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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정필담

19세기 조선 회화에 나타나는 중국의 영향

작성자촌정|작성시간15.12.10|조회수1,065 목록 댓글 1

 (1800년 이후의 조선 회화와 화가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발간한 '조선후기 회화사'라는 책을 참고하겠습니다.)


                    19세기 조선회화에 나타난 중국의 영향

  19세기의 조선 회화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뱓았다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다. 실제의 작품을 통해서 중국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회화는 18세기 회화에 뿌리를 두고 계승, 발전하였다. 18세기 회화의 연장 선상에 19세기 회화가 존재하므로, 19세기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세기 회화를 검토해 봄으로 19세기 회화가 중국의 회화를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였는지를 아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18세기는 병자호란을 겪은 지 100년 쯤 지난 시대이다. 그만큼 변화가 온 시대이다. 배청 사상을 견지해온 서인 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대청정책에 시각의 차이를 드러낸다. 노론 세력은 배청 사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론은 중국의 앞 선 문물에 시선을 주었다.


  이인상과 이윤영은 노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문을 배경으로 배청 의식에 젖어 있었다. 청에 반대하여 은둔하고 있는 중국의 화가를 숭상하였다. 유민의식을 갖고 있던 안휘파 화가들을 좋아 하였다. 안휘파를 대표하는 석도와 황산파의 홍인의 화풍이 그들의 그림에 나타나 있다.

  이인상의 화풍은 고아하고, 담백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윤영과 친하게 지냈다. 이윤영과 고담을 나누면서 자연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의 바위는 선묘로 간결하게 그리므로 홍인의 담백한 그림을 닮았다. 황산파는 준법(皴法)을 사용하지 않고 윤곽선만으로 산이나 바위의 형태를 묘사함으로 전체적으로 담백하게 느껴진다. 이윤영의 고란사도에서도 이런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홍인의 양식은 19세기 화가인 정수영에게 많이 나타난다. 김창수와 김수철의 그림에도 산의 표현에 기하학적인 양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세기의 화가들은 배청 의식 때문에 유민화가들인 황산파의 화풍을 닮게 그린 것은 아니다. 선대 화가의 화풍을 따르다보니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이었다.

  정수영은 진경산수 계열의 화가이다. 이인상과 강세황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선묘에 의한 기하학적 양을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로서 전통적인 회화 양식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정선은 진경산수화가로 분류한다. 한국미술사가들은 조선의 회화가 중국화의 아류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선은 한국미술사가들이 열등감을 벗어나게 해준 화가로 생각한다. 진경산수에 나타나는 실경은 확실히 중국과 다르다. 그러나, 정선은 명, 청대에 나타난 실경화풍을 받아들여서 그린 화풍이라는 평을 듣는다. 진경산수가 정선의 독창적인 화풍이 아니다. 정선은 문인화풍을 기본적으로 갖춘 화가이다. 정선은 미불, 예찬, 문징명, 동기창 등의 문인화가의 화풍을 기본으로 공부하고 나서, 한국의 실경을 문인화풍으로 그렸다고 평가한다. 정선의 그림에는 당연히 중국의 문인화풍이 나타난다.

  정선은 퇴락한 노론 집안의 출신으로 김창흡(삼연)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정선에게는 배청 사상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정선이 받아들인 문인화풍은 청대 이전의 문인화풍이다.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가 조선 회화에만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때에 중국과 일본에도 나타났으므로 정선의 진경산수도 중국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인왕제색도는 미법 산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법은 송대의 문인화풍이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하나의 화풍은 방작(倣作)이다. 모방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방작은 원래에 중국의 명 중기에 나타나서 명의 후기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청대에 이르면 대 유행을 하게 된다. 방작은 복고주의적 회화 양식이다. 고대 중국의 그림을 되살리는 것이므로 지극히 중국적인 회화양식이다.

  방작의 기본 사상은 독창적인 것은 전통에서 나온다는 중국인의 사고 방식이 이론의 뿌리이다. 그러나 지나친 방작은 창의력을 오히려 억제하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중국의 방작 열품이 조선에 흘러들어 온 것은 약 1세기가 지난 18세기이었다. 한국 회화사에서 18세기의 방작 유행은 중국보다 더 심각하였다. 중국의 그림을 그대로 베끼므로 우리 회화의 독창성을 저해하여 중국화의 아류로 귀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렇더라도 조선 회화사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정선의 작품에는 방작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선 이후의 화가들이 방작을 그렸다.

  중국에서는 문인화와 실경화를 한 사람의 화가가 동시에 그렸다. 화풍으로 구분하여서 그린 것은 아니었다. 문인화풍으로 실경화를 그린 것이다. 정선도 중국의 화풍을 받아들여서 실경산수를 문인화풍으로 그린 대표적 화가이다. 명대의 대표적 문인화가 심주가 바로 이런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 문인화풍으로 그렸다는 것은 실경의 모습이더라도 사실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니고, 문인화적인 변형을 한 것이라고 한다. 정선의 금강산도도 실제의 모습이기 보다는 관념적으로 변형한 것이다.


  정수영의 경우는 방황공망산수화(倣黃公望山水畵)를 그렸으나 황공망의 그림과는 차이가 많다. 조선의 화가들이 방작을 유행으로 받아들였으나 중국화를 이해하지 못한 체 그렸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중국회화와 차이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적이라는 해석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조선의 화가들이 방작을 통하여 많이 그린 중국의 화가는 원대의 예찬과 황공망이었다. 명대의 화가로는 심주, 문징명, 동기창이다. 조선의 화가들이 중국을 배운 것은 이들 화가를 통해서 이다. 19세기에는 청초의 화가인 사왕오온(四王吳)등의 전통파 화가의 그림도 방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사의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가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중국 문인화풍을 받아들여서 방작을 시도한 대표적 화가로는 강세황을 꼽는다. 동기창의 방동원산수(倣董源山水圖)를 구하여서 그 그림을 바탕으로 다시 방동원산수도를 남겼다. 방작을 또 베낀 그림이다. 강세황은 이 그림을 자신의 특유의 화풍으로 그리지 않고 동기창 화법에 상당히 가깝게 그렸으므로 중국의 회화를 이해하고, 그 화풍에 맞추려 하였다는 평가를 들었다. 강세황은 미법산수, 황공망, 예찬, 동기창의 화풍울 광범하게 섭렵한 후에 문인화풍의 그림을 다양하게 그렸다.


  강세황(1713-1791)은 정선보다 약간 후대의 화가이다. 문인화풍을 도입하였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 19세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이다. 19세기의 직전에 죽었으나 그의 제자들이 19세기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강세황은 심사정과 교유하면서 중국 그림을 모방하여 그리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최북과도 교유하였다. 18세기의 많은 화가들이 중국 그림을 모방함으로 중국 화풍을 받아들이는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였다.

  강세황의 제자로는 김홍도와 신위가 중요하다. 김홍도는 19세기에 접어들자 곧 죽으므로 18세기 화가로 분류한다. 그러나 신위(1769-1847)19세기 전반에 활동을 하였다. 기록상으로 강세황의 제자로 남아있는 화가는 김홍도와 신위 뿐이라고 한다. 김홍도와 신위의 화풍에 문인화풍이 나타났다.


  신위는 19세기 전반에 활동하였으므로 강세황에서 이어지는 문인화풍을 진작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위 스스로 말하기를 한때는 강세황의 수제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사대부들은 시, , 화 정신이 같은 계통인 것을 모르고 그림에 대한 것은 화원(畵員)에게 맡기고 그것을 얘기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긴다.”

  신위는 강세황을 영향을 받아서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18-19세기에 유행한 풍속화도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풍속화는 지역의 풍속을 그리므로 지역 정서를 아주 강하게 담아낸다. 따라서 우리나라 풍속화는 우리의 정서를 가장 표현해내었다고 말한다.

  18세기에 동아시아는 경제 성장이 동시에 일어난다. 풍속화는 사회경제적인 배경 속에서 자연스레 태동한 그림이므로 한국적인 고유한 화풍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중국은 명나라 때에 소설이 발달하였다. 음화도 발달하였으므로 풍속화가 발달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청조 때는 중국의 풍속적인 그림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청조 때가 되면 풍속화가 크게 발달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금지가 미치지 않는 역외 지역이었으므로 풍속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김정희가 19세기 조선 화단에 미친 영향은 아주 크다. 김정희는 사행사의 일원으로 중국에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여러 번이나 중국을 다녀 왔다. 중국의 저명 학자이자 서화 수집가인 옹방강과 교류를 하면서 중국의 문물에 심취하게 되고, 중국의 서화를 도입하여 조선의 서화가에게 전수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을 선다. 그뿐 아니고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서 조선의 화단에 우두머리가 됨으로 그의 영향력은 더더욱 커진다.

  김정희(1786-1856)는 북학파의 우두머리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다. 연경에 직접 간 것은 1809년이 처음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를 따라서 연경에 가서 두 달 간을 머물면서 박제가의 소개로 중국의 학자 조강을 만난 것이 중국 학자와 첫 접촉이고, 중국의 고증학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김정희는 중국의 학문과 예술에 푹 젖어서 귀국을 하였다. 이후에 조선의 많은 학자와 화가들이 김정희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김정희는 역관인 이상적, 조수상, 오창렬, 김석준, 오경석을 제자로 두었다. 이들은 중국을 자주 드나드는 역관이었으므로 이미 중국화에 익숙하였으므로 쉽게 김정희를 사숙하게 되었다. 귀국한 후에는 조희룡, 전기, 허련 등 중인 계급의 서화가에게 문인화를 고취하여 조선의 화단에 완당 바람이 불도록 하였다.

  조희룡은 김정희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둘의 관계는 사승 관계를 이루면서도 묘한 차이를 나타내었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회화를 격이 떨어진다고 비난한 만큼 조희룡은 전통적인 문인화풍과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조희룡은 중국의 양주팔가 중의 한 사람인 나빙의 매화를 좋아 하였다. 양주 팔가는 사대부 화가처럼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으므로 사대부의 문인화와는 달랐다. 조희룡이 김정회와 다른 화풍이라고 하더라도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전기와 허련은 원, 명대의 문인화풍으로 그렸으므로 김정희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세기의 중국에서는 서양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풍이 일어났다. 그 중의 한 곳이 상해로서 해상화파(해파)를 이루었다. 오창석이 해상화파의 지도자로 꼽힌다. 임백년을 대표 화가로 인정한다. 해상화파는 전통 중국화에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였다. 오창석 이래로 중국 문인화에 채석을 강하게 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선 말기에 민영익이 상해에 머물면서 일찍부터 이곳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민씨 일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장승업의 회화에 해파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장승업은 해파의 화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림에도 해파의 양식을 도입하였다. 장승업의 그림은 중국의 조지겸을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장승업의 제자인 조석진과 안중식의 그림에도 해파 화풍이 많이 나타난다.

다시 조석진과 안중식의 제자인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김은호에게 전수됨으로 한국의 현대 한국화에도 해파의 영향이 나타난다. 규진에게는 해파의 영향이 많지 않으나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김규진을 통하여 김영기, 이응노에게 그 영향이 이어진다.


  19세기 조선 회화사에 서양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 말에 선교사 등의 외국인에 의한 그림이었으므로 조선의 화가가 직접 서양화를 그리는 정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서양화가 한국 화단에 등장하면서 그 세가 강물처럼 거세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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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芝香 | 작성시간 15.12.11 감사하는마음 전합니다 촌정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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