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운대 弼雲臺
석야 신웅순
필운대,서울문화재자료 제9호,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 1-2 소재
출처:http://cafe.naver.com/pangpang71/64
필운대는 바위 유적으로 조선 선조 때의 백사 이항복의 옛 집터이다. 현 배화여자고등학교 뒷뜰에 있다. 좌측에 ‘필운대’(弼雲臺) 석각자가 있고, 중간에 제명, 우측에 동추 박효관 외 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필운산은 인왕산의 별칭이다. 중종의 요청으로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명명한 인왕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운룡 즉 임금을 오른쪽에서 보필한다는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왔다.
이항복은 고려 대문호 이제현이 후손으로 자는 자상, 호는 필운, 백사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권율 장군의 사위이다. 죽마고우인 이덕형과의 기지와 작희에 얽힌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동국여지비고』 「한성부」조에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 있는데 백사 이항복이 젊은 시절 그 아래 있던 도원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호를 ‘필운’이라고 했다. 바위벽에 새겨진 ‘필운대’ 글씨 석 자는 곧 백사의 글씨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항복은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의 사위로, 권율의 집을 물려받았다. 그런 관계로 여기에 글씨를 남기게 된 것이다.
이유원은 이항복의 후손이다. 그의「필운대계권서」에서 필운대의 주인이 이항복의 것이고 필운대의 글씨도 이항복의 것임을 밝히고 있다.
겸재 정선의 필운대
내가 젊었을 때 필운산의 고적을 찾아다니다가 선생의 필운대라 쓴 세 글자를 보았다. 필운대 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필운대 아래 작은 터가 있는데 선생이 예전에 살던 곳이라 한 다. 이제 300년이 되어 사람들이 모여 살아 마을을 이루어 많게는 수백 호가 되었다.의기를 중시하 고 신의를 숭상하며 노소를 분별하고 양보를 좋아한다. 내가 때때로 술병을 들고 산에 올라 시를 읊조리니, 비록 시끄러운 시정 안이지만 그 사람을 보는 듯하고 그 말씀을 듣는 듯하다. 그 아래 사는 사람들이야 물어보지 않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째째한 무리들이야 감히 이와 견주어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유원,「필운대계권서」, 『가오고략』
백사의 해서체는 ‘수경(瘦勁)’이라 하였고 『동국금석평』,『유곡집』에는 필법이 ‘호탕’하다고 하였다. 필운대의 글씨는 근엄한 육조체로 되어 있어 이유원이 썼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유원은 『조선인명사전』에서는 예서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운대 글씨는 백사 연구, 서체의 흐름, 생가의 유적을 밝히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제명의 내용이다.
이유원의 제
우리 할아버지 살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 푸른 바위에는 흰구름이 깊이 잠겼다. 끼쳐진 풍속이 백년토록 전해오니, 옛 어른들의 의관이 지금껏 그 흔적을 남겼구나
계유 월성 이유원 제 백사선생 필운대
我祖舊居後裔尋, 蒼松石壁白雲深. 遺風不盡百年久, 父老衣冠古亦今
癸酉月城李裕元題 白沙先生弼雲臺
박효관 등의 이름을 열거한 오른쪽의 글은 이유원의 글보다 앞선 1873년이나 1813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항복의 옛집 건립과 관련된 명문(銘文)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항복 옛집 건립과 관련된 명문
필운대는 19세기『가곡원류』의 탄생을 가져온 예술의 산실이기도 하다. 운애 박효관의 은거지로 여기에 운애산방이라는 풍류방을 만들어 안민영과 같은 제자를 가르치고, 풍류를 즐겼다.
안민영은 스승 박효관을 이렇게 예찬했다.
인왕산 아래 필운대는 운애 선생 은거지라.
선생이 평생에 성격이 호탕하고 유유자적하여 작은 예절에 구애되지 않고 술을 좋아하고 노래 를 잘하니 주량은 태백이요 놀기 좋아하는 선남선녀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날마다 풍악 소리요 때마다 술이로다. 선생의 넓은 주량 한 말 술을 능히 마시거늘 어찌하여 첫 잔부터 사양함이 진정 인 듯 봄바람 꽃 버들 피는 좋은 계절에 온갖 악기 앉히고서 우조 계면조를 부를 때에 반공에 떠 있는 소리 맑고 낭랑한 소리가 날아 넘쳐 대들보의 티끌이 날아나고 나는 구름 멈추니 이 아니 거룩하냐. 소리를 마치거든 술잔을 씻어 다시 대작한 연후에 달빛 받으며 함께 돌아감이 옳지마는 편삭대엽 불러 마친 후에 묻지 않고 일어나서 벽에 걸린 큰 옷 벗어 들고 쫓기는 듯이 달아나니 이 어인 뜻이런가. 이때에 태양관 우석공의 노랫소리가 흰빛 같아 은자 풍류랑 묵객들과 명기 양 반 자제들을 다 모아 거느리고 날마다 즐기실 때 선생을 사랑하고 공경하여 못 미칠 듯하구나.
아마도 태평성대에 호화롭고 즐거운 일은 이밖에 또 어디 있겠는가.
-살아있는 고전 문학 교과서.휴머니스트, http://www.humanistbooks.com
어머니 최씨가 임신을 했다. 마침 상을 당한 후이고 병약했기 때문에 낙태를 하려고 독물을 먹었으나 위대한 인물의 탄생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오른쪽 갈비뼈와 어깨, 등이 검게 썩어 살이 생기지 않았다. 태어난 지 이틀이 되었는데도 젖을 빨지 못하고 사흘이 되어도 눈을 뜨지 못하였으며 닷새가 되도록 울지 못하였다고 한다.(이종묵,『조선의 문화공간』3,42쪽)
그는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한번은 이항복이 새저고리를 입었는데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가 보고 부러워하여 새저고리에 신었던 신까지 벗어주었다.
“ 새 저고리를 어찌 두고 맨발로 돌아왔느냐?”
어머니는 짐짓 노하여 꾸짖었다.
“ 그 아이가 부러워하는데 차마 아니주지 못하였습니다.”
이항복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의로웠다.
소년 시절에 부랑배로 헛되이 세월을 보낸 적이 있어 어머니는 이를 준열하게 책망했다. 백사는 이후 몸을 고쳐 학업에 열중했다.
훗날 「한식날 선친의 묘가 생각나서 두보의 칠가에 차운하다」라는 시의 서문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부모를 잃고 형제들이 동서로 흩어진 뒤에는 혈혈단신으로 혼자 외로운 그림자뿐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남들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자랐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고 자라서는 사우의 도움을 입지 못하였다. 미친 듯이 제멋대로 쏘다니면서 짐승처럼 자랐다.
필운대 일대는 ‘북둔의 복사꽃,北屯桃花’, ‘흥인문 밖의 버들, 興仁門外楊柳’, ‘천연정의 연꽃, 天然亭荷花’, 삼청동 ‘탕춘대의 물과 바위, 蕩春臺水石’ 등과 함께 ‘필운대의 살구꽃, 弼雲臺杏花’라 하여 장안의 유명한 명소로 꼽혔다. 봄이면 도성의 풍류객들이 이 곳을 찾아 술과 시로 춘흥을 즐겼으며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 양곡 소세양의 정자 청심당에는 당대 문명을 떨친 용재 이행, 기재 신광한 등 인류 문사가 모여들었고 명나라 사신들도 이 곳을 찾아 즐기는 것이 관례였으며 공용경은 「청심당기」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 읊은 시첩을 『필운대풍월』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기도 했다.
영조 때의 시인 석북 신광수는 이 곳의 봄 풍경을 「필운대에 올라 꽃을 보며」(登弼雲賞花)에서 ‘ 필운대의 꽃 기운 장안을 압도하여 雲台花氣壓城中/ 눈 가득한 봄빛 만호 장안 넘치네 滿眼芳華萬戶同” 라고 읊었으며 암행어사 박문수는 ’그대는 노랫가락 읊조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필운대에 오르니 君歌我嘯上雲臺/오얏꽃 복사꽃 울긋불긋 나무 가득 피었구나李白桃紅萬樹開/이런 좋은 경치에 이 즐거움 또한 멋지거니如此風光如此樂/ 세세년년 태평 술잔 가득 마시고 취하리라年年長醉太平盃‘ 라고 노래했다.
풍류객들이 찾아와 그 위용을 자랑하던 필운대는 지금은 학교 교사의 뒤편에서 벼랑마저 무너져내릴 듯 초라한 바위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백사 이항복의 저택이었고 박효관의 예술의 산실이었던, 봄이면 상춘객들로 북적거리던 그 아름다운 행화촌의 풍광은 어디로 갔는지 이도 근대화의 물결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옹색한 모습으로 문화재라는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필운대이다.
필운대 가는 길
월간서예 2016.4.월호,129-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