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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명심보감(계선편)1장

작성자松亭|작성시간07.07.24|조회수204 목록 댓글 2

 

明心寶鑑명심보감

(繼善篇계선편)1장

 

原文원문: 子曰자왈 爲善者위선자는 天천이 報之以福보지이복하고 爲不善者위불선자는 天천이 報之以禍보지이화니라.

 

語譯어역: 착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이에 보답하고, 악한 일을 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이에 보답한다. (孔子공자)

 

註주: 孔子공자: 기원전552~479 春秋춘추시대 말기 魯노나라의 昌平鄕 阜+取邑창평향 추읍: 지금의 山東省산동성 曲阜현곡부현에서 탄생하였으니 이름은 丘구. 字자는 仲尼중니다. 仁인을 근본으로 하는 倫理道德윤리도덕을 설명하여 사람들이 갈 길을 밝힘으로써 예수,석가와 더불어 세계 三大 聖人삼대성인으로 일철어 진다.

 

공자는 도탄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아며, 理想的이상적인 통일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천하의 여러 제후들을 巡訪순방하고 王道政治왕도정치를 부르짖었으나, 이에 呼應호응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後進후진들을 교육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詩經시경》《書經서경》《易經역경》의 편찬과 《春秋춘추》등에 著述저술 등의 사업에 몰두하였다. 공자의 제자는 3000여명이라고 하며, 그 가운데서 뛰어난 제자가 72명이었다고 한다. 공자는 堯舜요순을 理想的이상적인 군주로 찬양하고 禹우 湯탕 文武(문무: 문왕과 무왕을 합쳐서 부르는 말임)등 三王삼왕을 추대함으로써 공자 이전의 중국을 체계화 하였으며, 그의 思想사상은 爾來이래 이천수백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에 있어 정치 . 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朝鮮時代조선시대가 儒敎유교의 極盛時期극성시기로서 유교에 배치되는 思想사상을 논하는 자에게는 斯文亂賊사문나적이라고 하는 極惡극악한 죄명이었다.

 

해설: 현재 말해서 善선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준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親近친근한 사람이 많고, 돕는 사람이 많아 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번영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려고 들기 때문에 孤立고립을 불러오게 되고,따라서 불행과 悲運비운이 닥쳐온다.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그러하며 또 東西古今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공자의 말씀은 선의 좋은 점과  악의 나쁜 점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선한 자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린다는 데 대한 實話실화 한 토막을 실으니 讀者諸賢독자제현은 참고해 주기 바란다.

 

조선 선조대왕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우리 나라는 明명나라를 宗主國종주국으로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여러 번 使臣사신이 명나라를 드나들었으며 사신이 들어갈 때 마다 여러 사람의 通譯官통역관이 따라가서 통변하는 일을 맡아 했는데, 이들을 흔히 通使통사 라고 불렀다.

 

한 번은 사신이 명나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譯官역관으로서 홍순언이라는 통사와 그밖에 백가 성을 가진 통사 한 사람이 따라갔다.

어느 닐 밤 통사는 젊은 나이에 호탕한 풍정을 금할길 없어 북경성 안에서 가장 호사스런 紅燈街홍등가를 찾게 되었다. 어느 靑樓청루 앞을 지나노라니까 이팔 芳年방년의 美人圖미인도 한 폭이 나붙어 있는데 그야말로 傾國之色경국지색이었다.

 

그런데 그림 밑에는 하룻밤을 같이 지내는 데 銀子은자 2000냥이라고 적혀 있었다. 은자 2000냥이라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만져보지도 못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나 絶世美貌절세미모에 유혹을 받은 홍 통사는 도저히 그대로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주머니 속을 생각해 보니, 마침 사람들로부터 물건 사다 달라고 맡은 돈과 나라돈을 합쳐서 어음이 2000냥 정도가 들어 있었다. 일시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홍 통사는 무조건 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순간 미녀의 어여쁜 뺨 위에서 두 줄기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홍 통사는 미녀의 어깨를 향하여 가던 손을 급히 멈추고 갑작스럽게 우는 까닭을 묻게 되었다. 여인은 처음에는 흐느낌 때문에 말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 만에야 간신히 이를 진정하고 말을 꺼냈다. 여인은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 高官고관을 지낸 사람의 귀여운 외동딸이었다. 부귀의 가문에 태어나서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영화를 누리면서 호화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아버지가 나라의 공금을 流用유용한 끝에 옥에 갇히게 되고 있는 재산을 통틀어 팔아도 유용한 공금의 액수를 채울 수가 없게 되었다. 생각다 못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기로 결심하고 이 청루로 나오게 된 것이며, 변상할 公金공금이 아직도 2000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몸값응 2000냥으로 결정하여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광고를 하게 된 것이다.

 

광고를 내걸은 지가 벌써 열흘이 되었건만 어낙 큰돈이라 누구 하나 감히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되어 아버지가 국법에 의해 처형될 날 짜를 사흘 앞두고 여인의 마음은 타는 듯 초조했다. 이제 다행이도 하늘이 돌보시어 홍 통사 같은 恩人은인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감격이 넘쳐서 눈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 통사는 피와 눈물의 사나이었다.

 

이 말을 듣자 이번 길에도 비단과 패물 등속을 무역하여 톡톡히 돈벌이를 하게 되였으며, 홍 통사는 한때의 의협심에서 은자 2000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내던지고는 힘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가장집물을 모도 처분하여 겨우 국가의 공금을 비롯한 남의 빚을 청산하고는 셋방살이로 전락하게 되고 통사도 떨어져서 집주름(복덕방) 노릇을 하여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뒤 선조 25년 왜의 침입으로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고 조정에서는 구원을 청하는 사신을 명나라로 파견하게 돠였는데, 여러 동료들의 주선으로 간신히 譯官역관으로 復職복직되어 사신을 따라 북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백 통사가 가지 못하게 되니, 홍 통사를 찾아와서 한 가지 청을 하는 것이었다. 그 청청이란 다음과 같았다.

 

백 통사는 북경에 들어갈 때마다 유숙하는 단골 여관이 있었으니 그 집주인은 王왕씨였다. 백 통사는 여러 번 북경을 드나드는 동안 왕ㅆ와 친하게 되었으며, 왕싸도 백 통사를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백 통사는 왕씨를 꾀어서 많은 자본을 얻어내, 비단과 패물 등속의 무역으로 크게 致富치부를 하고도, 번번히 실패했다는 핑계로 빌린 돈을 갚지 않았다. 왕씨는 세번이나 막대한 자본을 백통사에게 빌려주고 회수를 못하게 되니, 家産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말았다. 홍 통사에게 이번 길에 그 왕씨를 찾아보고 왕씨가 자기의 소식을 묻거든, 장사에 실패해서 곤궁하게 살다가 염병(열병:장질부사)이 유행되어 일가족이 다 죽었느니라고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왕씨가 곤란한 중에도 다소간의 돈을 줄 것이니 그것을 路需노수에 버태 쓰라고 했다. 홍 통사는 백 통사의 말을 들어보니 그 소행이 극히 可憎가증스러웠으나 쾌히 승락하고 북경길을 떠났다.

 

사신 일행이 북경성 10리 밖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 비단 장막이 드리워지고 한 명나라 官員관원이 나와서 마중을 하며 홍 역관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 것이다. 홍 통사가 앞으로 나서며 나요라고 대답하니,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한 채의 가마가 등대되고 홍 통사에게 오르기를 청했다. 명나라 관원이고 보니 거절할 수도 없고 하여 우리 나라 사신도 그대로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홍 통사는 영문도 모르고 가마에 실린 채 앞으로 나갔다. 북경성 안으로 들어서서 얼마를 또 가고 나서야 九重宮闕구중궁궐 같은 으리으리한 집 앞에서 몸을 내렸다. 정문이 활짝 열리고 한 貴人귀인이 정중하게 영접을 하며, 아버님 遠路원로에 수고 많으십니다.하며 깎듯이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홍 통사는 어안이벙벙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 귀인의 인도를 받아 몇 겹의 중문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안마당에서는 또 한 사람의 幽限貞靜유한정정한 귀부인이 正裝정장을 하고 마중을 했다. 비취보석 섬돌ㄹ 위를 올라서서 內室내실로 들어선 홍 통사는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꿈속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큰방 아랫목에 앉히더니 귀인 부부가 나란히 큰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홍 통사도 엉겹결에 답례를 했다. 그 부인이 꿇어앉더니, 아버님께 오랜만에 뵙는다고 말을 전했다. 부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벌써 오래 전 북경으로 사신을 따라갔을 때 구해주었던 그 청루의 주인공이었다. 그 때 홍 통사의 구원을 받아 죽을 운명이던 아버지를 살려내서 一家일가가 再生재생을 하게 되고, 그 뒤 출가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바로 兵部尙書(병부상서:국방부 장관) 石星석성인 것이다. 석성은 벼슬도 높고 재산도 만ㅅㅎ았으니 富貴부귀를 겸전해서 이름이 세상에 높았다.

 

이제 친정이 살아나게 되고 이와 같은 부귀한 家門가문에 들어와서 영화를 누리는 것이 모두 홍 통사의 덕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홍 통사를 義父의부로 작정했으며 조선서 사신이 들어올 때마다 홍 통사가 따라오는지를 탐문했으나 번번히 실망했던 것인데 이번에야 비로소 소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홍 통사는 옛 추억에 젖어들게 되고, 감격이 가슴속에 벅차올랐다. 홍 통사는 병부상서 石星석성 내외로 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은 물론, 당시 명나라 정부에서는 조선에 遠兵원병을 보내느냐 아니느냐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는데, 석성의 극력 추천으로 드디어 구원병이 우리나라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홍 통사는  그와 같은 막중한 국사를 마치고 나서 백 통사가 부탁하던 대로 북문 밖 왕씨의 호떡집을 찾았다.

 

왕씨는 반겨 홍 통사를 맞이하였으며 백 통사의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백 통사의 悲運비운을 슬퍼 했다. 그리고는 은자 100냥을 주선하여 주면서 그의 무덤 앞에 대신 제사라도 들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홍 통사는 명나라 왕씨의 뜨거운 인정에 눈물을 머금으며 백 통사의 極惡극악한 마음씨를 唾罵타매하였다.

 

홍 퐁사가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석성의 부인은 여러 수레에 이르는 금은보화를 선물하였다. 홍 통사는 굳이 이를 거절하고 마지못해 비단 다섯 상자만을 받아왔는데 그 비단은 報恩보은이라는 금 글씨를 수놓은 것이다. 지금 서울의 授恩洞수은동을 옛날에응 報恩緞보은단골이라 불렀는데, 이는 홍 통사가 여기에 살았다는 데서 由來유래했다.

 

나라에서는 일개 역관인 홍순인에게, 그 공로를 嘉賞가상하여 唐綾君당릉군이라는 莫重막중한 爵位작위를 내려 榮貴영귀함이 극도에 이르렀으며, 그 자손들도 번창하였다. 그러나 홍 통사가 서울로 돌아와서 백 통사ㅑ를 찾아 왔을 때는 참말로 백 통사가 살던 마을에 염병이  유행되어 백 통사의 온 집안 식구가 다 죽고 없었다.

 

홍 통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었더니, 나라에서는 백 통사의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명나라 왕씨에게로 보내주었다. 賞善閥惡상선벌악의 하늘의 攝理섭리란 실로 불변의 법칙이다,. 어찌 거울 삼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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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三道軒정태수 | 작성시간 07.07.26 6섯살 때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명심보감 첫문장인 이 글을 외운기억이 아련합니다...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松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7.28 삼도헌지기님 안녕 하세요? 맞아요 어릴적 명심보감 읽으면서 부끄러워 하던 생각을 하면 늘 외워 강독을 하던 생각이 납니다. 늘 행복 하시구요, 건필 하세요.건강 하시고능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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