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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그해 겨울, 산촌 학교의 러브레터(자전적 단편소설)

작성자신웅순|작성시간26.06.14|조회수41 목록 댓글 0

그해 겨울, 산촌 학교의 러브레터

 

 

 

 

석야 신웅순

 

분홍빛 꽃 편지

 

아이들이 빠져나간 이른 저녁의 교실은 적막했다. 나는 교단에 앉아 출석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열어둔 창문 너머로 텅 빈 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낮게 내려온 산노을이 교사 앞마당까지 급하게 내려왔다. 산촌 학교의 겨울 저녁은 해가 짧고 그림자가 길었다.

책상 위 교과서 사이에 끼어 있던 낯선 물건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무슨 예쁜 꽃봉투가?"

혼잣말을 내뱉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산골 학교의 문구점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은은한 꽃무늬가 새겨진 분홍색 편지봉투였다. 겉봉에는 또박또박, 연필로 꾹꾹 눌러쓴 정성 어린 글씨,‘선생님께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리 반 오학년 여자아이, 순이의 글씨였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 나이 대 아이들의 편지는 사소한 고민거리나 고발, 혹은 "선생님 좋아요.”로 시작하는 해맑은 인사가 전부였다. 그러나 펼쳐진 분홍 편지지를 보는 순간 예감이 이상했다.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순간 나의 손가락은 이내 굳어져버렸다. 그것은 장난스러운 낙서도, 철없는 투정도 아니었다. 한 줄 한 줄 어린 영혼을 쥐어짜낸 진심이, 서툴지만 단호한 어조의 애틋한사랑의 고백서'였다.

 

선생님,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선생님 생각을 해요. 학교에 오는 길에 산언덕을 넘을 때도 선생님이 먼저 와 계실까 봐 가슴이 뛰어요. 그냥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제 마음을 알아주세요. 선생님 사랑합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장문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스물세 살 총각 선생의 심장을 흔들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연애편지였다. 그것도 내가 가르치는 제자에게서 말이다. 편지지를 쥔 손에 땀이 배었다. 읍내 문구점에나 가야 겨우 구할 수 있을 분홍 편지지와 꽃봉투. 면 소재지도 아닌 이 궁벽한 산골에서 초등학교 오학년 아이가 이 물건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지 눈에 선했다. 읍내로 통학하는 중·고등학생 언니나 오빠에게 몇 번이고 머리 숙여 부탁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고백을 전하기 위해, 밤마다 등잔불 밑에서 언어를 고르고 문장을 배열하느라 밤을 지새웠을 그 어린 아이의 분홍빛 생각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가슴이 저려왔다.

 

회피가 남긴 상처

 

이튿날 아침, 교단에 선 나는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시대로 대했으면 그만이었을 것을, 전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속마음이 금세 얼굴과 눈빛으로 드러나 버리는 나의 천성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참으로 순진했고, 지독하게 서툴렀다.

순이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눈길을 피했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어린아이인데 뭘 어쩌겠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치부해 버리려 애썼지만, 나의 차가운 거듭되는 회피에 그 애의 여리디 여린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피멍이 들었을까. 미처 헤아리지 못해 그 아이가 안쓰럽기만 했다.

고백한 것이 무슨 죄라고, 아이는 교실에 앉아 있는 순간순간 얼마나 창피하고 후회스러웠을까. 사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가 단칼에 퇴짜를 맞았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 새벽까지 머리와 가슴으로 짜내며 편지를 쓰고, 거절당한 뒤 밤을 새워 가슴으로 울었던 청춘의 상처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는 그런 지독한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나의 어설픈 결심은, 오히려 아이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발현되고 말았다.

비극은 체육 시간이었다. 그 주의 수업은 앞뒤 구르기와 뜀틀이었다. 시골 아이들이라지만 초등학교 오학년쯤 되면 제법 처녀티가 나는 여자아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순이도 그중의 하나였다. 남자아이들에 비해 대개 운동신경이 둔한 여학생들이 안전하게 뜀틀을 넘을 수 있도록, 선생은 허리나 어깨를 잘 받쳐주어야 했다. 특히 체육복이 없어 평상복 치마를 입고 온 예민한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순이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교실에서의 어색함이 고스란히 운동장으로 이어졌다. 나는 순이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조심스러운 것을 넘어 어쩐지 두려웠다. 기억은 불분명하지만, 그 애를 대할 때 유독 굳은 표정으로 딱딱한 거리감을 두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안전을 위해 잡아주는 손길조차 서먹하고 차가웠으니, 그 세심하고 예민한 아이에게는 그 조작된 태도마저 커다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오는 본능이었다. 그날 이후 순이는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하지 못한 말 한마디

 

순이가 결석한 며칠 동안, 내 고향집 마당에 서서 산언덕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아득했다. 내 집에서 산언덕 하나만 넘으면 바로 순이의 집이었다. 매일 아침 그 언덕을 넘어 학교를 오가며, 수업 시간마다 교단에 선 나를 바라보며 그 아이는 혼자서 무슨 생각들을 삼켰을까. 받아줄 수 없는 사랑이라도, 스승으로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말 한마디 들어주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순이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아주 예쁘고 귀한 거란다. 괜찮아. 선 생님도 네 나이 때는 그런 마음을 품었었단다. 네 고백이 참 고맙구나.”

왜 이 쉬운 위로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을까. 그저 말이라도 다정하게 들어주었더라면, 아이가 차가운 거절감 속에서 며칠씩 결석하며 앓아누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연애라고는 해본 적 없는 애송이 총각 선생이었기에, 타인의 타오르는 진심을 유연하게 받아 안을 만한 내면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절벽 앞에 선 것처럼 눈앞이 아득하고 아찔했다.

결국 나는 몇 년 더 초등학교 교단에 머물다 스스로 사표를 던졌다. 어쩌면 안과 겉이 투명하게 비쳐 사람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조율하지 못하는 나의 천성이 교단이라는 딱딱한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학교를 떠나 야간 대학교에 편입하면서, 순이와의 인연도, 그 고즈넉한 산촌 학교와의 인연도 완전히 마침표를 찍었다.

 

영원한 꽃봉오리

 

어느덧 오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 번 바뀌었는데도 한 번도 순이를 만나지 못했다. 고향 소식을 통해 들려오는 안부조차도 없었다. 이제는 성만 희미하게 기억할 뿐, 그 애의 이름 석 자조차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내가 생애 처음으로 받았던 그 분홍빛 연애편지의 강렬함 때문인지, 대답을 회피하던 나를 바라보던 그 애의 앳되고 부끄러워하던 표정만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 옛날에는 여자가 먼저 마음을 고백하거나 대시하는 일이 극히 드문 시절이었다. 하물며 담임선생님에게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기까지, 그 작은 아이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았을 용기를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쓰라렸을까. 어쩌면 그 고백 뒤에 찾아온 한없는 부끄러움과 내가 준 상처의 깊이 때문에, 그 아이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나를 한 번도 찾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다보니 그 애도 이제는 예순을 조금 넘었을 것이다. 머리에는 어느덧 서리가 허옇게 내리고, 품안에는 자식의 자식인 손주를 안고 토닥토닥 재우는 할머니가 되어 있을 나이이다. 이제는 세월의 강을 건넌 지금 한 번쯤은 "선생님, 그때 기억하세요?" 하고 웃으며 찾아와 주어도 괜찮으련만,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소식조차 적막하다. 그저 어디선가 건강하게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도 먼 산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더없이 아름답고 애처로워 보인다. 아마도 채우지 못한 미련들이 있어, 다듬지 못한 청춘의 허물들이 있어 그런 것인가. 어떤 것은 아스라한 능선의 구름으로 또 어떤 것은 아득한 강물 위 돛배로 멀리 멀리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초등학교 오학년, 분홍 편지지를 선생님께 전해준 벌지 못한 수줍은 꽃봉오리는 내 가슴 한 켠에서 그대로 굳어진 채 애틋하고도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제는 만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아스라한 저편의 기억이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내 가슴속 머언 하숙방 같은 불빛은 반짝 반짝 때론 약하게도 세차게도 흔들린다.

그리움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늘그막의 강물처럼 그저 저물도록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2020.12.22.자 에세이 제자의 러브레터를 자서전적 단편소설로 재구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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