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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서예이야기

추사의 ‘백파선사비문(白坡禪師碑文)&백벽(百蘗)’

작성자신웅순|작성시간20.06.04|조회수1,383 목록 댓글 4

추사의 백파선사비문(白坡禪師碑文)

백벽(百蘗)’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평론가 서예가, 중부대교수)

 


 

백파선사 앞면과 뒷면 탁본

 

추사가 과천에 내려온지 삼년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봉은사에서 과지초당으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과지 초당으로 가려면 작은 시내를 건너야한다. 그래서 건넛마을 어귀를 돌아서 가야한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부부였다.

영감 나이가 얼마요?”

일흔 살입니다.”

동감나기였다.

서울은 가보셨습니까.”

아니 갔습니다.”

노부부는 여기 개천 안에서만 70평생을 산 것이다.

무얼 먹고 사느냐고 했더니 옥수수를 먹고 산다고 했다.(강희진,추사 김정희,명 문당,341-343)

과천 이 칠십노인은 누릴 것 다 누리고 먹을 것 다 차려먹고도 어디 웃을 일 하 나도 없구나.”

이런 생각에 추사는 과천에서 칠십을 맞이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망연자실이었다.

촌로의 삶 속에서 평범하지만 추사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추사는 과천에서 칠십살이를 과칠십이라 스스로 명했다. 이렇게 해서 과칠십이라는 호가 생겨났다. 돌아가시기 1년 전이다.

추사 만년 해서·행서 금석문의 최고 걸작,백파선사 비문이 바로 이 때에 탄생했다.

1855년 어느 봄날 정읍 백양사의 설두 백암 스님이 추사 초당을 찾았다. 3전에 돌아가신 백파스님의 비문을 지어달라는 것이다.

통상 비문은 앞면은 전서, 뒷면은 해서로 쓰는 것이 보통인데 완당은 비 앞면 이름은 크게 해서로 쓰고 뒷면 이름 풀이글은 작게 행서로 썼다. 완당에게는 파격이었다.

앞면의 비 이름이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뒷면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로서 일종을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스님만이 이에 해 당할 만하다. 그래서 율사라고 썼다. 대기와 대용, 이는 바로 백파스님이 팔십년 동안 늘 강조하던 사항이다.……

예전에 나는 백파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논변한 적이 있는데, 이를 갖고 세상 사람들 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 이니 아무리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닳게 말한다 해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스님을 일으켜 서로 마주앉아 한번 웃을 수 있으리오.

그러니 지금 백파의 비면 글자를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네 글자를 대서특서하 지 않는다면 족히 백파의 비가 되지 못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果老 : 추사의 별호, 즉 과천에 사는 노인)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1 - 전북, 초판 1994., 개정판 132011

 

추사는 끝내 백파 스님의 얼굴을 뵙지 못했다. 그래서 완당이 백파를 사모하는 마음, 사죄하는 마음이 더욱 절절했다.

제주 유배 중백파망증 15를 지은 일이며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는 길에 정읍 조월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이며 만가지 일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추사와 초의는 동갑내기였다. 19살이나 연장인 백파의 선문수경에 초의가 맞서선문사변만어를 들이대며 반박 논리를 폈다. 이 때의 논쟁에 추사가 끼어들어 백파와의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다.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다고 15가지로 반박 논증을 폈다. 이것이 그 유명한백파망증15(白坡妄證十五條)이다. 추사에게 백파 스님은 삼촌 뻘 같은 분이었다. 추사다운 추사의 도발이었다.

백파는 추사의 방외우이다. 백파는 일생을 선에 대해 대기대용을 주장해왔다. 추사는 그 설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서로 간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백장은 대기를 터득하고 황벽은 대용을 깨우친 고승이다. 백장과 황벽을 모두 얻는 것이 곧 대기대용을 두루 갖추는 것이 된다. 백장, 황벽을 따르면 대기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고승을 본받으라는 뜻이다. 추사는백벽 百蘗끝 협서에 그 뜻을 명확히 했다. 추사는 백파스님의 제자인 설두 스님에게 선물로 백벽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추사가 설두 스님에게 써준 글씨 백벽

 

백파 선문의 종취는 대기대용을 드높이는 것이므로 이 두 자를 써서 설두

상인에게 준다.
백문종취 거양대기대용 아차이자 서부설두상인 승련

白門宗趣 擧揚大機大用 以此二字 書付雪竇上人 勝蓮

 

여기에서 추사는 발문 끝에 승련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승련의 호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유배에서 풀려나 강상에서 머물면서부터로 생각된다. 주로 스님들하고 소통하면서 쓴 명호이다. 승련이란 석가에 근접한 경지를 말한다. (강희진,추사 김정희,230) 차에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의당 승설이라고 해야하는데 추사 자신이 승련이라고 쓴 것이다. 추사에게는 가끔 이런 장난끼들이 발동했다. 그 호는 부처님 경지 정도가 아니면 여간해서 쓸 수 있는 호가 아니었다. 희증(戱贈)으로 시작한 승련이라는 호는 마지막 봉은사 시절 남호 영기 스님과 화엄경 판각을 펴내면서 진실로 승련으로 인정을 받았다. 후에 호봉 스님이 화엄경 80권에 대해 평할 때 선생을 승련노인이라 호칭해준 것이다. 추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그의 불가의 뜻을 넘어 추사를 승련으로 인정해준 것이다.(강희진 추사 김정희,234)
추사는 또 백파의 제자들에게 평소 아끼던달마대사초상을 부도 비문과 함께선물했다. 이 달마상을 백파의 영정으로 알고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다. 여기에 게송까지 써 주었다.

 

멀리 보면 달마 같고

가까이 보자 백파일세

차별 있음 가지고서

불이문에 들었구려

흐르는 물 오늘이요

밝은 달은 전신일세

 

이 백파율사비는 1858(철종 9)에 건립했다. 선운사 부도밭에 있으며 사람들은 이 곳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밭'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파율사비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는 모조품이 세워져 있다. 비명이 훼손될까 진품은 1998년 개관시와 함께 선운사 성보박물으로 옮겼다.

백파 긍선(1767~1852) 스님은 고창 무장 출신으로 12세 때 출가하여 이곳 선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는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 오랬동안 침체되었던 조선 후기 불교에 참신한 종풍을 일으킨 화엄 종주로 평가 받고 있는 고승이었다.

 

- 신웅순,월간서예,2020,6,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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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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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치암 | 작성시간 20.06.05 추사의 기름 뺀 모습이 보임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웅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06 만년의 작품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졸글 잊지 않고 찾아주시네요.감사합니다.
  • 작성자三道軒정태수 | 작성시간 20.06.06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웅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0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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