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늘복음♥묵상글

2026년 6월 22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6.06.22|조회수12 목록 댓글 0

제1독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7,5-8.13-15ㄱ.18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살만에세르는 5 온 나라를 치러 올라왔다.
그는 사마리아까지 쳐 올라와 그곳을 세 해 동안 포위하였다.
6 마침내 호세아 제구년에 아시리아 임금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잔 강 가 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
7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8 또한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13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와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셨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14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15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18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크게 노하시어 그들을 당신 앞에서 물리치시니,
남은 것은 유다 지파뿐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가 남왕국 유다만 남게 된다.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탓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시며, 아시리아가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고 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기 전에 제 눈의 들보부터 빼내라고 하신다(복음).

☆☆☆☆☆☆☆☆☆☆☆☆☆☆☆☆☆☆☆☆☆☆☆☆☆☆☆☆☆☆☆☆☆☆☆☆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 호세아를 잡아 가둔 뒤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 간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몰락한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율법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라고 촉구하신 것을 듣지 않은 결과이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빼내야 이웃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하신다(복음).

☆☆☆☆☆☆☆☆☆☆☆☆☆☆☆☆☆☆☆☆☆☆☆☆☆☆☆☆☆☆☆☆☆☆☆☆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게 함락되어 결정적으로 멸망한다. 멸망의 근본 원인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면서 살아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은 다르다. 이웃을 가혹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며, 더없이 약한 존재임을 모르는 사람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 이 명령은 산상 설교에서 “걱정하지 마라.”(6,25)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미래를 향한 불안이라면, 심판은 다른 이를 향한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크리노’는 법정의 판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대하여 성급히 결론 내리는 가벼운 태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심판을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로 보고 꾸짖습니다(4,11-12 참조).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 고대 유다 전승에도 “사람이 헤아린 그 잣대로 그 또한 헤아림을 받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판의 저울이 인간의 손에 있는 듯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 저울을 가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심판하는 그 잣대는 사실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냅니다. 심판의 시작은 나의 밖을 겨누지만, 그 끝은 결국 제 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티와 들보의 비유는 남을 판단하는 우리의 옹졸함을 정확히 겨냥합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교정하는 자의 어설픈 폭력성을 향합니다. 훈계는 사랑의 행위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훈계는 다른 이에게 폭력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이르십니다. 다른 이의 흠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만, 자기 안의 갈라진 틈은 어둠 속에 숨기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지요. 다른 이를 판단하고 심판할수록 우리의 어둠은 더욱 짙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안의 어둠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일깨우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형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께 단죄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단죄하는 그대로 우리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를 구원에 초대하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또한 이웃을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이웃과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이웃의 부족한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 먼지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기둥,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형제’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세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아닌 ‘형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아주 작은 흠은 쉽게 찾으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형제에게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기막힌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선자야!” 하시며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한 다음, 맑고 따뜻한 눈으로 형제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주변의 형제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전 일을 마치고, 또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매 순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자녀로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해 봅시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신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 하루를 살면서 거울을 몇 번이나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외출하기 전에 한 번,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 한 번 등 시도 때도 없이 보는 것이 거울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더러운지 그렇지 않은지, 깔끔하게 옷을 잘 입었는지 아무 맵시 없게 옷을 입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누군가가 세심하게 알려 주거나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형제 안에 담겨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듯이, 형제의 단점과 잘못된 점을 볼 때마다 그 형제의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처지를 헤아리며 ‘나’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신학생 때 공동생활을 하면서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다 보니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울로 삼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는 너와 달라.’라는 생각보다 ‘나와 너는 크게 다르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외모를 가꾸기가 어렵듯이 형제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우리와 함께하는 형제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도록 보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우리는 눈을 가진 덕분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가졌다고 모두가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이 다르듯이, 무엇을 보느냐는 마음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쉽게 보입니다. 하지만 내 허물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험담은 쉽지만, 자신에 대한 험담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나 한 번쯤은 되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하지만 내 눈 속의 들보를 보려면 나를 들여다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흥적이고 자극적인 매체들의 발전이 나의 내면보다는 외적인 매력에, 영적 감각보다는 육체적 감각에 빨리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시도 쉴 틈 없이 먹고 마시고, 보고 듣는 미디어 홍수의 시대 속에서 잠시 ‘멈추어 사색하는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중단의 본능’을 일깨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해 내가 뛰고 있는지,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잠시 멈춰서 자신에게 묻고, 하느님께 묻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성체 조배는 하느님 앞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보는 시간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보기보다는 내 허물을 인정하고, 내 마음을 살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나는 하루에 얼마나 그 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

어제 지낸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여운을 느끼며 성체성사에 따른 삶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보’와도 같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공동체 안의 이웃에 대한 비판을 일삼는 자들의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득 반성과 성찰의 순간에도 교묘히 움직이는 우리 안의 자기중심주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찰’이 단지 이웃을 ‘비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경우가 너무나 잦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철저히 살피고 ‘뚜렷이 보는’ 힘을 얻은 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깊이 머물러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완전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형제의 잘못을 합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가?’ 하고 성찰할 때에는 형제는 여전히 객체로 남아 있는 가운데 ‘나의 옳음’만이 관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의 옳음’이 아니라 형제를 ‘중심’으로 초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담고 있습니다. 곧 형제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인지가 관심사가 됩니다.

성체성사에 따른 삶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묘한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고 깨닫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위라 할지라도 이웃을 중심에 두고 진심으로 그의 처지에서 그의 치유와 다시 일어섬을 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체성사에 따른 삶일 것입니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황금률이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그러나 이 말씀대로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에게 해 주더라도, 남을 판단하여 그대로 해 줍니다. 그래서 도와주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남을 존중하고, 남이 무엇을 바라는지 신중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해 도와주어야 “고맙다.”라는 인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남을 잘못 판단해 모든 허물이나 탓을 그에게 돌려야 할 경우에는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칫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등을 너무 쉽게 판단해 그들을 더 슬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들 편에 서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 눈을 돌리고, 남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타인이 잘못했을 경우, 즉각 그를 심판할 것이 아니라, 우선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을 배려하는 데에는 더디고, 남을 판단하는 데에는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우리는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일 수도 있음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

왕은 알고 싶어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왕은 은수자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은수자는 왕을 보고도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왕은 그가 일을 빨리 마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거들어 줍니다. 

숲 속에서 부상자가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왕은 그를 돌보아 주었고, 다음날 부상자가 자신의 정적임을 알게 되자 화해합니다. 

은수자와 지내면서 왕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그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구나.’ 톨스토이의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탓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을 심판합니다. 서먹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이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료가 필요합니다. 그것으로도 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사형수들의 대부였던 김홍섭 판사는 자신의 판결이 항상 100점이라고 할 수 없으며 70점일 때도 있고 60점일 때도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잘못된 재판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 역시 빌라도의 오판으로 사형을 당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시민 법정에서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잘못된 판단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아무런 죄가 없는데 죄인이 된다고 합시다.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뜻에서 판단하지 않기를 당부하십니다. 판단은 하느님께서만 정확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잘 알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생각나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내 빤스 어디 있지?”라고 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진짜 로댕이 그런 의도로 이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이 작품의 자세는 너무나 불편합니다. 오른팔을 꺾어 턱을 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오른 팔꿈치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리는 것도 너무 불편합니다. 한 번 이 자세를 취해 보십시오. 아마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기 힘들 것입니다. 로댕은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불편한 생각을 불편한 자세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 작품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새롭게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알려는 노력보다 그냥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쉽게 판단하고, 그 뜻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함부로 판단, 단죄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원하실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여기서 심판한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정당한 비판이나 판단 능력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상대방의 동기나 영혼의 상태까지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짓고, 그를 단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금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향해 들이대는 그 엄격하고 냉혹한 잣대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재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타인에게 자비가 없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바르게 돕고 교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자기의 죄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모습보다 먼저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익숙해진 생활에서 쫓겨 나면 절망하지만, 실제는 거기서 새롭고 좋은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다(톨스토이).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래전 학생 수도자들을 양성 책임자로 살 때였습니다. 당시 공동체에는 신학교와 신학원에 다니던 젊은 형제들로 북적였습니다. 당시 젊은 형제들은 막 운전면허를 취득한 초보운전자들이었는데, 소년원이며 분류 심사원, 법원 등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접촉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과속, 신호 위반 등으로 딱지가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보들이니 그러려니 했었는데, 한번은 일주일 사이에 세 장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에 날을 잡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데다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것,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제발 시간 넉넉하게 출발하고, 양보 운전, 방어 운전 잘하면서 앞으로 제발 딱지 안 날아오도록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공동체 분위기가 싸해졌겠지요. 다들 어색한 침묵 속에 저녁 식사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조심하겠지 했는데, 바로 그 다음 날 또 하나의 딱지가 날아왔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는 제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뜯어보니 과속에 신호 위반에 법칙금이 7만원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또 이렇게 날아오는구나, 하는 마음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습니다. 범인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해보니, 범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황급히 수녀원 새벽 미사를 가던 중에 찍힌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은밀히 은행에 가서 범칙금을 납부했습니다. 지난 시절 돌아보니, 그런 부끄러운 케이스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그 시절,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실수에는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부족이나 실수 앞에는 얼마나 관대한지 모릅니다.

참 인간이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도 않고 파악하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운이 좋다.” 혹은 “운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기회를 얻고, 뜻밖의 도움을 받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을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운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운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행운은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道)’라는 말도 있습니다.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걷고, 또 걷고, 사람들이 함께 다니면서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오솔길이 되고, 큰 신작로가 되고, 마침내 고속도로가 됩니다. 신앙의 길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희생, 용서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길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라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성전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을 원망했고, 시대를 탓했고, 심지어 하느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은 무너졌고, 희망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시간을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성찰의 시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소홀히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상을 따르며 세상의 욕심에 흔들렸음을 반성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비록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느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배지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눈물의 자리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목적지 하나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은 과정 자체가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에 있어도, 달라스에 있어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건강할 때도, 아플 때도, 기쁠 때도, 외로울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는가입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 활동을 했습니다. 산행을 가면 저는 늘 앞장서서 걸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 했고, 식사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로미테 산행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산장에 도착했고, 누구보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를 맡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뒤처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형제님 한 분은 달랐습니다.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산 아래까지 내려가 약을 사 왔습니다. 저 역시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난처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형제님은 아무 불평 없이 저와 함께 산 아래까지 내려가 새 신발을 사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 다른 산장으로 옮겨야 할 때도 기꺼이 자원했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이 이미 목적지였습니다. 걷다 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성공이라는 산장에 가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명예와 권력이라는 산장만 바라보며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도 보지 못하고, 뒤처진 사람의 손도 잡아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적할 때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밉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신앙의 길은 남을 판단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길입니다. 원망과 비난 속에서는 참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이미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 때로는 험하고 고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서로 손을 잡아주고, 기다려 주고, 함께 걸어간다면 그 길은 이미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로소 보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나를 봅니다


나를 보려
나를 봅니다


내가 보는
나를 봅니다


너를 보려
나를 봅니다


너를 보는
나를 봅니다


네가 보는
나를 봅니다


비로소
내가 보입니다


너를 봅니다


너를 보려
너를 봅니다


네가 보는
너를 봅니다


나를 보려
너를 봅니다


나를 보는
너를 봅니다


내가 보는
너를 봅니다


비로소
네가 보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을 잘하는 사람의 내심에는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려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 자체가 바로 위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짓고 있는 죄의 종류가 서로 다를 뿐 하느님 앞에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권한은 늘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단죄의 모습이 아니라 함께 부족함을 이겨나가는 사랑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회개의 모습이자 사명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먼저 내 마음의 창을 닦는 사랑

      김웅태 신부님

1.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초대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시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마태 7,1)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가정과 직장, 심지어 성당 안에서도 타인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를 내 기준으로 재고, 마음속으로 단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꾸짖기보다 먼저 우리 시선을 돌려 주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겨누던 칼날 같은 눈길을 거두고, 내 마음 안을 비추어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2. 성령의 빛 안에서 나를 바라보기

우리가 타인을 쉽게 심판하는 까닭은 때로 내 안의 불안과 결핍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깊이 믿지 못할 때, 우리는 남을 낮추며 나를 세우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일하십니다. 타인의 허물을 찾아내기보다, 먼저 내 안의 어둠과 들보를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빼낼 용기와 지혜를 주십니다.

 

3. 먼저 닦아야 할 내 마음의 창

어느 부인이 날마다 맞은편 집 빨래가 더럽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빨래가 눈부시게 깨끗해 보였습니다. 그때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앞집 빨래는 원래 깨끗했어. 오늘 아침에 내가 우리 집 창문을 닦았거든.”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웃의 허물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내 마음의 창에 낀 먼지일 때가 많습니다.

 

4. 형제의 티와 내 눈의 들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3)

주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사랑 어린 충고가 아닙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 채 남의 티를 빼내겠다고 나서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되기 쉽습니다.

먼저 내 마음이 주님의 자비로 맑아질 때, 우리는 비로소 형제를 뚜렷이 보고 도울 수 있습니다.

 

5. 심판 대신 자비를 실천하기

오늘 하루 세 가지를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판단하고 싶은 순간에 잠시 멈추십시오.

“내 안에도 이런 들보가 있지 않은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둘째, 나의 창문을 먼저 닦으십시오.

비판의 에너지를 나 자신을 돌보는 성찰의 에너지로 바꾸십시오. 고해성사를 통해 내 마음을 흐리게 하는 욕심과 시기, 분노의 먼지를 털어내야 합니다.

셋째, 비판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주님, 그에게 평화를 주시고 저에게는 자비의 마음을 주소서.”

 

6. 함께 걷는 자비의 동반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완벽한 의인들이 아닙니다. 저마다 주님의 자비가 필요한 순례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심판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함께 눈물을 닦아 주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기를 청합시다. 주님의 자비 안에서 오늘 하루도 평화롭게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남을 심판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인간은 종종 선입견제한된 정보감정적 판단에 따라 타인을 평가한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이는 심판이 오직 하느님의 고유 권한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인간이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며하느님의 정의와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형제의 눈에 있는 티와 자기 눈의 들보(3-5)를 비유로 말씀하신다티는 작은 잘못이나 사소한 흠이며들보는 자신의 큰 잘못이나 죄악을 의미한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잘못을 쉽게 판단할 때사실은 자신의 큰 잘못을 보지 못하는 위선에 빠진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자기 죄를 직시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작은 죄를 꾸짖는 자는스스로 정의를 행한다고 착각하지만사실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죄를 짓는 것이다.(Enarrationes in Psalmos, 30,1 요약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큰 잘못을 제거한 후에야 다른 이를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자세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결함을 깨닫고 정화함으로써이웃에게 올바른 도움을 줄 수 있다이 성찰은 단순히 자기반성을 넘어서 영적 성장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바로잡을 수 없으며먼저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이만이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Homiliae in Matthaeum, 33,2 요약)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겸손과 사랑의 표현이다우리는 먼저 자기 삶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 힘쓰고그 후에 주변 사람들을 진심 어린 관심으로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자기 성찰과 겸손한 사랑을 통해 참된 영적 성숙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준다타인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돌아보고 정화하며겸손과 사랑으로 이웃에게 도움과 격려를 해주는 삶이 바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 것이다우리 모두자기 마음속 들보를 먼저 제거하고그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의 작은 티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1)
이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 것이지, 죄를 바로잡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목적은 마지막 구절에서 보여주듯이,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마태 18,15-16)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 4,2; 1티모 5,20 참조)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단지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하시면서, 자신의 죄를 먼저 보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자신의 ‘큰 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마태 23,24)

또한 단지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고 하십니다.

그래야 ‘심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들보’는 대체 어떻게 빼낼 수 가 있을까? 

그것은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하느님의 눈과 마음'을 지니는 것일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호의와 자비의 마음’, 곧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 7,5 참조).

그렇습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그보다 적극적으로 ‘호의로 선을 베푸는 일’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 '용서'를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결국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심판을 벗어나는 길임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진실과 사랑을 살지 못한다.<마태7/1-5>6월2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각자의 마음은 내안에 어디에 있을까 인공지능에게 물으니 양적 삶의 시작이라 하고 어디에 있는지 말을 안하여 답답했지만 오늘 복음에 ”네눈에 들보를 빼내어라.“ 마음은 내몸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 삶의 시작이면 우선 생각 안에 말안에 전 몸안에 특별이 행위 안에 마음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눈이 밝으면 모든 것이 바로보이고 내 귀가 열려있으면 들림이 바르고 내입이 바르면 바른말을 하고 내 생각이 바르면 바른생각을 하며 진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생각 말 행위가 나타납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려면 눈이 바르고 꺠끗하여야 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색을 따라 세상을 보게됩니다. 마음의 시작은 생각부터 시작합니다. 권력이나 탐하고 재력에만 마음두고 자기 명예만 생각하면 악으로 기우려지고 말에 진실 사랑이 없어집니다.

미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진실하고 사랑 안에 살려면 셍각 말 행위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는진 선 미로 생각을 가꾸고 말을 가다둠고 행위를 마로 하는 공부를 햐야 합니다. 어떤이가 어려서 부모님의 폭력적 삶을 산사람은 푹력을 사용하며 산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밥상머리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관계가 시작하는 것은 함께 밥을 먹으면서 관계가 시작됩니다. 어른이 음식을 먹기전에 먹는 사람 수가락 젓가락 놀림이 하나의 습관을 배움니다 음식상에 마지막 남은 것 하나 자기입에 가져가는 사람과 다른이에게 양보하는 사람과는 다른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겉보고 이러니 저러니 판단하지 말고 사람의 생각 말 행위를 종합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남을 판다하는 사람은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과 아니 바른 미음 깨끗한 마음가진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려면 남의 판단에 휩쌓이지 말고 나의 바른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기전 자기 자신부터 바르게 보고 판다해야합니다. 우리 기도문 중 ” 내 탓이요“ 하면서 세상의 잘못을 네 탓이라. 한다면 자기 눈부터 보고 남을 보는 사람이 되여야 합니다. 서로 진실하고 사랑안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참 믿음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사람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면에 자기만의 가치관과 신념이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과 신념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단단히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지요. 이를 집의 구조에 비유하면 지붕 전체를 단단히 떠받치는 ‘들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들보가 늘 고정불변인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둘러싼 세상도 변하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도 변하고, 나 자신도 변하는데 내가 마음 속에 한 번 설치해 둔 들보에만 계속 집착하고 의존하면 내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가 경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를 ‘심판’이라도 하게 된다면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게 될 뿐만 아니라, 소중한 인간관계마저 깨지고 말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마음에 박혀 단단히 굳어져 버린 ‘들보’를 기준 삼아 다른 이를 판단하려는 마음이 들면, 먼저 내 마음 속에 박힌 들보부터 빼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집에서 들보를 갑자기 빼버리면 집 전체가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내 마음 속에서 나의 고유한 가치관과 신념이라는 들보를 빼버리면 나라는 존재 전체가 무너져내릴 것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온 지난 날들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화도 나고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때는 그 들보가 나로하여금 외부의 요인에 휘둘리지 않고 굳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단단히 지탱해주던 시절도 있었지만, 내가 그 들보에만 집착하고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충분한 이해와 고민 없이 세상과 사람을 섣불리 단정지어 오해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형제를 심판하고 단죄하려 든다면, 내가 내린 잘못된 판단과 실행으로 인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요.

누군가의 작은 ‘티’가 내 눈에 거슬려 나를 불편하고 화나게 만든다면, 내 마음 속에 커다란 들보가 박혀있을 확률이 100%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 마음 속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건 주님께서 내 마음에 넣어주신 신앙의 등경에 사랑으로 불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대한 들보가 내 마음의 창을 막아버려 초래된 오해와 편견, 미움과 갈등이라는 어둠은 오직 사랑이라는 밝은 불빛으로만 몰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마음으로, 그분을 닮은 사랑과 인내와 호의로 내 이웃, 형제를 바라보고 대해야겠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길은 단지 판단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ㄴ)

 

 

 

인간의 목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주머니

    김석주 베드로 신부님
인간의 목에는 두 개의 주머니가 걸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앞주머니에는 남의 잘못과 약점이 담겨 있고, 뒷주머니에는 나의 잘못과 부끄러움이 담겨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허물은 쉽게 보지만, 내 허물은 잘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심판’은 단순한 분별이 아니라 사랑 없이 남을 함부로 단죄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내 상처와 교만의 눈으로 형제를 판단하기 쉽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말씀하십니다. ‘티’는 작은 나무 조각이나 먼지를 뜻하고, ‘들보’는 집을 받치는 큰 기둥을 뜻합니다. 남의 작은 허물은 크게 보면서도, 내 안의 큰 죄와 교만은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한 통의 식초보다 한 방울의 꿀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차가운 비판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남의 티를 말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들보를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판단의 말은 줄이고, 이해와 기도의 마음으로 형제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연상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3-5)”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하느님의 뜻’은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입니다(요한 3,17). 만일에 죄인 자신이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심판을 받고 멸망하겠지만, 그 심판과 멸망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여자를 붙잡아 끌고 오긴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돌을 던지지 않고 그냥 떠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12).”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6-17).”

<이 말에서 ‘죽을죄’는 ‘죄인 자신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묵상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

죄 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형제애 실천’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라는 뜻인데, ‘파문’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파문당한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형제애 실천’은 ‘함께 가는 일’입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형제와 함께 가기 위해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에 있는 ‘티’와 ‘들보’는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누구의 눈에 무엇이 있는지, 즉 누구의 죄가 더 큰 죄인지, 그것은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들보’와 ‘티’ 라는 표현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너나 잘해라.”가 아니라, “너부터 잘해라.”입니다.

내가 회개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인데, 내가 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 없는 일, 이기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함께 회개해서,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 다음에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어라.”로 읽어야 합니다. 내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일을 모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서는 ‘나의 회개가 먼저’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산은 스스로 높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들보는 남의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자리한
편견과 교만,
고정관념과 자기중심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교만을 탓하면서도
우리 역시 교만했고,
이기심을 비난하면서도
우리 역시 이기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성찰과 기도입니다.

정화의 출발점은
남을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성찰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평가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참된 회개는
남을 바꾸려는 노력보다
먼저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서
시작됩니다.

들보를 빼내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영적 여정입니다.

자신 안의 들보를 깨닫고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더 인간다워집니다.

그리고 타인의 부족함 앞에서도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의
들보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고,
참된 사랑은 그 들보를
내려놓는 데서 완성됩니다.

오늘도 교만과 편견의 들보를 내려놓고,
겸손과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날 되십시오.

어느 형제님께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기에 너무나 반가웠고 다시 예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으면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술이 한두 잔 계속 늘어가면서 어떤 친구가 어렸을 때의 형제님 별명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별명은 ‘꽈당’이었습니다. 반대표로 계주 달리기 시합에 나갔는데, 너무 긴장해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뒤로 친구들은 ‘꽈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꽈당’이라는 별명을 좋아할 리가 없었겠지요. 자신의 굴욕을 기억나게 하는 별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넘어진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얻은 별명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꼬리표가 달린다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쉽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남에 관한 섣부른 판단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지요.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악플을 보십시오. 근거도 없는 가짜 뉴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가짜 뉴스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져야 할 죄인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이 손가락질받게 됩니다. 또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이 심판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재판관으로서 하느님만이 지니시는 권위를 침해하면서 남을 단죄하는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심판은 하느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서 남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이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보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남의 작은 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주님께서는 “위선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라는 그리스말에서는 ‘패륜아, 사악한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입구에서부터 쫓겨나지 않을까요?

주님으로부터 ‘위선자야!!’라는 말을 절대로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남에 관한 판단은 그만두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면서 ‘왜?’라고 하지만 나는 없는 현실을 꿈꾸면서 ‘왜 안 돼?’라고 말한다(로버트 케네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랜만에 감기가 찾아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때문에 긴장해서인지 감기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손을 자주 씻었고, 마스크를 착용했고,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급적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신을 4번 맞았고, 코로나에 대한 긴장도 풀려서 인지 손도 자주 씻지 않았고, 마스크도 거의 착용하지 않았고 모임에 자주 참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감기가 제 몸으로 들어왔습니다. 감기의 증상이야 비슷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감기는 콧물이 많이 났습니다. 콧물을 자주 닦다 보니 코 아래가 물집이 잡혔고, 작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다행히 코로나 테스트에는 음성이 나왔습니다. 감기는 2주간 저와 친구를 하더니 말도 없이 떠나갔습니다. 감기가 떠나갔지만 코 밑에 작은 상처를 선물로 주고 갔습니다. 그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입니다. 감기는 분명 반갑지 않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감기가 오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문 홍보를 갈 때나, 여행을 갈 때면 ‘델타항공’을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대한항공과 제휴를 맺어서 마일리지 적립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회원가입을 하면서 급한 성격 때문에 영문이름을 잘못 기재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회원으로 항공권 구매를 하면 결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비회원으로 항공권을 구매했고 그래서인지 마일리지 적립을 못했습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말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배 신부님이 델타항공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저의 이름을 다시 수정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회원으로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지난번 항공권에 대한 것도 마일리지 적립을 해 주었습니다. 급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인지 잘못된 것을 수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차분하게 살펴보면 분명 길은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저것 만져보면 길을 찾을 수 있는데 혹시 잘못 될 것 같아서 쉽게 포기하곤 했습니다. 의사가 처방전을 줄 때는 먼저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게 됩니다. 원인을 알면 처방전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아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강대국이었고, 이스라엘은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침략을 받았습니다. 아시리아는 자신들의 정책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원인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군사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시리아가 강대국이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지도자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독서는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풍속과 이스라엘 임금들이 만들어 낸 것에 따라 걸어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지듯이 하느님과 멀어지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도 많은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돈이지만 정성껏 봉헌했던 과부의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던 세리의 겸손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제게 말씀하십니다. ‘가브리엘!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아라.’

 

 

 

너 자신을 알라. -자기인식自己認識의 지혜와 겸손,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평생 하늘에 보물을 쌓아 온 좋은 분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선 하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무려 24년 동안 친교를 맺고 있는 분들인데 참 한결같이 사랑을 실천하며 산 분들입니다. 저에게 많은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하고 행복했다는 분들에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저도 오늘 하늘에 보물을 계속 쌓고 계신 좋으신 분들과 함께 해서 참 행복했습니다.”

 

이어 예수성심자매회 회장직을 맡아 하늘에 보물을 잘 쌓고 있는 자매와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총무직까지 하면 아마 15년 이상을 봉사해온 참 한결같은 자매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성심자매회에 주신 선물은 넷입니다. 성경, 예수님, 미사, 신부님입니다.” 즉시 덕담德談의 답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자매님을 추가하여 예수성심자매회에 주신 선물은 다섯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또 분도지 여름호중 존경하는 수도선배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의 감동적인 인터뷰 기사를 읽고, 즉시 신부님과 분도지 편집장 신부님에게 감사와 감동, 위로와 격려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두 분 다 수도원에서 평생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선하게 사는 분들입니다. 특히 인터뷰 기사 머리말 부분이 훈훈했습니다.

 

“두번째 대담자로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를 만났다. 한 수도자가 걸어온 ‘여운 깊은 영화’같은 인생을 공유한 복된 시간이었다. 그날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그윽히 관조하고 있는 82세 ‘참 수도승’을 뵈었다.”

 

이래서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은 사찰寺刹의 참 중요한 자산資産이라는 말이 천주교의 수도원에도 그대로 통함을 봅니다. 참 수도승을 “만났다”가 아니라, “뵈었다”는 마지막 부분 표현에서 대담 정리자의 신부님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와닿아 기뻤습니다. 좌우간 어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계속 하늘에 보물을 쌓고 있는 분들을 만난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 수도형제들의 삶 역시 매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무사無邪한 사랑의 삶입니다.

 

정말 살 줄 아는 이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두 부류의 삶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냐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이냐’ 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침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면서 자기인식의 지혜와 겸손, 사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타적利他的 선행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悔改의 선택選擇과 훈련訓練, 습관習慣과 더불어 함께 가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 주님을 닮은 참나의 성인으로 변화시켜 갑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너 자신을 알라-자기인식의 지혜와 겸손, 사랑-”으로 정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요,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알 때 지혜와 겸손이요 사랑입니다. 자기의 한계와 약함, 결점과 부족을 아는 이들은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남을 심판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아는 수행 역시 평생 수행입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자기를 알아가는 수행이 바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정말 남말이나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완덕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 남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말마디 둘을 기억할 것입니다. “너나 잘해!”, “너가 뭔데?”인데 참 적절한 대응입니다. 정말 제눈에 들보를 깨닫는 이가 지혜와 겸손,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평생 회개의 여정을 통해 서서히 깨달아 없어질 제눈에 들보이겠으며 더불어 형제들의 티도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내가 변할 때 상대방도 알게 모르게 보고 배우며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십니다. 하느님께만 유보된 심판입니다.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 하실 일을 주제 넘게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알아 가면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워지고 너그러워진 사람들은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맡기고 끝까지 바라보고 지켜보며 기다립니다. 이런 끝없는 기다림 역시 하느님 신뢰의 표현입니다.

 

오늘 잠시 중단됐던 열왕기 하권 제1독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짜증스럽고 복잡한 내용들이라 호감이 안갑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망덕의 악순환의 역사를 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라 했습니다.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축복이 예언됐지만 계속 계명을 지키는 과제 수행을 망각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지은 결과 축복의 선물을 상실한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의 수행에 한결같았다면 이런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단斷! 끊어냈을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 후반부가 이런 죄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규정과 그분께서 저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 그리고 자기들에게 주신 경고를 업신여겼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자업자득의 업보요 자기 스스로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기억과 성찰, 회개에 따른 단호한 조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현실과 역사만 봐도 계속되는 반복의 악순환의 역사같습니다. 불행하게도 양상만 달랐을뿐 조선시대 보복의 사화士禍가 지금도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참으로 고착된 면면히 내려온 보복의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의 수행에 단호하고 철저히, 묵묵히, 끝까지 힘을 쏟는다면 이런 반복의 악순환도 끊을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회개의 선택과 훈련, 좋은 덕목들의 습관화가 정말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바로 주님은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자기인식의 지혜와 겸손,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그런 것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산이
나무를
보듬고


바다가
파도를
품으며


사람이
사람을
안는다


나무가
산에
깃들고


파도가
바다에
스미며


사람이
사람에
안긴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자신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본다. 법을 전공한 사람들이 그렇고 법을 잘 지킨다는 사람이 그렇다. 사사건건 남에게 시비를 걸고 남을 곧 잘 심판한다. 심판 받을 사람은 오히로 그 사람들이다.

형제의 눈에 티를 빼내 주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눈에 박혀있는 들보를 빼내려 하지 않는다. 남은 변하라고 높은 지위는 말하지만 자기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지위가 높고 배운 사람이 더 그렇다. 위선자로 살아갈 뿐이다.

나는 청소년기 사춘기를 어렵게 사는 학생들과 살았다. 그들은 지금 어른들이 박아준 들보를 빼내고 아름답게 변해 살아간다. 그러나 어른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흉물의 내면을 지니고 산다. 청소년은 어른의 거울이다. 청소년들이 자라면서 좋은 어른의 거울을 만나 과감히 과감히 나쁜 어른의 거울인 들보를 빼내 버렸다. 그러나 그 어린이의 불량 어른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거울이다. 예수님은 눈의 아무런 티도 없으면서도 삼판하지 않으시고 남의 들보를 빼내어 주신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거울이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머태7,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서부의 한 대형 교회에서 과거에 치명적인 도덕적 죄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더니, 이들 중 대부분이 평소에 “나는 절대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도덕적 결벽주의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개혁을 한다. 부정부패를 척결한다. 새 역사를 만든다”고 하면서 정의의 칼을 높이 드는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개혁되어야 할 대상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타서 살아가면서 남들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정의로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좋지만 정의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그렇게 사랑과 용서가 전제되어진 것이 바로 진정한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참된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책과 지기 비하가
자신을 향한 폭력이자 악의 유혹이라면
자신에게만 무한히 관대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모습 역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위선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온전히 당신 앞에 나의 모습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당신께 용서와 자비를 온전한 마음으로 청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당신의 말씀 앞에 내 자신의 모습을 먼저 바라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Stop judging.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남을 심판한다는 것은 자신이 심판자임을 스스로 말하는 것인데 오직 심판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잊어버린 이들인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남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이는 그리고 하느님 앞에 겸손한 이들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구약에 이렇게 다른 이들을 심판하지 않는 이들이 있지요, 그들은 요셉과 다윗입니다.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상인들에게 팔려간 요셉, 하지만 요셉은 이집트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었는데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다윗은 심판하지 않았지요.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고 하느님만이 심판자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이들을 심판하려는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심판자들에게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티를 보고 빼내주겠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삶은 세상에 만족하고 세상의 규칙대로 살고 있는 이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이들이 죄인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오직 심판자는 하느님 뿐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당시에 남을 심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사이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지요.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며 그것을 지키지 못한 이들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심판하고 감옥에 가두고 하였지요. 이러한 당시 사회적 문제를 말하면서 제자들만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큰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을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신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는 것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들은 자신들 역시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심판자는 하느님 뿐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오직 기도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들보가 너무나 커서 눈에 넣는다는 이야기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들보와 눈에 든 티의 크기비교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내 마음에 들보처럼 고정돼 있으면 좀은 이해 갑니다.

매일 만들어내는 뉴스들이 남을 심판만하니 이젠 듣기짜증만 납니다.
특히나 내로남불 그렇고 정치발언들이 너무나 그래서 듣기 싫어져요.
세상 들보로 가려있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순수 하늘 못 보게 합니다.

나의 상식이나 지식들로 고정되면 내 눈에는 하늘진리 안 보일 테죠.
들보 모르고 사는 단순한 어린이들은 역시 하늘일 가까이 볼 거예요.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보다 살아 있는 곳에 있다.< 마태7/1-5>6/2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만이 공정한 심판관이십니다. 우리의 머리칼 까지도 세어 알고계신 분 우리의 속마음 까지 알고 계신 분 참으로 공정한 심판관이시며 정의와 자비가 일치한 판관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 남을 심판하지 말라.” 하심으로 우리의 심판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만 달렌트 빛진 사람이 왕에게 탕감을 받고도 100데나리온 빛진 형제를 판단하어 감옥에 처넣어 자기도 더 무서운 감옥에 들어간 비유는 참으로 사람이 사람을 잘 못 판다하여 똑같이 자기도 핀단을 받게 된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잘못 판단으로 자기도 잘못 판단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에서 지은 죄를 이유로 공닥이 없다는 이유로 영원한 지옥에 처넣어 불속에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려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아들의 비유에서 유산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고 잘못했는지 묻지 않고 죽은 아들이 돌아 온것만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왜 우선 잘 잘못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을까요. 잠간 지나가는 세상과 영원한 세상의 가치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 하면서 우리의 삶은 얼마나 이웃에 대한 내로남불적 판단을 하는지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네 죄는 크고 무겁고 내 죄는 가볍고 아무것도 안이고 남의 약점만 크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저는 가끔 죽어서 갈지 안갈지 있는지 없는지 가바야 알겠지만 없다고 생각하는 지옥은 세상에 더 무서운 지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잘 못 판단하여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하는 세상의 일을 너무나 많이 보고듣고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욕으로 인격을 죽이고 잘못된 판단으로 오게 기두고 서로 시기 질투로 망하게 하고 서로 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법에 고발 해서 사업을 망치게 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끼리 마음에 들지 않은다고 의절하고 버리고 등을 돌리고 사는 사람들 참으로 자기 판단에 속아 남을 고통으로 몰아널는 것은 죽어서 간다고 말하는 지옥보다 더 고통스랍습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법의 고발로 지옥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기도에 “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진복팔단에 첫 머리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에 살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은 에페소 4/2-6에 “ 겸손과 온유.” 평화의 끈으로 영의 일치를 힘써주고“ ” 그분은 모든 이 위에 모든 이를 통하여 모든 이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와 나의 일치안에 현존합니다. 나를 알 듯이 너를 아는 것은 겸손과 온유로 하느님 안에 일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모든 이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자기생각을 버리고 너의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세대 갈등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장편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던 사람 하나가 한 캐릭터를 두고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구나 합니다. 좀 더 앞선 에피소드를 봤던 사람이 말합니다. “저 사람이 전편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그런 이야기 못 할 걸.” 나중에 본 사람이 다시 따져 묻습니다. “무슨 소리야 저 사람 지금 하는 거 보니까 좋은 사람 맞는데” 하며 서로 논쟁을 합니다. ‘니가 몰라서 그래. 전편에서 저 사람이 어쩌구 저쩌구…’ 목소리가 커집니다.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요. 각자의 입장에선 다 맞는 말입니다. 드라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세대간 갈등이 이와 같이 느껴집니다. 이 사회를 바라보는 출발 지점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스토리는 전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각자가 신고 있는 신발을 직접 신어 보기 전엔 그 사람이 느꼈던 그 느낌을 알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서로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지 않으면 갈등의 평행선은 길게 이어질 뿐입니다. 먼저 내가 나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실상을 뚜렷이 볼 수 없습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자신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들보이다.

심판을 멈추고
우리 눈에서
먼저 들보를
빼내어야 할
실천의 때이다.

심판의
들보에 갇히면
삶은 날카롭고
관계는
무의미해진다.

덮어주어야 할 것과
빼내어야 할 것의
분명한 식별이
필요하다.

신앙의 삶은
들보와 함께
갈 수 없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내는
것이 삶의
변화이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우리중심으로
살아온 시간이
들보의 시간이다.

욕심으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티와 들보의
무의미한
경쟁을 멈추고
나눔과 배려의
빛으로
나가야한다.

들보가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맑고 깨끗한
십자가의
영혼이다.

어리석고 아픈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먼저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들보를 먼저
빼내는 일이다.

이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내적 동기이다.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삶이
복음이다.

아름다운
결단이며
변화의 새로운
삶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하는
들보를 빼내는
회개의 날이다.

“우리 아이는 책을 읽지 않아요. 책을 읽어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책을 읽으라고 하면 놀 궁리만 한다니까요.”

아이가 잘 성장하기 바라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저는 “그러면 형제님은 책을 얼마나 읽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가 바빠서요. 하지만 저도 아이 때는 많이 읽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읽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면, 강요나 강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먼저 보여 주고, 때로는 같이 읽고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눠간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모범이 먼저 보일 때, 자녀들도 따릅니다. 단순히 자녀를 위한다면서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지를 잘 아셨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씀만 하면서 우리에게 강요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먼저 가장 큰 사랑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사랑 말고는 다른 판단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커다란 기준이 없을 때, 손쉽게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섣부른 판단이 자신의 심판을 가져오게 됩니다.

실제로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행하지 않음을 꾸짖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은 성품이 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먼저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실천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강요하고 있었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를 향한 판단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사랑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도 떠올려야 합니다. 말만 하는 사랑인지, 아니면 실천하는 사랑인지…….

 

오늘의 명언: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만 한다(디어도어 루빈).

 

졸음을 쫓는 가장 좋은 방법.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실제로 겪은 상황이었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지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커피 한 잔을 타왔습니다. 커피 카페인의 힘을 빌려 보려는 것이었지요.

다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커피를 든 채로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봅니다. 글쎄 커피를 키보드에 쏟아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키보드를 탈탈 털며 커피를 닦아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잠이 싹 달아난 것입니다.

잠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커피를 키보드에 쏟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키보드 자판이 잘 눌러지지 않아서 교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방법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방법이 없다며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또 다른 아픔이 동반될 때도 있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서도 부활이라는 희망을 보여 주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포기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과 함께 이웃 본당 판공성사를 도와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제가 형제들에게 그랬습니다. “오늘만큼은 날이 날인만큼 사제로서 패션에 신경들 좀 써주세요!”

그랬더니 형제들이 즉시 이구동성으로 반격을 하시더군요. “아니, 그런 말씀 하실만한 분이 그런 말씀하셔야지요. 신부님, 구두 좀 보세요! 하얗게 소금끼가 남아있는데, 또 구두 신고 바다 다녀 오셨군요. 그리고 바지 뒷쪽에도 흙이 잔뜩 묻어있는데요.” ㅋㅋㅋ

저는 아무말 없이 조용히 차에 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오늘 복음 말씀이 어찌 그리 뼈저리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3~5절)

 

참 인간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적당한 순간과 장소를 가려 조언해 줄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순간은 단둘이 있을 때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결점에 대해서 먼저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 결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면,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 결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개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7월입니다. 함께 안식년을 지내던 동창신부와 함께 이태리 돌로미테 산악 트레킹을 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하였습니다. 10일 동안 함께 걸었습니다. 숙소는 산장이었습니다. 아침은 간단하게 산장에서 먹고 걸었습니다. 점심은 길 위에서 주로 라면 밥을 먹었습니다. 저녁은 산장에서 샤워를 하고, 일행들과 여유 있게 먹었습니다. 산행 중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두에 서서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입니다. 늘 앞장서서 갔었고, 먼저 가니 쉬는 시간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길을 보고, 꽃을 보고, 하늘을 보고, 일행과 대화를 하면서 가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걷다보니 쉬는 시간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분들에게 산장은 경유지이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산행이 곧 목적지였습니다. 산장이 목적지인 사람은 빨리 걸어야 했고, 그러니 길은 경유지였습니다.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 여유도 없었습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산행의 책임자는 여유 있게 걸어도 산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정하였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이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했고, 저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산행은 여유가 없었고, 길은 그저 경유지였습니다. 돌로미테 산행에서도 저는 주로 앞장서서 갔습니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고, 먼저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도 느끼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늦게 오는 분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행 중에는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분이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는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약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저도 신발의 밑창이 떨어져서 새롭게 등산화를 사야했는데 그 형제님은 기꺼이 저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 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서 다른 산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때도 형제님은 기꺼이 자원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이 목적지였고, 일행들과의 만남이 목적지였습니다. 걷다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지내다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산장을 향해서 앞만 보고 걷는 건 아닌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무능한 왕을 욕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시대를 탓하였고, 궁핍한 생활이 고단했습니다. 성전, 나라라는 목적지가 없으니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걸어가는 길은 좌절이고, 절망이고, 슬픔이고,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길은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지 못했음을 반성했습니다. 이방인의 신을 섬겼음을 후회했습니다. 비록 시련의 길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다면 그 길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유배의 길에서 고단하고, 불편하지만 마음은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목적지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과정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뉴욕에 있어도, 서울에 있어도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삶이나, 코로나 19 이후의 삶이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적지는 나의 내면에 있다고 하십니다. 목적지는 원망하고, 비판하고, 좌절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사람은 이미 목적지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지적할 때는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1-2절)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보면 다른 사람을 잘 알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입견이나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인간관계 안에 장벽이 쌓이게 되고 사람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라고 했다. 우리는 그 행위가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는 고유권한이다. 우리가 그 판단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권능을 침해하는 것이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 네 눈에 있는 들보”(3-5절)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선자야”(5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야 한다는 판단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깔보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가까운 이들을 흠잡고 비난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야말로 들보를 가진 모습이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절) 다른 사람의 작을 잘못까지 볼만큼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그렇게 보고 있는가?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고 하신다. 다른 이들과 관련된 문제는 그 다음에 바로 잡아도 된다. 인간은 자기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또 작은 잘못 보다는 큰 잘못을 더 쉽게 알아본다. 우리는 그 관심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보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꾸짖거나 판단을 할 때는, 우선 그와 같은 잘못을 나 자신은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는지, 또 나는 그런 잘못을 이겨냈는지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또한 그런 잘못이 없더라도 우리는 인간이므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고 지금은 완전히 끊었다면 자비의 마음으로 바로 잡고 훈계하도록 하자.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전에 어떤 선배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목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운 점과 시행착오들을 이야기 했었는데, 그 선배님이 대화중에 하신 한 마디가 참 마음에 남으면서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 한마디는 바로 “나도 그랬었어”였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다른 이들의 잘못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나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인식과 자각이 내재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잘못을 하고 있는 대상에게는 그러한 인식과 자각의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을 마냥 비판하고 험담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회개와 성장을 위해서 형제애를 가지고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멤버십과 파트너십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장해 나갈 때 우리의 공동체는 더욱 더 하느님의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위선자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들보는 집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들보가 가로막대로 눈에 거슬리지 않게 올려져 있어야 집의 전체적인 구도가 잡혀 보기좋다. 만일 들보가 잘못 올려지거나 툭 삐져 나와 있다면 보는 사람 모두에게 불편함을 줄 것이다. 그런 들보는 눈에 성가셔서 개축을 해서라도 바로 올려 놓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내 집에 잘 못 설치된 들보를 보면서도 남의 집에 조금 잘 못된 옷에 티를 보고는 약점도 아닌 것을 꺼집어 신랄하게 비난하는 변변치 못한 사람이 있다.

 

자기 안에 큰 결함을 지고 사는 사람이면서 그 결함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이를 숨기거나 겉꾸며 위장하고는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기는 언제나 문제가 없는 것처럼 하면서 남의 작은 결점을 찾아 흠을 내고 단죄하고 심판한다. 큰 결점을 가진자가 자기를 보지 못하고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사정없이 심판하며 살아간다. 위선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황금율’을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남의 사정을 먼저 잘 살펴보고 내 눈에 들보를 먼저 빼내고 난 후에 남의 눈에 티가 있을 때가 생겨나면 드러내 보이지 않게 빼내 주라고 하신다. 대열에서 열을 지어 행군할 때, 자기가 열에서 툭 삐져나와 전체의 열을 그르치고 있음에도 남이 대열에 조금 어긋남을 보고 요란하게 탓하지 말라 이르신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7,5) 명심해 들어야 할 말씀이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월요일>(2020. 6. 22. 월)(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남을 심판하는 일과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형제로서, 또 같은 죄인으로서 그 형제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기 위한 사랑 실천이지만, 남을 심판하는 일은 마치 자기가 하느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죄인 취급하는 일이고,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면서도 그를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형제를(남을) 대하는 기본 원칙은 ‘형제애 실천’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도 모두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모습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은 것은 잘못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전 경비병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고 말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말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은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처럼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하는 죄는 교만죄와 합해져 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이 말씀도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 라는 말씀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티’와 ‘들보’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말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기 전에 먼저 회개부터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형제를 도와주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죄 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형제애’입니다.

 

그 일은 아픈 형제를 치료해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일과 같습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기 때문에, 형제가 아프면 나도 아프게 됩니다. 따라서 형제가 건강해지는 것은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건강한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제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표현과는 반대로 형제의 눈 속에 들보가 있고 나의 눈 속에 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먼저 나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 줄 수 있습니다.)

 

<만일에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고, 형제는 가벼운 병에 걸린 상태라면, 형제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됩니다. 우선 먼저 나부터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형제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먼저 나의 건강 상태부터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고해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고해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만일에 부모 자신은 고해성사도 안 보고, 기도생활도 안 하면서, 자녀에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여기서 ‘케파’는 베드로 사도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실수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반성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판을 받은 베드로 사도의 반응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오로 사도의 비판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만일에 베드로 사도가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을 보였다면, 위대한 사도로 존경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분열되거나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비판하는 사람 쪽에서 자신의 들보를 먼저 반성하는 일도 중요하고, 그 비판을 받는 쪽에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생각할수록 너무 멋지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남을 사랑하면 그 대가가 나에게 오듯 심판하면 그대로 나에게 옵니다.

남의 약점을 들추면 그 자체로 나는 남을 흉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간혹 왜 남을 의식하며 사느냐고 대드는 사람 머잖아 외톨이가 됩니다.

 

이웃을 예수님 대하듯 하늘가족정신으로 살면 세상평화 확실히 옵니다.

하늘가족정신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인류에게 하셨는데 생각할수록 너무 멋지다봅니다.

 

외로우십니까? 남의 흉 보지마시고 하늘 귀향할 내 마을 올려다봅시다.

귀향할 하늘 내 마을에 인생 성공한 친구들 많이 만들며 기대해봅시다.

 

 

 

하느님의 길을 지켜라.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⓶ 사회 공동선의 경쟁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에 보면, 북쪽에서 일어난 아시리아가 삼 년 동안이나 사마리아 지방에 대해 포위공격을 하는 바람에 주민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고, 그 대신 이 땅에는 아시리아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사마리아 지방에는 우상숭배 풍습이 들어왔고 혼혈가정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가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열왕기 기자의 신학적 관점은 사마리아에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 즉, 이집트를 탈출시켜주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불충실하였고 그 대신에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원인 분석의 결론 역시 자명합니다. 모세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모든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갈릴래아 지방과 유다 지방에 살던 유다인들도 모두 로마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로마제국의 황제를 신격화시키는 우상숭배를 강요받고 있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의 종교적 폐해는 하느님을 섬기지 못해서 최고선이 가로막히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폐해 역시 공동선이 가로막힌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선이 차단되면 악이 창궐하게 됩니다. 이런 악이 판치는 상황에서는 크든 작든, 구조적으로든 행위로든, 누구든지 악에 물들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누구를 심판해 본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보다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형제의 눈에서 티끌을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심판이 필요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오히려 악이 판칠수록 선에 의한 심판은 더욱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문제는 기준과 주체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최고선과 여기서 파생되는 공동선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심판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심판자의 역할은(마태 19,28) 이제 교회에 맡겨져 있습니다.

 

민족화해위원회가 권고한 9일 기도 지향에 따르면, 종전선언과 평화체제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남북한 당사국은 물론 미국 등 관련국의 지도자들을 위한 지향과 함께 북한의 핵무장으로 인한 경제제재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지향과 더불어 한반도의 비핵화 및 남북한의 복음화를 위한 지향 등 현 시기 한반도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공동선의 방안들이 빠짐없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밋밋하게 평면적으로 나열해 놓은 듯한 이 방안들을 입체적으로 판단해 보면, 하느님의 길을 지키기 위한 공동선의 전략이 보입니다.

 

여기서 비핵화와 경제제재 해제 문제는 서로 맞물리는 것이어서, 우리로서는 이 문제가 과연 어떻게 풀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달려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무려 30년이 넘도록 풀지 못한 해묵은 이 과제가 과연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이 당사자들의 말과 협상 테이블에서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합리적 의심도 들고 있습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이미 핵무기를 만여 기 이상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단 한 기도 폐기하지 않으면서 겨우 몇 기 내지 수십 여기를 이제 막 개발한 북한에 대해 비핵화를 요구하면 그 요구가 설득력이 있을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상호 간에 그 어떠한 신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북한에 비해 조금의 도덕적 우위도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이 사태는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입각한 고사작전을 구사하는 미국과 역시 같은 논리로 핵위협 작전을 구사하는 북한이 맞닥뜨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도토리 키재기와도 같은 치킨 게임의 형국 아래서는 남한이 교착된 비핵화 협상을 타개할 수 있도록 중재할 그 어떤 지렛대도 활용할 수가 없고, 따라서 민족 화해와 일치라는 공동선을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고선과 공동선으로써 하느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열왕기의 신학적 관점을 떠올리게 됩니다. 대한민국이 이 교착된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힘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의 논리로 개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즉, 이미 선진국 대열에서 문명의 모델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를 최고선과 공동선이 살아있는 사회로 건설하는 한편, 이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고사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돕기 위하여 협력과 교류 사업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것입니다. 이 선의 주도권을 주도면밀하게 실현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대해 한미동맹을 당당하게 대등한 관계로 강화하는 한편,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해서는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미국의 경제적 압력이나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아니며,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선의 길을 가고 있는지가 정작 중요합니다.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이 과정은, 미국과 북한, 이 두 관련당사자 사회에 대해서 한국 사회가 끼어 들어서, 이 셋 중 어느 사회가 더 사회 공동선을 이룩할 수 있는지 하는 경쟁을 겨루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진리와 정의의 심판자 역할을 위임받은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로써 하느님께 청하고 국민 여론을 일으켜야 할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순례길 못 걷는 요즘… 하느님 안에서 ‘영적 순례’ 떠나야. (산티아고에서 온 편지 - 멈춰있는 까미노)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코로나19로 사라진 순례자들

모두 멈춰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금 가는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완전히 정지되어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두 숨을 죽이고 있다. 깊은 침묵 가운데로 정적만이 흐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정말 낯설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니 모든 것이 낯설다. 3월 14일에는 갈리시아 지방이, 15일에는 이곳 카스티아-레온 지방을 비롯한 전체 스페인이 멈췄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생명이 꽃피는 봄이 왔건만, 만물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계절이 왔건만, 까미노 위에는 아직도 멈춤의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한겨울만 빼놓고 내내 분주했던 라바날 델 까미노 우리 마을도 조용하다.

거의 3개월 만인 6월 2일, 아침 미사 때 처음으로 여성 순례자가 성당에 찾아왔다. 정말 얼마 만인가!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는 정말로 순례자를 환영했다. 순례자가 선물인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서 인사만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 살고 있으면서, 순례자들을 자신 있게 초대했다. “가던 길을 멈추세요.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멈추세요. 멈춰야 보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선물을 발견할 것이에요.” 그리고 약속한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날아갈 겁니다. 산티아고까지 날아갈 겁니다.” 그런데 지금 나 자신이 멈춤을 실제로 살고 있다. 나 자신이 이렇게 진짜 멈추게 될지는 몰랐다. 함께 사는 수도 형제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푼 안식년”이라고. 멋진 생각의 전환이다.

멈춤은 ‘침묵’과 같은 말이다. 공허한 부동의 침묵이 아니라 꽉 찬 멈춤의 침묵이다. 삶이 순해지고 겸허해지는 깊은 멈춤의 침묵 속에서, 우리의 근원을 생각하고 내적으로 그곳에 되돌아가는 때다. 적극적인 능동적인 멈춤이 바로 침묵이다. 수도 형제들도 내내 달려왔던 분주함을 떠나 각자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삶의 뿌리를 향해 내적인 길을 걷고 있다. 멈춤의 침묵 가운데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만물의 뿌리로, 원천으로 돌아간다.

멈췄을 때만 우리는 걸어온 우리 길을 되돌아볼 수 있다. 앞으로만 갈 때는 보지 못한다. 아니, 볼 시간도 되돌아봐야 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 순례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멈춰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곳곳에 물구덩이들이 많았다. 아~ 이 물웅덩이들이 지난날 내가 무수히 흘렸던 눈물이구나! 물웅덩이가 아니라 내가 흘린 눈물의 웅덩이구나.” 얼마나 많은 밤이 홀로 지새운 긴 밤이었나.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실패와 고난의 굴곡을 지나왔다. 잊고 지냈던 지친 마음을 만난다. 정말 먼 길을 걸어왔구나. 한편 나 자신이 참 대견하기도 하다. 나를 위로한다.

 

공동선 위해 돌아보고 기도해야

멈춤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계를 깊이 보게 된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가 굉장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여러 가지 위기 앞에 부딪히니까 휘청거리고 있다. ‘인간 안보’라는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던져졌다. 안보라고 하는 것을 ‘군사적 우위’에서만 생각했었다. 이제는 인류를 지켜내는 일,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최우선적이며, 어떤 사회든지 그걸 지켜내기 위해서 의료와 보건 등 공공체제, 공공성의 체제가 작동을 해야 한다. 특히 공동선을 위한 정치 지도자와 정부의 헌신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는 멈췄을 때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을 수 있다. 우선 기도 안에서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 나를 만드신 주님께서 기도 안에서 나를 위로하신다. 그리고 나를 넘어 다른 이를 위한 기도를 한다. 기도의 연대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그 죽음 안에서 나의 죽음도 미리 체험한다.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앞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가족들의 아픔과도 함께한다. 묵주를 손에 들고 오늘도 멈춰서 투병 중인 모든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영적 멈춤으로 다시 하느님께 걸어가라

결국, 멈춤의 침묵 가운데 더 강렬하게 확신하는 것은 우리 모두 ‘순례자’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어떤 분을 만나러 가고 있다. 길이 누구인지 알고 그 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된다.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며 우리를 목적지인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신다. 엠마오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이렇게 청을 한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예수님을 알아본 후 두 제자는 이렇게 서로 이야기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가장 암울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가장 힘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내 옆에서 함께 걸어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례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8) 우리도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순례자다. 우리 존재의 근원은 사랑이신 하느님이시다. 까미노, 곧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멈춤은 우리 베네딕도회의 정주(Stability, 定住) 서원과 매우 비슷한 것 같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순례’와 한 곳에 머무는 ‘정주’가 만난다. 정주는 구체적인 한 수도원에 온전히, 그것도 죽을 때까지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체적인 공동체에 완전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어떤 환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인내와 정성으로 구체적인 현실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순례 안에서 정주를 만나고 정주 안에서 순례를 발견한다.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순례란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내가 더욱 깊이 서 있는 정주하는 것임을, 동시에 정주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원이신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는 영적 순례임을 발견한다.

 

영적 멈춤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알게 한다. 하느님 안에 내가 굳건히 멈춰 있을 때만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다시 앞을 향해 순례 여정을 걸어갈 수 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해진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우리는 움직이고 숨 쉬고 살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만 우리의 생명도 죽음도 다 있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우리 기도로 모신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 Nada te turbe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 nada te espante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Todo se pasa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 Dios no se muda

인내가 la paciencia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todo lo alcanza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quien a Dios tiene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nada le falta

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 solo Dios basta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일러줍니다.

복음은 계속되는 예수님의 산상 설교 대목입니다. 설교의 대상은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마태 4,25)이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마태 7,5)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그의 허물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면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의적 기준일 수도 있고 공동체적 기준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자의적 기준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타인을 자기 취향이나 사고방식, 선호도에 따라 함부로 심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법이나 판례, 관습 등 공동체적 기준에 기대어 자기 판단의 근거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상대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칫 공적 기준을 제 편의에 맞게 재단하고 편집해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제1독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몰락이라는 아픈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2열왕 17,7).

성경 저자는 이 비극적 멸망의 원인을 성찰하며 신학적으로 재해석합니다. 즉 하느님 백성의 몰락은 하느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분께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등을 돌리고 업신여긴 탓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파란 많은 자기네 역사를 끌어가면서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층은 율법과 계명, 성전을 수호하는 일에 골몰하지요.

문제는 그러한 충성과 열정이 율법의 정신보다 형식에 더 집착하는 율법주의로 고착되어 버린 데서 발생합니다. 율법이 하느님을 더 열렬히 사랑하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동력으로 발휘되기보다, 하느님께는 적당히 예를 다하면서 사람을 구분하고 단죄하고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율법 안에 깃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도 전에, 그 세세한 기준과 씨름하느라 예민하고 각박해질 뿐이었지요.

 

"심판하지 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수님은 오랜 세월 자기도 모르게 몸과 정신에 새겨진 잣대, 율법주의를 먼저 들어내라고, 그러다 보면 타인을 함부로 심판할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율법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지켜야 하는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그분 말씀을 사랑이라는 잣대로 받아들이길 바라십니다.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발휘되지 않는 말씀은 우리 생각과 속셈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 모욕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심판도 단죄도 지적도 교정도 멈추는 게 맞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차올라 그가 나인듯 보일 때까지, 그가 예수님인 듯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심판하지 않는 이 앞에서는 주님도 심판을 주저하십니다. 그에게는 이미 심판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오직 하나인 심판이 사랑의 심판이듯 우리의 심판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벗님의 눈이 사랑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려고 애쓰는 벗님을 칭찬하고 응원합니다.

 

 

 

자기인식. -무지, 심판, 회개, 겸손, 진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소서, 당신을 떠나는 자는 망하오리니,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외다"(시편73,27ㄱ.28ㄱ)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이요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일이라 합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로 인한 판단이지 정말 자기를 안다면 절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정말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하느님을 갈망하고 배움을 사랑합니다. 하여 평생 늘 자기를 활짝 열고 배우는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합니다.

 

자기를 알아가는 자기인식이 깊어짐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 비로소 자기를 알아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은 북 왕국 몰락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경외함으로 무지의 늪에 빠지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빛이신 하느님을 떠나 배은망덕의 삶을 살 때 무지의 어둠의 늪으로 떨어짐은 필연입니다. 얼굴을 수시로 드려다 보는 거울처럼 내 영혼의 얼굴을 드려다 보는 하느님 거울이 없으면 자기를 몰라 본의 아니게 무지의 늪에 빠질 수 뿐이 없습니다.

 

주님의 거울에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히 자기 영혼의 얼굴을 하느님 거울에 비춰보며 회개하는 고백성사 시간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인지요. 이렇게 자기인식에 철저한 이들은 절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예언자들과 선견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보내 모든 율법대로 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라.”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주 저희 하느님을 믿지 않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목을 뻣뻣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무지의 죄, 교만입니다. 누구 탓도 아닌 무지의 죄요 결국은 자기탓입니다. 회개를 통해서만이 무지의 죄에서 벗어나 심판을 면할 수 있는데 무지의 죄의 결과는 심판뿐입니다. 주님의 경고를 업신 여긴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크게 노하시어 이들을 물리치시니 결국 자기의 무지의 죄로 인해 자초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의 죄입니다. 불가佛家의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욕심, 성냄, 어리석음)도 결국 무지의 산물입니다. 무지의 인간, 바로 인간에 대한 부정적 정의같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한번뿐의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요,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자기인식의 심화와 더불어 겸손과 진실이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무지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무지로 인한 심판이요 주님은 거두절미하고 남을 심판하지 마라 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심판하실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겸손한 이들은 절대로 하느님 자리에서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로 인해 하느님 자리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분별은 구별해야 합니다. 미움에서 나온 심판이나 판단인 반면 사랑에서 나온 분별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있는 그대로’ 분별하지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정적 미움의 심판이요 사랑의 분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으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티와 들보의 비유가 참으로 적절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인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몇이나 될까요? 누구나 지닌 무지의 들보입니다. 자신의 무지의 들보를 빼내어야 비로소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텐데 과연 여기에 해당될자 몇이나 될런지요.

 

우리 눈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가 상징하는 바, 바로 무지입니다. 마음따라 보는 눈인데 마음이 무지로 눈이 멀면 무지는 들보가 되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순수와 겸손이 무지의 들보를 점차 없애는 길이 될 것이니 평생 수행의 끊임없는 회개임을 깨닫게 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눈에 무지의 티는 물론이요 무지의 들보가 완전히 사라진 이들이 바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요 맑은 눈으로 하느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로 무지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순수와 사랑, 겸손과 진실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도달한 사람은 아마 예수님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날로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이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시어 모두를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별하고 받아들이며 평화공존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아멘.

 

 

 

<바로 내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세상을 살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살리는 것

 

세상을 숨 쉬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숨을 불어넣는 것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따뜻해지는 것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깨끗해지는 것

 

세상을 넉넉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내어놓는 것

 

세상을 사랑스럽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정의로워지는 것

 

세상을 진실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진실해지는 것

 

세상을 바람직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바람직해지는 것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살맛 내는 것

 

세상을 평등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평등하게 사는 것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평화를 일구는 것

 

세상을 하나 되게 하는

쉽고 빠른 길은

바로 내가 하나로 품는 것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은퇴하신 신부님께서 “나이가 들면, 누군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라고 조언하는 것보다, 나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정하고 실천하고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 되더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5)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 그의 마음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며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면서,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향하기 보다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복음적으로 점검하고 실현하며 살아가기로 합시다.

 

 

 

잘 모르면 침묵이 금이다<마태,7/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남을 크게 판단하는 사람은 잘 몰라서 하는 경우와 알면서 시기 질투에서 나오는 경우 교만과 폭력적 자세에서 나오는 경우입니다. 특별히 잘 모른는 일에 혹시 까자 소식에 휘말려 군중심로 이런 저런일을 사람에 빗대서 비난의 섞인 판단은 최상의 악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상식에 의해 판단도 자기모순을 들어낼 때가 있습니다.

 

왜 주님은 남을 판다하지 말라 하시고 하셨을 까요? 오늘 복음으로 보면 나도 잘못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 간음하다 들킨 여자를 돌로 죽이려 할 때 “ 죄없는 사람 돌로 처 죽이라” 하시니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양심을 아름답게 하시려고 이런 말씀하시였습니다.

저는 세상의 악이나 공동체의 악을 보면서 내 탓이요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잘못된 현상은 인간의 보편적 약점이고 본능적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벌 위주의 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벌보다도 변호인의 말에 마음을 쓰는 법관이면 세상은 더 아름답게 변화되어 갑니다. 벌을 먼저 생각하는 법은 회두를 강조하시는 하느님의 뜻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 손에는 시계 한손에는 온도계를 들고 사람을 판단하는 법관이 되어 벌을 면하고 용서받고 더 좋은 삶을 살도록 인도 하는 법관이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기들의 교육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자기 가슴을 칩니다.

어떤 학교에서 학교에서 말성 부리고 공부도 하지않은 아이 어머니를 고환해서 “ 당신 아들 이란 잘못 이런 질을 하여 하교교실이 시끄럽고 라고 부모님이 잘 타이르라고 부르고 듣고 집으로 아이와 함께 가면서 ” 선생님이 니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셨나? “ 물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 잘 사귄다고 했어.” 하고 긍정적으로 말해 주었습니다.

반대로 “ 너 때문에 선생님 한데 욕먹고 챙피해 당했다.” 하고 원망 비난을 했다면 결과는 더 나쁘게 나왔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이름있는 의학 박사가 되었다는 말이 있고 후에 어머니를 찾아 어머니에게 만일 그때 저를 나쁘게 판단하고 챙망했으면 이런 사람이 못되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덕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공동체 안에서 저런 놈은 못서 틀렸어 한다면 그 판단대로 될 것입니다. 조용히 불러 작은 소리로 잘하면 더 좋은 사람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인데 하고 긍정적 권고나 희망찬 이야기를 해주면 가정이나 수도회나 모두가 좋은 사람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저는 박 정희 대통령후 전 두환 대통령 때 “ 전대가리 ” 라 말하며 비고거 욕하고 하다가 체육관 대통령이지만 지금은 이 나라를 끌고 가니 가듯이 “ 전 두환 대통령이라.” 불러 이 나라를 잘 잘 다스리게 하자 하여 그렇게 부르니 점점 나라를 잘 다스리고 위기의 한국을 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은 변함없는 법이며 이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지나친 판단 보다 용서와 긍정적 말이 서로 잘 사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인 것 같이 이웃도 희망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이의 그리스도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그리스도인 완성의 원형’에서 (PG 46,254-255)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누구보다 더 잘 알았고 또 그분의 이름, 즉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받은 이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너무도 정밀히 본받음으로 해서 자신 안에 이루어진 주님의 형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정밀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영혼의 형상은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형상과 너무도 일치하여 이제는 말하는 사람이 바오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을 잘 알고 있던 바오로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거를 찾고 있던 여러분이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다른 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다음의 여러 가지 말씀을 할 때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시오 지혜이시며, 평화 자체이시고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접근할 수 없는 빛이십니다. 우리의 속량과 구원과 대사제이시고 파스카이시며 영혼들의 속죄물이십니다. 하느님 영광의 광채요 그분의 본체의 모상이시며, 세기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영적인 양식과 음료이시며, 바위와 물이십니다. 신앙의 기초와 모퉁잇돌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과 위대한 하느님이시고,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새 피조물의 맏아들이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 최초로 부활이신 분이시오 죽은 이들 가운데의 맏아들이시며, 많은 형제들의 맏형이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이며, 영광과 영예의 월계관을 쓰신 외아드님이시고, 영광의 주, 만물의 시작, 정의의 왕이시며 세상의 어느 왕국도 그분을 경계선 안에 갇히게 할 수 없는 그런 권세를 얻으신 평화의 왕, 만물의 왕이십니다.

 

바오로는 이 칭호들과 이와 같은 다른 여러 가지 칭호들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키는데, 이들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모든 칭호들을 분류하여 하나 하나의 의미를 이끌어 낸다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지닌 놀라운 힘을 드러내 줄 것이고 우리 정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름의 엄위를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우리가 모든 칭호 중에 가장 위대하고 거룩하며 첫째가는 “그리스도”라는 이 이름에 참여하게 하시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꾸며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표현하고 있는 모든 칭호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을 거짓으로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 생활은 그 이름의 증거와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유일한 심판관이신 하느님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에서 자유롭기가 참 어렵습니다. 친한 사람과 함께 대화할 때 의도치 않게 남을 흉보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을 심판하고 나면 시원하기는커녕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심판할 때, 그 잣대가 동시에 나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으로는 서로 관계없는 개별 존재지만 신성으로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심판할 때 유쾌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식하든 그러지 못하든 간에 서로 온전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타인은 한두 마디 말로 단정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내가 오늘 만나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내 판단의 기준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자리에 서서 바라볼 뿐입니다. 모든 면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누구나 언젠가 하느님을 마주보게 됩니다. 그때 유일한 심판관은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자비하신 심판관을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모든 사람 안에서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오 7,1-5)

     신은근 바오로 신부님

타인을 심판하기는 쉽습니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허물을 말하기는 정말 쉬운 일입니다. 순간적으로 방심하면 누구나 빠지는 실수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자신의 눈에 들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할까?’ ‘어찌하여 저런 식으로 행동할까?’ 무의식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도 모르게 ‘비판의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려면 ‘긍정의 시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갖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만나는 이들에게 ‘당신의 힘’을 주셨습니다. 병자들은 병이 나았고, 악한 기운에 붙잡힌 이들은 자유를 선물받았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는 자체가 ‘삶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을 탓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을 심판합니다. 서먹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이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 하느냐?"(마태 7, 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 많은 판단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판단은 소중한

마음과 마음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모두가 우리가

찾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성찰과

판단 사이에서

판단을 멈추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탄생의 삶입니다.

 

하늘 아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부족하고

아픈 사람들입니다.

 

먼저 주님께

나의 들보를

내어 보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와같이

마음의 시력을

회복하듯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먼저 제대로

보아야 할 사람은

언제나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거짓과 착각

위선과 교만의

들보를 빼내어

심판이 아닌

마음의 성찰이길

기도드립니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형제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