 있으면 관심을 보이며 달려듭니다. 제가 그걸 내어주면, 새로운 것을 받기 위해 좀 전까지 재밌게 갖고 놀던 물건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남자아이라 씩씩하구나!’ 하면서 하하 웃고는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새로운 것을 잡기 위해 쥐고 있던 것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나아갈 때 필요한 과감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몇 가지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면서 하느님께 길을 열어달라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전의 것을 놓지는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청하고만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선순위를 정리하지 않고, 이것저것 벌려놓은 것들은 그대로 움켜쥐고 있으면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하느님께만 닦달하고 있던 셈이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쁘게 웃으며 저에게 새것을 내밀어 주셨는데, 제 손엔 이미 많은 것들을 쥐고 있어서 그것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새로운 것을 달라고 보채고 있었던 겁니다.

 

새로운 것을 위해 옛것을 과감히 내던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탄하며 신앙의 태도를 한 수 배우고, 제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 지나버린 것들, 내 욕심과 집착으로 인한 것들, 움켜쥐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새로운 선물과 기회를 붙잡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래놓고는 왜 가만히 계시냐고 칭얼대고 말이죠.

 

새롭게 되기 위해 옛것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싶습니다.하지만 제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다시 주워 담지 못하도록 아예 과감하게 멀리 던져버리는 연습을 말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전교가 두려운 우리에게

     임상만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떠나려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세 번씩이나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다. 전도는 하느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기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실 두려움이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다거나, 도둑질한다거나, 남에게 부끄러운 일을 하고서는 후환 때문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기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라고 하시며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주눅이 들지 말고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고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라고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당하고 떳떳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반응, 이것으로 인해 혹 자신이 받을지 모르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매우 당당하게 하라고 이르신다.

 

사실 우리가 믿고 전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고 세상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 진리이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들, 특히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신천지’는 대단한 열정으로 목숨을 걸고 전도를 하고 있다. 이들은 그릇된 진리를 전하면서도 대담하게 집집이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믿음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사이비인데도 그것을 참된 진리인 것처럼 믿고 전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신자들이 전교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전하는데 무엇이 부끄럽고 두려운 것이지 생각해 봐야 한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 때문에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매 맞고 심지어 순교까지 각오하면서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드러냈고 복음 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 믿음 안에 참 진리가 있고 그들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두려움은 하느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20년 주님 부활 대축일 사도좌 축복(Urbi et Orbi)을 통해 “기도 속에 하나 되어 있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부활했고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고 거듭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신합시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오늘도 세상에 대한 온갖 근심과 걱정은 오롯이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당당하게 그리고 기도로 하나 되어 전교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겠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아쉬움이 없도다.“(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

 

 

 

선교로써 천국 잔치를 선물합시다.

     장재봉 신부님

어느새 유월도 막바지, 달라붙는 더위에 선풍기를 켰습니다. 그러다 지난 봄, 길에서 본 현수막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몸은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가장 큰 피해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서 찬란한 봄을 앗아간 것이라 싶었습니다. 막막했고 기막힌 상황을 겪어야 했던 세상이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생각이 참으로 짧고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지요. 그 때, 주님께서는 여전히 나무눈을 틔워 새싹을 돋워주셨고 고운 봄꽃들로 세상을 치장해주셨으니 말입니다. 늘 그러하듯 약속에 충실하신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흥건하여 이 세상이 유지되도록 열심히 일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저 그런 주일로 여겨지던 연중 시기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물론 대축일의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중하고 깊으며 그 은혜 또한 으뜸일 터이지만 대축일이 아닌 연중 주일이라 해서 땅의 감사와 찬미가 줄어들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달까요? 그저 그런 우리의 매일에 온 힘을 쏟아 꾸려주고 계신 주님의 수고에 온 마음으로 화답해드리는 게 마땅하다는 걸 느꼈달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꼽으실 일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빚어내고 있는 교회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어떠할지 살피고 싶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복장 터지고 열 받는 상황을 숱하게 만나게 되는데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신약에서는 그런 감정이 더 북받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수군거림, 소위 존경받던 종교인들마저 오직 주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려고 모략을 펼치기 일쑤이니 그렇지요. 그 때문일까요?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오직 제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들려주셨다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적어도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오늘 복음말씀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우리 모두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 이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하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솔직히 이러한 주님의 뜻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줄 압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이신 주님의 뜻을 분명히 파악하고 살아가니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된 사실마저 전혀 자랑할 것 없는 하느님의 은혜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이리 살피니 죄인과 세리들과 몸소 ‘함께’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신 예수님과 한참 동떨어진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우리의 생각과 말이 정말 예수님을 닮아있는지…, 고민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과 잘라내야 할 것을 꼽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쓸데없는 벽을 부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에 갇혀 신음하는 당신의 나라를 풀어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살기 위해서 고민합니다. 더더욱 사제는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교회의 모습을 갖추려 고심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다울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숙고하며 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계획을 밀어 놓은 채 교회의 ‘운영’에만 마음이 쏠렸던 적이 허다합니다. 주님의 뜻은 뒷전에 두고 눈에 보이는 것만 정리 정돈하느라 열을 냈던 셈입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 선물하신 천국의 기쁨을 치워버리는 못된 짓이니, 마음이 얼얼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며 예수님을 배우는 곳은 더욱 아닌데 말입니다. 오롯이 사랑밖에 모르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 그 사랑을 살아내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무수한 계획에 함몰하여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지워버리고 ‘사람 냄새’만 풍겨댔던 것이라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은 채 사랑도 온유도 희생도 봉사도 입으로 가르치려고만 들었던 것입니다. 절로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머릿돌로 삼아 세상에 없던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희생을 통해서 몸소 세상의 교회가 되셨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교회이기에 교회의 마음은 주님과 동일해야 옳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누누이 알려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언제나 ‘잔치’가 벌어지는 기쁜 곳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이라 듣습니다. 나아가 교회인 우리의 삶도 늘 천국을 맛보는 기쁨으로 채우라는 당부라 믿습니다. 당신의 교회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심정을 온전히 살아낼 때에 천국에서는 기쁨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고백이라 새깁니다.

 

연중 제12주일입니다. 대축일이 아니라서 그저 그런 주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을 완전하게 하시려, 최선을 다해서 우주를 꾸리고 계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숨 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지난 시간에 마음을 묶어두는 어리석음을 털어냅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계획한답시고 오늘을 팽개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마음이 제일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감사드리는 것으로 예수님처럼 하늘에 기쁨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를 “지붕 위에서 선포”함으로 하늘에 기쁨의 잔치를 선물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소원합니다. 

 

 

 

두려워 말고 선포하라.

     유환민 신부님

코로나 감염병 시대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안녕하신가 요. 지난 몇 달, 코로나바이러스로 미사 전례를 비롯한 신 앙생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되 찾아 가는 부분도 있고, 새로운 기준이 되어버린 변화도 있 습니다. 신앙에 대해, 또 교회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 절입니다.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말고 선포하라’는 말씀으로 요 약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직면하게 되는 곤경 의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믿 고 복음의 진리를 삶으로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1독서는 거대한 두려움 앞에 선, 그러나 선포하기를 그 치지 않았던 사람,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레 미야는 유다 왕국과 백성이 처한 위기를 내다보며 야훼 하 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백성이 기다리는 ‘야훼의 날’은 구원과 승리의 날이 아니라 패배와 멸망의 날이 될 것이라 고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 며 세우고 심는 일을 위해’(예레 1,10 참조) 파견되었습니다. 평 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그가 유다 왕국의 종말과 예루살렘 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겁내고 두려워 하던 그가 왕들과 사제들, 거짓 예언자들, 모든 백성을 거슬 러 싸움으로써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는’ (예레 15,10 참조)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 을 겪으면서도 그는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하느 님이 그를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역경을 이겨 낼 힘도 주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너와 맞 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 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 하느님의 말씀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 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순교하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 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불충실 과 비겁함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박해 시대 를 살고 있지는 않지만 삶의 매 순간이 복음을 전하고 신앙 을 증거해야 할 현장임은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에 불편함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소망이 담긴 존재들 입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하 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 구원 의 은총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김명식 신부님

달력을 보니 하지(夏至)입니다. 일 년 중 가장 해가 긴 때를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 새벽 5시 정도가 되 면 해가 뜨는데, 저는 해뜨기 전에 일어나니 꽤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왜 일찍 일어나는가? 잠이 오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배가 고파서? 해가 뜨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얼마 전 “인간극장” 이라는 방송에서 우연히 본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칩니다. 다섯 살 된 외동딸 다은이에게 아빠가 묻습니다. “다은아,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응, 아빠가 보고 싶어서” 다은이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다고 대답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 지 않을 귀염둥이 딸입니다. 그 옛날 신학교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아침 기상 시간이면 ‘주님을 찬미합시다’ (Benedicamus Domino). ‘하느님 감사합니다!’ (Deo Gratias)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참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는데 이제야 답이 나 왔습니다. 나는 왜 일찍 일어나는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함이라고…. 요즈음 이른 아침이면 사제관 뜰과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냅니다. 한두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 다. 아침 식사가 맛있습니다. 겁나게 좋습니다. 남도 사투리 중에 ‘겁나게’ 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가끔 이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너무너무’ , ‘아주’ , ‘매우’ 등등의 표현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말 그대로 ‘겁난다’ , ‘두렵다’ 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행하신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셨다.” (마태 10,29)고 하시면서 “너희 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0,31) 정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큰 사랑 안에 살아가는 귀한 존재입니다. 언제나 그분 섭리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삶 안에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 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인식한다면 나는 정말로 주님을 두려 워하며 살아가는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지닐 때 삶의 모든 두 려움과 걱정은 그분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우 리가 두려워해야 할 내용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게 해 주시고 하루를 시작하며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는 하느님 아버 지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주님은 겁나게 좋으신 분!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이민락 신부님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민주주의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 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헌법 제21조 1항) 말하자면 나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 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뜻을 자유롭게 표현할 때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자기 검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고 생각하며 스 스로 어느 정도 자기 검열을 합니다. 적당한 자기 검열은 말의 수위를 조절하게 하고 말실수를 줄여줄 수 있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면 말의 열정과 표현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과 도하게 계산하여, 남에게 스스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확신의 부족과 자신 감의 결여가 생기게 됩니다. 신자들을 보면 직장에서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과도한 자기 검열을 하는 분들을 보 게 됩니다. 흔히 ‘나 자신도 잘 살지 못하면서 신앙적인 이야기나 신앙적인 표현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착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자기 검열은 내 신앙을 숨 기게 되고 신앙에 확신이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마태 10,32) 복음의 결말은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다.”(루카 24,48) 복음을 증언하는 삶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활태도에 있어서 신앙 안에서 늘 감사하는 생활, 겸손한 생활, 어렵고 힘든 일을 솔선수 범하는 생활, 그리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 그 모습대로 따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의 삶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과도한 자기 검열로 자신을 숨기는 신 앙의 삶이 아니라, 복음이 내 삶에 생활화되고 체득되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신앙인입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지나가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 <마태 10, 26-33>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창세기에 대홍수로 벌을 주신 하느님은 창조하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셔서 사람과 다른 모든 생명체를 노아의 배에 싣고 모든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에 차별을 두시지 않고 귀중하게 여기시는 예는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려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세상에서는 덧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도에 145세 된 사람에게 소원이 무엇인가 물으니 죽는 것이라 했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물으면 저는 더 살고 싶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는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똑똑하게 알리고 전해주기 위합니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은 지나가는 이 생명을 지키느라고 긴장과 조심으로 돌보는 것을 보고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생각은 조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좌절하거나 자기 생각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죽음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죽음도 생각하며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상담자들에게 작은 성당의 뒤쪽에 있는 선배들의 영정 사진을 보여줍니다. 이분은 나의 영세 신부, 이분은 나의 수련장, 이분은 나의 본당 보좌 때 본당 신부, 이분은 우리의 아빠스님 등을 보여줍니다. 저는 가끔 그 앞에 가서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어디 계십니까? 하느님 품이 그렇게 좋습니까? 세상에서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세요. 얼마 있지 않아 만나서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이러고 나오는 저의 얼굴은 사랑으로 화끈거립니다. 이같이 지나가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의 만남을 체험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저에게는 죽음과 삶이 하나로 보이고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제 방에는 부모님 사진은 없지만 오도 아빠스님과 최 시동 신부님 사진은 있어서 먹을 것 들어오면 책상에 올려놓고 “아빠스님 드세요. 시동아 먹어 보아라.” 그리고 오늘 세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기도도 부탁합니다. “죽음과 삶의 통교를 믿나이다.”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우리도 두려움보다 주님에게 믿음으로 의탁하는 삶을 살 기회를 만들어 봅시다.

강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느님으로 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굳게 믿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삶을 지금부터 살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움이라는 허상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한평생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릴 때는 귀신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사람이 무섭습니다. 생의 마지막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압니다. 내면에서 스스로 키우는 생각의 괴물도, 나를 괴롭히는 타인의 폭력성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약한 본성을 지닌 우리에게 두려움은 구체적으로 와 닿는 실재로 느껴져,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윗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불리움 받았을 때 그는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을 만나러 갔을 때, 한 필리스티아 장수 앞에서, 온 이스라엘군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그 상황이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하느님의 군대가 한 이방인 앞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모습이 어이없었기 때문입니다. 돌멩이 몇 개를 집어 들고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소리칩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달려가 작은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립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칼과 창을 든 골리앗 앞에 선 이스라엘 군대처럼 어찌할 방법을 몰라 두려워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힘의 주인이신 분께서 작은 돌멩이 하나로도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내가 만든 허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허상이며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려움과

하느님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은

결코 영원하신

하느님을

뛰어넘어

덮칠 순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두려움을

어김없이 부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통해

우리 사람이

더 귀해지고

더 아름다워집니다.

 

비로소 사람은

하느님을 통해

편안하여집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댈 수밖에 없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사람의 길은

사람을 더

귀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향하는

길입니다.

 

서로를

귀하게 함과

소중함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에서

우리를

끄집어 내시어

행복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소중함으로

우리를

이끌어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진심으로 압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간이

우리 영혼을

되살리는 은총의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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