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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서예이야기

김홍도의 「서당」-석야 신웅순

작성자신웅순|작성시간18.01.05|조회수555 목록 댓글 2

김홍도의 「서당」





석야 신웅순



김홍도의 「서당」 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단원풍속도첩』에 실린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한 조선 후기 풍속화「서당」의 모습이다. 타원형 구조 속에서 눈물을 훔치는 아이를 바라보는 훈장과 학생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 속의 서당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금 훈장님이 한 사람씩 호명하며 공부를 해왔는지 안해왔는지 전날에 공부했던 내용을 점검하고 있다.
  맨 앞 한 녀석은 책을 등지고 돌아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다. 훈장님 책상 옆에는 회초리가 놓여있다. 공부를 안해온 모양이다. 매를 맞을 생각에 겁이난 것인지 훈장으로부터 막 매를 맞아 아파서 울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종아리를 맞으려고 댓님을 풀고 있는 것인지 훈장으로부터 방금 회초리를 맞아 댓님을 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숙제를 하지 않아 훈장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혼이 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예전에는 전날 배운 것을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외워야 했다. 뒤로 돌아앉아 책을 보지 않고 다 외우는 것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아 외운다고 해서 이것을 등돌릴 배(背), 외울 송(誦)자를 써서 '배송(背誦)'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는 훈장님과 학생들의 표정이 각기 달라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분위기도 또한 다르다.
  훈장님은 혼이 나 우는 녀석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다. 지긋이 웃음을 머금고 난감해하는 표정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안쓰러운 듯 아이를 처다보고 있어 무섭지가 않고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진다.
  아이들의 표정들도 조금씩 다른 모습이다.
  왼쪽 가장자리에 앉은 녀석은 입을 가린 것으로 보아 우는 녀석을 보며 외울 대목을 살짝 읽어주고 있는 것 같다. 왼쪽 줄 앞에 있는 두 아이는 이걸 보고 말하라고 하면서 책을 쓱 내밀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며 외우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다.
  오른쪽 맨끝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어려보이는, 등을 보이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책을 들여다보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꼿꼿이 앉아 녀석이 혼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숙제를 자신 있게 해온 모양이다. 아래쪽 두 번째로 앉은 녀석은 숙제가 미진한 지 웃을 겨를도 없이 책을 보며 열심히 외우고 있다. 다음 숙제 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나머지 녀석들은 킥킥 웃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숙제 검사를 다 마친 모양이다.  그런데 혼자서 갓을 쓰고 있는 화면 오른쪽 학생이 있다. 장가를 든 젊은이이다. 어른 대접을 받아 제일 윗자리에 앉아있고 맨 아래쪽 꼬맹이는 서당의 막내라서 끝에 앉아 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물론 글공부는 양반들 차지였다. 김홍도가 살던 영·정조 시대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사를 해 부자가 된 상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해결되니 다음 순은 글공부해 실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이 서당에서는 양반과 상민이 같이 공부하는 모습을 그렸다. 짧은 옷차림을 한 왼쪽 아이들이 상민이고 긴 옷차림을 한 오른쪽 아이들이 양반이다.
  동병상련이랄까. 혼나고 있는 아이가 상민이다. 어제 부모님 일을 도와주어 숙제를 못해왔나보다. 그래서 왼쪽 아이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왠지 왼쪽 아이들을 오른쪽 아이들보다 더 똑똑하게 그린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은근히 양반을 꼬집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풍속화는 예리한 관찰, 치밀한 구성과 함께 한국적인 따뜻한 시선, 해학과 정감이 묻어있는, 우리들에게 매우 친근한 그림이다.
  작품은 그 사람이라고 한다.
  조희룡의『호산외사』에 의하면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마음씀이 크고 넓어서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사람들은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강세황 역시「단원기」에서 “단원의 인품을 보면 얼굴이 청수하고 정신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고상하고 세속을 초월하여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삶은 어려웠고, 건강도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크게 구애받을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것 같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전해주는 한 편의 일화가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      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이로 보아 그는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생활력이 강한 가장은 아니었던 같다.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언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말도 전하고 있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밤이면 거문고 한 두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를 즐겼고,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홍도(1745-1806?)는 영. 정조를 거쳐 순조 연간 초까지 활동한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김득신 · 신윤복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일컬어진다.
  출생지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7, 8세에 안산에 있는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어린 시절 안산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면서 직장에서는 상하관계,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이러한 인연은 강세황이 세상을 떠난 김홍도의 나이 47세까지 이어졌다.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이른 나이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궁중화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29세의 젊은 나이로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또한 1781년 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 신한평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산수, 인물, 불화, 화조, 풍속 등 모든 장르에 능했지만, 특히 산수화, 풍속화에 뛰어났다. 또한 회화에서뿐 아니라 연주하는 음악가로서도 재능이 있었고, 서예가로도 평판이 높았으며,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 고졸의 아취가 있어 품격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두산백과)
  스승 강세황의 평가를 보면 김홍도가 어떤 화가였는지를 알 수 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매 못하는 것이 없다. 인물이면 인물, 산수면 산수, 신선이면 신선,       동물이면 동물, 새면 새, 꽃이면 꽃 등 그의 그림은 감히 명성 있는 옛 화가들과 비교해도 가히       거리낄 것이 없다. 특히 신선과 꽃 · 새 그림을 잘 그려, 이것만 가지고도 한 시대를 울리며 후대      에까지 길이 전하기에 충분하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능히 그려 내어 선비, 장사꾼, 나그       네, 양반 가문의 여인네들이 사는 모습,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다른 것이 없으니 옛적에      는 이런 솜씨가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옛 화가들이 그린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 공력을 쌓      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그릴 수 있는데, 그는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타고난 소질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1805년 12월 아들에게 보낸 김홍도의 편지가 전하고 있고, 1805년 12월 25일 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추성부도」가 전해지고 있다.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예순 두 살이던 1806년에 사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809년 순조 때 김홍도의 형 홍석주가 「추성부도」가 그려진『해산첩』을 받았을 때 김홍도는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 월간서예,2018.1,125-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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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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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치암 | 작성시간 18.01.07 새해에 좋은 말씀으로 시작 합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웅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07 늘 찾아주셔 감사합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기원 드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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