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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정필담

중국의 화가(11) - 서희

작성자촌정|작성시간15.06.07|조회수953 목록 댓글 1

 ***서희는 전해오는 작품이 없는 화가이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중국 회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 있기는 하나.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어 작품을 싣지 않고 소개서만 올리겠습니다.

 

              서희(徐熙

  남당의 화가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의 조상은 남당 조정에서 벼슬을 한 사대부 가문 출신이다. 재야에서 보낸 만큼 그의 화풍은 문인사대부의 야일(野逸)한 정취를 보인다.

서 희의 작품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요녕 박물관에 있는 죽작쌍토도(竹雀雙兎圖)가 그의 작품을 추측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송대의 사람은 서희를 평하여, 먹으로 그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여러 채색으로 보완하였다. 서희는 색을 칠하는 것을 번잡하다고 하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송대에 들어서서는 화조화가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특히 서촉과 남당의 이름있는 화가들이 송의 조정에 와서 일하였다. 그러나 화조화는 황전의 화풍이 주도하였다.

  곽약허는 도화견문지에서 서희는 황전과 다른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늘과 물을 모두 같은 색으로 칠한다. 서희는 묵필로 그리기 때문에 매우 거칠고 간략하다. 단청과 호분을 약간만 사용하는데도 생동감의 느껴진다. ‘라고 하였다.

  심괄은 글을 남기기를 황전은 서희가 자기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까 하여 매우 미워하였다. 황전화파가 송 초기의 화조화풍을 주도하자 서희의 아들인 서숭사와 서숭구도 황전화풍으로 그렸다고 하였다(손자라고도 함). 황전이 서희를 미워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서로 부합되지 않으므로 후대에 만든 말이리라고 한다.

  심괄의 평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어서 황전과 서희의 평가에 편견을 가지도록 하였다.

 

               <당말에서 송까지>

  당 말에서 송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지만 송왕조로 통일 된 후로는 일반적으로 삶이 윤택해지고, 상류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사람들은 회화를 수장하고, 회화 감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서화가 완상용으로 바뀌는 데는 자신의 부(富)를 과시하려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송나라에 들어서면서 토지 매매가 허용되고, 과거제도를 시행함으로 부와 관직을 세습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나라 때에 유행한 인물화는 성인이나 역사적으로 이름이 난 사람을 그리므로 교화와 교훈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교화 목적의 인물화가 시들해지고 감상 위주의 화조화가 유행하였다. 심미 의식에도 변화가 와서 이상향을 그렸던 청록산수 대신에 유필유묵(有筆有墨)의 수묵 산수가 나타났다. 수묵 산수는 진경(眞景) 즉 실경(實景)을 그렸다. 입체감과 괴량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준법(皴法)이 나타났다.

  문인을 우대하면서 송나라 때는 궁정 회화가 발달하였다 화원을 설치하여 궁중용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완상용인 산수와 화조가 대부분이었고, 정치적 용도의 교화용 그림은 거의 없었다.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관방미술과 완상화가 나타난 것은 귀족 문화의 모습이다. 채색이 유행하고, 문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수묵 산수화가 나타나는데는 불교 사원이나 도교 사원의 백묘 벽화도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수묵 산수화가 나타남으로 후대에 심미 의식에도 크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형호는 미술 이론인 필법기에서 형상을 닮게만(實景) 하는 것이 아니고 진경(眞景)을 그려라고 하였다. 산수화는 여기서 더 발전하여 북방 산수화파와 남방 산수화파가 나타났다.

  화조화는 당나라 말기에 강남의 서촉, 남당의 화가들에 의하여 전통을 변용되고, 전승 되었다. 취향이 다른 황전과 서희에 의하여 유파가 갈렸다. 황전의 황가부귀(黃家富貴) 유형과 서희의 서희야일(徐熙野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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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彰華 작성시간 15.06.09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잘 읽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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