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의 의무론적 직관주의
1. 로스의 기본입장
윌리엄 데이빗 로스(William David Ross, 1877~1940)의 의무론적 직관주의는 칸트와 밀 사이의 매개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로스는 자신의 윤리적 입장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현대의 철학자는 프리차드(H.A. Prichard)와 무어(G.E. Moore)라고 언명한 바 있다. 그는 의무와 옳음에 대해서는 프리차드의 견해에, 그리고 선의 정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무어에 의존하고 있다.
로스는 철저한 법칙론자라는 점에 있어서 도덕철학의 근본적 오류는 의무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함에 있다고 주장한 프리차드와 상통한다. 그러나 프리차드가 의무란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달린 것이라고 보는 반면 로스는 의무가 사실 자체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로스는 선의 궁극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그는 무어와 가까운 일면을 가졌다. 하지만 로스는 법칙주의 윤리설을 취하는 점에 있어서 뚜렷한 목적론을 주장한 무어와 대조적인 위치에 섰다. 로스의 의무론은 척 보아서 의무인 것(prima facie duty)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가능한 최대의 선을 산출하라는 이상적 공리주의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세우는 것이다.
전체로 보아서 로스와 학설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윤리학자는 브로드(C.D. Broad)이다. 그에게 있어 옳은 행위란 각각의 도덕적 요구에 대한 상반된 긴박성에 비중 둔 뒤에 행위자에 대한 여러 가지 도덕적 요구들을 서로 가장 좋게 절충시키는 행위이다. 긴급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정도 분석에 따라 행위자에게 구성적 의무(component obligation)를 부여하는 각 그룹을 형성하고, 옳음을 이끄는 특성과 그름으로 이끄는 특성 모두의 요구에 대해 신중하게 평가하는 것은 결과적 의무(resultant obligation)를 산출하는데 그것은 여러 구성적 의무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절충을 가능하게 한다.
2. 옳음(right)
(1) 옳음(right)의 정의 불가능
로스는 ‘옳음’(right)의 뜻을 밝히는 것을 자신의 윤리학적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종래의 ‘옳음’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부정한다. 먼저 ‘옳다’와 ‘착하다’를 같은 뜻으로 보는 생각이다. 착한 행위는 내면적으로 좋은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옳은 행위는 그 외면적 적합성이 문제이므로 이 둘 서로 다르다. 둘째, 무어와 같이 ‘옳음’을 ‘가능한 최대량의 선을 산출하는 결과’로 보는 관점이다. 로스는 가령 우리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할 때 결코 약속이행에서 오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듯이 이 둘이 사실상 일치할지는 모르나 그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확실히 다르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뒤르켐과 같이 옳은 행위를 사회, 국가 등의 요구에 배치됨 없는 행위로 보는 사회학적 견해이다. 이 견해는 시비의 척도가 시대와 사회를 따라 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로스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도덕원리를 믿는다.
도덕적 옳음은 본성에 관한 한 그것은 정의 불가능하다. 도덕적 옳음은 불가능한 특성이고, 비록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삶보다 넓은 관계라 할지라도 적합성 같은 본질적 차이점은 단지 그것이 붉다고 주장해서 다른 색깔과 구별되는 색깔 빨강처럼 도덕적으로 옳다는 말이나 그 동의어를 반복해서만 언명될 수 있다.
로스에 따르면 ‘옳음’은 고유하고 객관적인 특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다른 말로 옮길 수 없는 궁극적인 관념이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방법은 분석적 방법이 아닌 직각적인 방법으로 알 수 있다. 무어는 인간의 모든 의무는 가능한 최대량의 선을 산출하라는 하나의 기본원리로 귀착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로스는 모든 의무가 하나의 원리에로 귀착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우리가 이행해야 할 의무는 여러 가지이며, 그 여러 가지 의무는 하나의 원리로부터 연역된 것이 아니라 각각 그 자체 안에 ‘옳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스가 목적론적 사고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도 쾌락, 지식, 건강 등과 같은 본래적 선의 증진을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을 의무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무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점에서 무어와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다. 무어가 ‘좋음’에 관해서 지각적 직각론(perceptual intuitionism)을 주장했다면 로스는 ‘옳음’에 관해서 그것을 주장한 것이다.
(2) 직견적 의무(prima facie duty)
‘옳음’ 또는 ‘의무’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두 가지 이상의 의무가 서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로스는 보다 큰 의무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의무의 대소경중을 무엇으로 결정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점이 발생한다. 약속을 지킴, 은혜에 감사함, 빚을 갚음 등은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볼 때 모두 옳은 행위 즉 우리가 해야 할 행위이다. 그러나 사정에 따라서는 하나의 옳은 행위를 수행하자면 다른 옳은 행위는 보류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것만을 떼어서 생각할 때 옳은 행위는 절대로 해야 할 행위는 아니며 오직 의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행위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그것만을 떼어 볼 때 옳은 행위, 즉 보다 큰 의무 앞에서는 보류를 당해야 할 옳은 행위를 로스는 직견적 의무(prima facie duty)1)라고 불러 절대적 의무(absolute duty)와 구별한다. 직견적 의무인 것은 다른 직견적 의무와 모순이 되지 않는 경우에 칸트의 절대적 무조건적 정언명법과 비슷하다. 직견적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성실, 보상, 감사, 정의, 선행, 자기개선, 악행금지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직견적 의무에 관한 인식은 직접적이요, 명증적인 반면에 절대적 의무에 관한 인식은 성찰을 포함하며 판단이 그릇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로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직견적 의무 가운데 서로 상충이 발생했을 때 우선권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이때 우선권을 결정하는 규칙은 첫째, 보다 큰 의무는 열등한 의무를 능가하는 보다 큰 의무를 산출하는 행위에 있다는 점이며, 둘째, 보다 큰 의무는 우연히 또는 대충 이루어진 행위보다는 심사숙고하여 분명하게 이루어진 행위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셋째, 양심적인 사람들의 대다수 견해는 불확실성의 경우에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3) 적합성(suitability)과 유용성(utility)
옳음을 정의할 수 없는 궁극적 관념이라고 주장하는 로스는 모든 옳은 것들에게 공통된 특색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적합성(suitability)과 유용성(utility)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옳은 행동으로 만드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적합성과 유용성이라는 것이다. 적합성을 옳은 것의 가장 기본적인 특색으로 보는 것은 현대의 법칙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일치된 견해이다. 다만 로스는 선악도 상황에 대한 행위의 적합성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유용성도 적합성과 아울러 옳은 것들의 기본적 특색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로스는 칸트와 프리차드와 다르다.
3. 좋음(good)
로스는 좋음이라는 말이 도구적 선(instrumental good)으로 쓰일 경우와 본래적 선(intrinsic good)으로 쓰일 경우를 나누어 고찰한다. 도구적 선은 찬미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서의 선이고, 본래적 선은 관심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서의 선이다. 이 둘 모두는 덕망 있는 활동과 지적 활동에 적용될 수 있지만 단지 후자만이 쾌락, 즉 우리의 의무가 되는 다른 것들에 이로운 쾌락에 적합하다. 그러면 본래적 선의 본질은 무엇일까? 로스는 본래적 선이 객관적이며, 일종의 성질(quality)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성질이란 내재적 특질(intrinsic quality)을 말한다. 따라서 본래적 선은 가치가 오직 그것을 보유하는 것의 내적 성질에만 달렸다.
본래적으로 좋은 것들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 사상(事象)2)을 가진다. ①유덕한 의향 및 유덕한 행동; 의향은 마음이 향하는 바를 뜻한다. 여기서 유덕한 의향이라 함은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 선을 실현하려는 의욕, 남의 기쁨을 늘이고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의지 등을 말한다. ②쾌락, ③유덕한 자에게는 기쁨이, 부덕한 자에게는 고통이 분배됨, ④지식 및 올바른 의견
위의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 ‘좋은 것들’의 경중을 비교하여 우열을 정하는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 그는 다음과 같은 가치 비교척도를 제시하였다. ①쾌락과 쾌락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크고 작은지를 헤아리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②덕과 덕, 지식과 지식 사이에 있어서 상호 간의 대소를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원칙상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③쾌락보다는 지식이 더 값지다. ④지식보다는 덕이 더욱 값지다.
4. 착함(morally good)
'착함'이란 인격에 깃들인 좋음을 말한다. 도덕적으로 선하다 함은 일정한 타입의 인격을 가졌거나 혹은 일정한 인격과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스에게 있어서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라 함은 일정한 타입의 인격을 가졌다는 뜻이요, 착한 행동이라 함은 일정한 타입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행동 또는 심정이라는 뜻이다. 로스에 따르면 사람의 인격은 주로 그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인격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동기에 있다. 그러므로 착함 즉 도덕적 선은 주로 동기에 달려 있다. 착한 사람은 좋은 동기를 많이 가진 사람이요, 착한 행동이란 좋은 동기에서 일어난 행동 내지 심정을 일컫는 것이다. 즉 착함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동기에 있다.
행동의 착함이 주로 동기에 달려 있다면 착함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동기의 고저에 관한 인식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로스는 우리가 갖는 일반적인 동기를 도덕적 견지에서 8단계로 나눈다. (1)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고통을 일으키려는 욕망, (2)일정한 일시적 고통을 일으키려는 욕망, (3)도덕적으로 나쁜 쾌락을 일으키려는 욕망, (4)도덕적으로 볼 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쾌락을 일으키려는 욕망, (5)도덕적으로 좋은 쾌락을 일으키려는 욕망,(6) 남의 쾌락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 (7)좋은 활동을 조장하려는 욕망, (8)내 의무를 수행하려는 의욕. 이러한 동기의 고저를 밝히는 분류에는 많은 난점이 보인다. 로스는 그러한 단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직각이라는 방법 이외의 것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직각론의 일반적이요, 기본적인 한계로 볼 수 있다.
1) 직견적 의무(prima facie duty)는 일견적 의무, 조건부 의무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된다.
2) 사상이란 우연 현상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하나의 가능성에 대하여 확률을 대응시키려고 할 때 그 대상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가령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수의 사상은 6개이다.
<참고문헌>
1. 김태길 저,『윤리학』, 박영사, 1997.
2. W.S. 사하키안 저, 박종대 옮김,『윤리학』, 서강대출판부, 2003.
3. F. 카울바하 지음, 하영석, 이남원 옮김,『윤리학과 메타윤리학』, 서광사, 1995.
4. 한국분석철학회 편,『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철학과현실사, 1991.
5. 폴 테일러 지음, 김영진 옮김,『윤리학의 기본원리』, 서광사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