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고동주 기자
- 입력 2026.06.12 14:49
- 댓글 0
식수·토지·협동조합으로 달리트 여성 자립 도운 20년 활동 평가받아
6월 9일 제20회 생명의 신비상 시상식에서 활동분야 장려상을 수상하며 정순택 대주교와 함께한 인도 HRDF의 다얄란 상임이사와 냐나키루바 활동가. (사진 제공 = 한국희망재단)
인도 달리트 공동체의 인권과 자립을 위해 활동해 온 HRDF(Human Resource Development Foundation)가 6월 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제정한 제20회 생명의 신비상 활동분야 장려상을 수상했다. 이번 수상은 카스트 제도 아래 가장 깊은 차별과 배제를 겪어 온 달리트, 특히 여성과 아동의 생존권과 존엄 회복을 위해 헌신해 온 HRDF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다.
HRDF 다얄란 상임이사는 수상 소감에서 “이 상은 우리와 함께 싸우고,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희망을 일구어 온 달리트 공동체 모두에게 드리는 상입니다. 우리의 길이 옳다는 위로이자 더 나아가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이며,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계속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
HRDF는 1993년 인도 타밀나두에서 달리트 인권활동가 7명이 설립한 비정부기구(NGO)로, 설립 이후 달리트 여성과 아동, 농촌 주민들을 중심으로 인권 옹호와 교육 지원, 공동체 조직화, 식수 환경 개선, 토지 되찾기, 여성 유기농업 협동조합 육성, 판차야트(Panchayat, 마을의회) 참여 확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달리트 곁에서 30여 년을 함께하며 변화를 일구어 낸 HRDF 활동가들. (사진 제공 = 한국희망재단)
“우물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 식수 차별… 식수개발사업으로 생존권 회복
달리트가 겪어 온 차별은 식수 문제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쳉갈파투 지역에서는 마을에 공동 우물이 있어도 불가촉천민인 달리트는 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상층 카스트는 접촉만 해도 오염된다고 믿으며 우물 사용을 막아 왔다.
달리트 주민들은 농업용 우물이나 외진 곳의 웅덩이 물에 의존해야 했고, 상층 카스트가 농업용 우물에도 농약을 타면서 여성들은 항아리를 들고 매일 왕복 2시간 거리를 오가며 물을 찾아야 했다. 아이들까지 학교에 가지 못한 채 물을 길어 오는 일에 매달려야 했으며, 어렵게 구한 물조차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해 주민들은 배탈과 설사 등 수인성 질병에 시달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HRDF는 식수 확보를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생존과 존엄의 문제로 인식하고, 2006년부터 한국희망재단과 함께 식수개발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50개 마을, 7만 5천 명의 달리트 주민들이 우물과 식수탱크 등 안전한 식수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을별 식수보호위원회를 구성해 주민들이 직접 우물을 관리하고 수질을 점검하는 자율적인 체계도 마련됐다. 우물이 생기면서 주민들은 매일 2~3km를 걸어 물을 길어 오지 않아도 되었고, 아이들을 제시간에 학교에 보내며 지배 계층 우물에 의존하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카스트 제도가 폐지됐지만 여전히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차별 속에서, 공동우물에 다가갈 수도 없었던 달리트 주민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매일 밤 2~3km를 걸어 농업용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만 했다. (사진 제공 = 한국희망재단)
토지 되찾기 운동과 유기농업 협동조합… 달리트 여성의 자립 기반
달리트들은 오랫동안 토지 소유조차 제한된 채 농노와 소작농, 일용노동자로 살아가야 했다. 열악한 경제적 조건과 대물림된 빈곤 속에서 많은 이들이 빚과 고리대에 묶여 예속적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도 이어져 왔다.
국경을 초월한 협력은 식수 지원을 넘어, 달리트의 토지권 회복과 유기농업 협동조합 운동으로 이어졌다. 두 기관은 2006년부터 상층 카스트가 불법 점유한 ‘억압계급을 위한 토지(Panchami Lands)’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함께 전개했고, 2011년 기준 약 495만㎡의 토지가 회수돼 달리트에게 배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되찾은 땅은 이후 달리트 여성들의 유기농업과 협동조합 활동의 기반이 되었고, 여성들이 더 이상 일용직 임금노동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산과 생계를 책임지는 출발점이 됐다.
되찾은 땅에서 직접 키운 유기농 채소를 선보이는 달리트 여성협동조합원들. (사진 제공 = 한국희망재단)
2012년 HRDF 활동가들의 한국 초청 연수를 계기로, 달리트 여성 중심의 유기농업 협동조합 운동도 본격화됐다. HRDF는 한살림 등 한국의 유기농업과 협동조합 사례를 바탕으로 여성 생산자 조직을 꾸렸고, 2017년에는 인도 최초의 달리트 여성 유기농업 협동조합연합회가 설립됐으며 2023년 타밀나두주 ‘최고의 유기농 협동조합상’을 수상했다. 현재 52개 마을, 2,500명의 여성 조합원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은 되찾은 땅에서 유기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유통까지 주도하면서 자립의 기반을 넓혀 가고 있다.
HRDF 활동가 Paul은 “과거 달리트 여성들은 하루 9~10시간 노동을 하고도 일당 2달러를 받는 일용노동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협동조합 조합원으로서 자신의 땅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다”라며 “단순한 생산자를 넘어, 사업가로 성장해 스스로 소득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며, 자존감까지 회복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경제적 자립을 넘어 – 신용조합 설립과 판차야트(마을의회) 진출로 이어진 달리트 여성들의 성장
담보가 없어 은행 대출이 불가능했던 달리트 여성들은 고금리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HRDF는 2023년 여성 유기농 농민을 위한 신용조합(Credit Union)을 설립했고, 그 결과 1,200명 이상의 달리트 여성 조합원이 이 신용조합을 통해 농업 자금과 긴급 생활비를 조달하며 생계를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 자립의 경험은 달리트 여성들의 정치적 참여로도 이어졌다. HRDF는 협동조합 임원들에게 판차야트(마을의회) 선거 출마를 권장하고 판차야트 행정·회계·협상·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협동조합 활동으로 역량을 키운 여성들은 판차야트 선거에도 진출했고, 지역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식수와 도로, 주거, 교육 문제 해결을 이끄는 공적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그 결과 2020년에는 373명이 출마해 173명의 달리트 여성 농민이 판차야트에 당선됐고, 이들은 달리트 가정의 주택·식수·도로 인프라 접근권을 확보하고, 달리트 아동의 100% 취학률을 달성하며, 마을총회에서 달리트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는 달리트 여성들이 더 이상 개발사업의 수혜자에 머무르지 않고, 마을의 방향을 함께 결정하는 공적 주체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농촌 달리트 여성들의 유기농산물을 도시 달리트 여성들이 판매하며 연대한 바자회. (사진 제공 = 한국희망재단)
이번 생명의 신비상 활동분야 장려상 수상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를 되찾고, 침묵을 강요받던 여성들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며 공동체의 리더로 성장해 온 시간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HRDF와 한국희망재단의 20년 연대가 함께 일구어낸 이 변화는 국제개발협력이 한 공동체의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게 됐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