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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서예이야기

서울 삼전도비(2) - 석야 신웅순

작성자신웅순|작성시간15.07.22|조회수557 목록 댓글 1

서울 삼전도비(2)

 

 

 

 

신 웅 순

 

  

  

이경석 궤장 및 사궤장 연회도 화첩. 보물 제930

1668(현종 9) 1127일 현종이 이경석에게 내린 지팡이와 궤, 그리고 이를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화첩.

출처: 문화재청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의 삼전도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경석의 글이 낙점되었으나 황제의 공덕을 더 서술하라는 개찬의 조건을 달았다.

인조는 이경석을 불러 말했다.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 이 나는 것이다. 월나라 구천은 회계산에서 오나라의 신첩 노릇을 했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 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연려실 기술, 현종조고사 본말)

 

이경석은 국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글공부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형 이경직에게 털어놓았다. ‘수치스러운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에게 비문 찬술은 주홍 글씨보다 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 것은 누군가가 했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1668년 현종 9년 임금은 그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궤장은 원로 대신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내려주는 의자와 지팡이를 말한다. 이원익 정승 이후 50년 만의 일이었다.만 일흔셋이었다.

송시열은 이경석에게 수이강(壽而康· 편안히 오래 살았다)’이라는 축하글을 남겼다. 당시 이경석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이 세 단어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현종 임금이 온양으로 온천 요양을 떠날 때 이경석은 임금이 병이 나 요양하고 있으면

신하된 도리로서 찾아뵈야 하는데……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일이라고 짧은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이것이 송시열에게 문제가 되었다.

현종 101669414일자 조선왕조실록이다.

 

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 는 줄 알고 크게 노하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았다. 손적에 빗대어 이경석을 모욕한 것은 이경 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찬양하는 말이 많아서 청의에 기롱 을 받은 까닭이었다. 송시열이 조그만 일로 너무나 각박하게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송시열은 이경석이 올린 차자(조선 시대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오해한 것이다.

손적은 송나라 항복 문서를 황제 대신 금나라에 바친 송나라 학사이다. 이는 금나라에 아첨한 항복 문서라 해서 그에게 수이강(壽而康 오래 살고 편안했구나)이라 하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송시열은 이 손적의 고사를 들어 이경석의 삼전도 비문을 조선판 손적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또한 경인년의 일(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일)이 아니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하였다. 이경석은 반청 인사로 죽음의 문턱에까지 여러 번 왔다간 사람이었다. 또한 효종 초 송시열 등을 천거하여 중용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이경석을 송시열이 공격한 것이다. 양송으로 불리던 송준길조차도 송시열의 행위를 미덥지 않게 생각했다.

이 사건은 이경석 사후에도 문제가 되었다.

박세당이 찬한 영의정 백헌 시조비명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멋대로 꾸미고 방자하게 속이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난 사람(聞人)이 있다. 올빼미는 봉황새와 달라서 제멋대로 성내고 제멋대로 꾸짖는다. 불성자가 미워하는 것이니 군자가 무엇을 염려하리 오.

 

여기서 聞人·올빼미는 송시열을, 君子·봉황새는 이경석을 비유한 것이다. 비문이 아직 탈고되지 않았으나 이 구절은 사람들 입에 이미 회자되었고 노론의 격분을 사게 되었다.

박세당의 사변록에 대해 김상헌의 손자 김창흡이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박세당의 문인인 이덕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경석을 비판하고 송시열을 옹호했다. 이어 주자의 경전해석을 개변한 박세당의 처사를 통박했다.(사변록 하, 계미록김창흡여이덕수서p.495.)

이어 성균관유생 홍계적 등 180여명이 임금께 상소를 올렸다. 박세당을 윤휴와 같은 성문의 반역자, 사도의 난적으로 규정하고 사변록과 비문을 거두어 불태워 줄 것을 청했다. 숙종은 주자와 송시열을 옹호하면서 박세당을 삭탈관직에 문외출송하고,사변록을 조목변파한 후 비문과 함께 불태워 버리도록 명령했다.

소론의 영수인 윤증이나 남구만 같은 이는 이사변록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으며 윤증은 김창흡의 박세당 공격은 마치 송시열의 구습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 비판했다. 정작 논의해야할 것은 사변록초고가 아니라 이경석의 신도 비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이경석의 졸기이다.

 

경석의 자는 상보이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랫관 리에게 겸공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문형을 잡고 태사에 올라서는 나랏일을 근심하고 공무를 받드는 마음이 늙도록 해이해지지 않았다. 경인년 청나라가 성을 내어 말할 때에 수상으로 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 조정의 대신으로서 은혜와 예우가 시종 바뀌지 않았고 궤장 등 늙은 신하를 우대하는 은전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런 데 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하찮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이경석에 대한 핍박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의 신도비는 노론의 방해로 세우지 못했다가 그가 죽은 지 84년만인 1754(영조 30)에야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세웠다. 1974년에 재건되었으며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낙생면 석운리에 그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이경석의 삼전도 꼬리표는 이후에도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옛사람이 삼전도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장수는 주책이 없었고 / 將帥無籌策

문장은 시비가 있었다. / 文章有是非

라 하여, 사람들은 지금까지 전송하고 있으니 그 문장의 흠은 천추에 씻기 어렵다.”

하였다.(몽경당일사 제 5편 옥하선진록, 병진년 1856철종 71)

 

삼전도비 원래의 위치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로 지금의 롯데월드 롯데매직 아일랜드 부근 호수이다.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신도비는 강물에 수장되었고 1913년에 일제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주민들이 땅 속에 묻었고 1963년에 대홍수로 그 모습이 더시 드러났다.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한 후 1983년에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로 옮겨졌다. 지금은 원래의 위치에서 30m 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 호수 서호 언덕에 세워져 있다.

삼전도 비문은 이조판서 이경석이 짓고 당대의 명필 오준이 썼으며 비문 이름은 여이징이 썼다. 글씨를 쓴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는 벼슬도 버린 채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 오세창의근역서화징에는 오준은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도 능해 삼전도비의 글씨를 썼으나 그로 인해 한을 품고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의 치욕은 이렇게 길고도 길었다.

 

-주간문학신문,2015.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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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三道軒정태수 | 작성시간 15.07.25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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