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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갑집에서 부른 노래 한 편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 곳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온다. 지짐이를 붙이는 냄새 같기도 하고, 기름에 무엇을 튀겨내는 냄새 같기도 하다. 며칠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담아보지 못한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군침이 고이고, 코까지 벌름댄다.
‘
모처럼 포식을 하게 생겼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냄새가 나는 쪽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긴다.
햇볕을 가리느라 그런지 사내의 머리에는 커다란 삿갓이 놓여있다. 오랜 세월을 밖으로만 떠돌았는지, 삿갓 속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는 꺼칠한 기색이 완연하다.
잠시 후, 사내가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차일이 쳐있고,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마당 귀퉁이, 안채로 통하는 곳에는 음식상을 나르느라 시끌벅적하고, 풍악소리까지 울려대는 바람에 그야말로 잔치집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중이다.
‘허, 이거 오늘이야말로 포식을 할 운수로군.’
삿갓을 쓴 사내는 허흠허흠 헛기침을 해대며 마당으로 슬며시 들어선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다.
‘아, 이거 봐라.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어디 앉으라는 사람 하나 없어.’
사내는 두릿두릿 사방을 살핀다. 그 때 마침 풍악 소리가 멈추더니 대청마루에 앉은 귀빈인듯한 사람들이 풍월이 어쩌구 하며 수런거린다.
‘옳지, 저 친구들이 시를 지으려는 수작인가본데, 어디 슬슬 끼어들어볼까.’
사내는 대청마루 가까이로 슬슴슬금 다가선다. 그 사이 대청위의 사람들은 어느새 시를 지었는지 읊기도 하고, 무릎을 치며 감상을 하기도 한다. 마루 밑에 다가선 사내는 그들이 읊는 시를 듣고는 ‘어허’, ‘허, 좋군’, ‘글쎄’하며 한마디씩 토를 단다.
웬 낡아빠진 옷을 걸친,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 삿갓까지 쓴 사내가 자기들의 풍월놀이에 끼어들자 그들은 불쾌한 기색이 연연하다. 그 집 아들들은 사내를 내쫒기 위해 팔을 걷어부치기까지 한다.
그때, 한 선비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꺼낸다.
“허허. 저 거렁뱅이도 보자 하니 문자속 꽤나 익힌 것 같소. 마침 오늘이 이 집 주인어른 회갑날이고 하니 저 비렁뱅이에게도 우리 시를 한 수 지을 기회를 줍시다. 잘 지으면 한 상 거나하게 차려주기로 하고 말입니다.”
선비의 제안에 몇몇이 찬동을 한다.
“그럽시다.”
“별 들을만한 구석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한 수 짓게 해보지요.”
“언문 풍월이나마 제대로 하겠는지 원. 어디 들어보기나 하지요.”
그들의 제안에 사내는 냉큼 대청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보기보다 청아한 목소리로 시를 풀어낸다.
“彼坐老人不似人(저기 앉는 저 노인 사람같지 않구나)”
그가 가리킨 곳에는 환갑을 맞은 노인이 의젓한 자세로 앉아있다.
“저, 저런.”
“고얀놈 같으니라구.”
사람들이 부르르 또 팔을 걷어부친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렇지, 환갑집에 와서 주인공에게 사람같지 않다니 정말 불학무식한 놈이로군, 그런 생각이 든 때문이다.
그러나 사내는 사람들이 그러건 말건 느긋하게 다음 구절을 읊어낸다.
“何日何時降神仙(어느 날 어느 때 신선께서 내려오셨나)”
막 사내를 치도곤하려던 사람들이 그만 움찔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사람같지 않다고 한 말이 곧 신선이 내려온 것이라는 말로 이어졌으니, 그들이 오해를 한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
“허허.”
“거 참 제법일세.”
사람들의 감탄이 이어지는데 사내는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음 구절을 턱 덧붙인다.
“膝下七子皆盜賊(슬하에 둔 일곱 아들이 다 도둑놈이구나)”
이번에는 주인영감의 좌우에 앉아있던 일곱명의 아들들 얼굴이 울그락푸르락이다. 자신들을 다 도둑놈이라니 그럴 밖에. 그 중에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사내를 노려보는 자식도 있다.
허나 사내는 별 동요 없이 또 다음 구절을 읊어댄다.
“取天桃善奉養(하늘의 복숭아를 훔쳐 아버님을 잘 봉양하였구나)”
마침 주인영감의 앞자리에 놓인 상에는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가득 담겨있었으니 딱 들어맞는 시였다.
그제야 사내의 시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를 다투어 불러올려 거나하게 대접했음은 물론이다.
2) 가족사의 비극을 녹여내는 시심(詩心)
삿갓을 쓰고 잔치집에서 그 시를 지은 사람의 이름은 김병연(金炳淵,1801-1863)이었다. 그의 자(字)는 성심(性深)이고 호는 난고(蘭皐)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호나 자보다 별칭인 김삿갓(金笠)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평생을 삿갓을 쓰고 살다 간 탓이었다.
그가 삿갓을 쓰고 산 이유는 홍경래의 난으로부터 비롯된다. 홍경래는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난을 일으켰으나 불행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건과 김삿갓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의 난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였다. 그는 홍경래가 쳐들어오자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였으며, 난군이 주는 벼슬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익순은 전국에 지명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날 홍경래의 참모 중 한 사람인 김창시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관군에게 자수를 하였다. 그런데 사실 조사를 해보니, 그 머리를 베어온 것은 김익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며, 김익순은 그에게 많은 돈을 주기로 하고 머리를 가로챈 것이었다. 더구나 그 머리가 김창시의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익순은 적에게 항복한 죄 위에 거짓말을 한 죄까지 덧붙어 사형을 당하고 만다. 아울러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그 뒤 할아버지의 일을 모르는 김병연은 과거를 볼 때 김익순의 죄를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지었고,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되어 세상을 보기 부끄럽다며 일평생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전국을 방랑하며 그는 발닫는 곳 어디에서나 많은 시를 지었다. 그에 얽힌 비극적인 가족사가 그의 시를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3) 풍자와 풍월로 한 세상을
그의 시는 다양하다. 과거볼 때 흔 히 쓰는 형식인 과시(科詩)가 있다. 형식도 까다롭고 내용도 만만한 것이 아닌 이 시를 통해 그의 시창작 능력이 단순한 재주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한시도 여러편 있다. 평측과 운을 맞춰야 하는 전통 한시 역시 그의 시적 재질을 짐작할만 한 자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이름나게 만든 시는 풍월시들이다.
풍월시중에는 우리말을 직접 쓰기도 하고, 한문의 음이나 뜻을 우리말의 의미와 관련시켜 짓기도 한다. 대표적인 풍월시 한 수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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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나무는 느티나무과에 속하는 큰나무다. 이십은 우리말로 스물이니 이렇게 나무로 슬쩍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삼십은 서른이니 ‘서러운’으로, 사십은 마흔이니 ‘망할’로, 오십은 쉰이니 ‘쉰’으로, 또 칠십은 일흔이니 ‘이런’으로 다른 삼십은 서른이니 ‘설익은’으로 풀어 읽도록 쓴 것이다. 숫자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기가 막힌 솜씨다. 어느 집에서 쉰 밥을 주기에 썼다는 이 시는, 쉰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자신의 비극적 처지를 여유와 익살로 풀어내고 있는 대표적인 풍월시다.
“諺文眞書 섞어 作/是耶非耶 皆吾子”와 같은 시는 아예 한글과 한문을 섞어 써놓고 있다. 내용도 ‘우리말과 한문을 섞어 지었으니 이 시를 옳고 그르다고 말많은 사람들은 다 내 아들이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의 풍월시에는 풍자와 해학이 바탕에 깔려있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웃음이 나오는 법일까? 김삿갓은 자신이 겪은 참담한 현실을 오히려 웃음으로 그려낸다.

4) 김삿갓 시의 시대적 의미
그러나 아무래도 김삿갓 시의 본령은 대상을 풍자하고 익살로 조롱하는 풍월시에 있다. 한시의 형식적 경계를 무너뜨리며 그가 이런 시를 지은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가족사의 비극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당시의 시대적 환경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이행기에는 다양한 사회적 변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미 김삿갓 이전시기부터 있어온 이런 변화는 그가 살았던 순조 무렵부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을 것이다.
중인인 여항인들이 시를 쓰고, 모여서 공동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여항문학 혹은 위항문학이라고 하는 이들의 시창작은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한시에 대한 도전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공동 시집에 ‘풍요(風謠)’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했다. 풍요는 민요의 다른 말이다. 한시가 민요처럼 민중들의 삶과 정서를 표현해 내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실학사상이 등장했고, 그 사상에 입각한 문학이 창작되기 시작했다. 민중의 자기각성이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한시 중에서는 아예 민요를 번역해 쓴 것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변화의 틀 속에 김삿갓의 시는 자리잡고 있다.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것은 한시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다. 이제 한문시는 그 수명의 막바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세로부터 시작된 한시는 중세의 끝, 근대의 출발점에서 그 영향력을 점점 잃어버릴 위치에 놓인다. 김삿갓의 언문 풍월시에서처럼 한시의 파탄은 한글과의 엇갈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요시나 악부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삿갓의 작품으로 알려진 여러 시들은 그의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풍월시의 상당수는, 김삿갓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민간의 입에서 떠돌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시집에는 이이의 <화석정>이 김삿갓의 작품으로 실려있기도 하다. 또 이백의 시구절이나 민요의 한문투 구절들이 그의 시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그의 시의 상당수가 구비전승되면서 민간 창작의 과정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김삿갓이라는 특정한 인물의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여러 사람들의 창작이 뒤섞인 것은 이러한 시적 경향이 당시의 일반적 정서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는 희작시나 풍월시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고 한다. 양반들이나 짓던 신성한 한시로 말장난도 하고 놀려먹기도 하는 자리에 한시의 마지막 운명이 놓여있는 것이다. 중세의 시작과 더불어 문학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한시는 이제 중세의 몰락과 함께 생명의 잔영을 남기게 된다.
그 시대의 자리에 김삿갓의 한시가 놓여있다. 그러나 한시의 슬픈 운명에도 불구하고 김삿갓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시들은 재미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그 속에 시대적 운명이 담겨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나무 지팡이에 삿갓을 쓰고 세상을 방랑하며 지었다는 그의 시는 어쩌면 그의 슬픈 개인사와 시대의 쓸쓸한 변화에 대응하는 작은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