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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복음♥묵상글

2026년 6월 23일 (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작성자peater|작성시간26.06.23|조회수19 목록 댓글 0

제1독서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과 다윗 때문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9,9ㄴ-11.14-21.31-35ㄱ.36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9 히즈키야에게 사신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네가 믿는 너의 하느님이,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너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자, 아시리아 임금들이 다른 모든 나라를 전멸시키면서 어떻게 하였는지
너는 듣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14 히즈키야는 사신들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런 다음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15 그리고 히즈키야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16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 산헤립이 보낸 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주님, 사실 아시리아 임금들은 민족들과 그 영토를 황폐하게 하고,
18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작품으로서
나무와 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없애 버릴 수 있었습니다.
19 그러나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당신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 때문에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
21 주님께서 그를 두고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경멸한다, 너를 멸시한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든다.
31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32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시리아 임금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 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33 자기가 왔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34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35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36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위협 편지를 받고 기도하자,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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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위협에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주님께 기도한다.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시리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아시리아는 퇴각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시며,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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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시리아의 침공에서 유다를 구해 주셨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임금 산헤립이 되돌아가고 예루살렘 도성이 수복되었음을 알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기본 태도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전체를 거꾸로 비추는 거울의 구실을 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짧은 접속사는 앞서 말한 모든 요구, 분노와 보복의 중단, 원수 사랑 등을 하나의 문장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 문장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이라고 선언하는데, 이는 그 정신의 확장에 가깝습니다. 이미 있는 도덕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 가르침을 다른 이들을 향한 무한한 관계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황금률은 인류의 여러 전통 속에서 되풀이되어 온 윤리적 경구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 사이의 단순한 계산을 넘어섭니다. 이 말은 ‘다른 이의 자리에 서 보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방식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이지요. 사실 서로를 향한 윤리는 언제나 관점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황금률은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자리를 떠나, 다른 이의 상처가 보이는 자리로 옮겨 가 보라고 재촉합니다. 그 이동이야말로 산상 설교가 요구하는 핵심이자 실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른 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황금률이 말하는 바는 다른 이를 나와 같다고 단순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다름을 인정하며, 그 다름 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이 규범은 자기 수양의 기술이 아니라,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 때로는 행복과 기쁨 앞에 멈추어 서서 그의 삶에 머물러 보는 열린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은 인간적 격언이라기보다, 다른 이를 통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초월의 자리입니다. 그 초월의 끝에는 하느님께서 꼭 함께하실 것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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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여기서 ‘거룩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을 떠올리게 하며, 이 구절을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 견주어 보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방인을 ‘개’에 빗대기도 하였지만, 문맥상 여기서 ‘개와 돼지’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의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구절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겪었던 모진 박해와 시련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율법과 예언서,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의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마태 22,34-40 참조)과 더불어 예수님 가르침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끝자락에 이처럼 ‘황금률’을 당신 가르침의 결론으로 강조하십니다.

한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이 바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늘 나라의 가르침을 실현하고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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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에 칠레에서 광산이 무너진 일이 있었습니다. 33명의 광부가 지하 700미터에 있는 약 15평의 대피소에 갇혔는데, 남은 식량은 열 명이 이틀 먹으면 없어질 분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69일 만에 33명의 광부가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살아난 광부들은 이 기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 보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자기만 배고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고프고, 자기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두렵고, 자기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고통스럽다는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장자는 연륜으로, 유머가 있는 사람들은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33명 모두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세상은 어쩌면 15평 남짓의 대피소와 같은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어려움과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또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나’만 살아 보겠다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죽이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내’가 어렵고, 두렵고, 걱정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좁고, 그 길이 비좁은 이유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타인을 향하여 마음을 건네는 길입니다. 그런 길이야말로 거룩하고 진주처럼 고귀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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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넓고 편한 문으로 들어가면 많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려고 밤잠을 자지 않고 먹을 것을 아껴 가며 노력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반대로 우리는 돈을 쉽게 벌려고 사기를 치고 일확천금을 바라며 돈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만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가치를 돈과 재물에 두고 일희일비하는 삶을 삽니다. 

정말로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적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가치에 자신의 삶과 목숨을 거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찾더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쾌락을 찾는 사람이 많더라도 유혹에서 빠져나와 주님을 올곧게 섬기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영원한 행복과 상급을 받는 길은 생각보다 좁고 험하여 마음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좁은 문은 마음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숙여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높이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특권과 능력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내어 놓는 마음을 가집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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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생존에 대한 본능적 욕구는 이기적 욕망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각박하고, 살기 힘들어질수록 이기적 유전자는 더 강해집니다. 관계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기적 사회는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서로를 외면하고 자기애에 빠져 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타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웅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삶은 결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내 부모, 내 자식, 내 가족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힘들게 해서 고통스럽지만, 그들이 있어서 내가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헤어지고 싶지만, 정 때문에 산다는 부부들이나,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한탄을 하고,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고 서로를 원망하는 부모 자녀들, 때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시부모나 며느리와 같은 고부 갈등에 이르기까지 관계 속의 상처가 끊이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운명처럼 엮어진 인생이기에 삶을 더 곱씹으며 그들이 나를 살게 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적 삶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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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외국인 선교사입니다. 청나라 사람으로 ‘북경교구 신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를 조선 땅으로 보냅니다. 주 신부님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어렵게 국경을 넘습니다. 그를 안내했던 분은 순교자 ‘지황’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한양에 도착하여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익힙니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외국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9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교우들과 함께 조선말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봉헌하는 첫 번째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배교자에 의해 입국 사실이 알려지고 최인길과 지황은 순교합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피신했지만 숨어 지내며 사목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우들은 붙잡히고 신부님의 거처를 캐묻는 문초를 받습니다. 교우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한 신부님은 순교를 결심하며 관아에 자수합니다. 그리하여 1801년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나이 49세였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비좁기 마련이다.’ 자신을 낮추고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활동하신 첫 사제였지만 지금도 ‘소박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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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욕망을 희석시키고 욕심의 물줄기를 가늘게 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좁은 문을 당연히 어려운 문으로 여깁니다. 경쟁이 치열한 문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천상 문은 경쟁이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고 자신의 마음을 비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앙생활을 힘들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내가 신앙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내게 가까이 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총 속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그저 은총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받는 기쁨이 전부지만, 어른이 되면 주는 기쁨도 깨달아야 합니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좁은 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청소년 자모회 어머니들이 주방에서 아이들을 위해 스파게티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양파를 열심히 썰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십니다. 양파를 썰며 생긴 화학 반응으로 자극성 기체가 만들어져 눈이 매운 것입니다. 옆에 약간 떨어져 있었던 저 역시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 바로 앞에서 양파를 써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칼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계속 칼질을 해야 나중에 바라던 결과인 맛있는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눈이 맵다고 양파 써는 것을 포기하고 양파를 넣지 않으면 당연히 스파게티의 맛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맛있는 스파게티를 위해, 또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면서 눈물을 쏟으면서도 양파를 썰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렇지 않을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에 항상 기쁨과 행복이 충만할까요? 이 길에 갈등도 또 아픔과 상처도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곧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어떨까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없고, 나중에 얻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눈물을 흘리며 노력해서 우리 자신 안에 거룩한 불을 지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흔히 황금률이라 하는 가장 위대한 윤리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당시 유다교의 랍비들이나 동양의 공자 등 많은 사람이 “네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소극적인 형태의 윤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적극적인 선행과 사랑의 명령으로 뒤집으십니다. 즉,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머무는 무관심을 넘어서, 자기가 위로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행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마태 7,13)

 

넓은 문, 널찍한 길은 세상의 가치관, 안락함, 그래서 다수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여기에는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은 문, 비좁은 길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들어갈 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하셔서일까요? 아닙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철저한 자기 비움이 요구되는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 비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문이고 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한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또 불편한 이 문과 길을 선택할 용기가 있나요?

 

오늘의 명언: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다보면 어느 길이든 행복하지 않은 길은 없습니다(조지.E.베일런트).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오 복음 7장 13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이며 친지, 세상의 부귀영화 다 버리고 깊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자들의 삐쩍 마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초췌한 얼굴,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에 빛나는 얼굴!

세상에 살던 그들은 어느 순간 느꼈을 것입니다. 갖은 유혹거리들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한가운데 있다가는 평생 헤매도 진리를 못 찾겠구나, 일생일대의 깊은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수밖에...그들은 결연히 세상을 등지고 혈혈단신으로 아무도 없는 깊은 사막 어두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과 집중이었습니다. 진리 중의 진리이신 하느님을 보다 더 잘 파악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을 깨닫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었겠지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에너지의 99퍼센트를 기도와 묵상에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1퍼센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것이었겠지요. 그러니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의 포기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니는 맛집이며, 골프 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막에서의 단독 수도 생활의 필수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섭생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취미가 단식이요, 특기가 고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극단적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실체를 손에 잡힐 듯이 바라보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고 단 것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들은 이제 하산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 소중한 깨우침을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과 함께 사막을 걸어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보다 큰 선이요 아름다움이요 절대적 가치관이신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사막의 교부들처럼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사막으로 들어갈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매일의 삶 안에서도 사막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다 보면 매일 매 순간 ‘좁은 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상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시대 참된 영성가들은 바로 이 선택과 집중을 잘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빨리 오라고 우리를 손짓합니다. TV나 컴퓨터를 켜면 즉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외치는데,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꼭 필요한 물건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영성가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필요한 많은 것들 가운데 정말 필요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식별력, 그것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다 할 수도 없고 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영성입니다. 자신이 꼭 서 있을 자리에 반드시, 그것도 항상, 기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성격이 조금 급한 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울 때도 기초를 차분히 익히기보다는 빨리 결과를 얻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원래는 기초 영문법부터 차근차근 익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빨리 실력을 얻고 싶어서 곧바로 ‘성문종합영어’를 펼쳤습니다. 문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려운 독해를 하려 했으니 당연히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비슷했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초급 코스에서 기본자세를 익혀야 했는데, 저는 처음부터 중급 코스로 올라갔습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습니다. 피아노도 그랬습니다. 손가락 연습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빨리 노래를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몇 곡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조금만 어려운 곡이 나오면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삶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조급한 마음으로 고치를 억지로 열어버리면 날지 못하는 나비가 나온다고 합니다. 기다림과 훈련의 시간은 어쩌면 좁은 문과도 같습니다. 답답하고 느리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야만 진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람들은 넓은 문을 좋아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좋아합니다. 빨리 성공하는 길, 빨리 돈을 버는 길, 빨리 인정받는 길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이 가지라고 말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더 빨리 경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무엇입니까? 희생의 문입니다. 양보의 문입니다. 기다림의 문입니다. 이해와 용서의 문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면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넓은 문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더 큰 집, 더 많은 소비, 더 편리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바벨탑은 끝없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문을 통해서 들어온 것도 있습니다. 환경오염이 들어왔습니다. 생태계의 파괴가 들어왔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 들어왔습니다. 풍요로운 세상 뒤에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도 있었고, 난민들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결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연대와 협력의 길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에는 언제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먼저 물을 부어야 큰물이 올라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먼저 사랑해야 사랑이 돌아옵니다. 먼저 용서해야 용서를 받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좁은 문은 먼저 내가 한 걸음 양보하는 문입니다. 먼저 내가 희생하는 문입니다. 먼저 내가 이해하려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처음에는 불편해 보입니다. 느리고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생명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욕심과 경쟁의 넓은 문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과 나눔의 좁은 문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좁은 문 끝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과 평화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아, 참사람이 되시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지으심에


함께 일하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함께하심에


함께 뛰노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살리심에


함께 어울리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의로우심에


함께 숨쉬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자유로우심에


함께 춤추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완전하심에


함께 깃들이는
참사람이 되시게


사람아
그대 사람이니
참으로 사람이 되시게


그대 빚으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함께 물드는
참사람이 되시게

 

 

 

하느님 앞에 펼쳐놓는 신뢰,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

     김웅태 신부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1. 복음이 들려주는 세 가지 초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깊은 분별력과 실천, 그리고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영적으로 귀한 것을 함부로 내던지지 말고, 하느님께 받은 거룩함과 신앙의 품위를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신앙생활의 나침반이라 불리는 황금률을 들려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권고를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 7,13)

 

2. 좁은 문은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사실 이 ‘좁은 문’과 ‘비좁은 길’이라는 말씀은 듣기만 해도 우리 어깨를 조금 무겁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은 왜 이리 늘 좁고 험난해야 할까?’ 하는 인간적인 아쉬움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걷는 이 좁은 길은 결코 외롭고 쓸쓸하게 홀로 버려진 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만 하시고 저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시며, 진리의 성령을 보내시어 이 좁은 길을 함께 걸어 주시는 든든한 동반자이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비좁고 험난한 문이라 할지라도 마침내 생명으로 도달하는 은총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3. 히즈키야가 택한 좁고 정직한 길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유다의 히즈키야 임금은 바로 이 ‘좁은 길’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아시리아의 산헤립 임금은 유다를 위협하며 하느님을 모독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네가 믿는 너의 하느님이 너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여라.” (2열왕 19,10 참조)

이는 단순한 군사적 협박이 아니라, 히즈키야의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두려운 도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넓은 길을 찾았다면,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에 굴복하거나 다른 강대국에 의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는 인간적인 지름길을 찾기보다, 가장 좁고 정직한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사신들의 손에서 받은 편지를 들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그것을 주님 앞에 그대로 펼쳐 놓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2열왕 19,16 참조)

 

4. 주님 앞에 펼쳐 놓은 한 장의 편지

히즈키야는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 편지는 단지 종이 한 장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나라의 운명, 백성의 두려움, 임금 자신의 무력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런 무기도 없이 주님의 집에 올라가 기도하는 그의 모습이 비좁고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좁은 문, 곧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신뢰하는 가난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응답하시고, 당신 백성을 구원해 주십니다.

 

5. 우리 삶에도 찾아오는 ‘협박 편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삶 속에도 매일 수많은 ‘협박 편지’가 찾아옵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건강의 적신호, 뜻대로 풀리지 않는 자녀들의 문제, 마음을 옥죄어오는 경제적 어려움, 직장이나 가정에서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는 인간관계의 갈등이 그러한 편지들입니다.

그 편지를 혼자 움켜쥐고 원망하며 슬퍼하는 길은 어쩌면 세상이 말하는 넓고 익숙한 길일지 모릅니다. 똑같이 험한 말로 되갚아주고, 상대를 깎아내리며 내 억울함을 증명하려는 유혹은 너무나 쉽고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의 귀한 마음의 평화를 분노와 미움에 내맡겨 짓밟히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신앙인의 품위를 지키는 길은 히즈키야처럼 그 모든 고통스러운 마음의 편지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미사 중에, 혹은 홀로 바치는 침묵 기도 중에, 주님 앞에 그것을 가만히 펼쳐 놓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6. 황금률을 살아낸 한 신앙인의 증언

직장에서 한 교우분이 겪으신 소박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후배 직원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는 그것을 이 교우분에게 교묘히 떠넘겼던 적이 있습니다. 주변 동료들은 말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된다.”

“똑같이 갚아주고 윗선에 일러바쳐라.”

세상은 넓고 빠른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우분은 가슴이 미어지는 억울함 속에서도 주님의 황금률과 좁은 문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대로, 그는 후배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묵묵히 실수를 함께 수습해 주었습니다.

당장에는 손해를 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퇴근 후 성당 뒷자리에 앉아, 그 억울한 마음의 편지를 예수님 앞에 펼쳐놓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자신을 고아처럼 홀로 두지 않으신다는 위로가 마음 깊이 차올랐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이 드러났고, 그 후배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사죄해 왔습니다. 그 일로 이 교우분은 직장 안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귀한 진주를 얻게 되었습니다.

 

7. 좁은 문은 생명의 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리키시는 좁은 문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관문이 아닙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할 때, 억울함을 주님께 맡겨드릴 때, 분노 대신 기도를 선택할 때, 그 문은 우리 영혼을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의 문이 됩니다.

좁은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좁은 문은 불편합니다. 그러나 그 문은 생명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8. 오늘 주님 앞에 펼쳐놓읍시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끙끙대던 고민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 앞에 온전히 펼쳐놓읍시다.

말하지 못한 아픔도, 감추고 싶은 두려움도, 억울해서 차마 내려놓지 못한 마음도 주님 앞에 가져갑시다.

우리를 결코 고아처럼 홀로 두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세상을 이길 힘과 하늘의 평화를 우리 마음에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아멘.

 

 

 

<좁은 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 2,14)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도,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세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 맺는 나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예로부터 이 구절을 황금률이라고 불리워져 왔습니다. 로마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이 구절을 황금으로 명시하면서 황금과 같이 고귀한 말씀이라고 천명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종종 대접을 잘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종종 자신은 대접하지 않으면서도 대접받기를 바라곤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넘어서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하느님께 해 드린 것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고 대접받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계산없이 우리에게 무한하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받기만을 바라는 우리가 아니라 지금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희망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 위해 전하는 사랑은 더 큰 사랑과 자비와 은총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믿음을 사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마태 7, 12-14> 6월 23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어제 하느님 앞에 영원한 삶을 사시도록 환송한 안비오 수사님의 죽음 앞에서 미사드렸습니다. 저는 그분이 수도자의 삶을 선택하여 주님을 믿고 사시며 어떤 자리가 아니라, 수도자로서 순명 청빈 정결 속에 어떻게 사셨는지를 묵상하며 하늘나라로 가는 환송식에 참례하였습니다. 사람 앞에 늘 겸손하고 온유하게 사셨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복되게 사시던 수사님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살았으며 “안 해, 안 돼.”하는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늘 조용한 가운데 열심히 기도하고, 손잡아주고, 다정하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시다가 믿음 안에서 바라던 영원한 삶으로 가셨습니다.

많은 접촉은 없었지만, “저 수사님은 문제야.” 하는 말 듣지 못했습니다. 수도자로 조용히 주님 뜻에 순종하고 말썽 없이 사시다가 형제들의 정성 어린 환송을 통해 일생 바라던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사랑받고 살기 위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제 미사 중에 저도 저만큼 살다가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수사님 안녕”하며 보내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시는 것같이 저도 ‘조금 더 주위 사람에게 아니, 형제들에게 행하다가 말없이 떠나는 사람 되어야지’하고 기도 중에 마음먹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결심했습니다.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는 모습 안에 세상 삶의 마지막, 끝이 있다는 것을 바라며 더 주님 뜻 따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방에 들어와 못 보낸 카톡을 보내며 묵상을 계속했습니다. ‘잘 살아야지, 더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야지.’ 마음먹으며 저녁기도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아침 기도 전 들리는 성경 말씀 안에 저는 무릎 꿇고 주님의 지혜와 계시를 듣고 따르려고 합니다.

권력에 탐내거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리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 뜻 따라 주님 몸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처럼 오늘도 주님 따라 살기를 바라며 어떤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깊은 관심을 두고 오늘 하루 바르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한 삶을 기다리며.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함승수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규칙을 세상 사람들은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경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가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금으로 글씨를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여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그만큼 특별하고 대단한 말씀인가 싶지만, 사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들도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수님 시대에 살던 유다인들에게도 이 말씀이 이미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을 실천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리라고 해도 막상 그 진리대로 사는 게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니 어떻게든 노력해봐야겠지요. 그러기 위해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를 살펴봅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싫어해서 남이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해 주었으면 하는 긍정적인 것인지로 말이지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때에는 그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수준에 머무르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 할 때에는 그런 소극적인 수준은 당연히 포함이고 이에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기까지 바란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중잣대’를 적용하다보니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실망하고 상처받게 되지요. 나는 ‘최소’만 하려고 들면서 상대방에게는 ‘최대’를 바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소의 사랑에 머무르지 말고 최대의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정도로는 사랑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뿐이며, 그건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함이라기보다 나 스스로가 상대에게 민폐를 끼쳐 그와 불편한 관계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이니, 어찌보면 사랑의 반대개념인 ‘무관심’에 해당하는 모습인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사는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뭐가 나아도 나은 사람이 되어야,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며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고 편한 길 놔두고 굳이 ‘고생길’로 가는 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아무렇게나 살아도 다 통과할 수 있는 ‘널찍한 대문’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끈다고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최고’는 못되더라도 ‘최선’은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황금률’

    김석주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가야 할 세 가지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알아보는 식별의 지혜, 둘째는 황금률을 따르는 사랑, 셋째는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이 말씀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배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고, 그것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두 번째로, 이 황금률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요약하는 사랑의 법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다면 먼저 이해하고, 내가 용서받고 싶다면 먼저 용서하며,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은 편하고 많은 사람이 가기에 쉬워 보이지만, 생명에 이르지 못합니다. 반대로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때로 힘들고 외로워 보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이자 참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은 때로 좁고 힘들지만,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처럼,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풀면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상도 익히 아는 위대한 법칙, 이른바 황금률을 담고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베푸는데, 어떤 베풂은 사람을 살리고 어떤 베풂은 사람을 망칩니다.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성인으로 키우고, 어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을 폭군으로 키웁니다. 그 둘을 가르는 경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이 한 가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주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먼저 우리의 민낯을 봅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무조건적인 허용과 타협으로 곧잘 착각합니다.
"신부님, 무조건 퍼주고 다 이해해 줘야 참사랑 아닙니까. 자식이 엇나가도, 이웃이 무례해도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참아야지요."
듣기엔 거룩한 희생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다를 때가 많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갈등을 감당하기 싫어서 질서를 뭉개 버린 비겁함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악의 경계를 허물고 스스로 영적 호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에 무서운 경고를 박아 두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무턱대고 내어 주는 가짜 사랑이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미리 일러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진주가 짓밟히는 까닭은 진주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주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두려워서 주거나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은, 사실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것입니다.
강요당해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요당해 내놓은 것은 상대를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도리어 "내가 으르렁대면 저 사람은 내놓는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 상대의 교만과 탐욕만 키웁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온 토르라는 개가 이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순하게 생긴 이 개는 온 식구를 지배하며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밥을 먹으려 하면 사납게 으르렁대며 덤볐습니다.
가족은 개가 화낼까 눈치를 보며 벌벌 떨면서도 밥을 챙겨 주고 비위를 맞췄습니다.
이를 본 훈련사가 일침을 놓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저 개에게 사냥감처럼 몰이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가족은 분명 매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주었기에, 그 줌은 개를 길들이기는커녕 개를 폭군으로 키웠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맡은 짐승은, 받을수록 더 사납게 무는 법입니다. 
 
같은 일이 사람 사이에서도 벌어집니다.
한 양육 프로그램에 나온 여섯 살 아이와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아이가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어머니를 때리며 무법자처럼 구는데도, 어머니는 혼내지 못합니다. "우리 애가 기죽을까 봐요" 하며 달래기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머니에게는 어린 시절 제 친정어머니에게 한 번도 칭찬받지 못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 결핍을 보상받으려고, 제 자식만은 무조건 오냐오냐 키우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아이를 올바로 이끌려고 준 것이 아니라, 제 옛 상처를 달래려고 주었습니다.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준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연민으로 덧칠된 줌 앞에서, 아이는 통제 불능의 돼지가 되어 어머니의 삶을 물어뜯게 되었습니다. 
 
이 어긋난 사랑이 한 집안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구약의 엘리 사제가 똑똑히 증언합니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피느하스는 주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가로채고 성소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대사제이자 아버지인 엘리는 마땅히 하느님의 율법으로 이들을 엄히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향한 눈먼 정 때문에 "얘들아, 그러지 마라"(1사무 2,24 참조) 하는 솜방망이로 그치고 맙니다.
거룩한 제물을 두 돼지에게 계속 던져 준 것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진노하며 물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존중하느냐?"(1사무 2,29 참조)
결국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비참히 죽고, 하느님의 궤는 빼앗기며,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율법의 선을 지우고 맹목적 정에 휘둘린 그 거짓 사랑이, 결국 온 집안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엘리는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과 부딪치기를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자식을 목숨처럼 사랑하고도, 정반대의 열매를 거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눈물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입니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집에 돌아왔을 때, 모니카는 "그래도 내 자식이니 품어야지" 하며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단에 빠진 아들을 향해 단호히 집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상에서 밥 먹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십시오. 모니카가 문을 닫은 것은 아들이 미워서도, 아들이 두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닫힌 문 뒤에서 평생을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단호함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자식이 두려워 진주를 던져 주었고, 모니카는 자식을 사랑하여 진주를 거두어들였습니다.
그 차이가 한 집안은 멸문으로, 한 아들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렇다면 호구가 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참된 줌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쁘게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저마다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지, 아까워하면서 하거나 마지못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두려워서 주는 것도, 마지못해 주는 것도 하느님의 줌이 아닙니다.
강요당한 줌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쁘게, 자유로이 주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며, 그런 줌만이 받는 이를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의 냄새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탐욕을 키우지만,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주면 상대의 마음을 녹입니다. 
 
이것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협박당해 십자가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참조)
그분께서는 두려움 없이, 기쁘게, 당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강요당해 빼앗긴 줌이 아니라 자유로이 바친 줌이었기에, 그 줌은 온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두려워서 빼앗기는 줌은 폭군을 키우고, 기뻐서 바치는 줌은 세상을 구원합니다.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두려움과 자기 연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상처를 메우려고, 혹은 미움받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주지 마십시오.
그런 줌은 사랑이 아니라 강요당한 헌납이며, 상대의 교만만 살찌울 뿐입니다. 
 
상대를 교만하게 하는 내어줌은 가장 안 좋은 내어줌입니다.
겸손하게 만드는 내어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줄 때는 기쁘게 주고, 거두어야 할 때는 사랑으로 단호히 거두십시오.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건히 서서 두려움의 냄새를 지울 때, 비로소 우리의 줌은 기쁨의 향기를 풍기며 사람을 좁은 문으로 이끄는 보람된 사랑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신다“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우리의 신앙지혜그리고 영적인 가치들을 상징한다진리를 전할 때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신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우리의 영적 선물은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12이 황금률은 율법과 예언서 전체의 정신을 요약한다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책임을 실천하는 지침이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선은 그저 외적인 행동이 아니라우리의 내적 성숙을 완성하는 계단이다.” 즉사랑의 실천은 자신을 단련하고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좁은 문과 좁은 길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많은 이들이 편안하고 쉬운 길을 찾지만참된 생명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겸손과 온유희생을 요구한다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여기서 좁은 길이 편하다고 하신 의미는은총 안에서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따르는 자에게는 그 길이 부담이 아니라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남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공정사랑용서자비를 실천할 때또한 좁은 길즉 주님의 계명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삶을 살아갈 때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현대 사회에서도 이 가르침은 적용된다직장가족공동체에서 상대방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행동하며은총의 길을 좁지만 기쁘게 걷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를 가르친다신앙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무분별하게 주지 말고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사랑과 선을 실천하며좁은 길로 주님을 따라 걸으라는 것이다우리 모두주님의 뜻 안에서 사랑과 겸손으로 자신을 단련하며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6.12-14).”

 

1)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말씀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복음, 성사’ 등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인데,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뒤의 15장에 있는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1-28).”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 숭배자에게 줄 수 없다.”이고, 여자의 청을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제가 우상 숭배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만 믿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자기가 숭배하는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과 똑같은 마음과 태도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우상 위치로 끌어내린 것과 같은 신성 모독죄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고, 곧바로 우상 숭배를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사를 집전하지 않는 것은,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주면 안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2)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스스로 개, 돼지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미신을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개, 돼지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큰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3) 12절의 ‘황금률’은 앞의 1절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고, 뒤의 22장 37절-40절에 있는 ‘가장 큰 두 계명’을 하나로 압축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황금률’의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은 하늘나라의 문이 실제로 좁다는 뜻이 아니라, 세속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재미없고,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생활이 재미있고, 편하고, 쉬운 생활이라고 주장하고, 또 자기들처럼 생활하라고 신앙인들을 유혹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탄의 유혹입니다.

“왜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로만 가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말렸다가 크게 혼난 일이 좋은 예가 됩니다(마태 16,21-23).

충실한 신앙인들에게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재미는 없지만 영적인 기쁨이 충만한 생활입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생활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곧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됩니다.

강물은 수 많은
물줄기로 나뉘어도
결국 하나의 바다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형성합니다.

변화는 언제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먼저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계산하고 거래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기중심의 집착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친절,
이해와 용서를 받고 싶다면
먼저 그것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순환을 이루는 길입니다.

바라는 것에 머무는 마음은
부족함을 느끼지만,
나눔의 실천으로 깨어난 마음은
이미 충만합니다.

받은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고,
받은 자비가 또 다른 자비를 낳습니다.

우리가 받고 싶은 사랑을
먼저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은
자신이 받고 싶은
존중과 사랑을 먼저 베풂으로써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먼저 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넨 사랑이
세상에 돌아 다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평생 구두 수선을 해왔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허름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니, 너의 구둣방을 오늘 방문하겠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둣방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했고, 구둣방에서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준비했습니다. 또 구둣방이 추워서 따뜻한 담요로 예수님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개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주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너무 춥다고 하면서 이불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담요를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음식이 좀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너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청소부가 와서는 너무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료를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구둣방에 세 번이나 갔었다. 그리고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이웃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내게 해 주는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사실, 이와 비슷한 구절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이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황금률을 새롭게 표현하십니다.

첫째,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고 솔선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국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경력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감동하게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삶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김성태).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차원 높은 삶,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가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저희 수도원 출입구 앞마당에서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기특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날락하며, 자연스럽게 녀석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어제는 작은 친구 겨울 침구를 걷어내고 시원한 여름 담요를 깔아줬더니 고맙다고 꼬리를 칩니다. 강아지들과 지내면서 그들이 선호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젤 좋아하는 건 자신들의 넘버원, 넘버투, 넘버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같이 산책을 한다든지, 놀이를 한다든지, 옆에 앉아 쓰다듬어 줄 때 표정이 제일 행복해 보입니다. 가끔 특별보너스로 해변에라도 내려갈 양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이 특식, 간식, 그리고 주식인 사료 등 먹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엔 시원한 그늘 아래, 세상 편안하게 널브러져 낮잠 자는 것도 좋아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십만원 짜리 수표가 생겨, 녀석들 눈앞에 펼쳐 보이며 제가 그랬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이게 뭔지 아니? 이거 어마어마한 거다. 십만원 짜리 수표야! 너희들 매일 먹는 사료 두 달 치나 살 수 있는 거금이라구!”

그러나 녀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녀석들은 수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폐지나 수표나 그게 그것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잘 파악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오 복음 7장 6절)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대상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그 놀라운 가치,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모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를 전혀 모르기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영약인 성체성사의 의미를 모르니, 앉아있으면 짜증만 납니다.

 

사랑의 심오한 의미와 가치, 영혼이나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 진리나 성경의 위력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니, 그저 강아지처럼 돼지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것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대상들의 중요성을 인식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차원 높은 삶,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해주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 해주려다가 호구가 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테이커-매처’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기버는 내어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빼앗는 사람이며 매처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을 보았더니 가장 높은 위치에 기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위치에도 기버가 있었습니다. 왜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호구가 되는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에게 폭력까지 당하는 이지현 씨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의 호구가 됩니다. 이것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또 '개는 훌륭하다' 10편에 토르라는 강아지에게 온 가족이 당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개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토르라는 강아지는 아무 때는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애꿎은 것을 물기는 하지만 화를 잘 냅니다. 가족은 평화를 위해 토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씨 좋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가족에게도 토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토르는 가족들이 잘해주는 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아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이 오히려 토르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토르가 가족을 ‘몰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대고 무언가를 주어도 왜 미리 잘하지 않았느냐고 엄포를 놓습니다. 생존본능 중의 하나인 교만을 가족들이 키워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호구가 되기 딱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들이 그 좋은 것을 받고 오히려 나를 밟고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면서 호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면서도 호구가 되고 있는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 감정을 살피면 됩니다. 

 

토르가 아버지만을 특별히 공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두려움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생존 욕구가 높은 개들은 두려움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이용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가 두려워서 잘해준다면 그 잘해주는 것은 모두 상대를 더 교만하게 만들고 나는 호구가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몰이하며 최강자임을 자처하려는 토르를 강 훈련사는 되려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개에게 물려 피까지 흘립니다. 하지만 순종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시는 개에게 지나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은 절대 나를 두렵게 만드는 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질까요? 내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내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토르에게 저렇게 대하는 가족들도 분명 토르의 귀여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화내지 않을 때 가끔 부려주는 애교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을 아는 개는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두렵게 만들고 지배하려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베풀 때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해주면서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유튜브에  ‘EBS 부모’에서 방영되었던 ‘불안한 엄마, 무법자가 된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5살 소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가 생떼 부리면 다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다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절제 없이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기가 죽어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기죽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단만 맞다 보니까 자기는 자녀를 키울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안해서, 그래서 두려워서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도 망치고 상대도 망칩니다. 두려워서 무언가를 줄 때는 호구가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지배당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셨기에 당연히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미안함도 두려움입니다. 

 

그냥 지금 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양은 그 좁은 문 뒤에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양 떼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차피 자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망가져도 주님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졌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랑, 그 좁은 문 뒤에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의 주인이 계십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길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 앞에서 아버지가 학교에 가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어린 딸은 해맑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흐뭇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축복을 받은 아이는 든든한 마음으로 학교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힘들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믿고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아들 이사악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축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형을 대신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도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 주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마귀를 쫓아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축복하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제가 먼 길을 갈 때면 항상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군대에 갈 때는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새 사제가 되어 첫 본당으로 갈 때는 무엇보다 겸손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멀리 외국으로 연수 갈 때에는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셨고, 성무일도를 빠지지 않고 바쳤습니다. 제가 31년 사제생활을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축복과 기도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시노드’의 닻을 올렸습니다. 경청, 친교, 소통, 동행으로 교회에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서 지역교회도 ‘시노달리타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듯이 각 가정에서 축복의 전승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전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가정을 넘어 이웃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진복팔단’의 문입니다. 겸손과 희생이 좁은 문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좁은 문입니다. 오늘 하루 가족과 이웃을 축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오늘 제가 만나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듬뿍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황금율과 좁은 문으로의 삶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좋은 것임을 알고 살지 못한다면 의미없다 하겠다. 좋은 것의 기준은 하느님께서 기준이다. 불변하는 절대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나, 너, 우리가 지향하는 기준이다. 나만 좋으면 좋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너도 우리 모두도 좋아야 한다.

거룩함과 진주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살을 깍고 남에게 값진 것이어야 한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황금율이 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7,12)

좋은 것은 그냥 나, 너, 우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파괴적이지 않아야 하고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고, 이는 언제나 하느님 기준이어야 한다.

이 길로 들어서고 이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기에 또한 어렵다. 많은 사람이 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또한 우리도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럴 때 좋은 것이 된다.

 

개나 돼지는 거룩함과 진주가 갖는 의미와 무관하다. 사는 것에서 하등 이런 가치나 목표점하고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개나 돼지처럼 나만 좋으면 된다.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인데 수지맞는 장사인데 쉽지 않다. 사람에게 좋은 것이 되려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즉 황금율을 살아야 하고 좁은 문으로 함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거룩함과 진주처럼 반짝인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7,14)

 

성 알로이시오 성인 기념일이다.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고 흑사병 환자를 돌보다 흑사병으로 죽어갔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 닮아 생명으로 부활한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로 다가오는 것 중의 하나가 어쩌면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를 하다가도 자존심이 상할 때 더 이상의 봉사를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자존심을 중요시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상처를 준 사람이 오히려 더 상처받은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존감입니다. 그 자존감은 바로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원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그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충만한 자존감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의 경우 그 자존감이 없을 때 자존심을 중요시 합니다.

하느님 안에 충만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은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바라는 대로 다 해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나누고 베풀고도 하느님 때문에 은총이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를 하려면 개와 돼지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혹은 돼지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민사상, 즉 하느님에 의해 뽑힌 민족이라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으며 개, 돼지 취급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맞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개 돼지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유다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개 돼지들이라고 표현한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그 외 유다인들이 좋아하는 생활을 하지말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이 아닌 그들 자신들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 살고 있는 이들이면서 다른 이들을 거들떠 보지 않았지요. 하지만 자신을 믿는 이들은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왜 힘들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의 좁은 문은 편한 길을 아닙니다.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괴로움이 우리들의 삶에 올 때 그것을 피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러한 상황이 올 때 길이시며 문이신 예수님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큰 가르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이란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단순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지만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방인이며 개, 돼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루의 삶이 괴롭고 고통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좁은 문인데 이 좁은 문이기 때문에 도망가지 말고 예수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을 한다면 그 좁은 문이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방인이 되지말아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의탁하고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맡기고 함께 헤쳐나가자고 하시며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세상에서도 힘든 일을 할 때 혼자보다는 둘 혹은 셋이 함께면 편하고 빨리 끝나지요. 이처럼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고달플 때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들의 삶은 기쁨의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각자가 원하는 것이 얼마나 다양하고 다채로운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각자의 개성이 있기에
다양한 색깔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허나 나의 색만을 강조하고 강요하며 원하게 되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쉽게 상처 받고 고통을 겪으며 부조화를 겪게 되겠지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
그 문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는 용기와 시선,
그 지혜를 청해 봅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This is the Law and the Prophets.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낼 때,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를 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를 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풍요를 노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우리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고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 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 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거나 진주를 돼지들에게 주지 말라는 예수님.
남이 나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줘야 율법정신이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가라 하신 말씀 우리를 어렵게 합니다.

하늘 율법정신은 거룩하고 진주 같은 보물이란 걸 인식하라는 겁니다.
이 보물은 넓고 편한 곳에는 없고 어렵고 좁은 인생길 끝에 있답니다.
하늘 보물 얻으려면 놀고먹는 쉬운 길 없고 고생 끝에 얻는다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보물을 쉽게 얻으려면 싸워 이기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 보물은 세상 보물이지 하늘의 보물이 아니라 사후엔 버려야합니다.

 

 

 

지혜로운 성인의 삶, -분별력, 황금률, 좁은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끗한 욕심, 거룩한 욕심은 언제든 좋습니다. 누구에게나 무해한 아니 오히려 유익한 욕심입니다. 누게에게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바로 성인이 되고 싶은 욕심, 청정욕淸淨慾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삶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 인생입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빛나는 별들일텐데 요즘은 하늘에 별들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천주교 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천주교의 자랑이 이런 별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되는,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참으로 부요한 것은 이런 별같은 보물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써놨던, 가끔 인용했던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진리는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피어난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 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지금도 이 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자비의 집 본관이 있기전 옛 토굴같은 방밖 창문을 열었을 때 뒤뜰 가득 눈부시게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꽃들을 보며 써놓고 큰 위로를 받았던 시입니다. 바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우리 천주교의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예수회 출신 성 알로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그 어느 성인도 죽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어떤 성인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천상탄일에 이은 새로운 천상의 삶이 펼쳐집니다. 제가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 생몰生沒연대를 헤아리며 산 햇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1591년 빼기 1568년 해보니 고작 만 23년 살았습니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성인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참으로 살았느냐가 성인의 판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 알로시오의 성덕의 얼마나 출중했던지는 그가 신학공부 4년째 페스트병에 걸린 이들을 돌보다 전염되어 중병을 앓다 선종하기 얼마전 어머니에게 보낸 구구절절 감동의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어머니,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역시 성인의 배경에는 성녀같은 어머니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회 총장이던 콜벤바흐는 다음과 같이 성인을 칭송합니다.

 

“성 알로시오는 어떤 환경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참 왕이며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실한 벗으로 생활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뿐 아니라 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1605년 10월19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12월31일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그후 그는 모든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지만, 이에 우리의 분투 노력의 응답도 필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첫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어지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편애나 무시의 차별差別이 아니라 분별分別의 지혜입니다. 각자에 맞게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내 읽은 책이 좋다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아닐 것이며, 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누구의 식성에 맞는 음식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참 어리석게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져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짐만 될 것이며 곧장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것입니다.

 

둘째, 황금률을 명심하여 늘 지키는 것입니다.

황금처럼 귀하다 해서 황금률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이전 힐렐 율사 역시 “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요 나머지는 풀이이다.”라고 황금률을 말했습니다. 부정적이도 소극적인 황금률이라 이러면 아무 일도 않게 됩니다. 이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오늘 복음의 황금률이 더 좋고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황금률의 사랑의 실천은 끝이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경구와 일맥상통합니다. 좌우간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입니다. 이대로의 사랑 실천 노력에 항구하면 누구나 성인입니다.

 

셋째, 좁은문을 선택하여 통과하는 것입니다.

문이라 하여 다 똑같은 문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문도 있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화려한 죽음의 문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인 좁은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듯 구원의 좁은문도 선택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문을 선택할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우리 수도자들처럼 자발적 기쁨으로 좁은문을 선택하여 사는 이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세상에 거슬러 좁은문을 통과하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성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 덕분에 유지되는 세상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교사와 주고 받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 선생, 왜 그리 힘들게 살아. 좀 편히 살아.”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한데요.”

 

그렇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남이 볼 때는 좁은문이지만 안에서 내가 볼 때는 넓은문일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좋아서 사랑해서 기쁘게 택한 길이라면 살아갈수록 내적으로 점차 넓은문으로 변해갑니다. 성인들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늘 고통이 따랐다는 것, 휴식이 없었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런 좁은문의 통과 와중에도 늘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좁은문이지 내적으로 감미로운 사랑의 넓은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이를 언급합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밖에서는 좁은문이지만 갈수록 내적으로 넓어지는 감미로운 사랑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넓은 문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 현실을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인 것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히즈키야 임금이 풍전등화 위기 상황의 좁은문을 통과할 수 있었음도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날밤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명을 쳤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무니, 히즈키야는 좁은문을 무사히 통과해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좁은문입니다. 태어날때부터 좁은문이고 계속되는 좁은문의 연속이요 작금의 생존경쟁,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세상은 좁은문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유독 자살자들이 많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유럽에서는 40도 이상의 폭염이, 아시아에서는 폭우의 홍수가 빈번하니 지구 역시 좁은문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좁은문을 잘 통과하여 지혜로운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입니다. ‘개들, 돼지들’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라는 말씀은,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5-26).” 예수님께서 ‘개들’을 ‘강아지들’로 바꿔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숭배자에게 줄 수 없다.”는 거절입니다. 그 여자는 ‘이교도’, 즉 우상숭배자였고(마르 7,26),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우상숭배자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할 일은 아니고, 그들 쪽에서도 우상숭배를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전에 먼저, 우상숭배와 미신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은, ‘박해’를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없고, 성체성사도 안 믿는 사람에게 성체를 주지 않는 것은, ‘성체모독’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성체를 주었다가 성체가 모독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성체를 준 사제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와 성경과 성물들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는 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상숭배나 미신에 빠진다면,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를 짓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을 개들에게 주는 일이 되고, 자기 스스로 개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을 몰라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남’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또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기를 바란다면 이웃을 사랑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주어라.” 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받은 다음에 주겠다.’, 또는 ‘받을 가능성이 있으면 주겠다.’ 라는 태도를 버리고, 받기 전이라도, 또 받을 가능성이 없더라도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좋은 모범입니다. 그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보상받을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한 일도 아니고, 전에 무엇인가 받은 것이 있어서 한 일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도와준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다.” 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문은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넓은 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게 보인다는 뜻에서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마태 8,19),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20). 그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랐는지, 포기하고 떠났는지는 모릅니다. 사도들은 그 삶을 알면서도 ‘기꺼이’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몸의 편안함’만 찾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지만, ‘영혼의 기쁨과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는 ‘넓고 편안한 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좋아서, 또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 넓다는 말씀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닫힌 문이
아니라
열려있는
문이다.

단지
들어가는 문이
좁을 뿐이다.

좁은 문의
기준또한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여전히
문(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은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좁은 문은
넓은 문으로
이어진다.

좁은 문의
시작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여정의
시작이다.

낮아지고
작아지면
다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

좁은 문으로
하느님과
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좁은 문은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이다.

좁은 문을
체험한 사람이
모든 문에
감사할 수 있다.

좁은 문을
받아들인 사람이
넓은 문을
받아들일 수 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은
하느님 안에서
결국 하나이다.

좁은 문의
십자가와
넓은 문의
부활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좁은 문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람만이
새로운 변화를
체험한다.

내려놓고
떠나보내는
좁은 문이
좋은 문이다.

좋은 문은
열려있다.

관계의
중심에는
우리를 제대로
보게하는
좁은 문이 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내려놓게 하는
좁은 문의
소통이다.

내려놓아야
구원이며
작아져야
자유롭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자신을
반성하며
기도하는
시간이다.

좁은 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걸어가는
모든 여정이
구원을 향한
여정임을
믿는다.

자신이 사는 자리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남들과 비교를 통해 자신의 어렵고 힘듦을 하소연하기에 급급합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삶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 대한 만족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멋지고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지금을 바라볼 때입니다.

 

언젠가 외국에 나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 자리가 창가라서 창밖을 볼 수가 있었지요. 구름 위를 비행할 때에는 너무나 멋졌습니다. 매일 볼 수 있는 구름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지요. 그리고 착륙할 때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 역시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이 새로운 시점은 풍경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했습니다. 잘 짜인 도로도 하나의 선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내가 사는 자리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세상의 시점과 매우 다릅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생각하고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참 행복의 길로 안내해줍니다.

이 새로운 시각을 위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란다면”이라는 전제가 들어있습니다. 남에게 먼저 해 줄 때, 우리 역시 원하는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함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물론 좁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만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직 몸은 이 세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아주 비좁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한 실천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키울 수 있도록 철저히 노력해야 합니다. 좁은 문이라고 해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이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각에 항상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늙어 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지혜의 명작이며 최고의 인생 기술이다(앙리 아미엘).

 

정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온갖 소음, 온갖 정보, 온갖 데이터.

요즘 세상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침묵을 두려워합니다.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면 남들 눈에 멍청하게 비칠까 봐 두려워하고, 무엇인가를 놓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온갖 거짓 뉴스가 판을 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진리를 쫓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거짓 뉴스, 가짜 뉴스에 쉽게 넘어가고 맙니다. 내 삶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어도 여기에서 벗어나는데 자유롭지 못합니다.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것을 알기보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참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침묵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홀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보 시대일수록 모든 정보를 취하는 노력보다 진짜 정보를 알아챌 수 있는 지혜로운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침묵 중에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빼앗아 당신 등에 짊어지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오 복음 7장 13~14절)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은 어떤 것을까? 생각해봅니다. 한적하고 안전한 곳에서, 매일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축복의 장소에 살아가면서,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주어진 시간에 기도하고, 기쁘게 살고...그리 어려운 길이 아닌 것 같지만, 쉬운 길만도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좁은 문’을 산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가는 것! 매일의 작은 의무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정성껏 이행하는 것!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가장 작은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좁고 가파르고 불편한 길을 불평불만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역시 주님의 모상이며, 주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사랑받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잘 견뎌내는 것! 그것이 구원과 생명의 좁은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생명과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좁고, 불편한지, 그래서 그리로 찾아드는 자들이 작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살짝 걱정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죄가 하늘을 찌르고, 구원받기에 합당치 않으며, 구원 받을 자격조차 없지만,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와 부당함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빼앗아 당신 등에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은총 역시 보편적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구원의 보편성이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주실 것이며 덮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따라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100퍼센트 구원입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좁은 문’은 다름 아닌 공동체 생활입니다. 끝까지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공동체의 성실한 일원으로 남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나의 성장은 반드시 형제의 성장과 동시에 이루어지며, 내가 변해야 형제가 변하기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머무르는 이 공동체에서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솔직히 날이 갈수록 공동생활이 힘들어집니다. 남아있는 길이 지나온 길보다 훨씬 험난하고 힘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 형제들을 직면하기도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공동체를 다른 무엇에 앞서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깊이 사랑하며, 이웃과 더불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화의 길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코로나가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저도 영성관을 운영하는 어쩌면 소상공인으로서 얼마나 많으신 분들이 힘들어하실지 아주 조금은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더 걱정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질병으로 주시는 ‘시대적 징표’를 우리가 읽어내지 못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코로나는 어쩌면 더 큰 재앙의 작은 징조일 뿐일 것입니다.

저는 어쨌거나 코로나바이러스의 원인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연을 사랑하지 못한 것 때문에 발생했다고 봅니다.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면 그 누군가도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누군가를 아프게 하며 산 이들이 끝까지 평안을 누린 예는 없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공을 손으로 들고 뛰면 퇴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기나 ‘규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규칙은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은 이 사랑의 법과는 반대되는 ‘경쟁’을 가르쳤고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돈이면 남의 마음을 당연히 아프게 해도 된다는 의식이 우리들 안에 참으로 많이 들어있습니다.

 

제가 유학 가서 공부할 때 맥줏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우리가 서빙하는 분들을 예의 없게 대해서입니다.

“어이, 아저씨. 맥주 한 잔 더!”

이런 식으로 몇 번 시켰더니 주인이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술을 팔지 않겠습니다. 저희 식구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여러분은 이 집에서 술을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럽은 좀 다릅니다. 돈이 좀 있다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된다고 믿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어떤 신자분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창피함을 느낍니다. 서빙하는 분들을 너무 막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도 누구의 부모님이고 자녀일 수 있는데 반말로 소리 지르고 나무랍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이 가게에서 떠들고 사람들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는데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는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칩니다.

제가 냉면 배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남자들의 대부분은 저를 “어이, 철가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돈 내고 내가 냉면을 먹으면 다른 사람을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살기에 왜 이렇게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잘 압니다. 그 이유는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나라가 잘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라는 목표가 뚜렷합니다. 그러나 경쟁 속에는 타인을 이겨 아프게 해야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는지 느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평생을 남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는 것만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도둑질은 처음 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해서입니다. 다른 아이들의 지우개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처음 훔친 것은 지우개 하나였습니다. 그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서로 협동을 해서 과자도 훔치고 과일 서리도 많이 하였습니다. 점점 안 걸리면 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아파할지는 조금씩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사회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직 그 물이 많이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념은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홍익인간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의 법과 종교도 이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황금률’도 그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것을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경쟁주의 교육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면, 이젠 함께 공존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BS 어떤 다큐에서 보니,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나눠 타라고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각자가 한 바퀴 돌면 다른 아이들에게 그것을 양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먼저 차지한 아이가 지칠 때까지 타며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즐겼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그 세상에서 재밌게 살려면 그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이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마음도 아플 것이라는 ‘황금률’입니다. 지금 우리 교육도 경쟁이 조금씩은 줄어드는 추세이나, 아직은 경쟁주의가 지배적입니다.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크게 나아질 수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대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을 배우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안 이루어진다면, 그 이후의 세상을 보는 것이 지금보다 더 두렵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황금률’을 체득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처음 카메라를 가진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필름을 사용하였습니다. 필름 중에 유명한 것은 코닥 필름이었습니다. 필름이 다 감기면 사진기에서 꺼내 사진관에 갖다 주었습니다. 소풍가서 찍기도 했고, 성당 예술제에서 찍기도 했고, 여름 신앙학교에서 찍기도 했습니다. 통이 넓은 나팔바지를 입고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 뒤로 1998년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구했습니다. 메모리카드가 있었고, 그것을 컴퓨터에 연결해서 저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파일을 보내면 인화된 사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발명한 회사는 필름회사인 코닥이었다고 합니다. 코닥이 인화는 필름으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렸다면 지금도 유명한 회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코닥은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이 발명한 디지털 카메라의 힘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눈이 먼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빛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귀가 먼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본인이 눈이 멀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본인이 듣지 못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바꾸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고정관념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환자들의 고통과 의료진의 헌신과 희생입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경제상황입니다. 경제는 생산, 유통, 소비가 순환되어야 합니다. 이동이 제한되고, 국경이 폐쇄되는 상황에서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로 인해 소비가 급감하였습니다. 특히 여행, 식당, 항공, 공연과 같은 분야는 소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감염병의 확산 우려 때문입니다. 소비와 유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생산 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일거리는 줄어들고, 실업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정부는 새로운 길은 가고 있습니다. 전 국민에게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3개월 안에 소비하는 조건이며, 재래시장과 소상공인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역화폐와 선불카드로 지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소비가 촉진되면 유통이 활발해지고, 유통이 활발해지면 생산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조조정을 늦출 수 있고, 실업자도 줄일 수 있고, 경제상황도 개선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이기에 전 국민에게 소득지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생각과 고정관념을 바꾸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역사를 보존하고,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규정입니다. 이런 율법과 예언서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처럼 이웃과 벽을 쌓기도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를 단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상과 자유를 침해하기도 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대해서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지하에서 물을 퍼 올리는 펌프가 있습니다. 펌프에는 언제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습니다. 지하의 물을 얻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부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엄청난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규정과 단절이 아닙니다. 소통과 관계의 개선입니다. 내가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넓은 문을 좋아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바벨탑에서 풍요로운 세상을 만날 것 같았습니다. 그 넓은 문을 통해서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지구온난화, 기상이변, 새로운 전염병이 들어왔습니다. 공전의 그늘에는 난민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희생, 나눔, 양보의 문입니다. 연대와 협력의 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서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푸른 별 지구를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른 길이기에

많은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바른 길이지만

걷는 이가 별로 없는

길이 있다

 

그른 길이기에

걷는 이가 별로 없는

길이 있다

 

그른 길이지만

많은 이들이 걷는

길이 있다

 

많은 이들이 걷는다고

바른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걷는 이가 별로 없다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걷는 이가 많든 적든

바른 길은 바른 길이요

그른 길은 그른 길이다

 

홀로라도

바른 길을 가야하고

모두가 가더라도

그른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나는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귀금속 같은 ‘황금율’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비천한 개, 영물이야, 한 가족이 된 애완견, 시대에 따라 개의 취급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개에 대한 의인화의 표현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표현이 조심스럽다. 돼지에 대한 의인화의 표현도 그 적용이 달라지고 있다. 삽겹살을 먹은 뒤로 달라졌다. 오히려 사람이 인면수심의 인간 때문에 하급동물로 취급되기도 한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7,6) 오늘날 이런 동물에 대한 의인화의 표현이 적절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묻고싶다.

 

거룩한 것이 무얼까? 본질의 순수함이랄까? 금에서 보면 순금에 해당된다. 불순물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진주는 무얼까? 아픔을 통해 조개 속에서 만들어져 귀하게 내재된 보석이다. 진주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것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지려면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복음말씀은 거룩한 것과 진주에 해당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기에 해당된다. 거룩한 것은 아무에게나 보여지는 것이 아니고 그 진가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도량이랄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준들, 진주를 돼지목에 걸어준들 의인화에 해당되는 사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들보가 담긴 눈인데 그것을 알아 보겠는가? 거룩한 것과 진주를 헤아릴 영안을 잘 지니고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귀함을 보이는 귀함으로 만들려면 그만큼 내가 정화된 그 눈으로 남을 깊숙히 바라볼 때, 남을 제대로 볼 수있다. 비난이 앞서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들려 주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황금율’을 살 정도에 이르면 ‘좁은 문’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과 달리 제자들이 영안의 경지 수준이 되길 바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사제관 정원에 매일 물을 주면서 사용하는 물분사기가 있습니다, 호스관 끝에 물분사기를 달고 노즐의 구멍을 아주 작게 죄면 물이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노즐의 구멍을 열게 되면 물은 멀리가지 못하고 바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을 분사해 줄 수 있는 압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가는 길 역시도 분사기 노즐의 구멍을 좁게 만들어서 그 압력을 이용해서 물을 멀리 분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성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어쩌면 그렇게 물을 멀리 보내기 위해서 내면에 충분한 압력을 갖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곧 늘 기도하며 말씀과 성사를 충실히 거행하고 함께하시는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내면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을 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황금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2020. 6. 23. 화)(마태 7,6.12-14)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에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성사, 또는 성사를 통해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개들’과 ‘돼지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은총에 감사드리기는 커녕 성사와 은총을 모독하고, 교회를 박해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저에게도 그런 권능을 주시어 제가 안수하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사도8,18-19).”

그때 베드로 사도는 그에게 “그대가 하느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라고 말했습니다(사도 8,20).

<만일에 성사에 관한 일을(은총을) 돈을 받고 파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세례를 받은 신앙인”으로, 개들에게 준다는 말을 세례받기 전의 생활로(미신을 믿는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베드 2,20-21).”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거룩해진 사람입니다. 만일에 세례받기 전의 생활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이 받은 ‘거룩함’을 개들에게 주는 것과 같고, 거룩해진 자신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황금률’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말씀이고, 계명들과 율법들의 기본정신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입니다. (무엇이든지 ‘아무거나’ 받기를 희망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아무거나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주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순서’에 초점을 맞추어서,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그대로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받기를 바란다면, 너희가 먼저 그대로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그 은총을 누리면서, 그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이고, 자신이 이미 받은 그 은총을 남에게 다시 나누어 주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받아서 누리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남에게 다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지금처럼 앞으로도 계속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바라는 생활이고, 그것을 바란다면 이웃에게 먼저 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마태 6,1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의 뜻은, “넓든지 좁든지 간에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로는 가지 말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로만 가라.” 입니다.

신앙생활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만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3-5).”

여기서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라는 말은,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또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이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세속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세속의 일’은 세속의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방식으로만 해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일’을 세속의 방식으로 한다면, 그 일은 ‘세속의 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좁은 문’에 관한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가 혼난 일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베드로 사도가 어떤 사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말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신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것을 말렸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동이 사탄의 행동과 같다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막는 것은 사탄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뜻하고, ‘사람의 일’은 몸의 편안함만 찾는 태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걸어가고 있는 길의 끝에 죽음과 멸망이 있다면, 길이 아무리 넓고 편해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길의 끝에 구원과 생명이 있다면, 길이 아무리 좁고 험해도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신앙인이 걸어가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고난의 가시밭길인 것은 아니고, 가다보면 편안한 구간도 만나고 힘든 구간도 만나는데, 힘든 구간은 피하고 편안한 구간만 찾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어쩌면 지금 내가 누군가와 긴장과 갈등 관계에 있다면, 그만큼 그와 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산다면, 그 누가 내 기대를 채워주면 다행이겠지만,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게 되면 미안한 마음과 거듭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하는 이는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쌓여 가겠지요. 그에 반하여 아예, 누군가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아무런 감흥이나 감정의 교류조차 없이 살아가는 안타까운 관계도 있겠죠. 그런가 하면, 같이 살면서도 아무런 기대나 요구도 없이 무시나 포기로 일관한다면 삭막한 삶을 살게 되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기대하면서 살아가기보다 기여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늘 충분히 지켜주고 채워주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상대에게 불평과 부담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며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까지 연결 된 한 가족정신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율법과 예언서(구약성경) 계시를 예수님이 풀어(신약성경) 주셨습니다.

진주래도 개돼지 동물들에겐 의미 없듯 인생진주는 하늘행복뿐입니다.

거룩한 것 얻으려면 좁은 길과 문 들고 나를 대하듯 남에게 하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란 겁니다.

나의 존엄성을 위하려면 남의 존엄성도 위해줘야 모두가 함께 섭니다.

내 의미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줄 때 있듯 남들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인간생명 근본 고리는 하느님 창조주까지 연결 된 한 가족정신입니다.

내 목숨뿌리는 물질우연연합 아니고 하늘창조 힘과 연결 믿고 삽시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⓷ 황금율의 최대한과 최소한

     이기우 신부님

오늘 독서의 말씀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서 두 쪽으로 갈라졌어도 왜 열 지파를 거느리고 떨어져 나간 북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고 겨우 두 지파만 남은 남 유다는 나중에 가서야 멸망했는지 그 차이를 보여줍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우상숭배에 물들어 나라의 공동선이 심히 무너져있었는데 비해서 남 유다 왕국은 적어도 히즈키야가 임금으로 있는 동안까지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선포 활동을 하시던 때는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식민통치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로마의 억압과 착취에다가 이 권세에 기댄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동족 엘리트들까지도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백성의 삶이 고통을 당하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선의 가치 대신에 현세적 권세의 힘을 우상처럼 숭배하던 그들 세 부류의 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셨습니다. 그래서 개들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하고, 돼지들에게는 진주를 던져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서, 조상들을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받은 신앙과 전통을 보전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세력들의 행태를 본받다가 함부로 오염시키지 말라는 경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외부의 악에 대해서 신앙의 계시를 보전해야 한다는 당부라면, 황금율의 말씀은 제자들을 비롯해서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군중이 내부에서 지켜야 할 공동선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금처럼 귀하다는 이 가르침의 최대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우리가 먼저 남에게 해 주라는 것이고, 그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를 끝까지 우리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기를 지향하며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에서 평화의 샘이 되기를 지향하는 우리 대한민국 사회는 사회 공동선에 대한 경쟁으로 주변 국가들에 대해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선도적 역할도 필요하지만 사회 여론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이 여론 형성에 앞장서야 한다는 말씀을 어제 드렸습니다만, 그 국가들과의 협력과 교류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중국, 일본과 미국 등 일차적인 주변 관련국가들에 대해서 우리가 받고자 하는 인도적이고 호혜적이며 평화적인 대접을 먼저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대북관계에 있어서는 최근에 남북 정상이 합의한 대로 미국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말고 교류와 협력을 더 늦기 전에 과감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중, 대일 및 대미관계에 이써서 남북공조를 긴밀하게 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이 봉쇄하고자 하는 중국과의 관계에도 우리는 미국을 추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최대 교역국이 중국인데 공연히 대중국 봉쇄라인에 휩쓸려들다가 싸드 사태에서처럼 보복당할 이유가 없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전 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 중국의 처지를 감안해서 한중협력을 더욱 성실하게 해 나가면 중국은 한국을 고마운 나라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부당하게 수출을 규제하려 들었던 일본에 대해서도, 그들의 몰역사적이고 부당한 행태에 대해서는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지언정 우리가 그들의 입국을 제한하거나 국내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대미관계에 있어서도 G7 같은 선진국 다자기구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방역 선진국으로 명성을 얻은 한국을 불러들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자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미국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적극적 역할을 마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국력의 상승세를 활용하여 남북교류와 통일에 유리한 국제여론을 조성하는 데에로 활용하면 됩니다.

 

한편 이 나라들이 우리 사회에 가했던 불의하고 부당한 역사에 대해서는 잊지 말아야 하는 한편 우리는 그들 나라에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6·25 전쟁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 군사적 도발을 일으킨 책임이 있고 핵무장까지 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만일 군사적으로 도발해 오면 확전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철저하게 응징해야 합니다.

그 다음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정치세력을 분할하여 다룬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해 온 중국은 현재도 북한 및 남한과 다 같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 남북간 협력을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남북한 당사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함부로 남북을 이간시키지 못하도록 남북공조 체제를 지렛대로 삼고 한중 교역 상의 이익을 받침점으로 삼아서 미리미리 조정해 놓아야 합니다.

식민통치를 자행했고 전쟁을 일으켰던 전범국가 일본은 패전 책임으로 자신이 분단되는 대신에 한반도를 분단시킴으로써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북 대결을 부추기고 있지만 한일간 국력 격차는 점차 역전되어 가고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은 점차적으로 퇴조할 것입니다. 대일문제에 관해서는 남북한이 공조한다는 전략을 지렛대로 삼고 남북한의 협력을 지지하는 국제여론을 받침점으로 삼아서 일본이 함부로 남북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시켜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 간 화해보다는 국내 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패권을 유지하는 데 미국은 더 관심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남북간의 민족 화해와 일치 노력의 결과가 반미정서로 흐르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한 안전판으로서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해 줌으로써 미국의 지역 패권 유지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좁아 보이지만 사실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넓은 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요약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예수님께서 성경에 담긴 무수한 가르침들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단언하시지요.

훗날 예수님은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실 것입니다(마태 22,34-40 참조).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까지 하시지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구체화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타인이 자기를 해치거나 증오하길 바라지 않지요. 본성적으로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것은 선의와 호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자기가 받고 싶은 마음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 또 자기가 받고 싶은 대접을 타인에게 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를 때, 남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를 때는, 내가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역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그런데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에 사랑도 서툴고 미숙하지요. 하느라고 했지만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픈 시행착오를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사랑도 자라고 우리도 자라니 실패한 건 아니지만, 과정이 결코 녹록치는 않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러셨듯 사랑은 번번히 배척당하고 공격받고 모욕당합니다. 민족과 인류의 선의를 위해 온 몸을 던져도 돌아오는 건 조롱과 버림받음, 죽음일 가능성이 더 크지요. 그래도 이미 사랑의 좁은 문으로 이어진 비좁은 길에 들어선 이상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길이 더 위험하고 거칠고 외로워질수록 따름의 확신은 더욱 선명해지니까요.

우리 모두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비좁고 험난한 길을 수퍼맨처럼 넉근히 극복하면서 씩씩하게 걷지는 못하지만, 엎치락뒤치락 우왕좌왕 하면서도 따름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갑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은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같은 의미를 원색적인 표현의 다른 단어로 반복하시니 어조가 더 강렬해집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사랑과 진실과 믿음 등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아닐까 합니다. 때론 성소나 소명이기도 하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주님께 지키고픈 신의이기도 하겠지요.

그렇다면 "개들"과 "돼지들"은 그런 가치들의 소중함을 모를 뿐만 아니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나아가 제 욕망을 위해 하느님의 귀한 보물을 파괴하고 말살하려는 악의 힘을 상징할 겁니다. 슬프게도 그런 힘은 제 민낯을 드러내지 않고 사람과 사건을 통해 교묘히 존재하지요. 그래서 우리의 순진하고 어설픈 사랑은 때때로 상처 입고 잠시 길을 잃기도 합니다.

 

제1독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유다마저도 함락시키려 침략한 위기의 순간을 들려줍니다.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2열왕 19,14).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조롱과 협박 가득한 편지를 유다 임금은 주님께 보여 드립니다. 가련한 처지에 몰렸을 때 주님 발 앞에 온 몸을 던지는 것은 믿음을 지닌 가난한 이의 최선일 겁니다. 사실 산헤립은 유다를 모욕하기 전에 하느님을 모욕한 것이지요. 이제 이 일은 나라 대 나라, 인간 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무도한 산헤립의 일이 되어 버립니다.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2열왕 19,20).

위기의 순간에 비참하고 가난한 처지에서 올린 진솔한 탄식와 애원을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존재이자 진주인 당신 백성을 개들과 돼지들에게 던져 주지 않으시고, 손수 적들을 쳐서 그들을 구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깨진 그릇처럼 쓸모 잃은 죄인이고 부족하다 해도 절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귀한 진주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바치고라도 지켜내고 싶은 보물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님도 그런 보물이십니다. 그분 말씀과 가르침, 그분을 따르는 삶이 곧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러니 한껏 사랑을 실천하고 희생과 인내로 좁은 문을 통과해놓고 하릴없이 일순간 개, 돼지들에게 그 귀한 보물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도 온 힘을 다해 보물을 지켜내야 합니다.

주님의 귀한 진주요 거룩한 이신 벗님! 우리가 저마다 주님께 허락받아 간직해온 귀한 보물을 잘 간수하고 사랑으로 성장시키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 -생명의 곡선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10일전, “신부님, 저 오늘 휴가 떠납니다!” 인사를 마치고 꽃처럼 환한 모습으로 휴가를 떠났던 수사님이 어김없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어제 귀원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모두가 인생 휴가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 휴가가 끝나고 죽음이 임박했어도, 돌아갈 집이, 귀가할 집이 마땅치 않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는지요.

 

어제 참 좋은 분이 4월 강론집을 교정하여 제본해다 줬습니다. 무려 수십년동안 매월 작업해다주는 한결같이 성실한 분이십니다. 강론집 ‘구원의 여정’이란 제목도, 밝고 환한 표지의 그림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무의미한 여정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입니다. 인생 휴가 후회없이 잘 끝내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는 구원의 여정, 귀가 여정입니다.

 

또 어제 참 좋은 시를 발견하고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좋은 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그대로 구원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이 시 덕분에 복음을 중심으로 한 강론의 뼈대가 떠올랐습니다. 주저없이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분별의 지혜와 사랑, 기도와 시와 유머-’로 정했습니다. ‘구부러진 길(이준관)’이란 시입니다.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볕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사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따뜻한 애정이 가득 담긴 고향집 같은 시입니다. 말그대로 힘들고 험한 좁은 문들의 여정을 잘 통과한 분들의 모습이 바로 구부러진 길 같은 모습입니다. 제 어렸을 때만 해도 온통 구부러진 곡선의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산도 곡선이고 초가 지붕도 곡선이고 길도 곡선이고 내천도 곡선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도 말도 대부분 부드럽고 인정 많은 곡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곡선은 사라지고 직선들 가득한 참 단조롭고 삭막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연은 곡선을 만들었지만 사람은 직선을 만들었습니다. 좀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생명의 길이 곡선길입니다. 똑바로 난 직선길보다 굽이굽이 오솔길은 얼마나 깊고 아늑한 지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좁은 문들을 잘 통과했을 때 바로 아버지의 집에 닿는 구부러진 곡선길, 구원의 인생길입니다.

 

좁은 문들의 구부러진 곡선길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과연 좁은 문들 잘 통과해온 굽이굽이 구부러진 구원의 곡선길인지 때로 멈춰 숨을 고르며 내 삶의 뒤안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굳이 좁은 문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내 몸담고 있는 삶의 자리가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좁은 문은 없습니다. 사람 숫자 만큼의 좁은 문입니다. 각자 통과해 나가야 할 고유의 좁은 문들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도반들의 위로와 격려, 도움은 필수입니다.

 

좁은 문 하나를 통과하면 또 하나의 좁은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이 흡사 인생 장애물경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흡사 날마다 첩첩산중의 산을 넘는 느낌입니다. 며칠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하루하루가 넘어야 할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삶이다

하루하루가 통과해 나가야할 좁은 문이다

하루하루가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最前方의 삶이다

어찌하랴 주님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니”

 

누구나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좁은 문들의 여정입니다. 피하면 더 작은 좁은 문이 기다립니다. 우리 나라의 처지를 봐도 얼마나 좁은 문들의 연속인지요.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작금의 상황은 말그대로 인내와 지혜를 다해 통과해가야할 좁은 문입니다.

 

어떻게 좁은 문들을 지혜롭게 잘 통과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바로 분별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

 

다 이해심 많은 좋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배은망덕의 사람도 있고, 적반하장의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선의를 곡해하여 듣는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며 고도의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좋은 것이라 하여 아무에게나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려 다칠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조심성스럽게 분별의 지혜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차별이 아니라 분별입니다. 차별은 죄이지만 분별은 지혜입니다. 이런 분별의 지혜는 겸손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래야 좁은 문들의 통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황금률입니다. 황금률만 잘 지켜도 좁은 문들이 통과에 역시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황금률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무나 평범자명한 진리이지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이기에 너무 잘 잊고 지내는 진리입니다. 참으로 이대로만 하면 좁은 문들의 통과는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말그대로 분별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예수님보다 10살 더 많았던 랍비 힐렐의 일화도 재미있습니다.

 

-한 냉소자가 그에게 한발로 서있는 동안 온율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했습니다. 힐렐의 즉각적인 대답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거이 율법 전부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얼마나 단순명쾌한 답변인지요. 예수님과는 똑같은 황금률의 진리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이자 사랑입니다. 이대로만 산다면 좁은 문들의 통과는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다음에 기도 특히 성서의 시편과 시, 그리고 유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을 보세요. 아시리아의 산헤립의 침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는 말그대로 절망적 좁은 문의 상황입니다. 바로 여기서 히즈키야는 간절한 기도로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마침내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려주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일과표에 따라 평생, 끊임없이, 매일, 한결같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는 물론 매일미사가 좁은 문들의 통과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아니 믿는 이들 역시 이런 규칙적 항구한 수행은 좁은 문들의 통과를 위해 꼭 권하고 싶습니다. 하여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분따라, 감정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일과표의 궤도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시와 유머도 큰 도움이 됩니다. 시중의 시는 성서의 시편이지만 좋은 시나 노래도 좁은 문들의 통과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 유머러스한 제 자작시를 들어 보십시오. 무와 배추가 한창 왕성하게 자라나는 채소밭을 보며 쓴 시입니다. 좁은 문들 통과의 고달픈 삶중에도 미소 짓게 하는 유머같은 시입니다.

 

“웬 아침부터 육체미 대회가

잘 가꿔진 무밭 나란히 도열한 무들

옆으로 늘어진 무잎들 다 벗어버리고

저마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무 사나이들

근육질 알통의 팔뚝같기도 하고 쭉벋은 종아리같기도 하다

옆에서 넋놓고 바라보는 배추 처자들

얼마동안은 계속될 육체미대회 아침 산책때 마다 봐야겠다”-2007년

 

예수님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생명의 문, 생명의 길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실천해갈 때 예수님을 닮아 좁은 문들의 통과도 수월해질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물론 도반들과 함께 하는 굽이굽이 좁은 문들의 통과여정의 구원의 곡선길입니다. 밖으로야 좁은 문들의 연속같지만 내적으로는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미 롭고 향기로운 생명의 곡선길이 될 것입니다. 좁은 문들의 통과 여정을 통해 날로 둥글게 익어 원숙해지는 둥근 삶, 둥근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좁은 문들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그리스도인 완성의 원형’에서 (PG 46,283-286)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드러내고 구별 짓는 것은 행동과 말과 생각 -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생각이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마음속에 생기고 새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 밝히는 말이 나오며, 생각과 말 다음으로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도중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게 될 때, 우리 말과 행동과 생각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설명해 주는 그 칭호들의 거룩한 규범에 맞도록 해야 하고 이들의 고귀한 함축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지니는 영광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명확한 판단을 여러 방법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걱정과 불안이 담긴 행동과 생각과 말은 결코 그리스도께 상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혼의 진주를 걱정, 불안이라는 진흙과 뒤섞어 그 귀한 보석의 광채를 손상시켜 버리는 악마의 날인과 자취를 지니고 있는 것들입니다.

 

한편 온갖 애착심에서 벗어난 순결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원천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정감을 순수하고 깨끗한 샘에서처럼 솟아나게 하는 평화의 주이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개울에 흐르는 물과 항아리에 담겨 있는 맑은 물이 샘 속에 있는 물과 거의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생각과 정감은 그 원천인 그리스도와 유사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수성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순수성은 한가지로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수성은 샘에서 솟아 나와 샘에 고여 있는 그 순수성이고 우리의 순수성은 샘에서 솟아 나와 우리에게까지 다다른 물의 순수성입니다. 그리고 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이 우리에게까지 이를 때 그분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담아다 줍니다. 또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에게서 솟아 나오는 생각과 정감은 우리의 실제 생활을 꾸며 주어 거룩함과 질서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안전성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포함하는 모든 칭호를 우리 내적 생활과 우리 말과 행동이라는 외적 생활에 완전히 참여시키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있다고 봅니다.

 

 

 

어리석고 지혜로운 나눔 <마태 7, 6. 12-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주님은 황금률을 말씀하셨지만, 복음 전에 어리석은 나눔을 하지 말라고 하시며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도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꼭 필요한 것을 지혜롭게 청하고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기업주가 돈을 함부로 사용하면 부정이 되고 쌍방이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돈을 권력자에게 주는 것은 자기 편리함이나 정의롭지 않게 이익을 보려는 것입니다. 부정적 요소를 눈감아 달라고 하거나 감추려고 어리석게 돈을 쓰다가 법을 어기고 망하게 되거나 죽는 결과를 만듭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준 것과 같이 되고, 돈이 필요한 사람이 쉽게 돈을 벌려고 거짓말이나 사기 쳐서 버는 돈은 정당한 돈이 아닙니다. 받은 것도 정당하게 사용하고, 교회의 일은 진실과 사랑이 더 있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의 하소연, “저는 효자 아들을 둔 지 알고 살다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고 하소연을 하기에 들어보니 딱한 사정입니다. 대학까지 공부할 때까지 착하고 효도하는 아들이었는데 결혼 후 가끔 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데, 돈이 얼마가 필요하니 해주세요.” 하여 형편 닿는 대로 해주다가 이제 남은 재산은 집 한 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것마저 해달라고 해서 팔아서 조금 남기고 다 줬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어머니 책임진다고 하기에 전 재산 다 주고 기다리는데, 어머니를 냉대하고 돌보지 않아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래도 남의 일을 할 수 있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며, 돼지는 먹을 것만 찾지 진주인 어머니는 모릅니다.

 

본당 신부로 사목하면서 본당 운영상 필요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본당 일 년에 2억도 되지 않는 예산으로 사목하던 본당에서 성당 앞 집을 팔려고 내놓아서 사면 성당이 반듯하여 운동장도 나오고 다른 건물도 지을 수 있어 사려고 하니 1억이란 돈이 없었습니다. 걱정하던 중 어떤 분이 은행에서 대출받아 땅을 사고 2년 안에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모금을 하는데 모금이 어려워 궁리하던 중 본당 예산을 아끼는 수밖에 없어 2년 동안 신자들 모금액 6천만 원과 매년 2천만 원을 절약하여 빚을 다 갚고 운동장, 행사장으로 잘 사용하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신자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 불편한 것 참고 견디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목은 자기 편리한 대로 운영하지 말고 진실과 사랑으로 본당 사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무리가 없고 모두가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 지혜도 갖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받은 것을 잘 쓰는 것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함승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좋으신 분이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면서 왜 '구원의 문'을 넓게 만드시지 않고 좁게 만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깨달으려면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편집순서상 그 맥락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병행구절인 루카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이지요. 그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를 물었는데, 주님께서는 그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문제까지 '숫자놀음'으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대신 구원이란 좁지만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좁은 문'의 의미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문이 '좁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를 꺾으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니죠! 다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오만과 온갖 걱정들을 작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곧 우리가 우리는 죄인이며 그분의 용서가 필요함을 깨달아, 그분께 겸손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좁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오만은 우리를 비대하게 만드니까요."

 

'문'은 보통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정해놓지 않습니다. 차례로 들어갈지언정 문이 닫히지 않는 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문은 정해진 크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그 문의 크기에 나를 맞추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그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만듭니다. 자기들 기준으로, 자기들 욕심으로 어떤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정해놓고 서로 싸우도록 경쟁을 시킵니다. 그리고는 그 모습을 구경거리로 삼으며 돈을 벌기도 하지요. 그런 모습이 싫어서 저는 개인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열정을, 희망을, 꿈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며 일방적으로 제단하려는 모습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문을 통과한 소수만이 모든 부와 명예를 독식하고,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또 다시 상처를 입으며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이 마음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단편적이고 유한한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지도 않으십니다. 그 대신 우리 모두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문이 '좁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나의 욕심이 커져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이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나의 뜻이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이 '좁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과 고집을 비워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은 결국 내 영혼에 붙은 불순물들을 털어내고 하느님과 더 깊은 일치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유럽에 성지순례 갔을 때, 여러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독특한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은 엄청나게 큰데 그에 비해 성전 문이 아주 작았습니다. 한 줄로 서서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성당 문은 왜 이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알고 보니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 성당은 큰 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군대가 쳐들어와 도시를 점령했을 때, 군인들이 말을 타고 성당 안에 들어왔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슬람 군인들이 물러가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했습니다. “다시는 거룩한 곳에 사람이 말을 타고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성전 문을 작게 만들자!” 그래서 허리를 굽혀 가장 겸손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좁은 문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성전 문을 보면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오직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는 일뿐입니다.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에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다른 행동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하고 그 앞에 허리를 굽히는 사람만이 세속의 힘에 좌우되지 않고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를 살리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의

여정은 작아지는

여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주님과 하나되는

여정입니다.

 

시련과 역경의

좁은 문이 있기에

간절히 하느님을

찾게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을 향한

결단의 문이며

깨어있음의

문(門)입니다.

 

좁아지면

낮아지고

작아지면

자유롭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

귀결되는

은총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욕심이

작아지면 질수록

모든 관계안에서

하느님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을 만나는

참된

회개의 문입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좁은 문으로

오늘도 우리를

초대합니다.

 

모두를 살리는

좁은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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