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 1959년 다방과 인스턴트커피 유행
단순한 음료 이상을 넘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자 시대의 문화 아이콘인 커피는 해방 이후 어떤 모양새로 시대의 변화를 대변했을까?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의 저자 오두진에 의하면 “해방 이후 명동 거리에는 다방이 빽빽이 들어섰는데 이 곳에는 지식인들의 고뇌를 어루만지는 온기가 있었으며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새로운 문학적 기운들로 늘 충만했다.”고 한다.
해방의 감격은 다방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커피는 이 모든 것의 촉매제였다. 그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명동에 있는 ‘봉선화 다방’이었는데 그 곳 다방의 이름이 봉선화가 된 사연에는 일제에 억압된 시대를 거치면서 해방된 명동거리에서 봉선화 꽃이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봉선화라고 붙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그 당시 다방의 생명은 무엇보다 다실이 지닌 이름이 좌우하던 때였다. 그렇다고 다방의 이름만 좋아서도 안되었다. 아늑한 실내 장식과 구수한 커피 맛, 마담과 종업원들의 소박한 정성과 교양이 얽힌 분위기가 있어야 했다. 이래야만 다방이 손님들과 오래 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다방이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의 집합 장소로 인식되었던 시기에 너도나도 문화인들의 멋을 느껴보고 자신도 문화인 행색을 하기 위해 다방에 드나드는 가짜 문화인들(?)이 있었으니 그들로 인하여 일어난 해프닝에 대하여 박계주는 다방<육체>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다방 <육체>에는 여러 형의 육체가 드나들며 북적거린다. 정치육체, 머리육체, 문화육체, 학생육체, 연애육체, 어깨육체, 형사육체, 무직육체…, 실로 여러 빛깔의 육체의 전람회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방에서는 역시 문화육체가 단연 우세였다. 기성, 신진, 유명, 무명 그리고 자칭 문화씨(氏)까지 합쳐서 말이다.
이 다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누구나 처음에 알기를 그 청년은 화가요 양장양은 그의 애인으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기실은 양장녀가 화가요 청년은 당신의 종으로도 감사합니다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마담의 입을 통하여 훨씬 뒤에 안 일이다. 그 무명 문화청년은 그 날도 양장양과 함께 들어와 화구를 벗어 탁자 위에 놓고는 양장녀 낮은 편에 앉아선 전날과 다름없이 두 팔을 감아 안고 눈을 감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귀한 미제 음료, 양반 음료로 인식된 인스턴트커피
한편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군인들의 식량에 포함되었던 인스턴트커피가 6ㆍ25 전쟁으로 미군의 주둔과 참전으로 자연스럽게 쏟아져 들어왔고,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거래 되었는데 6ㆍ25 전쟁 이후에 커피는 소위, ‘양키 물건장사’라고 불리는 아줌마들에 의하여 부자들 사이에 불법적으로 유통되었다.
이 때부터 미군부대에는 미국의 각 커피회사에서 시험용으로 제공한 인스턴트커피가 넘쳐났고 미군부대 밖으로 커피가 흘러나와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생산된 인스턴트커피는 너무 많은 양의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어,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면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쓰디쓴 커피의 용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나이 드신 분들께서는 그저 구하기 어려운 귀한 미제 음료, 양반 음료라는 생각에 서울에서 귀여운 손자가 내려오면 설탕을 한 움큼 타서 내놓기도 하였는데 이 시절의 커피이다^^
이 시절 커피를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인스턴트 커피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인스턴트 커피로 쓰여지는 로부스타 종이 아닌 리베리카 종이라는 식용이 아닌 산업용 커피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는 ‘양반 음료’ 라 불리는 커피를 마시게 되면 잠이 통 안오게 되는 것이었다.
그 잘못 된 상식으로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온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부스타 종도 아닌 아라비카 종 100%를 마시면 숙면을 취 할 수 있다. 현재, 2013년 3조가 넘는 한국 커피 시장의 안타까운 현 주소 이다.
한편 전쟁이 끝나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다방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발전한 서양 문화를 즐긴다며, 한가로이 폼을 잡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전후 복구로 인하여 이들이 마시는 커피까지 정상적으로 유통되도록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었다. 많은 다방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쓰레기 속에 섞여서 나온 지저분한 깡통 속에 담긴 쓰레기 커피를 가지고 커피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런 커피를 온갖 폼을 잡으며 그 맛을 음미하던 결코 웃을 수만은 없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피난문단의 중심, 다방
6 ㆍ25 전쟁으로 인하여 서울의 다방은 거의 폐업하게 되었지만, 반면 부산 피난시절에 여기저기 다방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커피문화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다방에는 약속이나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서도 언제나 문인들이 모여 들었으며 특히 <밀다원>에서는 ‘피난문단’의 삶을 담은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산에서의 아지트는 뭐니 뭐니해도 광복동에 있는<금강다방>이었다.
다방에 진종일 앉아 있는 신선들이 늘어 마담들은 골치를 앓았다. 하지만 모든 다방이 이렇듯 문인들에게 하루 종일 자리를 제공할 만큼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다방이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앉아있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드물지만 50년대에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아침부터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다방 마담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만 차지하는 손님들이 눈에 곱게 들어올 리가 없었던지라 이런 손님들과 끊임없는 신경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주인이 차 한 잔을 마시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 손님을 내쫓자 여기저기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조리 분개하여 주인과 죽일 놈, 살릴 놈하면서 욕을 하며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온종일 앉아있어봤자 차 한 잔밖에 팔아주지 않는 문화인들을 내쫓기 위해 다방의 마담은 한 물 가서 시들해진 유행가를 마구 틀어대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화인들은 이런 마담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퇴는커녕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서 애꿎은 엽차만 더 달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하였다. 요즘같이 다방에 손님이 없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이지 못해 애가 타는 이 때에 그 시절 마담의 행실은 퍽이나 기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상황은 지금과는 모든 사정이나 형편이 사뭇 달랐다. 한 달 내내 외상차를 마시다가도 어쩌다 돈이 생기면 한꺼번에 갚았고, 한 번 자리에 엉덩이를 댔다 하면 온종일 나갈 줄 몰라 일명 로테이션이라고 말하는 손님 순환이 안 돼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 한 잔 시켜 마시면 볼일 다 끝낸 것처럼 후딱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뜨내기 손님들이 아니고 진종일 눌러앉아 세월만 낚겠다는 신선들만이 우글거렸던 때였던 것이다.
이처럼 다방을 이용한 고객도 시세를 따라 바뀌었다. 8ㆍ15 해방 이후부터 건국도상의 정치적 혼란통에는 정객(政客), 정치?사회 운동가들이 이 곳을 아지트로 삼았고, 문인들이 오후 한때 묻혀 문학을 논하고 예술을 토론하는 문화인 살롱 역할도 했다. 6ㆍ25때 부산에서는 집 잃고 가족 잃은 실향민들의 모임터로, 환도 후까지 그러했다. 또한 전후 우리나라의 다방은 정치 현실과 경제적 필요로 생겨났고 주로 미군정과 동란 때의 GI(미군 육군 병사의 속칭)와 이를 따라다니는 엄청난 깡통, 껌, 커피 등 잉여 군수물자를 바탕으로 생겨난 일종의 신기루 같은 전쟁 경기(景氣)의 부산물이었으며, 도시생활 문화의 대표적인 존재로 자리잡아가던 시절이기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