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창세기 제 22 강 '구원의 근원'
본문: 창 22:15-29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28-소돔과 고모라와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29-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Introduction: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TV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입니다. 우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활과 심리를 파악하는데 유익한 게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 전달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이것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가을동화'를 재미있고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 주제가는 저의 큰딸이 거의 외워서 부를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주말연속극 '태양은 가득히'를 유선 TV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월화드라마 '루키'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드라마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본구조가 4각 관계라는 것입니다. '가을동화'를 보세요. 준서와 은서, 태석이와 유미가 4각 관계를 이루며 드라마를 끌고 갑니다. '태양은 가득히'도 젊은 청춘 네 사람의 사랑과 갈등이 그 축입니다. 루키라는 드라마도 현세와 순심씨를 중심으로 현세친구와 부사장 딸, 이렇게 4각 관계로 드라마가 진행됩니다. 남녀 둘만의 관계를 다루어도 복잡 오묘한데 네 사람이 갈등하니 드라마가 재미없을 수 없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관련되어 드라마 선전하는 것 아닙니다. 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저의 관심은 삼각관계나 사각관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현저한 특징입니다. 그 특징은 주저, hesitation입니다. 어떤 경우는 옛사랑 때문에 주저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새로운 대상, 조건 좋은 대상 때문에 주저합니다.
왜 주저합니까?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집니다. 이 조건, 저 조건 따져봅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결정을 못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꼬여져갑니다. 그 사이에 오해가 생깁니다. 그러다 그 상황과 환경에 끼여서 거의 머리가 빠질 지경이 됩니다.
리더쉽의 핵심원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명확히 하라. 일단 결정한 이상 망설이지 말라.' 보세요. 주저한다는 것은 우선 순위가 명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망설이고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리더의 역할은 우선 순위를 명확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된 것은 집중해서 밀고 나가야합니다. 리더가 주저하고 망설이면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신중과 주저는 다른 것입니다. 신중은 확립된 기준과 원리로 우선 순위를 따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저는 우선 순위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저자 잭 켄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의 신작 제목은 The Power of focus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맥을 잡아라' 정도가 됩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제대로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집중하는 사람, the man of focus는 큰 그림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큰 그림은 단순 명확한 사고, 즉 simple mind의 사람의 것이라고 밝힙니다.
simple mind의 사람은 단순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련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미 분명한 원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분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힘과 능력의 사람입니다. 대가이며 거장입니다.
복음을 통해 보면 simple mind의 사람은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가장 우선되고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여기 이 땅에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충실한 청지기가 되나 욕심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나 자기 분수를 압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 때 균형을 가지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저하는 사람은 복잡합니다. 그 복잡함의 바탕에는 욕심이 깔려 있습니다. 다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내 것으로 꼭 삼아야하기 때문에 주저합니다.
본문의 롯을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얘기하며 천사들이 hurry, hurry합니다. 그러나 16절의 롯을 보세요.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롯이 지체합니다. 롯이 hesitate합니다. 롯이 주저합니다. 왜 입니까?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왜 복잡합니까? 그 곳 소돔에 투자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곳에 자기의 젊음을 투자했습니다. 정력과 정열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거두어야할 시기입니다. 이제 누려야할 시기입니다. 이제 즐겨야할 시간입니다. 모든 것이 그 곳에 다 투자되었기에 투자의 결실을 다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롯은 이제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하는 것입니다.
이러니 우선 순위가 보입니까? 보일리 없습니다. 멸망을 앞두고도, 유황과 불을 앞에 두고도 그곳에 미련이 남습니다. 그곳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여긴 온갖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러니 지체합니다.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hesitate, 주저주저하게 됩니다.
보세요, 여러분. 이 주저하는 모습, 지체하는 모습이 우리에겐 없습니까? 욕심이 우리를 주저하게 하진 않습니까? 여러분의 머리가 복잡하진 않습니까? 우선 순위를 몰라 헤매이진 않습니까? 폼만 청지기이지 다 내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까? 주님을 형식상 주라 부르지 사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고 지체하진 않습니까? 보세요. 주저하는 인간은 우리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현저한 특징입니다. 그는 확신이 없어 주저합니다. 신뢰 못해 주저합니다. 믿음이 없어 지체합니다. 지체하는 것은 구원이 너무도 필요한 사람의 뚜렷한 현상입니다.
Point 1: 구원의 근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그러면 구원의 근본이 뭐냐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은 지체합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롯 식구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끌어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그 성에서 그들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돌아보지 말라. 들에도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 분명하게 대피지침까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끌려나온 롯이 뭐라합니까? 19-20절을 보세요. 산까지 도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근처의 작은 성으로 도망하겠다고 반어거지를 부립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를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롯의 건강이 좋지 못해 산까지 가기에는 힘이 들어서 이런 부탁을 했을 것으로 여깁니다. 또 하나는 롯이 죄악의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큰 도시는 죄악이 심각해 멸망을 받겠지만 작은 성은 괜찮지 않겠나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큰 성이 오염되었으니 작은 성도 상태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산으로 피하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작은 성도 진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하나님은 롯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작은 성은 보존시킵니다. 그 성 이름을 작다라는 의미의 소알로 부릅니다. 원래는 창세기 14장에 나온대로 벨라지만 롯의 간청이후로 소알로 불려집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흐름을 자세히 보세요. 소돔의 수많은 사람들을 다 두고 왜 롯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까? 왜 산까지 못 가겠다는 롯을 두고서 심판의 경계선까지 바꾸면서 롯을 구원하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롯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인본주의는 이것을 '불공평'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부조리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 부릅니다. 16절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인자를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근본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원천입니다.
우리 20기 신입생들은 대단히 똑똑합니다. 그래서 질문들도 형이상학적이고 심오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질문 중에 이런 것이 많았습니다. '선조들중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오지에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인류애에 바탕한 원대한 질문들입니다. 20기의 장래가 기대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할 재간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제가 아는 것은 죄의 위력이 너무도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으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그 삯을 받아야 한다는 성경의 준엄한 메시지를 믿을 뿐입니다. 모두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처럼 저에게도 복음이 들려졌습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메시지가 들려졌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라 그 메시지가 들려졌습니다. 그 말씀 믿고서 도망할 뿐입니다. 생명을 보존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 근본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 인자와 자비하심을 믿고 바랄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답의 전부입니다. 더 복잡하고 심오한 것은 주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만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말씀을 기초로 선포합니다. 구원의 근원은 우리의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보와 지혜도 아닙니다. 우리의 테크날리지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탁월한 경영원리와 출세비결도 아닙니다. 우리의 놀라만한 의료수준이나 복제기술도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분의 인자하심입니다. 그 분의 은혜의 방도를 의지해야합니다. 하늘아버지의 독생자의 십자가와 보혈을 의지해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 자비로우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이 하신 일을 붙들어야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저는 그 은혜와 자비의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신년기도회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은 신명기 28장 1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탁월함의 약속입니다. 형통의 약속입니다. 그 전제가 뭡니까? Listen and simply follow! 말씀을 듣고 그저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했으면 도망하는 것입니다. 돌아보지 말라 했으면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머무르지 말라했으면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Simply follow! 그저 말씀을 따르는 것이 탁월함의 비결입니다. 형통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탁월한 삶 아닙니까? 형통한 삶 아닙니까? 행복한 삶 아닙니까? 그런 삶을 마다할 사람 있습니까? 그 근원이 뭡니까? 그 핵심이 뭡니까?
주저함입니까? 복잡한 계산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쓸데없는 길이 많을 때 우리는 헤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너무 길이 많은데 있습니다. 너무 계산이 복잡한데 있습니다. 행복은 한 길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한 길을 발견한 삶이 형통한 삶이요 탁월한 삶입니다. 그래서 그 한 길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길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압니다. 가지치기를 생각해 보세요. 모든 가지를 그대로 두어야 풍성합니까? 제대로 가지치기를 해야 풍성해집니다. 말씀에 단순히 반응하고 따르는 것, 말씀 따라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입니다.
구원의 체험은 무슨 엑스타시가 아닙니다. 구원의 가장 놀라운 경험은 말씀이 나를 살린 경험입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내가 살고 회복되었다 그것보다 놀라운 경험은 없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이 말씀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이 그를 살렸습니다. 이 말씀에 사로잡혀 평생 복음을 위해 살고 죽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와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하리라' 이 말씀을 베드로는 좇아 따라갑니다. 이 말씀이 그의 전 생애를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꿉니다. 그 말씀으로 대로마제국에 당당히 맞서고 복음의 영광속에 죽습니다.
말씀은 롯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롯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고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되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구원의 근원입니다. 그 분의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십시오. 단순히 따르십시오. 결코 우리를 후회케 하시지 않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곳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우리 삶 가운데 에너지가 용솟음칩니다. 바로 그 곳이 구원과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int 2: 기억
이제 본문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27-2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명확한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계를 넘은 죄악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 심판의 새벽에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섰던 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그 곳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이 그 곳에 주님의 경고가 어떻게 실현되나를 확인하려 갔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추적해보면 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에, 그것도 새벽에 간 이유는 달리 이유가 없습니다. 예배하러 그곳에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장소를 기억하여 예배를 드리러 간 것으로, 하나님을 높이려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예배의 장소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명확히 실현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에 너무도 엄밀히 실행됩니다. 그것을 예배의 장소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29절을 보세요. 여기에 예배의 비밀하나가 나옵니다. 예배를 통해 아브라함이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신다는 사실, remember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롯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열심히 예배하는 자에게, 예배로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기억하심을 알려주십니다.
같은 아씨지만 창세기 삼장의 아씨와는 대조적입니다. 거기 나오는 아담을 보세요. 3장 8절을 보세요.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나는 시간에, 예배의 시간에, 죄에 빠진 아담이 어떻게 합니까? 예배의 자리로 부지런히 일찍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찾아오셨지만 아담은 동산나무 사이에 숨어버립니다. 이러니 예배의 비밀이 열립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되려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 버린 부끄러운 예배자의 모습을 보세요. 자꾸 피합니다. 부끄러워합니다. 남의 탓만 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다해, 믿음으로 예배하러 나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를 기억하십니다. 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고 교제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예배가 이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remember,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특별히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성령으로 임재하는 시간입니다. 영광을 부으시는 시간입니다. 또한 바로 그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약속을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시간이 예배입니다.
지난주간이 설 명절이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수천만이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귀한 시간을 갖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도 이런 명절들이 있습니다. 설에 해당하는 나팔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명절들의 특징을 잘 살펴보세요. 이 기억하는 것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자 유월절을 지킵니다. 하나님께 언약을 받을 것을 기억하고자 오순절을 지킵니다. 광야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초막절을 지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3대 명절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출애굽 후 광야 40년의 연단도 따지고 보면 기억훈련입니다. 불신앙의 사람은 금방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 분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애굽의 고기 가마에 잘 삶겨진 고기를 그리워합니다. 떡 바구니를 그리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펼치신 능하신 손을, 홍해를 가르신 능하신 일을 금방 잊고 그 분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당장 닥친 문제에 휩싸여 버립니다. 그곳에 매여 쩔쩔맵니다. 불평합니다. 이들을 훈련시키다가 1년이 지납니다. 5년 십 년이 지납니다. 몇 주면 가는 길을 40년이 걸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난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를 공부하면서도 역시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하만의 몰락과 하나님의 간섭을 체험한 유다인들이 어떤 역사적 교훈을 남깁니다. 부림절을 만듭니다. 그 날을 지키면서 비극의 날이 될 뻔한 역사의 사실을 새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너무도 놀라운 섭리를 반복 반복해서 기억합니다. 오늘의 유대인들도 여전히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읽으며 하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짓밟는 시늉을 합니다. 마음 깊이 그 날의 교훈을 기억하고 되새깁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D-day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향해 돌진해간 날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꺽은 날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흘리셔서 죄를 덮은 날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시킨 날입니다. 그 십자가의 약속을, D-day의 약속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은 죄를 토해냅니다. 죄를 품고있질 않습니다. 도리어 죄를 미워합니다. 악한 것에 미련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한 약속을 지혜롭게 붙들고 나아갑니다.
또한 복음은 V-day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승리의 그 날입니다. 우리를 회복하시는 그 날입니다. 영광의 몸을 주시고 영원을 누리게 하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질 않습니다. 고난이 훈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의 의미를 모를 때 그것은 재앙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 일어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간섭하시며 기가 막히게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비밀입니다. 예배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지난주간 우리는 대표팀의 축구경기를 보았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홍명보 선수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수비수입니다. 그의 탁월한 점이 무엇입니까? 그를 자세히 보세요. 그는 상대방이 아무리 요란하게 몸동작을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공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또한 지혜롭게 공격을 가로막고 저지합니다. 집중의 힘입니다.
믿음의 삶에도 이런 집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위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며 우리의 살길은 주인의 말씀 따라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분의 은혜의 길을 기억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체하지 마십시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힘 모아 집중하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기억하는 지혜로운 주의 청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Prayer:거룩하신 아버지여, 주님만이 구원의 근원입니다. 주의 말씀만 따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창 22:15-29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28-소돔과 고모라와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29-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Introduction: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TV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입니다. 우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활과 심리를 파악하는데 유익한 게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 전달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면 이것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가을동화'를 재미있고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그 주제가는 저의 큰딸이 거의 외워서 부를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주말연속극 '태양은 가득히'를 유선 TV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월화드라마 '루키'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드라마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본구조가 4각 관계라는 것입니다. '가을동화'를 보세요. 준서와 은서, 태석이와 유미가 4각 관계를 이루며 드라마를 끌고 갑니다. '태양은 가득히'도 젊은 청춘 네 사람의 사랑과 갈등이 그 축입니다. 루키라는 드라마도 현세와 순심씨를 중심으로 현세친구와 부사장 딸, 이렇게 4각 관계로 드라마가 진행됩니다. 남녀 둘만의 관계를 다루어도 복잡 오묘한데 네 사람이 갈등하니 드라마가 재미없을 수 없습니다.
제가 방송국에 관련되어 드라마 선전하는 것 아닙니다. 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저의 관심은 삼각관계나 사각관계에서 나타나는 어떤 현저한 특징입니다. 그 특징은 주저, hesitation입니다. 어떤 경우는 옛사랑 때문에 주저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새로운 대상, 조건 좋은 대상 때문에 주저합니다.
왜 주저합니까?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집니다. 이 조건, 저 조건 따져봅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결정을 못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꼬여져갑니다. 그 사이에 오해가 생깁니다. 그러다 그 상황과 환경에 끼여서 거의 머리가 빠질 지경이 됩니다.
리더쉽의 핵심원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선 순위를 명확히 하라. 일단 결정한 이상 망설이지 말라.' 보세요. 주저한다는 것은 우선 순위가 명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망설이고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리더의 역할은 우선 순위를 명확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된 것은 집중해서 밀고 나가야합니다. 리더가 주저하고 망설이면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신중과 주저는 다른 것입니다. 신중은 확립된 기준과 원리로 우선 순위를 따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저는 우선 순위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의 저자 잭 켄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의 신작 제목은 The Power of focus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맥을 잡아라' 정도가 됩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제대로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집중하는 사람, the man of focus는 큰 그림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큰 그림은 단순 명확한 사고, 즉 simple mind의 사람의 것이라고 밝힙니다.
simple mind의 사람은 단순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련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미 분명한 원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분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힘과 능력의 사람입니다. 대가이며 거장입니다.
복음을 통해 보면 simple mind의 사람은 큰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가장 우선되고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여기 이 땅에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충실한 청지기가 되나 욕심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나 자기 분수를 압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 때 균형을 가지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저하는 사람은 복잡합니다. 그 복잡함의 바탕에는 욕심이 깔려 있습니다. 다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내 것으로 꼭 삼아야하기 때문에 주저합니다.
본문의 롯을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얘기하며 천사들이 hurry, hurry합니다. 그러나 16절의 롯을 보세요.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롯이 지체합니다. 롯이 hesitate합니다. 롯이 주저합니다. 왜 입니까?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왜 복잡합니까? 그 곳 소돔에 투자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곳에 자기의 젊음을 투자했습니다. 정력과 정열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도시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거두어야할 시기입니다. 이제 누려야할 시기입니다. 이제 즐겨야할 시간입니다. 모든 것이 그 곳에 다 투자되었기에 투자의 결실을 다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롯은 이제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하는 것입니다.
이러니 우선 순위가 보입니까? 보일리 없습니다. 멸망을 앞두고도, 유황과 불을 앞에 두고도 그곳에 미련이 남습니다. 그곳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여긴 온갖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러니 지체합니다.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hesitate, 주저주저하게 됩니다.
보세요, 여러분. 이 주저하는 모습, 지체하는 모습이 우리에겐 없습니까? 욕심이 우리를 주저하게 하진 않습니까? 여러분의 머리가 복잡하진 않습니까? 우선 순위를 몰라 헤매이진 않습니까? 폼만 청지기이지 다 내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까? 주님을 형식상 주라 부르지 사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고 지체하진 않습니까? 보세요. 주저하는 인간은 우리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현저한 특징입니다. 그는 확신이 없어 주저합니다. 신뢰 못해 주저합니다. 믿음이 없어 지체합니다. 지체하는 것은 구원이 너무도 필요한 사람의 뚜렷한 현상입니다.
Point 1: 구원의 근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그러면 구원의 근본이 뭐냐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은 지체합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롯 식구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끌어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그 성에서 그들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돌아보지 말라. 들에도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 분명하게 대피지침까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끌려나온 롯이 뭐라합니까? 19-20절을 보세요. 산까지 도망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근처의 작은 성으로 도망하겠다고 반어거지를 부립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를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롯의 건강이 좋지 못해 산까지 가기에는 힘이 들어서 이런 부탁을 했을 것으로 여깁니다. 또 하나는 롯이 죄악의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큰 도시는 죄악이 심각해 멸망을 받겠지만 작은 성은 괜찮지 않겠나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큰 성이 오염되었으니 작은 성도 상태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산으로 피하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작은 성도 진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하나님은 롯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작은 성은 보존시킵니다. 그 성 이름을 작다라는 의미의 소알로 부릅니다. 원래는 창세기 14장에 나온대로 벨라지만 롯의 간청이후로 소알로 불려집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흐름을 자세히 보세요. 소돔의 수많은 사람들을 다 두고 왜 롯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까? 왜 산까지 못 가겠다는 롯을 두고서 심판의 경계선까지 바꾸면서 롯을 구원하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롯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인본주의는 이것을 '불공평'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부조리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 부릅니다. 16절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인자를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근본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원천입니다.
우리 20기 신입생들은 대단히 똑똑합니다. 그래서 질문들도 형이상학적이고 심오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질문 중에 이런 것이 많았습니다. '선조들중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오지에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인류애에 바탕한 원대한 질문들입니다. 20기의 장래가 기대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할 재간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제가 아는 것은 죄의 위력이 너무도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으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그 삯을 받아야 한다는 성경의 준엄한 메시지를 믿을 뿐입니다. 모두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처럼 저에게도 복음이 들려졌습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메시지가 들려졌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라 그 메시지가 들려졌습니다. 그 말씀 믿고서 도망할 뿐입니다. 생명을 보존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그 근본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그 인자와 자비하심을 믿고 바랄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답의 전부입니다. 더 복잡하고 심오한 것은 주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만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말씀을 기초로 선포합니다. 구원의 근원은 우리의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보와 지혜도 아닙니다. 우리의 테크날리지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탁월한 경영원리와 출세비결도 아닙니다. 우리의 놀라만한 의료수준이나 복제기술도 아닙니다. 구원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분의 인자하심입니다. 그 분의 은혜의 방도를 의지해야합니다. 하늘아버지의 독생자의 십자가와 보혈을 의지해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 자비로우신 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이 하신 일을 붙들어야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저는 그 은혜와 자비의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신년기도회 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은 신명기 28장 1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탁월함의 약속입니다. 형통의 약속입니다. 그 전제가 뭡니까? Listen and simply follow! 말씀을 듣고 그저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했으면 도망하는 것입니다. 돌아보지 말라 했으면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머무르지 말라했으면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Simply follow! 그저 말씀을 따르는 것이 탁월함의 비결입니다. 형통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탁월한 삶 아닙니까? 형통한 삶 아닙니까? 행복한 삶 아닙니까? 그런 삶을 마다할 사람 있습니까? 그 근원이 뭡니까? 그 핵심이 뭡니까?
주저함입니까? 복잡한 계산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쓸데없는 길이 많을 때 우리는 헤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너무 길이 많은데 있습니다. 너무 계산이 복잡한데 있습니다. 행복은 한 길을 발견하는데 있습니다. 한 길을 발견한 삶이 형통한 삶이요 탁월한 삶입니다. 그래서 그 한 길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길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압니다. 가지치기를 생각해 보세요. 모든 가지를 그대로 두어야 풍성합니까? 제대로 가지치기를 해야 풍성해집니다. 말씀에 단순히 반응하고 따르는 것, 말씀 따라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입니다.
구원의 체험은 무슨 엑스타시가 아닙니다. 구원의 가장 놀라운 경험은 말씀이 나를 살린 경험입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내가 살고 회복되었다 그것보다 놀라운 경험은 없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이 말씀으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이 그를 살렸습니다. 이 말씀에 사로잡혀 평생 복음을 위해 살고 죽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와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하리라' 이 말씀을 베드로는 좇아 따라갑니다. 이 말씀이 그의 전 생애를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꿉니다. 그 말씀으로 대로마제국에 당당히 맞서고 복음의 영광속에 죽습니다.
말씀은 롯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롯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고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되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구원의 근원입니다. 그 분의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십시오. 단순히 따르십시오. 결코 우리를 후회케 하시지 않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곳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우리 삶 가운데 에너지가 용솟음칩니다. 바로 그 곳이 구원과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int 2: 기억
이제 본문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각하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27-29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명확한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계를 넘은 죄악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 심판의 새벽에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섰던 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그 곳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이 그 곳에 주님의 경고가 어떻게 실현되나를 확인하려 갔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추적해보면 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에, 그것도 새벽에 간 이유는 달리 이유가 없습니다. 예배하러 그곳에 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장소를 기억하여 예배를 드리러 간 것으로, 하나님을 높이려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예배의 장소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명확히 실현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에 너무도 엄밀히 실행됩니다. 그것을 예배의 장소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29절을 보세요. 여기에 예배의 비밀하나가 나옵니다. 예배를 통해 아브라함이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신다는 사실, remember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롯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열심히 예배하는 자에게, 예배로 나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기억하심을 알려주십니다.
같은 아씨지만 창세기 삼장의 아씨와는 대조적입니다. 거기 나오는 아담을 보세요. 3장 8절을 보세요.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나는 시간에, 예배의 시간에, 죄에 빠진 아담이 어떻게 합니까? 예배의 자리로 부지런히 일찍이 나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찾아오셨지만 아담은 동산나무 사이에 숨어버립니다. 이러니 예배의 비밀이 열립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까? 되려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 버린 부끄러운 예배자의 모습을 보세요. 자꾸 피합니다. 부끄러워합니다. 남의 탓만 합니다.
그러나 열심을 다해, 믿음으로 예배하러 나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를 기억하십니다. 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고 교제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예배가 이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remember,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특별히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성령으로 임재하는 시간입니다. 영광을 부으시는 시간입니다. 또한 바로 그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기억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약속을 기억하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시간이 예배입니다.
지난주간이 설 명절이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수천만이 이동을 합니다. 그래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귀한 시간을 갖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도 이런 명절들이 있습니다. 설에 해당하는 나팔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명절들의 특징을 잘 살펴보세요. 이 기억하는 것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자 유월절을 지킵니다. 하나님께 언약을 받을 것을 기억하고자 오순절을 지킵니다. 광야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초막절을 지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3대 명절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출애굽 후 광야 40년의 연단도 따지고 보면 기억훈련입니다. 불신앙의 사람은 금방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 분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애굽의 고기 가마에 잘 삶겨진 고기를 그리워합니다. 떡 바구니를 그리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펼치신 능하신 손을, 홍해를 가르신 능하신 일을 금방 잊고 그 분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가나안 땅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당장 닥친 문제에 휩싸여 버립니다. 그곳에 매여 쩔쩔맵니다. 불평합니다. 이들을 훈련시키다가 1년이 지납니다. 5년 십 년이 지납니다. 몇 주면 가는 길을 40년이 걸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난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를 공부하면서도 역시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하만의 몰락과 하나님의 간섭을 체험한 유다인들이 어떤 역사적 교훈을 남깁니다. 부림절을 만듭니다. 그 날을 지키면서 비극의 날이 될 뻔한 역사의 사실을 새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너무도 놀라운 섭리를 반복 반복해서 기억합니다. 오늘의 유대인들도 여전히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읽으며 하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짓밟는 시늉을 합니다. 마음 깊이 그 날의 교훈을 기억하고 되새깁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D-day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향해 돌진해간 날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꺽은 날입니다. 십자가 보혈을 흘리셔서 죄를 덮은 날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시킨 날입니다. 그 십자가의 약속을, D-day의 약속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은 죄를 토해냅니다. 죄를 품고있질 않습니다. 도리어 죄를 미워합니다. 악한 것에 미련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한 약속을 지혜롭게 붙들고 나아갑니다.
또한 복음은 V-day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승리의 그 날입니다. 우리를 회복하시는 그 날입니다. 영광의 몸을 주시고 영원을 누리게 하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질 않습니다. 고난이 훈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의 의미를 모를 때 그것은 재앙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다시 일어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주님은 반드시 기억하십니다. 간섭하시며 기가 막히게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비밀입니다. 예배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지난주간 우리는 대표팀의 축구경기를 보았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홍명보 선수에게 관심이 갔습니다.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수비수입니다. 그의 탁월한 점이 무엇입니까? 그를 자세히 보세요. 그는 상대방이 아무리 요란하게 몸동작을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공에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또한 지혜롭게 공격을 가로막고 저지합니다. 집중의 힘입니다.
믿음의 삶에도 이런 집중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집중할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위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니며 우리의 살길은 주인의 말씀 따라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분의 은혜의 길을 기억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저하지 마십시오. 지체하지 마십시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힘 모아 집중하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기억하는 지혜로운 주의 청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Prayer:거룩하신 아버지여, 주님만이 구원의 근원입니다. 주의 말씀만 따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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