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의 산수화
왕유의 생애를 앞에서 보았다.
그는 안록산의 난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위기를 겪었고, 불교에 심취하여 조용한 삶을 보내기로 한다. 장안의 근교인 망천(網川)에 은거하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진적으로 전해오는 것은 한 작품도 없다. 일본 등지에 그의 작품이라고 전해오는 것이 여러 점 있지만, 모두가 모사본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국 미술사 책에는 그의 작품을 싣지 않는 것이 많다. 그의 작품이라고 싣는 책에도 망천도나, 여기서 보여주는 그림 등이다.
唐에서는 화원이라는 국가 기관이 없었고, 아직은 文人畵도 생겨나지 않았다. 당 때는 궁정에 고용되어 궁정화를 그리는 화가, 대중적인 종교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그러나 문인화풍의 그림이라는 것은 晩唐 시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문인화를 그리는 선비화가들은 삶이 자유분방하고, 탈 세속적인 삶을 살므로 문인화에는 그와 같은 그들의 삶이 표현되는 수가 많다.
당대의 그림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지금 당나라 때 그림이라면서 전해오는 것은 거의가 북송 때의 모사본이다.
왕유는 이사훈의 청록산수와 오도자의 화풍을 모두 익혀서, 자신의 그림에 혼합하여 그렸다고 한다. 그는 자유로운 선비화가였으므로, 두 화풍을 계승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왕유를 말할 때
고대를 계승하여 현대를 계몽한다(承古啓今)
수묵화(파묵과 발묵을 이용한-실제로 왕유의 작품에서 볼 수 없다고 하지만) -- 일반적으로 오도자 화풍이라고 한다.
왕유는 시인으로도 유명하고, 그림도 그렸다고 하니, 후대의 문인화가들이 시를 쓴 문인이었으므로 그를 내세웠디는 점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