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택지적비문
석야 신웅순
사택지적비문
『일본서기』 권24 황극(皇極) 2년(642) 7월 조에 “조정에서 백제의 사신인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사택지적’이라는 이름은 한국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일본 서기의 ‘지적’을 이 비석의 ‘사택지적’과 같은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해는 의자왕 2년으로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좌평 기미 등 반대하는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축줄하였다. 이때 그가 연루되어 면직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내용에서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듯하다. (고고학사전, 2001.12, 국립문화재연구소)
이 비에는 연호가 없고 간지만 있다. 비문 첫줄의 간지는 마모되어 있어 확인할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甲’자로 본다.
갑인년은 의자왕 14년인 654년이다.
사택지적은 의자왕 2년 642년에 일본으로 갔다가, 백제로 돌아온 뒤, 654년 노재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 인생을 회고하면서 이 비를 세웠다. 그는 이 비에서 ‘나지성’이란 출신지를 밝히면서도 자신의 관등이나 관직은 적지 않았다. 인생무상과 관련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나지성은 부여읍 서쪽 30리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로 비정되고 있다. ‘사택(砂宅)’ 성은 백제의 팔대성의 하나로 사(沙)씨와 같은 것으로, 사타(沙吒) 등으로 표기했다. 사택지적이 대좌평(=상좌평)이었던 점으로 보아 그는 백제의 최고의 귀족이었다. 그가 불당과 탑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귀족으로서의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고학사전, 2001.12, 국립문화재연구소)
길쭉한 사각형태로 가로 세로로 일정한 간격으로 칸을 치고 그 칸 안에 글자를 새겼다. 정간은 정사각형으로 한 변이 7.6㎝이다. 남아 있는 비문은 4행으로 매 행의 글자는 14자로 전체 글자 수는 56자이다. 글자 크기는 약 4.5㎝ 내외이다. 비의 오른쪽 상단부에는 지름 20㎝ 가량의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봉황문을 새겨 넣었으며, 붉은 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비문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육병려체(四六騈驪體)로, 자체는 해서체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격조 높은 문체와 서법은 백제의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으며 백제 말기 귀족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불당과 탑을 세운 동기와 자신의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갑인년정월구일내기성사댁지적)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강신일지역왕개체월지난환천금)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이건진당착옥이립보탑외외자용)
吐神光以送雲峨峨悲貇含明聖以 (토신광이송운아아비간함성명이)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쉬이 가는 해를 슬퍼하고 쉽사리 돌아오는 달이 서러워,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파서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웠다. 높디높은 [巍巍]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스런 빛을 토해 구름을 보내고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해방 후 194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재직중이던 불교미술 사학자 황수영씨와 부여박물관장에 홍사준씨와 함께 부여 고적지를 답사하다 관북리 도로변에 쌓인 돌무더기 속에서 이 돌을 발견했다.
이 돌무더기에는 일제 식민강점 시절 일본인들이 신궁 역내의 참도에 깔려고 부여 각지에서 옮겨다 쌓아놓은 것인데 여기에 이 금석문이 섞여 있었다. 비석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며, 상당부분이 잘려나가 전모를 잘 알 수가 없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1983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몇 년 뒤 이 시는 사비 도읍기(538-660년)에 작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이라는 사람이 늙어감을 탄식해 사찰을 건립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사택지적비'라고 명명했다.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에서도 사택지적비를 탁본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인생무상. 백제인의 삶이나 현대인의 삶이나 뭐 다를 게 있는가.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가 보다. 쉬이 가는 해를 슬퍼하고 쉽사리 돌아오는 달이 서럽다고 했다. 보탑의 자애로운 모습, 빛을 토해 구름을 보내고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는다고 했으니 현대의 시라도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은 없을 것이다.
사택지적비는 인생무상에 앞서 아름다운 불교적인 한편의 시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감정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 문학신문,201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