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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자료실

[스크랩] 고백성사에 대한 마음가짐

작성자본당신부|작성시간13.11.25|조회수255 목록 댓글 1

 

 

 

마음에 평화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적이 있나요? 바보 같은 질문이죠?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느끼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느낌이나 기분 같은 감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관계도 그렇습니다. 감정은 들쑥날쑥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위치를 넣고 접속하면 자동으로 평화를 얻게 되는 감정 물류 센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는데도 왠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도록 노력했는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굳건히 유지하려고 애섰는가? 십자가를 지지 않은 채 온갖 영적 이로움(내면의 평화 등)을 얻으려 하지는 않았는가?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생활하다가 괴로울 때나 잠시평화를 맛보고 싶을 때처럼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지는 않았는가?’

 

여러분에게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는 없습니까?

 

관계가 끊어지면 평화도 사라집니다.
함께 있는 것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죄 중에 있을 때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됩니다.

 

 

인간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

이를 인간관계에 놓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데이트를 합니다. 처음에는 함께 있는 것이 무척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손을 잡고 걷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던 그 사람이 당신의 마음에 아픈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것도 여러번. 그런데 사과도 하지 않고 그런 행동을 고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전처럼 함께 걷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전과 같은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그럴 수가 없지요. 관계에 손상이 온 것입니다. 이제 함께 있어도 전 같지 않습니다. 평화는 마술이 아닙니다. 평화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평화도 사라집니다. 함께 있어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느님의 현존과의 관계도 이런 것입니다. 그분 곁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너무 가까이 오시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비록 이것이 문제라고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가 곁에 잇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함부로 대하거나 하느님께서 정하신 규범을 무시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에 평화를 느낄 수 없습니다. 관계는 그렇게 계속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올바르게 되돌릴 수 있을까요? 앞의 예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상처를 준 사람이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약속해.” 그러면 당신은 지난날을 잊고 신뢰를 다시 찾아 다시 한 번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언제라도. 그렇게 걸으면서 우리는 십자가도 져야 합니다. 죄를 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의 일부이며 그분과의 관계의 일부입니다.

 

 

대죄와 소죄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우정에 금이 가게 하는 일은 그 정도와 형태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의 가족을 죽이는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전자보다 우정에 대한 훨씬 더 큰 파괴 행위일 겁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작은 죄와 더 심각한 죄가 있습니다. 작은 죄는 소죄로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욕설이나 가벼운 거짓말 등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조금씩 무너뜨리지만 그 자체로 단절을 불러오지 않습니다.

 

한편 강도, 살인, 어떤 사람의 삶이나 명예를 파괴하거나 더럽히는 행위, 혼외 정사 등은 하느님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들을 대죄라고 합니다. 대죄가 어떤 죄인지 알고 자유 의지로 그 죄를 범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단절되는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모든 대죄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소죄도 역시 없애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려고 할 때 그이의 가족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크고 작은 관심과 배려로 끊임없이 그에게 잘해 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엄마를 죽게 했다면 우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대죄와 소죄 모두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때로는 어렵기도 합니다. 죄가 될 행위라면 결심을 하고 그만두어야 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 모두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맛서고, 회개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친구의 가족 되는 사람을 죽였다면 아무리 진심으로 사과하고 빌어도 아마 우정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 아무리 심한 짓을 해도 우리가 그분께 “용서해 주세요. 없었던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시 받아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가서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께 가는 것’은 좀 더 힘들 수 있습니다. 친구라면 만나서 사과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방법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고해성사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느 곳(고해소)에 가서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임명을 받은 누군가(고해사제)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말해줍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줍니다. 우리가 소죄를 범했다면 고해성사는 손상된 곳을 고쳐주고, 대죄를 범했다면 고해성사는 단절된 관계를 다시 이어 줍니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려고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시스템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요한 20,23)

 

다른 말로 하자면 사제들은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한을 가졌고, 고해성사에서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왜 고해성사가 필요한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고해성사는 물리적 행위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갈 장소를 주셔서 우리는 죄를 그곳에 ‘두고’ 나올 수 있고 그곳에서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인 우리가 물리적 수준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서 용서를 빌고 용서한다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지 아실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냥 홀로 어둠 속에서 “하느님, 용서해주세요.”라고 속삭이면 훨씬 쉬울 텐데.

 

그러나 고해성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규칙적으로 자주 고해소로 가십시오. 신부님이 충격을 받으실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부님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신부님은 고해소에서 들은 것을 발설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 신부님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행동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전하는 사절’이십니다. 그러면 관계는 다시 돌아옵니다. 평화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과 하느님 사이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 메리 베스 보나치


 

 

질문) 제가 특별히 수치스럽게 여기는 죄를 고백했을 때 고해 신부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제가 저지른 행동을 나쁘게 생각하시고 저를 달리 보시지은 않을까요?

 

답변) 사제는 고해자의 죄를 개인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지 사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죄인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사제가 하는 일입니다. 고해 사제가 가장 큰 만족감을 갖는 소임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일원인 또 한 사람을 다시 하느님께 데려오는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는 사제의 신성한 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윤리 신학을 배우면서 신학생들은 사람들이 범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합니다. 고해자의 어떤 고백 내용에도 사제는 놀라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돌아오기 위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고해자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습니다.

 

* 출처 : 신부님, 어떻게 할까요? (고해성사 편), 성바오로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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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윤지호(가스팔) | 작성시간 13.11.27 저를 위한 게시물인가요..?ㅋㅋㅋ헤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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