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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훼화]]마조상 「題折枝牧丹圖제절지목단도」 - 신명연 <화훼도

작성자松亭|작성시간14.08.27|조회수433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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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상 「題折枝牧丹圖제절지목단도」 - 신명연 <화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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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봄비 꽃향기 적시고
모란이 부귀영화를 뜻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부귀영화란 조선시대 문인에게는 대놓고 바랄만한 것은 아니었다. 깊이 학문을 닦아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과정에 어쩌다 부귀영화가 따라오면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애초부터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조선시대의 어느 시점까지는 이런 명분이 살아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어느 시대까지만 해도 모란을 그린 그림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말기 묵모란의 대가 소치 허련(小癡 許練 1808-1893)이 등장해 모란 그림을 남발하는 것은 이런 사회적 심리 저지선이 무너진 이후의 일이다. 이때는 조선시대의 거의 막바지인데 막판에는 명분이고 체면이고 모두 없어지는 게 인간사이다.

허소치 시대와 비슷한 시대의 화가가 그린 것중에 명분과 현실 두 사례를 보여주는듯한 그림이 있다. 하나는 신명연의 묵모란이고 다른 하나는 유숙의 담채 모란도이다. 우선 신명연(申命衍 1809-1886) 쪽부터 보면 큰 바위에 기댄 모란 두 포기에서 백모란과 적모란 두어 송이가 피어있는 모습을 그렸다.


신명연 <화훼도> 지본수묵 99.5x23cm 개인


호가 애춘(靄春)인 그는 19세기 들어 산뜻한 감각의 화조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묵모란도에 가깝다. 윤곽선을 그리지 않은 몰골 화법으로 힘들이지 않고 그려나간 것을 보면 어느 주석(酒席)에서의 휘호인양 여겨지기도 한다.

위쪽의 화제는 ‘帳底金盤承密露 東家胡蝶不須飛 藹春(장저금반승밀로 동가호접불수비 애춘)'이다. 시구는 원나라때 시인 마조상(馬祖常 1279-1338)이 지은 것으로 칠언절구 「제절지모란도(題折枝牧丹圖)」의 일부이다. 모란 가지를 그린 그림의 모란 꽃을 보고 하도 아름다워 마조상가 읊은 시이다. 신명연의 이 시의도는, 말하자면 그림속 모란을 보고 지은 시구 속의 모란 묘사에서 시작해 다시 모란꽃 그림을 그려낸 메타 작업인 셈이다.

洛陽春雨濕芳菲 낙양춘일습방비
萬斛臙脂染舞衣 만곡연지염무의
帳底金盤承密露 장저금반승밀로
東家胡蝶不須飛 동가호접불수비

낙양의 봄비 꽃향기 적시고
만곡의 연지 무의를 물들이네
장막 아래 금 쟁반처럼 빛나는 꽃술 감미로운 이슬 맺히니
나비인들 동쪽 집에 날아갈 필요는 없으리

만곡의 연지란 모란꽃 색이 짙은 연지가 무희의 아름다운 무복을 물들이는 것보다 짙다는 말이다. 금승은 금 쟁반처럼 빛나는 꽃술을 말한다. 마지막 구절은 이처럼 아름다운 꽃이 그림 속에 그려져 있으니 나비일지라도 굳이 사람 사는 동네로 꽃을 찾아 날아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소략하게 그린 묵모란에 비해 과분한 생각이 들 정도로 화사한 시구이다. 금쟁반에 이슬이 맺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주로 백모란을 대놓고 하는 말이다. 쟁반과 이슬이 나오는 시의도가 하나 더 있다.


유숙 <화조도> 저본담채 141.5x34.2cm 선문대 박물관


두 번째 그림은 정교한 필치로 꼼꼼하게 그린 화조화 한 폭이다. 혜산 유숙(蕙山 劉淑 1827-1873)은 단원 화풍의 계승자 중 한 사람이다. 이 그림에서도 새를 그린 모습에서 단원풍이 느껴진다. 풍속화도 그렇지만 화조에 특기가 대단했던 단원은 새를 그릴 때 부분적으로 세밀하면서도 전체적인 인상을 놓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내용은 바위 곁에 모란 한 포기를 그렸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위쪽 나뭇가지에 새가 두 마리 앉아있는 모습이다. 담채와 담묵을 기조로 해 그림의 인상이 매우 부드럽고 따사로운 느낌이다. 모란 줄기에는 위쪽에 홍모란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봉오리도 보인다. 아래쪽에도 꽃이 하나 더 있는데 특이하게 자색모란, 즉 자모란(紫牧丹)이다. 위쪽의 화제는 시 한 편 전체를 적었다. 그리고 달리 관지는 쓰지 않고 다만 ‘劉淑印(유숙인)’과 ‘蕙山(혜산)’ 도장을 찍었다.
시는 당나라 시인 배린(裵麟 ?-838)의 시로 제목은 「배급사댁백모란(裴给事宅白牡丹)」이다.

長安豪貴惜春殘  장안호귀석춘잔
爭賞街西紫牡丹  쟁상가서자모란
別有玉盤承露冷  별유옥반승로냉
無人起就月中看  무인기취월중간

장안의 호협 소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다투어 자은사 자모란 보러 달려가네
달리 옥쟁반에 찬 이슬을 받는 백모란이 있어도
달빛 속에 찾아가는 이 아무도 없네

호귀는 호협한 젊은 이를 말한다. 당시 장안에 서쪽의 자은사에는 자색 모란이 유명했다. 요염한 치장을 뽐내는 자색 모란도 좋지만 배집사 집 정원에는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고상한, 이른바 빙청옥결의 백모란이 곱게 피었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시이다. 시에는 백모란 찬양 뿐이지만 그림에는 자색모란과 홍모란이 있을 뿐 백모란은 보이지 않는다.

시의도이기는 하지만 시의 내용이나 이미지에 억매이기 보다 그림의 한 요소로 제시(題詩)가 들어가 있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정도로 여겨지는 시대가 된 듯한 인상이다. 이들 시대로 내려오면 시의도는 사실 더이상 신선한 것은 아니게 된다. 시대는 시의도이든 남종화이든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아울러 신명연과 유숙은 모두 이 시대의 위대한 마니에리스트(manierist)였던 허소치의 활동범위 속에 놓여있던 인물들이기도 하다. 신명연은 추사와 가까운 신위(申緯 1769-1845)의 둘째 아들이다. 또 유숙 역시 한때 추사 그룹에 속해 지도를 받았던 사이이다. 이런 까닭으로 보면 추사의 일급제자인 허 소치를 중심점으로 한 이 시대의 매너리즘이 이들에 전해졌다고 볼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4.08.2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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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三道軒정태수 | 작성시간 15.02.22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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