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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뱅크

사사기 3장 31절

작성자제트 스키(재우)|작성시간02.05.24|조회수56 목록 댓글 0
7) 사사기 3장 31절

31 - After Ehud came Shamgar son of Anath, who struck down six hundred Philistines with an oxgoad. He too saved Israel.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들의 숨통을 조르는 무서운 적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블레셋 민족이다. 드디어 이 블레셋 민족과의 운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이 운명적인 대결 초기에 바로 삼갈이라는 농부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농사를 짓던 중에 블레셋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육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 때 농사짓던 농기구로 600명을 죽이게 된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무리 약하고 적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만 있으면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기만 하면 블레셋은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패배하는 이유는 바로 신앙과 정신의 타락에서 비롯된다.
삼갈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이 전에 기록하고 있는 에훗에 비해 상세한 설명도 없다. 비록 짧은 이야기지만 아주 중요한 정보가 있다.
첫 번째로 이 싸움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 민족간의 운명적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무서운 원수이다. 출애굽 당시 해변의 좋은 길을 아닌 물도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블레셋 민족 때문이었다. 이들과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길로 이들을 인도하셨다. 삼손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블레셋 민족의 식민지 백성이었다. 아무런 구별이 없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다. 삼손을 아예 묶어서 넘겨 줄 정도였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는 블레셋 민족과 싸우다 하나님의 법궤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실로의 성막이 불에 타 버렸다. 사울왕 시대에는 어떤가 ? 블레셋과 전쟁을 하면서 그의 두 아들을 길보아 산에서 모두 잃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후부터는 승리하기 시작한다. 정말 블레셋 민족은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무서운 원수인 것이다.
삼갈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과 블레셋 민족과의 관계는 더 이상 힘의 관계가 아님을 밝혀 준다. 이 사건은 농부가 농기구로 600명을 무찌른 사건이다. 위기에서 구해낸 사건이다. 바로 힘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며 성령의 문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삼갈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아낫이다. 아낫은 가나안 민족의 여신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서 삼갈의 부모는 가나안화 되어간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삼갈의 부모는 상당히 가나안 종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즉 삼갈을 아낫 여신에게 바쳤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삼갈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에 정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다. 일종의 신앙적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들을 물리쳤다. 성령의 역사는 신학적인 정통성이나 지식과는 상관이 없다. 성령을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좀 부족하고 무식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 부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의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움켜쥐어야 한다. 실제로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간구해서 더 큰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거룩한 질투심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며 더 간절히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않으시는 분이다. 똑똑한 사람보다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다 버리고 자신 앞에 나아와서 은혜를 움켜쥐려고 간구하며 몸무림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신다. 말씀을 붙들며 몸부림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기적이 나타난다.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다. 무식해지라는 소리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믿지 말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 삼갈이 사용한 무기를 살펴보자. 말씀에는 '소모는 막대기(oxgoad)'로 표현되어 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이다. 이 농기구는 소등을 긁어주는 막대기 내지는 소가 끄는 쟁기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삼갈은 농부이다. 정식 군인이 아니다. 무기가 칼이나 창도 없었다. 바로 이 막대기로 블레셋 민족과 싸웠고 600명이나 죽였던 것이다.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네 번째로 기록의 간단성이다. 그것은 삼갈의 구원은 단 한 번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단 한 번만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었던 사람이다. 성령이 떠나자마자 다시 평범한 농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예전의 평범한 생활로 다시 돌아갔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록된 삼갈의 사건이 나타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바로 블레셋 민족과의 싸움은 무기와 사람의 수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기가 현대화가 되었느냐 ? 또는 많은 군사가 있느냐 ? 여기에 승패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에 싸움에 승패가 있는 것이다. 준비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소를 모는 막대기로도 블레셋 민족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삼갈은 삼손을 예표하기도 한다. 후에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1000명을 죽이기도 한다. 삼손은 성령의 사람이다. 신약시대에는 누구나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구약의 시대에는 구별되어 있었다. 바로 나실인이 그 사람이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 머리를 자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길게 머리를 길러야만 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그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었다. 이들은 성령의 임하심을 준비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다.
위기 상황이었다. 과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이처럼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오직 성령 충만에 있다. 우리에게도 이 삼갈의 기록과도 같은 체험이 있다. 우리가 가장 힘든 시기에 성령께서 찾아오셨다. 그리고 위로하시고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케 하신 기억이 있다. 이런 기억은 우리가 위기 상황에 있을 때에 우리를 승리하게 할 수 있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주님! 나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주소서. 그리고 이 어려움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소서.' 이럴 때에 불같은 마음이 일어나 나쁜 습관과 거짓된 교제를 과감하게 버리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승리를 주신다.
삼갈의 사건은 바로 이런 것이다. 분명 어려울 때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민족에게 짓밟혀 하나님의 백성의 능력을 잃을 때 삼갈을 기억하는 것이다. '소를 모는 막대기로도 그런 승리를 거두었는데 지금 우리가 패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 것에 배불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돌이킴의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 다시 한 번 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하신다. 아무리 우리가 원하다고 해도 성령을 붙잡을 수는 없다. 그 대신 우리의 관심은 과연 성령님은 누구인가 ? 삼갈의 구원과 삼손의 구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에 붙들리기만 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된다. 내성적이 성격이 사자처럼 용감해진다. 덤벙대는 사람이 치밀한 전략가가 되고 평범한 설교가가 되어 엄청난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 운동은 과연 무엇인가 ? 말씀없이도 나타날 때가 있다. 바로 은사 운동이 그것이다. 오랫동안 영적으로 메말랐던 곳에 그리고 마음이 병들고 강팍해져 더 이상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을 때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 아직도 나를 사랑하시고 알기를 원하시는가 ? 이것에 대해 알고 싶을 때 기적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지만 이러한 은사 운동은 오래 가지 않는다. 크게 한 번 역사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면 말씀의 역사는 과연 무엇인가 ? 메마른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라기보다는 밭을 가는 일이다.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 속에 완전히 파고 들어가서 하나님 없이 산 세월이 얼마나 큰 죄인지 교만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께서 능력있게 말씀을 증거하시면 마음 깊은 곳에 죄의식이 일어나서 온 영혼이 떨리게 되며 하나님의 용서를 크게 경험하게 된다. 큰 기쁨이 몰려오게 된다. 마음 속의 미신과 무지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은사 운동에 비해 상당히 지속적이다. 그렇지만 은사 운동은 이 말씀 운동을 위한 하나의 준비과정이다. 삼갈의 구원이 바로 이 은사 운동의 성격과 유사하다. 단회적이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손도 일종의 은사 운동가이다. 성령이 주시는 괴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지만 간헐적인 성격이다.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면 굉장한 구원을 이루지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자신의 도덕성조차 전혀 지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사무엘은 나실인으로 성령의 사람이었다. 동일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철저한 말씀의 사람이었다. 반대로 초능력의 기록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의 계속적인 설교 사역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고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기초를 다시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는 말씀 역사로 나아가는 하나의 준비과정이다. 그래서 곧 소멸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은사나 능력이 말씀을 가로막아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렇다면 삼갈이 물리쳤으며 이스라엘 백성의 맞수가 되었던 블레셋 민족의 정체는 과연 누구인가 ? 왜 영원히 원수가 되었을까 ?
원래 블레셋은 가나안에 원래 살던 민족은 아니었다. 이들은 크레타섬에서 이주한 해양민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와 비슷한 시기에 크레타 섬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비록 그들이 가나안 땅에 살기는 했지만 가나안 원주민처럼 무지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섯 개의 도시 국가로 이루어졌다. 즉 정치나 외교는 독자적으로 하면서도 종교나 전쟁은 힘을 합쳐서 함께 감당하는 대단히 근대적인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올림픽도 역시 그 기원에서는 블레셋 민족의 사상과 비슷하다. 즉 인간의 위대함과 가능성을 찬양하는 제전이요 축제이다. 블레셋 민족 역시 인간의 위대함을 믿는 나라였다. 이 민족은 다곤이라는 물고기 우상을 섬긴다. 그래서 이 우상을 기념하는 다곤제전이라는 축제가 있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력없는 백성이었다. 여호와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백성이었다. 안식일에 일도 하지 못한다. 또한 벌거벗고 운동도 하지 못한다. 즉 하나님이 모든 삶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이요 저기서도 하나님이다. 바로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백성이었다. 그러나 블레셋 민족은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죄라는 개념은 절대 없었다. 인간은 좋은 여건만 주어지고 서로 힘을 합치기만 하면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블레셋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상당히 멋있어 보인다. 인본주의 시각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노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적인 시각에서는 블레셋 민족이 흉악한 죄인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결코 허수아비가 아니며 죄 역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죄는 단순한 실수나 무지나 부족함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가능성과 지식과 젊음을 부인하고 자기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한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적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을 믿지만 자기를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은 결코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바로 십자가의 원수인 것이다. 블레셋화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죄를 단순한 상처로 보고 이런 상처를 위로하고 격려해서 잘 살게 도와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죄는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십자가 위해 못 박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이 공동체가 말씀으로 지속적으로 자라가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자신을 제한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이러한 신앙 공동체가 바로 성령의 역사가 흘러나오는 샘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교회 안에서 영혼을 축이는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몸의 일부를 드려야 한다. 나실인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를 깍지 않았다. 성령님께 붙들리기 위해서는 자기 몸의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다하게 되면 성령의 능력은 절대로 의지할 수 없다.
나쁜 것은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를 중독시키는 것이다. 설사 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 영혼을 중독시키게 되면 성령의 능력을 빼앗아 가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는가 ? 이런 질문을 하며 자신을 제한할 때 비로서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쓰레기로 가득 채워 놓고 성령님께 역사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성령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전쟁은 무기나 사람의 수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구원을 이룰 수 있다. 삼갈과 같은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신실한 공동체에서 자신을 제한하고 우리 몸의 사용을 제한하며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 그리고 그 은혜에 사생결단하고 매달리는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에 절대로 소극적이어서는 안된다. 은혜는 전심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이 은혜는 언제나 말씀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지 않는 은혜는 삼갈의 기록처럼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체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든든하게 뒷받침되어야 그 은혜가 삶 가운데 역사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 은혜를 든든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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