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원익청(香遠益淸), 필획에 스며든 기운생동의 아취
-이순옥 박사의 작품세계-
정태수(한국서예사연구소장)
전통 서예의 미학은 붓과 먹, 그리고 종이가 어우러지는 필획의 운필을 통해 작가의 사유를 ‘기운생동(氣韻生動)’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이다. 이순옥 박사의 작품 세계를 마주하면 이러한 서예의 본질을 깊이 깨닫게 된다. ‘동한 서론의 미학 사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이론적 기틀을 다진 이 박사가 2026년 5월 5일부터 12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에서 박사 초대전 겸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 이론과 실기를 겸비해 온 그의 진솔한 예술 세계를 만나는 뜻깊은 자리이다.
주지하듯이 서예는 지필묵을 빌려 내면의 사유를 표현하는 예술이자, 마음에 깃든 정감을 손 끝으로 풀어내는 동양 예술의 진수다. ‘마음속의 바른 기운이 수양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誠於中 形於外)’는 말처럼, 인격 수양과 서예의 도를 동일시하는 정서는 서예술만이 지닌 독보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처음 그저 먹향이 좋아 붓을 잡았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없이는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박사 과정을 마친 지금까지도 늘 부족함을 느낀다며 겸양의 미덕을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정통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최근 젊은 작가들이 여백의 활용이나 외형적 화려함에 치중하는 경향을 경계한다. 대신 정확한 용필과 용묵, 그리고 구성의 조화를 이루는 기초 수련이 충분히 뒷받침될 때 비로소 진정한 정제미와 역동미가 발현된다고 믿는다. 전통 미학의 핵심인 작가의 감성과 정신이 필획에 스며들어 생명력을 얻을 때, 비로소 기운생동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당나라 손과정은 "평정함을 익힌 뒤 험절함을 알아야 하고, 험절함 이후에 다시 평정함을 구해야 한다"라고 서예 수련의 단계를 설파했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마음과 손이 하나로 통하는 ‘심수상응(心手相應)’의 경지에 닿게 된다. 고희에 이르기까지 고법(古法)이라는 무궁한 보물창고를 탐구하며 영일이 없었던 이 박사의 행보 또한 이와 맞닿아 있다.
그는 전·예·초서 등 각 서체가 지닌 운필과 형상을 익히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으며, 서예의 본질인 ‘느림의 미학’은 오직 전통의 충분한 습득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확신으로 수십 년간 묵묵히 붓을 들어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오체(五體)가 두루 망라되어 있어, 학문과 예술을 나란히 닦아온 ‘학예병진’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주돈이의 ‘애련설’을 휘호한 ‘향원익청(香遠益淸)’은 진흙 속에서도 맑은 향기를 잃지 않는 연꽃의 품격을 군자의 모습에 비유해 깊은 울림을 준다. 애련설 전문을 행초서로 휘호하고 중앙에 ‘향원익청’ 네 글자를 주제어와 같이 행초로 배치하여 시각적 통일감을 부여했으며, 세련된 필치를 통해 작가의 깊은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채근담 구’를 쓴 작품에서는 원필(圓筆)의 자연스러운 필치를 통해 "인위적인 가둠보다 마음 가는 대로 노니는 자유로움이 귀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문자의 외적 아우라를 넘어 서자의 내면이 투영된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문질빈빈(文質彬彬, 형식과 내용의 조화)’을 추구하는 이 박사의 조형 사유가 잘 드러난다.
이 박사는 왕지환의 시 ‘등관작루’의 구절처럼, "천 리 밖을 내다보기 위해 다시 누각을 한 층 더 올라가는" 마음으로 조바심 없이 묵묵히 먹을 갈고자 한다. 멀리 갈수록 맑아지는 연꽃의 향기처럼, 서예가 지닌 선한 영향력을 세상과 나누며 소통하려는 그의 소망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의 바람대로 붓과 함께하는 ‘인서구로(人書俱老, 사람과 글씨가 함께 노련해지는)’의 아취가 오래도록 향기롭게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출처 서예세상( 서예세상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