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작품은 왕유 작품으로 전래되어 오고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문을 나타낸다.(모본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화집에는 傳왕유 작품으로 소개하면서 문인화의 비조로 꼽는다. 무덤 벽화에 남아 있는 당대의 산수화와는 품격이 다를 뿐 아니라, 이 그림 양식은 송나라 그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차라리 노호이 남긴 초당십지가 판화본이지만 문인화풍에 더 가깝다고 한다.
왕유(王維 ~760)
왕유는 산서성 태원 사람으로 호는 마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 왕진(대종 때 제상을 지냄)과 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므로 훗날 세상살이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불교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개원 21(734)에 재상 장구령에 의하여 여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곳 저곳에서 관직을 맡으면서 종남산에 자주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장안에서 벼슬을 할 때는 교외의 망천에서 반관반은 생활을 하였다.
755년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여 안록산에게 붙잡혔다. 이후에 장안이 수복되자 안록산에게 붙잡혔던 동료들이 모두 참수 당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다. 왕유는 용서를 받았으나(동생 왕진이 탄원을 하였다.), 이 문제로 왕유는 평생을 수치심으로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760년에 상서우승의 벼슬직에 올랐다. 이 때문에 왕유를 왕우승이라고 부른다. 곧 죽었다.
왕유가 호를 마힐로 한 것은 유마힐소설경의 불경 영향이라고 하였다. 왕유는 염세주의에 빠져 있었고, 만사가 소극적이었다. 왕유는 30세에 상처를 하고 평생을 홀로 지냈다. 왕유는 만년에는 불교에 더욱 심취하여 육조 혜능의 제자인 신회와 담론을 나누었다. 만년에는 남종선 불교 신자가 되었다.
왕유의 시와 그림에는 선종 사상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중국 문학사에서 왕유를 시불(詩佛)이라 하여 시선이라는 이백, 시성(詩聖)이라는 두보와 시의 거장으로 꼽는다. 동기창은 왕유를 남종화의 비조라고 하였다. 후대의 비평가는 하나 같이 왕유를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왕유는 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러나 그의 확실한 진적은 없고, 전칭되는 작품은 있으나 믿을 수 없다. 이사훈의 청록산수도 배웠고, 오도자도 배웠다고 한다 왕유의 그림을 직접 본 일이 있는 장언원의 품평은 다음과 같다
1. 산수화를 잘 그렸다. 고(古-채색화)와 금(今-수묵화)을 모두 잘 그렸다.
2. 대략적으로 용필을 하여 꾸미지 않았다. 왕유 이전에는 윤곽선을 뚜렷이 하고 채색을 하
였으나 왕유는 수묵화로서 윤곽선을 대략적으로 그렸다.
3. 이사훈 기법의 정교한 그림도 잘 그렸다.
4. 왕유는 파묵산수로서 수묵 산수를 잘 그렸다고 하였다.
왕 유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는 그가 지은 시도 도움이 된다. 왕유의 시는 강인한 기개는 보이지 않고 청담(淸談)이 기저에 깔려있다. 필선이 부드러웠다. 아직까지 준법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피마준이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는 감지된다.
왕유의 산수화는 평원구도가 많다. 왕유의 산수화는 자신의 시처럼 산림 속의 작은 경치를 즐겨 그렇다. 거칠고 웅장한 산세를 그리지는 않았다. 평온하고 한가로운 정취를 그리므로, 동기창이 남종화를 시작한 화가로 거론하였다.
왕유의 산수화는 시의(詩意)가 넘친다고 하였으나 진적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다(傳稱 작품만 있다.) 소동파는 왕유 그림을 두고,‘시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속에 시가 있다.’라고 하였다. 소식은 왕유 그림을 특히 높이 평가하여 오도자보다 앞선다고 하였다.(장조도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
당나라 사람들은 장조의 그림을 왕유보다 높게 평가하였다. 북송 대에 이르러면 장조를 언급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왕유를 많이 거론하였다. 왕유가 회화사에서 오늘의 이름을 남긴 것은 북송 시대에 문인화가 나타나면서 이다. 후대의 문인 사대부들이 왕유처럼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사리사욕을 버리고, 욕심을 버린 것으로 보았다. 남종화가들이 왕유의 사상에 공감하면서 왕유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