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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늦가을의 실버로드(자전적 단편소설)

작성자신웅순|작성시간26.06.05|조회수32 목록 댓글 0

 

늦가을의 실버로드

 

 

 

 

석야 신웅순*

 

사라져가는 단어들, 살아나는 풍경들

 

늦가을 창밖의 저녁 햇살이 거실 안까지 깊숙이 들어왔다. 아내는 텔레비전 화면 속, 붉고 노란 알이 가득 찬 간장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반짝였다. 숟가락으로 꾹 누르면 속살이 툭 터져 나올 것 같은 게장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내의 소박한 눈치를 놓치지 않았다. 석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당신 생일날, 저기 격포로 게장이나 먹으러 갈까?”

아내의 얼굴에 물결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아내는 게장을 좋아했다.

부안의 격포로 떠나기로 한 아침이었다.

부안에 …… , 거기 무슨 절이 있더라. 소림사인가?”

석야는 엉뚱한 단어를 뱉었다.

그건 중국이잖아요. 당신도 참.”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직지사?”

아내도 오답이었다.

직지사는 김천이잖아. , 부안에 직소폭포가 있어서 헷갈렸나 봐. 도찐 개찐이네, .”

나이 들면 고유명사들이 기억 속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맴도는 단어를 설명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도 두 사람의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오랜 세월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소사! 내소사요.”

한참을 돌고 돌아 아내의 입술에서 정답이 나왔다.

맞아.”

석야는 무릎을 쳤다.

그래, 당신이 그릴 한국화 자료로 내소사 진입로의 그 울창한 소나무 숲 몇 컷 찍어옵시다.”

석야는 오래전에 아내와 함께 내소사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기억해둔 소나무 숲이었다. 전에는 유적이나 역사적 유래에 눈길이 갔지만, 이제 두 사람의 시선은 여백 가득한 자연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산수풍경은 아내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축복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위해 석야는 기억 속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떠올린 것이다.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나이는 들었어도 뭐니뭐니해도 부부와 함께 떠나는 여행길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전나무 숲을 지나 뜻밖의 모항으로

 

세 시간을 달려 부안에 도착했다. 격포의 모 식당에서 아내가 원했던 간장게장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게딱지에 밥을 비벼 맛나게 먹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석야는 먹는 내내 행복했고 즐거웠다.

내소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석야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수십 년 동안 소나무 숲이라고 여겨왔던 그 길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푸른 전나무 숲이었다.

, …… 소나무가 아니라 전나무 숲이었네.”

기억이 또 실수를 해버렸다. 헛기침을 하자, 아내는 남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기역이면 어떻고 니은이면 어때요.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데. 기억이란 원래 마음대로 색칠하기도 하잖아요.”

소나무 숲을 멋진 구도로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지만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다.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가슴 속의 뿌연 안개를 순식간에 걷어갔다.

내소사를 나와 변산반도 해변을 따라 천천히 드라이브했다. 차창 밖으로 늦가을의 잔잔한 서해바다가 늦은 오후의 햇살에 은빛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모항 근처의 어느 언덕길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풍경이 너무나 수려했다. 석야는 자신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여보, 저기 좀 봐.”

시간이 멈춘 듯 그림 같은 작은 바닷가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바람에 서걱이는 푸른 대나무 숲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자그마한 교회의 십자가가 삐쭉 보였다.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빨간 지붕의 집들, 그리고 그 곁을 수백 년을 지켜온 정자나무. 고만고만 해변에 둘러앉아 파도소리와 함께 우아하게 실내악 연주를 하고 있었다.

, …… 참 예쁘다.”

아내는 차에서 내려 바닷가 마을의 악기 소리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잎들이 파도 소리와 섞여 쓰윽싸악 밀려왔다 밀려갔다. 석야는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바람 부는 풍경과 화음 소리를 잘라내 조심스럽게 여러 컷을 사진에 담았다. 내소사의 전나무가 주지 못한 아늑한 한 폭의 산수화가, 계획에 없던 모항의 바닷가에서 완벽한 연주로 완성되고 있었다. 인생은 늘 이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 길 끝에서는 더없이 빛나는 신의 축복이 기다리는 법이다.

 

먹향 너머 내 안의 찔레꽃

 

해는 변산의 등허리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석야는 운전대를 잡은 채 차창 밖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여보, 우리 바닷가 길을 걸어볼까?”

그래요.”

둘은 변산의 적벽강 노을길을 걸었다.

부안의 이 길은 먼 옛날, 조선의 천재 기생 매창과 그녀가 평생을 사랑했던 시인 유희경이 함께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던 추억의 로드였다.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석야에게 그들의 사랑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오늘 당신과 함께 걸은 이 길도, 훗날 서로에게 저 매창과 유희경의 길 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실버 로드로 기억될 수 있을까.”

채석강 노을 길에서 석야는 아내의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그럴 거예요.”

유희경과 매창의 사랑의 바닷길을 걷는 서정 가득한 노을길은 이미 두 부부에게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추억의 실버 로드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며칠 후 아내는 모항의 바닷가 풍경을 하얀 화선지 위에 먹색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내의 붓끝이 화선지 위를 부드럽게 지나갔다. 먹물은 대나무 숲이 되고, 작은 교회가 되고, 정자나무의 든든한 실루엣이 되었다. 석야는 곁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아내는 남편의 시조 율을 따라가며, 그동안 담아내지 못했던 마음의 풍경까지 20호 화폭에 차곡차곡 담아내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은 산녘에서 쉬다가고

초겨울 바람은 들녘에서 쉬다간다

 

산너머 울먹이고 있을

어느 봄날 찔레꽃

 

그림 속 보이지 않는 산마을 너머, 그 옛날 여백 어디쯤에서 눈물겹도록 하얗게 피어났던 젊은 날, 숨어 울던 내 안의 찔레꽃. 기억은 자꾸만 지워지고 변해가도, 먹향 가득한 서로를 품어 안은 이 은빛 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두 사람만의 풍경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처럼 뜨거운 적색이었다면, 노년에 접어든 두 사람의 사랑은 화선지 위에 은은하게 번지는 먹빛일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서로의 빈틈을도찐개찐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넉넉한 여백이 있는 은빛 사랑일 것이다.

석야는 아내가 완성해가는 한국화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은 왜곡되고 사라질지라도, 서로를 바라보는 은근한 눈빛과 화선지에 새겨지는 은은한 먹빛은 화선지의 실버 로드 위에 지워지지 않을 명화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점심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간장게장을 나누어 먹으며 보낸 먼 길, 그 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소중한 아내의 생일날이었다.

 

- 2025. 11. 5.자 에세이 추억의 실버로드를 자서전적 단편소설로 재구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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