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25일 목요일매일미사묵상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는 절차,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 그리고 기도로 이루어지는 분별. 그러나 이 모든 규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지요. 누군가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그 상처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 마음을 모아 …… 청하면”(마태 18,19). 이는 단순한 합의의 기술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저마다 분노와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함께 서 있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 확신 대신 서로를 향한 두려움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누군가의 생각과 삶을 더 무너뜨리지는 않을지, 그 조심스러운 두려움을 안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청은, 먼저 서로의 아픔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용서를 서로 간의 계산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을 무너뜨리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18,22). 이 말씀은 형제에게 받은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풀이되는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용서는 상처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지치면서도, 다시! 분노가 식지 않았는데도, 다시! 그 ‘다시’가 용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공동체가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상처 속에서도 서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 배움의 자리 한가운데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배우기 참 힘들지요. 배우기 싫기도 합니다. 그런 상처받은 마음 또한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분명히!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