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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骨之徵何慘毒(백골지징하참독)
同隣一族橫罹厄(동린일족횡리액)
鞭撻朝暮嚴科督(편달조모엄과독)
前村走匿後村哭(전촌주익후촌곡)
鷄狗賣盡償不足(계구매진상부족)
悍吏索錢錢何得(한리색전전하득)
父子兄弟不相保(부자형제불상보)
皮骨半死就凍獄(피골반사취동옥)
백골에까지 세금을 매기다니 어찌 그리도 참혹한가.
한 마을에 사는 한 가족이 모두 횡액을 당하였네.
아침 저녁 채찍으로 치며 엄하게 재촉하니,
앞마을에선 달아나 숨고 뒷마을에선 통곡하네.
닭과 개를 다 팔아도 꾼 돈을 갚기엔 모자란다네.
사나운 아전들은 돈 내놓으라 닦달하지만 세금 낼 돈을 어디 가
서 얻는단 말인가.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사이에도 서로 보살피지 못하고,
가죽과 뼈가 들러붙어 반쯤 죽은 채로 얼어붙은 감옥에 갇혀 있
다네.
기 - 가혹한 징세
승 - 징세의 횡포에 고통 받음
전 - 징세의 횡포에 고통 받음
결 - 징세의 횡포로 인한 비참한 삶
한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
백골(사람이 죽고 난 뒤에 남은 뼈)에까지 세금을 매기다니(백골
징포) 어찌 그리도 참혹한가(설의적 표현)
한 마을에 사는 한 가족이 모두 횡액[횡래지액의 준말로 뜻밖에
닥쳐오는 불행을 말함(橫來之厄)]을 당하였네.
아침 저녁 채찍으로 치며 엄하게 재촉하니(당시 지방관들의 가렴
주구와 횡포),
앞마을에선 달아나 숨고 뒷마을에선 통곡하네(사실적인 표현으
로 비참한 당시 민중의 현실을 말함)
닭과 개를 다 팔아도 꾼 돈을 갚기엔 모자란다네(지독한 수탈을
말하고, 당시 불합리한 의무와 가혹한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토
지를 이탈하는 농민이 증가하게 되었다.)
사나운 아전들은 돈 내놓으라 닦달하지만 세금 낼 돈을 어디 가
서 얻는단 말인가(설의적 표현으로 설의법은 쉽게 판단할 수 있
는 사실을 의문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상대편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수사법임)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사이에도 서로 보살피지 못하고(삼강
오륜이 무너진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고, 지독한 경제적
궁핍하에서는 인간이 인간의 도리를 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
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는 뜻으로, 혹독한 정치의 폐가 큼을 이르는 말. '예기'의 〈단궁
편(檀弓篇)〉에 나오는 말이다.]
가죽과 뼈가 들러붙어 반쯤 죽은 채로 얼어붙은 감옥에 갇혀 있
다네.(당시 민중들의 험난하고 비참한 처지를 말함)
이 시는 조선 후기의 가혹한 세무(稅務) 정책을 고발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백골(白骨)에까지 세금을 매긴다는 1구의 표현은, 죽은 사람에게도 인두세(人頭稅)를 부과했던 이른바 '백골징포(白骨徵布)'를 고발하고 있다. 당시 지방관들은 사망자에게도 여전히 보포(保布 : 조선 시대에, 양인으로부터 군역을 면제해 주는 대가로 거두어들이던 베나 무명. 처음에는 군인 한 명에 대하여 두 명의 보인(保人)을 정하고 베나 무명을 내게 하여 군인의 생활을 도와주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군역에 복무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의 하나로서 징수하였다.)나 신포[身布 : 조선 시대에, 양인(良人)이 신역(身役) 대신에 바치던 무명이나 베.] 따위를 징수하던 일을 수포(收布)라고 하는데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어린아이에게까지도 병역의무를 지워 수포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 조선 후기에, 군정(軍政)이 문란해져서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일.)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습관화된 악폐는 한편으로 양민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고 다른 편으로는 국가재정을 더욱 곤궁하게 하였다. 이 시는 피폐한 농촌의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금을 걷으러 온 아전들의 가혹함으로 온 마을이 모두 황폐화되는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심지어 세금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두고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죽을 지경에 방치하는 가혹한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잘못된 폐해와 비참한 조선 후기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1681(숙종 7)∼1757(영조 33). 조선 후기의 시인·문장가.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윤경(潤卿), 호는 완암(浣巖). 출신은 비록 한미한 사인(士人)이었으나 시문에 특히 뛰어나 당대 사대부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705년(숙종 31) 역관으로 통신사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갔을 때 독특한 시문의 재능을 드러내 더욱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문은 홍세태(洪世泰)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서 시와 문장이 하나같이 천기(天機)에서 나온 것과 같은 품격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저서로 '완암집' 2책 4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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