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지도서> p122~123
롤즈의 정의론
롤즈의 <정의론>은 1971년에 초판이 나왔다. 그 내용은 총 3부로 이루어진다. 제1부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분배적 정의 : 여론'의 내용을 다루고, 제2부는 '헌법상의 자유', '분배적 정의', '시민 불복종'을 주내용으로 한다. 제3부는 '정의감'을 다루고 있으나, 다른 장들은 정의에 관한 논지를 위해서 언급한 논지들을 강화하기 위해 첨부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시도해 왔던 것은 로크나 루소 그리고 칸트에 의해 제시된 사회 계약의 전통적 이론을 보다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바랐던 것은 흔히 이러한 이론에 치명적이라 생각되었던 명백한 반박을 면하도록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이었다. 나아가서 이러한 이론이 공리주의에 비해 정의에 관한 보다 나은 체계적 설명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하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결과적으로 도달된 이론은 그 성격에 있어 지극히 칸트적인 것이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상이한 원칙을 채택하리라는 것이다. 즉, 첫 번째 원칙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 있어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며,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예를 들면 재산과 권력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것이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소수자의 노고가 전체의 보다 큰 선에 의해 보상된다는 이유로 어떤 제도를 정당화하는 일을 배제한다. 다른 사람의 번영을 위해서 일부가 손해를 입는다는 것은 편의적인 것일지는 모르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운한 자의 처지가 그로 인해 더 향상된다면, 소수자가 더 큰 이익을 취한다고 해도 부정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인 조건들이 제시되는 경우에만 기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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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롤스 정의론正義論의 특징
고대 플라톤(Platon)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로부터 시작되는 정의正義의 문제는 개인 간에 서로 상충되는 권리를 어떻게 정의롭게 분배할 것인가? 를 문제 삼고 있다. 이러한 정의의 문제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이해의 갈등 속에 살면서 자기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억제하고 준수해야 할 덕’이라고 규정한 이래로 근세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公利의 원칙에 입각하여 ‘쾌락의 양’을 국가적 차원에서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의 주장 속에는 공리의 원칙이라는 다수의 횡포에 의해 소수의 권리가 무참히 침해되는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는 연장선상 위에 존 롤스는 서 있다.
이렇게 탄생한 롤스의 정의론은 종래의 정의론에 비해 몇 가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종래의 정의론들이 응분(desert) 개념을 중시하여 정의로운 분배의 기준으로서 재능, 업적, 노력, 필요 등을 제시한데 반하여, 롤스는 정의를 절차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롤스에 따르면 절차적 정의 개념은 ①완전한 절차적 정의, ②불완전한 절차적 정의 또는 ③순수 절차적 정의 등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자신의 정의론은 순수 절차적인 ‘공정함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것이다.1)롤스는《정의론》 서문에서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핵심적인 목적과 관념들은 공리주의에 대한 합당하면서도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정의관을 고안하고자 했다.”라고 자신의 정의관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지위나 계층상의 위치를 모르며 누구도 자기가 어떠한 소질이나 능력, 지능, 체력 등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심지어 당사자들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특수한 심리적 성향까지도 모른다고 가정된다. 그럼으로써 보장되는 것은 원칙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아무도 타고난 우연의 결과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으로 인해 유리하거나 불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이가 유사한 상황 속에 처하게 되어 아무도 자신의 특정 조건에 유리한 원칙들을 구성할 수 없는 까닭에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한 합의나 약정의 결과가 된다.”
또한 종래의 정의론이 대체로 비례적 평등, 즉 반드시 기계적으로 동일한 비례를 지키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차등 있게 분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롤스는 절대적 평등에 근거한 정의론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롤스도 차등적 분배를 전혀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평등의 기반 하에서의 차등이지 차등이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등이 허용되는 대상도 롤스에게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재화에 한정될 뿐, 인간의 존엄성과 근원적으로 연결되는 사회의 기본적 가치들, 즉 표현의 자유나 재산권 자체 등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롤스의 정의론은 윤리적 판단을 요하는 모든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정의의 주체(the subject of justice)로서 사회의 기본구조에 한정된다. 이는 물론 정의 개념이 사회의 기본 구조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 개념 자체는 작게는 가정적인 일이나 기업 내적인 분배 문제, 크게는 국제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롤스의 관심이 맑스 이전에는 크게 주목되지 않았던 사회 기본구조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
롤스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사회가 어떻게 평등하게 보장해 줄 것인가? 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 종착역은 사회의 기본구조의 정의성 여부를 판단하게 해주는 정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은 마치 수레의 양쪽 바퀴처럼 서로 같은 방향으로 굴러가야지 사회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으며 다른 방향을 지향하게 되면 정의를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칸트의 구성주의를 원용한 일종의 사고실험을 통하여 자율성을 인정하는 현실적 개인들이 서로 간의 합의를 바탕으로 사회체제의 기본원리를 구성하게 함으로써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보장받으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롤스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을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에 놓인 상태로 가정한다. 원초적 입장은 사회 기본 구조의 형태를 결정짓는 정의의 원칙을 세우기 위해 사람들이 정의의 원칙에 대해 합의를 맺게 되는 순수한 가설적 상황이다. 원초적 입장이라는 것은 전통적 사회계약설의 자연 상태라는 관념에 대응하는 것이긴 하나 현실에 실재하는 역사적 상황이 아니고 공정한 절차적 제약 조건을 통합하여 구성한 합리적이고 공정한 여건 하에 정의의 원리를 선택하기 위한 도덕적 관점이다. 즉 원초적 입장은 전통적 사회 계약론에서 말하는 자연 상태를 좀 더 정교화 시켜 놓은 것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1. 계약 당사자들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가려져 있어야 한다.
2. 당사자들은 상호 간에 서로 무관심한 이기적 개인이어야 한다.
3. 당사자들은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4. 의견충돌 시 손해를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합의한다.
다시 말해 원초적 입장에서의 합의가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연의 행운이나 불운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는 어느 누구도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아야 하며, 자기의 경우에는 무관심해야 하고 개인의 성향, 열망 등이 그 결과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계약당사자들이 이러한 원초적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그들은 도덕적 인격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고 그 결과가 사회적 세력들 간의 상대적 균형이나 자의적 우연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 입장이란 적절한 최초의 원상태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거기에서 도달된 기본적 합의는 공정한 것이 된다. 즉 정의의 원칙은 원초적 입장이라는 공정한 계약 상황 하에 합의된 결과라는 사실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5.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원초적 입장의 네 가지 조건 중의 하나인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2)은 계약당사자들이 공평무사한 합의를 보장하기 위해 각자의 사회적 지위, 천부적 재능에 대한 지식 등 이해관계의 갈등을 가져올 잠재적 요인들을 걸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이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당사자들은 인간 사회의 일반적 사실, 정의의 원리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정치현상이나 경제이론에 관한 원리, 사회조직의 기초, 심리법칙들은 잘 알고 있지만 자신과 관련된 개개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추구할 수 없는 ‘불편부당성’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개개인은 합의에 의한 결과가 자신도 가장 불리한 최하위층에 속할 수 있다고 가정하게 되고 따라서 소수가 될 수 도 있는 자신이 다수를 위해 희생되어도 된다는 공리주의적 원리의 난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계약당사자들은 무지의 베일을 쓰고, 자신들이 함께 영위하게 될 사회의 기본헌장인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게 된다. 자신의 천부적, 사회적 신분을 모를 경우 당사자들은 자신이 맞게 될 미래의 운명에 대해 지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며 도래할 사회에 있어서 최소수혜자(worst off)의 위치에 있게 될지라도 기본적인 인간적 삶이 충족될 수 있게 되는 그런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리라는 것이 롤스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같이 불행 중 다행을 선택하는 전략을 최소극대화 규칙(maximin rule)이라 부른다. ‘최소 극대(maximin)’라는 말은 ‘최소 중의 최대’(maximum minimum)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 규칙이 주는 지침은 제시된 행동 과정을 취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에 주목하고 그에 비추어 결정을 하라는 것이다.
6. 정의의 두 원칙
이처럼 원초적 입장의 계약당사자들은 모두가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기적인 개체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무지의 베일’에 싸여 있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한 특수한 이익을 추구하지 못한다. 또한 동시에 그들은 합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간의 의견 충돌 시 손해를 극소화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합의 결과가 자신에게 최악이 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이 최하의 위치를 보호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가치분배는 평등하고 공정하게 실현될 수 있다. 롤스는 이렇게 가상적인 합의절차를 거쳐 도출되는 정의 원칙을 2가지로 보았다.
1. 제1원칙(자유 우선성의 원칙): 각 개인은 모든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2. 제2원칙 :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허용은 다음의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1) 차등의 원칙: 그것이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2) 기회균등의 원칙: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에 결부되도록 배정해야 한다.
(1) 자유 우선성의 원리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위의 내용은 롤스의 정의론 제1원칙을 다시 한 번 인용한 것이다. 물론 그의 후기 저작인《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몇몇 구절의 내용이 달라진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에서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롤스는 정의의 제1원칙 중 평등한 기본적 자유들을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결사의 자유, 인격적 통합성과 자유에 의해 구체화되는 자유, 법치에 의해 포함되는 권리와 자유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시된 여러 가지 목록의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절차를 통해 성립하는 입헌 민주주의 제도가 요구되며, 이는 기본적 자유에 특수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제시되는 다양한 기본적 자유들은 서로 갈등하기 때문에 자유를 규정하는 제도적 규칙들이 조정되어 일관된 자유의 체계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기본적 자유는 공공선이나 완전주의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다른 기본적 자유들에 의해서만 제한되거나 부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는 우선성을 갖는다. 이렇게 본다면 기본적 자유는 서로 간에 충돌할 때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절대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의의 제1원칙에서 언급하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들에 대해 롤스는 하나의 목록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정의의 두 원칙에 있어서 자유가 다른 기본적 제가치에 비해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때 요구되는 자유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내용을 갖는다는 ‘평등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사항은 합리적 행위자들이 어떤 근거에서 자유에 보다 우선적인 비중을 두며, 차등의 원칙에 의거할 경우 자유의 불평등한 분배가 그들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자유를 주장하는가? 이다.
롤스는 이에 대해 합리적인 계약당사자들은 그들의 기본적 자유가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하에서라면 경제적 복지의 개선 때문에 보다 적은 자유를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합리적 인간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욕구를 최대한으로 실현하고자 하며, 그들이 바라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물질적 부의 증가는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기회를 그다지 증대시키지 못하는 반면, 자유의 증가는 그러한 기회를 증대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물질적 생활을 향유한다고 할 때 자유 우선의 원칙을 선택하게 된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들이 우리의 숙고된 판단에도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자유에 대해서도 가장 강력한 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만장일치로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정의의 두 원칙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설정된다.
하트(Hart, H.L.A)에 의하면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라는 개념은 애초에 토지에 대한 재산권에 쓰였다고 한다. 공동체에 의해 공동으로 소유되는 토지는 그 공동체 성원들의 평등한 자유와 함께 공동체의 소유권이 지속되며, 따라서 그 소유의 상태는 합법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롤스의 자유 우선성의 원칙이 시즈위크에 의해 제기된 주장과 유사하다고 하면서 정의의 제1원칙에서 거론하는 자유는 방해나 간섭으로부터 보호받거나 합법적으로 용인되도록 이해될 수 있는 기본적인 혹은 근본적인 자유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자유 우선성의 규칙을 전제로 하여 정의의 원칙을 최종적으로 공식화하면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에 대해 자유와 유사한 체계에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들의 가장 광범위하고 완전한 체계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유’는 단지 자유를 위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 다음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 (a)보다 광범위한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는 완전한 자유의 체계를 강화시켜야만 한다. (b)보다 덜 광범위한 자유는 더 적은 자유를 가진 사람들에게 수용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의 우선성이란 개념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반드시 자유의 전 체계와 관련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축차적 서열로 되어 있는 정의의 원칙에 기초해서 언급한다면 자유란 자유를 위해서만 제한되며 이렇게 제한되기 위한 조건은 대표적 시민들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그것이 자기의 자유를 위해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자유 없이 지내는 것이 합당한 경우는 장기적인 이득이 다소 불행한 사회를 평등한 자유가 충분히 향유되는 사회로 변형시킬 만한 경우가 보장될 때이다.
(2) 자유 우선성의 근거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가 모든 가치에 우선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의의 두 가지 원칙에 있어서 제2원칙보다 제1원칙에 우선성을 두어야 하는 근거, 즉 축차적 서열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경제 부문에 있어서 산출의 총량이 증가하면 할수록 경제적, 사회적 이득이 우리의 선(가치)에 있어서 갖게 될 한계 의의(marginal significance)는 자유에 대한 관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관심은 동등한 자유의 행사를 위한 여건이 보다 충분히 실현됨에 따라 강화되어 왔다. 이렇게 진행되어 온 자유에 대한 관심의 강화가 일정한 지점을 넘어설 경우, 보다 큰 물질적 수단과 개개인이 맡을 직책의 쾌적함을 위해 보다 작은 자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합리하게 되고, 계속해서 인간의 심리에 불합리하다고 느끼게 하는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불합리하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복지의 일반적 수준3)이 향상됨에 따라 적어도 인간의 욕망이 제도나 사회 형태에 의해 심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닌 한, 더 이상의 향상으로 인해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 것보다 덜 긴박한 욕구들뿐이다. 동시에 동등한 자유의 행사에 대한 장애물은 줄어들고,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 관심들을 추구하는 권리에 대한 요구가 훨씬 커지게 된다. 점차적으로 사람들과 집단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관심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공동체의 자유로운 내적 생활을 동등한 자유 및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과 탁월성을 허용하는 사회적 통합의 양식 속에서 확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게 된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하에서 우리가 자신의 인생 계획을 결정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관심사에 대해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자유에 대한 욕구는 당사자들이 그들 모두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함께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주요한 규제적 관심사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자존감自尊感4)이라는 기본선이 갖는 중심적 지위와 타인과의 자유로운 사회적 통합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에 있다. 무지의 베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계획으로부터 특수한 것들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의 두 원칙에 대한 축차적 서열을 정하며 이에 따라 자유의 우선성이라는 원리가 나타난다. 이렇게 자유의 우선성이 기초가 되어 형성되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존감의 근거는 소득의 몫이 아니고 공공적으로 인정된 기본적 권리와 자유의 분배이다. 이러한 분배는 모든 사람에 있어서 동등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보다 넓은 사회의 공동사를 처리함에 있어 유사하고 확고한 지위를 갖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확고하지 못한 지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평등하지 못한 자유를 수용하려는 경향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그들이 열등하다고 사회 전체적으로 규정하게 되고 이렇게 된다면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 즉 자존감이 깎이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의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와 공적인 상호 존중의 태도를 유지하고 서로 간에 그것을 바탕으로 관계를 진행하며, 그들 자신이 가지는 가치를 확산시키고자 노력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서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는 자존감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시민적 지위를 공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확보되는 데 물질적 수단의 배분은 순수 절차적 정의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맡겨 두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의해 자유의 우선성이 확고히 유지되며 계약당사자들은 정의의 두 원칙의 축차적 서열화를 채택하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평등한 자유의 원칙에 의해 도출되는 자유 우선성의 함의는 ‘인간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는 경제적, 사회적 재화의 풍요로움과 교환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차등적 원리의 의미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허용된다. (1)그것이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고(차등의 원칙), (2)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에 결부되도록 배정해야 한다.(기회균등의 원칙)”
롤스의 제2원칙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진술의 형식을 띄고 있다. (1)은 차등의 원칙, (2)는 기회균등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 원리들은 근본적으로 경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제안된 개념이다. 민주주의적 평등의 입장은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장에서 언급했듯이 롤스의 정의의 두 원칙에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인 제1원칙과 제2원칙이 서로 상충할 때, 제1원칙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한다. 이것은 자유 우선성의 원리에 의해 전제되고 있는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또 다른 표현형식이다. (2)는 계약당사자들이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의 평등을 당위로서 요청하고 있다. 즉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수락하는 한 별로 문제없이 우리들은 이를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1)로 표현되는 차등의 원칙은 경제적 평등주의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롤스의 평등주의를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어서 상당한 논란이 된다.
롤스의 차등의 원리에 내포된 의미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먼저 롤스는 이 원리를 통해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드워킨과 같은 절대적 평등주의자들과는 구별된다. 롤스는 현시점에서 뛰어난 자와 열등한 자, 능력 있는 자와 능력 없는 자, 자본가와 노동자가 동일한 수입과 부 그리고 동일한 권한과 책임을 지녀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기본 구조에 포함된 계약당사자들의 사회, 경제적 평등이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절대적 평등을 현재보다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보다 뛰어난 자, 능력과 자질이 있는 자, 자본가 등 사회 내에서 유리한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보다 나은 사회, 경제적 지위를 일종의 유인책(incentive)으로 제공하여 그들의 능력과 자본을 사회 전체의 재화 생산에 투여하도록 장려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차등의 원리가 불평등을 허용한ㄴ 이유는 단지 전략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사회 내의 평등을 보다 효율적, 합리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롤스의 입장은 재화의 평등한 분배에 관한 이론으로 볼 수 있다. 기회 균등의 원리는 공정한 기회 균등에 대한 자유주의적 원칙으로, 재능이 있으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다는 협의로 해석되지 말아야 한다.
사회구성원 간의 자유 경쟁이 부의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조장하기 위한 원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유경쟁은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상당한 임의성이 전제된 상태에서 천부적 재능과 사회적 지위의 오랜 누적적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재화의 불평등 배분을 위한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롤스는 소득과 부의 분배가 역사적, 사회적 행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듯이 천부적 재능에 의해 소득과 부의 배분이 이루어지는 것도 허용할 수 없다고 본다. 사회조직 내의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한 권위와 수입 특권 그리고 이에 따르는 책임부담 등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물론 이 규정에 의해 모든 사람이 그 자격에 상관없이 무조건 일정한 직책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의 자격, 구체적으로 그 직책에 필요한 능력, 기술 그리고 그 직책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으면 경쟁을 통하여 그 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바로 이러한 단서 아래에서 사람들 간의 불평등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절대적 평등을 추구했던 마르크시즘은 현실 속에서 실패했음이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붕괴로 실증되었다. 즉 인간 사회에 상존하는 심각한 불평등에 대한 극복책으로 나온 것이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받는 것을 강조한 마르크스의 정의관이었다. 마르크스는 평등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대신에 특정 계급의 이익을 내세웠다.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주의 질서를 이룩하려고 했던 마르크스는 그러한 이성이 인간의 자율성이나 자유에 기반 하여 발달되어 왔음을 간과했던 것이고, 따라서 마르크시즘에 의해 건설된 국가는 필연적으로 현실적 부적합성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라는 가치의 보장 없이 정의로운 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롤스의 통찰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기회균등이라는 단서만으로 평등주의 이념을 구현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실상 보다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탁월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이러한 능력이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이득을 얻는 사람들(최소 수혜자)을 위해 쓰인다면 차등의 원칙에 의해 기회 균등의 원칙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이와 대비하여 정의의 제2원칙의 첫 번째 단서로 제기된 차등의 원리는 롤스의 정의론에서 그의 평등주의적 입장을 가장 선명하게 부각시켜주고 있다. 또한 동시에 많은 철학가들에 의해 가장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원리는 흔히 사회계층 간의 소득분배를 중심으로 그것의 공정한 배분을 정하는데 기초가 되는 정의를 실현하는 원리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체제가 평등한 자유와 기회의 균등을 요구하는 제도로 가정될 경우에 처지가 나은 자들의 보다 높은 기대치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도리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것이 사회의 최소 수혜자(the least advantaged)들의 기대치를 향상시키는 기제의 일부로서 작용하는 경우라는 내용이 이 원리에 내포되어 있다. 어느 한 사회 내에서 보다 혜택을 받는 자들에게 이전보다 훨씬 매력적인 전망을 허용함으로써 보다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의 이익이 도모되지 않는 한 사회질서는 그러한 전망을 설정하거나 보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어떤 사회에서 가장 유리한 처지의 집단에게 유인책을 줌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 내의 평등을 유지, 발전시킬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그들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이익의 극대화를 꾀해 사회 구성원간의 격차를 더욱 크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 개연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차등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요청된다. 민주주의적 평등체제를 가장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롤스는 정의의 제2원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기회 균등과 차등의 원리의 상호결합을 통해 이러한 체제가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는 구절이 지니는 의미는 상호독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 두 의미의 결합은 네 가지 경우의 수를 가져온다. 롤스에 의하면 이 4가지 경우의 수가 의미하는 정치체제는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을 전개함에 있어서 어떤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하면서 원초적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로운 체제는 민주주의적 평등 체제라고 롤스는 생각하고 있다.
(4) 차등의 원리의 철학적 기반 : 자산 공유주의
롤스는 차등의 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산 공유주의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자연적이거나 사회적 또는 경제적 우연성의 덕으로서 취득하게 되는 천부적 자질과 능력, 후천적 기술, 환경 등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모든 것들은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자의적이며 이것을 판단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우연적인 것이며 그것을 당연히 부여받을 응분의 도덕적 권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롤스의 주장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는 타인들보다 유리한 여건들은 그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의 것이라는 자산 공유주의를 언급한 것이다. 이는 빈곤이나 무지 혹은 다른 결핍이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정의의 제1원칙에 대한 제약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보다 많은 자유를 위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적 자산에 대한 분배요구는 분배적 형평성이라는 측면에서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이러한 분배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제1원리에 대한 제약을 어느 정도 완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자산을 활용하여 산출되는 재화를 사회구성원 간에 똑같이 배분한다면 평등이라는 이념은 실현될 수 있고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계층은 사라질 것이다.
롤스의 차등의 원리에 표현되는 평등주의는 불평등이 부정의한 제약으로 경험되지 않는 한, 성립 근거를 갖는다는 자유주의적 정의관과는 다른 분배적 원칙을 갖는다. 즉 차등이 가난한 자의 물질적 복리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모든 사회구성원이 가져야 할 자유라는 가치를 보다 확장시키거나 심화시키기 때문에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제적 재화와 우리가 자유를 이용할 능력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때, 자유의 가치는 불평등이 모든 사람을 보다 나은 처지에 있게 하는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가 된다. 자산 공유주의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계약 이전의 상황 속에 그 내용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즉 원초적 입장에서 개개인들은 합의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모든 구성원들이 도덕적 인격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고, 그 결과가 사회적 세력들 간의 상대적 균형이나 자의적 우연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다.
롤스는 자신이 규정한 원초적 입장에서 계약당사자들이 사회적 기본 재화를 배분하는데 있어서 우선 평등의 원칙으로부터 시작하리라고 생각한다. 원초적 입장에 서 있는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무지의 베일로 인해 자신을 위해 어떤 특정한 이익을 취할 길이 없다. 또한 그들은 차등의 원칙에 의해 자신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특수한 손해를 그대로 감수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타인의 이익추구에 무관심한 만큼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그는 조금도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모든 당사자들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들은 사회적 제가치를 배분하는데 있어 모두에게 동등한 몫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마찬가지로 동등한 몫보다 더 적은 것에 동의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까닭에 계약당사자로서 그들이 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은 동등한 분배를 요구하는 정의를 제1원칙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롤스는 이렇게 무지의 베일을 쓴 당사자들이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에 당연히 도달할 것으로 생각하여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순수 절차적 정의(pure procedual justice)로 생각했다.
롤스는 기회균등이라는 서로 공정한 입장에서 경쟁이 이루어졌을 때 초래하는 소수자의 이익까지도 감안하고 있다. 이것은 종래의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던 공리주의자들의 한계를 한층 더 발전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장 자유롭고 이상적인 사회 상태는 사회구성원들이 최소 수혜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더 없는 상태까지이다. 원초적 입장이 보장된 상태에서의 사회구성원들은 ‘최소 수혜자의 원칙’에 모두가 동의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부담을 지니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러한 원칙들이 상호 충돌할 경우 제1원칙이 제2원칙에 우선하며 제2원칙에서는 ‘기회균등의 원칙’이 ‘최소 수혜자의 원칙’보다 우선한다고 말한다. 결국 롤스는 자유의 절대적 우선성(제1원칙)을 바탕으로 그 속에서 야기되는 불평등(제2원칙)을 허용하되 기회균등과 최소 수혜자의 보호를 강조함으로써 평등의 문제 또한 극복하고자 하였다. 즉 롤스가 말하는 평등이란 단순한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를 통한 ‘과정의 평등’이자 ‘출발의 평등’인 것이다.
7. 롤스 정의론의 비판
사회정의에 대한 오랜 철학적 논쟁이 그러하듯이 자유와 평등의 고른 실현은 많은 이론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으며 롤스의《정의론》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정의론》에서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제시한 여러 가지 전제조건들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1) 일반적 지식과 특수한 지식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의문
공정으로서의 정의관을 도출하기 위해 롤스가 가정한 원초적 입장은 과연 충분히 일반화 될 수 있을까? 롤스는 정의의 원칙들을 이끌어 내는 계약 당사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천부적 지위 나아가서 그들의 가치관이나 심리적 성향까지도 모른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롤스는 동시에 당사자들은 인간 사회의 일반적 사실에 대한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일반적 사실은 정치문제나 경제이론의 원칙들을 이해하며 사회조직의 기초와 인간심리의 법칙들에 대한 지식이다. 그런데 계약 당사자들에게 허용되는 일반적 지식과 제한되는 특수한 지식들이 과연 양립할 수 있을까? 일반적 지식이란 대부분 특수한 지식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2) 계약 당사자들에 대한 기본 가정에 대한 비판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협동의 주체들이 합리성과 상호무관심성을 가지며 시기심을 결여해야 한다는 롤스의 인간관도 검토의 여지가 있다. 인간적 특성들이 과연 그렇게 중립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까? 롤스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비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3) 원초적 입장의 가설성에 대한 비판
원초적 입장에서의 계약은 순수 실험적인 가상의 상태이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가 그 지식을 사실상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드워킨이 제기한 다음의 가설적 계약의 상황을 살펴보다. 갑과 을이 포커 게임을 할 때 갑이 거의 이겨가는 도중에 카드 한 장이 부족한 사실이 발견됐다고 하자. 이 때 을은 “만일 네가 게임을 하기 전에 게임도중 카드가 부족한 경우에 대한 규칙을 만든다면 너는 그 게임을 무효로 한다는 규칙에 동의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게임을 무효로 하자라고 할 것이다. 이때 을이 주장하는 식의 가설적 합의는 실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약으로서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
(4) 자유들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판단과 이를 선별해 줄 표준의 부재
무지의 베일은 정의의 원칙을 연역해 내는데 있어서 또 다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롤스에 의하면 당사자들은 원초적 입장 아래에서 제일 먼저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는 정의의 제 1원칙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평등한 자유의 선택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자존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평등한 자유가 서로 상충할 경우 이를테면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간의 또는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 간의 상충이 있을 경우 롤스의 이론은 그러한 갈등을 조정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경우에 문제가 된 두 자유들의 상대적 가치에 대한 판단과 이를 선별해 줄 어떤 표준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무지의 베일에 가려있기 때문에 기본가치들의 상대적 중요성을 평가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결국 무지의 베일은 계약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를 배제시킴으로써 공정한 조건 아래에서 도덕 원칙을 도출해 내기 위해 가정된 것이지만 그 베일의 두께로 인해 실질적인 어떤 원칙의 도출도 불가능하게 만든 이론적인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4) 최소 극대화의 원리에 관한 비판
롤스는 정의의 제1원칙과 2원칙을 발견해내는 방편으로 ‘최소극대화의 원리’(maximin principle)를 상정했다. ‘최악의 결과 중 가장 다행스러운 것을 선택하라’는 이 원리는 도리어 역설적인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최소 수혜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에 절대적 우선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최소 수혜자의 아주 미미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중요하면서도 다수의 큰 이익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악의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원칙을 선택한다면 이는 교통사고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외출을 금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8. 롤스 정의론의 현재적 의의
롤스『정의론』은 철학이론으로서는 드물게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사회이론으로서 정의의 두 원칙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점 이외에도, 좁게는 당시 윤리학계를 주도하던 메타윤리학적 상대주의를 극복하고 규범윤리학을 복원하였으며, 개인에게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근대 사회계약론과 칸트의 정언명법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는데 성공했다는 등의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넓게는 윤리학이 경제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으며, 법의 근거로서의 윤리이론의 의의는 어떤 것인지를 해명한 것도 《정의론》과 이후의 저작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 원칙의 명료성과 별도로 정당화 방법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를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정당화 방법으로서 중첩적 합의의 개념과 연결된 것이다. 약술하면 《정의론》에서 정당화되어야 했던 것은 정의원칙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도출되는 원초적 입장과 그 조건들이었음에 반하여,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중첩적 합의의 대상은 정의 원칙 자체이다. 이 경우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나 개방된 직위의 원칙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나, 차등의 원칙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바, 롤스는 제1원칙은 헌법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음에 반하여, 차등의 원칙을 포함한 제2원칙은 법률의 단계에서나 적용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곧 제2원칙의 약화를 의미하는 바, 제1원칙이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기본권들의 목록에 대한 것임을 감안하면 롤스는 잘못된 정당화 전략을 택함으로써 더욱 핵심적이고, 독창적인 제2원칙을 포기하는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그러나 항상 정당화의 실패는 정당화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롤스의 정의원칙, 나아가 제2원칙의 적절성과 독창성을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존 롤스 저, 황경식 역, 《정의론》, 이학사, 2002.
2. 보위․사이먼,『사회․정치철학』,서광사, 1986.
3. 박효종, <사회정의론>, 일정연수교재, 2004.
4. 박효종, <절차적 정의에 관한 일 고찰>, 일정연수교재, 2003.
5. 구윤희,<John Rawls의 공리주의 비판과 정의론에 대한 연구>, 경남대학교 대학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