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 죽간
무위 의례 漢簡
무위 한간
거연 한간
거연 한간
은작산 한간
마왕퇴에서 출토된 백서는 죽간은 아니다. 그러나 죽간처럼 전서가 예서로 바뀌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죽간(竹簡)과 목독(木牘)( 전서에서 예서로)
중국의 고대 문자에서 갑골이나 금석에 새기거나 점토에 찍어서 만든 것을 책(冊)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적의 기원을 찾자면 죽간과 목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간(簡=대나무 조각)을 모아서 실로 꿰어 편(篇)을 만든 것이 오늘의 서적 형식과 유사하다. 때문에 간독을 오늘의 서적의 기원으로 본다.
대나무의 조각들이 언제부터 서사의 재료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른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국 시대의 간독까지 이다. 그 전의 것은 볼 수 없다. 최초의 중국 글자라는 갑골문에 이미 전(典)과 책(冊)을 나타내는 글자가 보인다. 전과 책은 제왕이 조정 관료에게 땅이나 작위를 내릴 때 그 사실을 사관(史)이 기록한 것을 말하였다. 한나라 때는 그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았고, 이어서 5세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종이가 발명 된 후에도 값이 비쌌으므로 종이가 점진적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간독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비단에 글을 쓴 것(帛書) 보다는 앞섰다. 서사 재료를 시기적으로 보면 간독, 비단, 종이의 순서이다.
기원 전 299년에 만든 위(魏)의 양왕의 무덤을 기원 후 281년에 도굴을 하였다. 여기서 대량의 죽간이 출토 되었다. 16종의 서적을 75묶음으로 만들었다. 글자 수도 10만 여 자나 되었다. 내용은 점복과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많았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기록하였다. 이 중에도 상고시대부터 기원전 299년까지 기록한 죽서기년(竹書紀年)이었다. 이 죽간을 진의 무제는 순욱과 속석에게 주석을 달도록 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간독은 하나씩 하나씩 흩어지다가 원나라 때는 모두 없어져 버렸다.
4 79년에는 호북성 양양에 있는 초나라 무덤에서 10여 개의 축간을 출토하였다. 이것은 기원전 505년에서 기원전 278년까지 기록이었다. 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고 있는 죽간은 대부분이 최근에 발굴한 것이다
1950년 대에는 여러 곳에서 죽간을 발굴하였다. 대부분이 전국시대 죽간이었다. 글자체도 전국시대의 글자체(금문)와 닮았다. 특히 초나라 지역에서 많이 발굴한 탓인지 초나라 글자체와 닮은 것이 많았다.
1954년에는 장사의 양가만에서 모두 73점의 죽간을 발굴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든 것이었다. 1957년에는 하남성 신양의 장대관에 있는 초묘에서 28점을 발굴하였다. 1966년에는 호북성 망산의 초묘에서도 죽간을 출토하였다.
1978년에는 전국시대 초기의 무덤인 중후을의 묘(BC433) 묘에서 죽간 240여 점을 발굴하였다. 글자 수도 무려 6천 여 자 였다. 내용은 장례 의식에 필요한 병사들의 갑옷 수와 마차 수를 기록한 것이었다. 발견 된 죽간 중에는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이다. 글자 체는 역시 전국시대 글자체와 같았다.
1975년에는 호북성 운몽현에 있는 수호지에 있는 진(秦)나라 무덤에서 1100여자가 기록된 죽간을 발굴하였다. 진의 소왕 원년(BC306)에서 진시황 30년(BC217)까지 의 율령과 편년기를 기록하였다.
한(漢)나라 때의 죽간도 많이 출토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장사 마왕퇴 출토 죽간이다. 약 1천 점으로서 기원전 2세기 때의 죽간이었다. 산동성 임기현의 서한 묘에서는 고대 병서와 음양서가 기록된 4천 9백 여 점이 출토되었다. 더구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손자병법의 저자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
1977년에는 안휘성 부양현에서 서한의 개국공신인 하후영의 손자 하후조을 무덤을(BC163) 발굴하였다. 여기서는 창힐편, 시경, 주역, 연표, 대사기(大事記), 작무원정 등 10여 종의 옛 책이 적혀 있었다.
1983년에는 호북성 강릉의 장가만에서 서한 초기의 죽간 1천 여 매가 나왔다. 서한의 한무제와 문제 시대의 유물로서 글자 수는 모두 4만 자에 이르렀다. 서한의 법률, 군사, 의학 등에 관한 문헌이었다.
간독이 출토되는 지역을 보면 중원의 장사, 강릉, 신양, 임기와 변방인 돈황, 주천, 거연,무위 그리고 신강성 남부의 누란과 화기이다. 장사에서 출토된 것들은 대부분이 전국시대와 서한 초기의 것으로서 상당히 오래 된 것들이다. 거연에서 출토된 것은 수량에서 제일 많다. 거의가 서한과 동한시대의 것이다. 누란에서 출토된 것은 시대가 약간 후대인 진(晉)나라 때 것이다.
거연의 한간(漢簡)은 1930년에 중국의 서북과학고찰단이 발굴한 것이다. 거연은 돈황과 무위의 사이에 있는 곳으로서 기원 전 104년에 흉노를 막기 위해 여기에 성을 쌓았다. 거연에서는 거의 1만 점에 가까운 목간을 발굴하였다. 목간에 표시되어 있는 날자에 의한다면 기원전 102년에서 기원후 30년 사이에 쓴 기록들이었다. 목간의 내용은 다른 지역의 한나라 무덤에서 발굴된 내용들과 비슷하였다.
이 중에 77쪽의 목간을 엮어서 만든 하나는 책(冊)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아마도 이 목간들이 중국에서 제일 오래 된 책일 것이다.
1955년에는 무위에 있는 동한시대의 무덤에서 완전하게 보존된 385점의 간독을 발굴하였다. 대부분이 가문비 나무로 만들었다. 각각의 나무 편(簡)에 숫자를 붙여서 표시를 하였다. 그 목간에는 의례 7장이 쓰여 있었다.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고, 묶은 형식으로 보아서 판본(版本)이었다.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거연에서는 동한의 왕망 시기의 간독을 2만 여 점이나 출토하였다. 간독은 책의 형식으로 제본을 한 것도 있었다. 글자는 행문(行文)과 문독(文讀)에 일정한 격식으로 되어 있어 고대의 문서당안제도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한다.
누란에서 발굴한 간독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만든 것이다. 3세기 중엽에 진(晉)의 무제가 서역의 개척을 목적으로 만든 군사 기지이다. 발견된 목독은 중후반에 만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다양한 한나라의 목독을 발굴하였다.
간독에 사용한 나무는 대나무가 가장 흔하고 소나무, 버드나무, 백양나무 등이다. 이런 나무는 색이 희고 재질이 가벼우며 먹물은 빨아들이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간독을 만드는 지역에서 직접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나무를 편편한 판자로 만들어서 좁고 길게 다듬었다. 대체로 긴 간독에는 중요한 경서 따위의 글을 쓰고 짧은 간독에는 일상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내용들을 썼다.
죽간에 글씨를 쓴 후에 끈으로 엮어서 오늘의 책의 페이지처럼 엮은 것은 책과 같은 형태를 취하였다. 죽간의 형태도 새로가 길므로 일반적으로 종서(縱書)로 하여 행으로 하였다. 한 개의 간(簡)에 쓰는 글자 수가 같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간독의 한 면에 하나의 행을 쓰지만 간혹 앞, 뒤 면에 두 행으로 쓴 것도 있다.
한 개의 죽간을 간(簡)이라 하였다. 글자 수가 많아서 여러 개의 죽간에 쓰는 경우는 이어 엮어서 책(冊)이라고 하였다. 더 긴 글을 모아서 하나로 엮을 때는 편(篇)이라 하였다. 하나의 편은 여러 개의 책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갑골문에서 나타난 글자의 형태는 간략해지고, 추상적인 부호가 되면서 중국의 한자가 만들어진다. 다시 전국 시대에 이르면 각국의 나라가 자기기들에게 적합한 글자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이때의 대표적인 문자체가 대전체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6국을 통합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진시황은 문자의 통일을 추구하여 더 간략해진 소전체를 만들었다. 갑골문에서 금문을 거쳐 대전과 소전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자.
동한의 허진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는 8체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대전, 소전, 각부(刻符), 충서(蟲書), 모인(摹印), 서서(署書), 수서(殳書), 예서 이다. 그러나 8체를 어떻게 구분하였는 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다. 글자체로는 대전, 소전, 충서, 예서로 나누었고, 나머지 4체는 용도로 구분하지 않았나, 라고 한다.
대전(大篆)체는 고문(古文)과 주문(籒文)을 포함하는 서체이다. 고문은 6국의 문자를 아우러서 일컫고, 주문은 진(秦나)라의 문자를 말한다. 진나라가 문자 통일을 하였더라도 각 지역에서는 자신들이 사용하던 문자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후대에도 전승하였다. 특히 하층 관료는 엄정하고 단아한 진의 소전체로 문서를 꾸미기 보다는 조금 변형시킨 글자체(즉 秦隸 등)를 사용하였다. 소전보다는 예서체가 더 빨리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서의 기원을 진나라 때에 둔다. 동한의 허진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고문과 전서로 된 경전을 시황제가 모두 불살라 버렸으므로 하층 관료들이 사용한 예서가 일상적인 문자로 되었다. 라고 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진시황 때의 권량소판(權量소版)에 쓰여 있는 글자체가 대전체이면서도 획의 꺾임이 모가 나므로 진예(秦隸) 또는 고예(古隸)라고 하였다.
1980년에 사천성의 청천현(靑川縣)에서 전국시대의 토갱묘에서 두 개의 목독을 발굴하였다. 진의 무왕 2년(Bc309)에 만들었다. 이 목독은 글자체가 전서에서 예서로 바뀌는 것을 보여 주었다. 청천의 목독은 글자의 모양이 상하로 긴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졌고, 붓의 사용법에서 획의 변화도 둥글거나 타원형에서 각이 나게 꺾었다. 파세(波勢)에서도 잠두연미(蠶頭燕尾)를 보였다. 그 외에 호북성의 운몽현에서도 법조문이 쓰여 있는 죽간에 전서에서 예서로 바뀌는 글자체를 볼 수 있었다. 진나라 때 이미 한나라에 앞서서 예서로 전환하고 있었다.
한나라 때에도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죽간과 간독을 많이 사용하였다. 한나라 때는 비석을 많이 세웠으므로 비각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서법의 관점에서 보면 간독은 묵적을 직접 보여준다. 비석 글씨는 각자(刻字)라는 2차적 과정을 거치고 나서 글자가 나타난다. 서법사에서 간독은 묵적을 직접 대면하는데 의의가 있다.
한나라 때의 묵적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간독은 무위한간, 거연한간 등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땅에 앉아서 한 손으로는 붓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간독(簡牘)을 잡고 글자를 썼다.
비석 글씨는 유가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서를 전아하고 장중하게 썼다. 그러나 간독은 비석 글씨와는 다르게 꾸밈이 없고 솔직하고, 자유롭게 썼다. 무위한간이나 은적산 한간은 이처럼 직접 쓴 붓글씨이므로 서법의 미적 표현을 잘 보여준다. 한간의 글자체는 기본적으로는 전서와 예서가 혼합된 모양이다. 거연의 한간에는 일부 글자에서 이미 일파삼절(一派三折)의 필세를 볼 수 있다.
글자 모양이 전서에서 예서로 바뀌어 갈 때 초서체도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초서를 금초(今草)라 부르고 한간에 나타나는 초서체를 장초(章草)라고 한다. 장초는 민간에서 태어난 글자체로 본다. 장초는 전서가 예서로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의 변형된 형태로 보기 때문에 일종의 예서인 셈이다.
거연 한간 중에 원봉6년간(元鳳六年簡)에서 장초의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거연의 잡거장후의 간에서도 예서와 초서체가 함께 나타난다.
동한 광무제3년(기원 후 27)의 유품인 거연오사마구책(居延誤死馬駒冊)에는 초서체가 완연하다. 한나라 때는 이미 초서와 예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