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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부터 박학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에 뛰어났다. 170년 영제(靈帝)의 낭중(郎中)이 되어 동관(洞觀)에서 서지 교정에 종사하였으며, 175년 제경(諸經)의 문자평정(文字平定)을 주청하여 스스로 써서 돌에 새긴 후 태학(太學)의 문 밖에 세웠다. 이것이 '희평석경(喜平石經)'이다. 후에 중상모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대사령(大赦令)을 받았으나 귀향하지 않고 오(吳)에서 10여년을 머물렀다. 189년 동탁(董卓)에게 발탁되어 시어사(侍御史), 시중(侍中)에서 좌중랑장(左中郞將)까지 승급하였으나 동탁이 벌을 받고 죽음을 당한 후 투옥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조정의 제도와 칭고에 대하여 기록한<독단(獨斷)>, 시문집 <채중랑집(蔡中郞集)>이 있다. 비백체 중국의 한자 서체. 글씨의 점획이 새까맣게 씌어지지 않고 마치 비로 쓴 것처럼 붓끝이 잘게 갈라져서 씌어지기 때문에 필세가 비동(飛動)한다 하여 붙여 진이름이다. 후한의 채옹이 창시하였다고 전해온다. 한, 위시대의 궁전 제액(題額)에 이 서체가 쓰였으며, 후한때에는 장지(張芝)가 일필서(一筆書)의 비백을 썼다하고 위나라의 위탄(韋誕), 진(晉)나라의 위항(衛恒), 왕희지, 왕헌지 등도 모두 비백체의 명수였다고 저해지지만 오늘날 남아 있지않다 남송의 포조가 비백서세명이라는 글을 지어 이 서체의 아름다움을 일컬은 것을 보면 그 무렵에 훌륭한 비백의 작품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齊), 양(梁)시대에 유행한 잡체 속에는 이서체가 포함되어 있다. 제나라 소자량의 '전례문체'에도 이 서체가 잡체의 일종으로 도시(圖示)되어 있다. 양나라의 소자운은 소자를 이 비백체로 벽서한것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떄는 태종이 이에 능하여 가끔 신하에게 써주기도 하였다. 태종의 <진사명제액(晉祠銘題額)>, 고종의<기공송제액(紀功頌題額)> <효경황제예덕기제액>, 측천무후의 <승선태자비재액>등은 모두 비백체로 쓴 현존하는 유적들이다. 대영박물관 소장의 둔황문헌 속에도 이 서체로 제액을 쓴 고본(稿本)이 있다. 송나라떄는 인종이 제1인자로 꼽혔으며 명, 청시대 이후에는 문인 묵객들이 감상하며 즐겼고 청나라의 육소증(陸紹曾)은 비백에 관한 문헌을 모아 <<비백록>>을 저술하였다 자세한 자료는 대구서가협회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이에 해당하는 작품이 있음다 http://my.netian.com/~callip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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