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선조님이 도탄에빠진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든 비결
토정비결은 조선 선조때의 학자 토정 이지함(1517~1587)이 저술하였으며, 조선후기 이래 수백년간 민초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아왔으니 가히 운세분야의 베스트 셀러이자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다.
토정은 원래 더욱 방대한 규모와 적확한 적중도의 저술로써 민간의 피흉취길에 이바지하고자 하였으나, 너무나 자세하고 정확한 예언서가 주는 폐해를 경험하고 난 후 그 규모를 대폭 줄였다 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토정비결 경우의 수는 모두 144가지!
왜란과 호란, 당쟁의 그늘에서 희망없이 신음하던 백성들에게도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하고,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을 부여하고 싶었던 토정 할아버지의 그 따뜻한 마음을 가만히 느껴보자.
재미로 보는 토정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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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李之 ) 기인(奇人)인가, 실학의 선구자인가?
토정 이지함(李之 :1517-1578)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역사적인 위상보다도 그의 저술로 알려진 『토정비결』에 관심이 집중되거나, 그의 기인적인 풍모만이 야사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또한 『임꺽정』, 『토정비결』 등 소설 속의 주요인물로 등장하여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지함에 대해 대중적인 친숙성만큼 잘 알고 있지는 않은 실정이다.
이지함은 16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가 제시한 국부증진책과 민생안정책과 같은 사회경제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으며 실학의 원류로까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 부강한 조선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제시했던 실학자였다.
1.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신분에 구애되지 않아
이지함의 자는 형백,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말의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색은 이지함의 7대조가 된다. 이곡과 이색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쳤다.
이지함은 1517년 이치(1477~1530)의 아들로 충청도 보령군 청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이치는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미 사망한 종조부 이파(李坡)의 성종 때의 폐비사건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지함은 14세 되던 해에 부친이 죽자 형인 이지번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는 후에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이지함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세째 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죽었다. 서자인 이산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신분에 구애되지 않는 이지함의 개방적 학풍과 교유관계, 그리고 『토정비결』이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한 점 등으로 그의 신분을 한미하게 보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이지함의 가계가 이색의 후손으로 조카대에는 영의정을 배출한 양반 가문 중에서도 명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신분적 개방성은 가문을 초월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토정비결』에 반영된 이지함의 사상
‘토정’이라는 그의 호는 ‘흙으로 만든 정자’라는 뜻으로 지금의 마포 강변에 허름한 집을 짓고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지붕을 정자 삼아 글을 읽었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에도 마포는 서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던 물산의 집산지로서 상업과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으며, 마포의 토정은 강가에 바로 직면한 곳이었다. 이지함의 주된 근거지 또한 충청 해안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는 일찍부터 상업과 어업, 유통경제에 안목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흔히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가탁(假託)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는데,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 등으로 볼 때 이지함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토정비결』에서 내포하고 있는 뜻과 이지함의 사상이 상통하는 측면이 많다. 『토정비결』에는 『주역』에 바탕한 상수학(象輸學)의 사고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지함이 스승인 서경덕에게서 상수학을 배운 것은 이지함과 이 책의 연관성을 넓혀주고 있다. 서경덕 등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자들이 ‘기(氣)’에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의 사회상황을 변화가 요구되는 시기로 파악한 점과 이지함이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역 사상에 내포된 새로운 변혁의지가 『토정비결』에도 일부 반영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덕형이 이지함을 염두에 두고 ‘세상에서 풍수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이씨의 집안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한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야사류의 책에 그에 관한 기록이 풍부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모두 이지함이 민간에서 격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응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지함은 스스로에게는 철저히 엄격했으나, 일반 사람을 접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온화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질 또한 민중들을 쉽게 만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3. 바다와의 깊은 인연
이지함의 주된 활동 지역은 출생지인 충청도 보령에서 서울의 마포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특히 고향인 보령은 친가, 외가를 아울러 그의 일족들이 크게 이름을 떨친 곳이었다. 이지함은 아산과 포천에서 잠시 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주로 충청도와 서울의 마포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가 거처했던 마포의 토정은 서해와 통하여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었으며, 특히 배를 타는데 익숙하여 해상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러한 연유로 그에 관한 기록에는 바다와 관련된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스스로 자신을 ‘해상에 사는 광민(狂民)’으로 표현했으며, 조헌은 ‘해우(海隅)’에 은거한 이지함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고 했으며, 조헌의 상소문에서는 이지함이 ‘안명세의 처형을 보고 해도를 주유(週遊)하면서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다고 했다. 이지함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장지(葬地)가 해안에 가까이 있어 조수가 밀려옴을 걱정하여 옮겼다는 기록이나, 성품이 배타기를 좋아하고 항해 중에 조수의 흐름을 알아 위험을 만나지 않은 것, 어염 등 해상의 경제활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것 등은 모두 이지함과 바다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이이가 이지함의 제문을 쓰면서 ‘수선(水仙)’이라 표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한 혁신적인 사상
이지함은 1573년(선조 6) 탁행(卓行)이 알려져, 최영경, 정인홍 등과 함께 조정의 천거를 받아 종6품의 포천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건의가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1578년에 다시 천거를 받아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다시 그의 생각을 실천할 기회를 갖게 된 이지함은 걸인청(乞人廳)을 만드는 등 노약자와 고통 받는 백성들의 구호에 힘을 기울였으며, 현감으로서 경험한 시무책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지함은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 실상을 알면서도 백성들을 부당하게 군역에 넣어야 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이 역병으로 곧 사망했기 때문에 상소문에서 제시한 시무책은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지함은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할 여러 가지 방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백리가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보장(保障)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상이 정치에 실현되기를 희망했다. 이지함의 경제사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급(自給)과 국부의 증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지함이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인 「이포천현감시상소( 抱川縣監時上疏)」를 통하여 그가 지향한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지함은 당시 포천현의 실상을 보고하면서 ‘포천현의 형편은 이를테면 어미 없는 고아 비렁뱅이가 오장(五臟)이 병들어서 온 몸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다하였으며 피부가 말랐으니 죽게 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입니다’하여 당시 포천현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타계할 수 있는 방책으로 크게 세 가지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지함은 제왕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中策), 백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하책(下策)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지함이 중점을 둔 것은 하책이었다. 즉 당면한 현실에서 상책과 중책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하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지함이 하책을 강조한 것은 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의(義:성리학의 의리와 명분)와 리(利:실용과 이익)를 대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절충하려는 개방적인 사상이 있었다.
이지함은 어업이나 상업, 수공업, 광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육지건 해양이건 국토에서 산출된 자원을 적극 개발, 이를 통해 국부를 증대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실천하였다. 북학파의 중심인물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지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일찍 외국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식견은 탁월하여 미칠 수가 없다” (『북학의』,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折江商舶議)」)
16세기를 살아가면서 민중들의 경제적 고민을 해결하고 민중들에게 항상 위안의 벽이 되어 준 이지함이 제기했던 민중 본위의 사회사상과 적극적인 국부 증대책은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것은 이지함을 기인으로만 볼 수 없는 주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글쓴이 / 신병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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