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세한도(歲寒圖)(7)
고 오주석(吳柱錫)미술사가)
가운데 앉아 계신 한 노인은 몸집이 자그마하고 수염은 눈같이 희며 숱은 많지도 성글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발기가 옻칠한 것처럼 빛났고, 머리는 벗어져 머리칼이 없었다. 승관(僧冠)처럼 대쪽으로 짠 둥근 모자를 썼으며, 소매가 넓은 옥색 모시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얼굴은 젊은이처럼 혈색이 불그레했지만 팔이 약하고 손가락이 가늘어 마치 아녀자 같았으며, 손에 염주 하나를 쥐고 만지작거리며 굴리고 계셨다. 여러 어른이 절하며 예를 갖추자, 몸을 구부려 답하고 맞으시니, 이분이 바로 추사 어른인 줄 알게 되었다. 예전에 추사선생은 ‘다른 시대 사람(異代人)’같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까닭에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았던 터라 그방의 집기들이며 얼굴 모습이 아직껏 뚜렷하게 눈에 남아 있다. 그분은 동편가 부처를 모신 탁자 아래에 옥색 무늬 종이에 쓴 서련(書聯) 세 짝을 펴놓고서 이제 막 볕에 쪼여서 먹 마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참이었다. 그 중 하나는 “봄 바람같은 큰 아량으로 능히 만물을 받아들이니, 가을 물처럼 맑고 고운 문장은 세상 티 끝에 물들지 않았네(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였고, 도 하나는 “산골짝 집에서 푸른 이끼로 새끼 사슴을 길들이고, 돌밭에 내리는 봄비 속에 인삼을 심네.(磵戶靑苔馴子鹿 石田春雨種人蔘)”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노국(潞國) 문언박(文彦博, 1006~1097)은 만년에 오히려 건장했고, 여단(呂端, 935~1000)은 큰일을 맡아서 우물쭈물한 적이 없었다.(潞國晩年有확삭 呂端大事不糊塗)”는 것이었다. 추사는 여러 어른을 대하시고 침계(?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 공의 안부를 거듭 물어 마지않으셨다.
중이 저녁 식사를 알렸다. 여러 어른은 물러나왔으나 나는 짐짓 서서 살펴보니, 밥상 없이 검게 옻칠한 편편한 목판위에 바리때와 나무 접시 다섯을 갖추었으며, 모두 소찬에 옻칠 수저가 놓여 있었다. 시종 한 사람이 들어와 은수저와 찬합을 따로 올리고, 또 무슨 말을 고하고 나가더니 자기 단지 하나를 가져왔다. 이것도 반찬 같았으나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내 뜰 밖으로 나왔다. 중이 밥상을 물리기에 들어가 보니, 중은 다시 대얏물을 올리고 공은 손을 씻고 양치질을 마치었다. 또 늙은 중이 댓가지 하나를 가지고 들어오는데, 그 끝에 작은 종이통이 하나 달려 있었다. 통 가운데 바늘 같은 가시랭이(베 올에 초를 칠해 짧게 짜른 것) 한 올을 골라 공의 오른 팔 살점에 곧추 심었다. 이어 사미승이 돌유황에 불을 붙여 다가서서 가시랭이 끝에 불을 붙였다. 타는 것이 촛불 같더니만 곧 꺼졌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일인지라 급히 서편 방으로 돌아와 여러 어른들게 여쭤보고자 했더니 여러 어른들께서 늙은 중에게 막 묻는 중이었다. “김공께서는 매일 조석 식사를 이같이 하시는가?” “그렇습니다. 김공의 조석 식사는 비록 절 음식이긴 하지만 올리는 찬수를 대개 당신 댁에서 마련해 옵니다. 생선과 고기가 항상 있으니 매양 이같이 하는 일이 많습니다.” 중이 나간 후 나는 어른들께 물었다. “그 하신 일이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며 또 무엇이라 하는 것입니까?”어당께서 말씀하기를 “이는 불경에 있는 것으로 자화참회(刺火懺悔)가 그것이니라. 또 수계(受戒)라고도 한다. 무릇 중이 되면 처음에 삭발하고 스승의 계를 받을 때도 이같이 한다. 이는 다 세속의 더러운 것을 살라버리고 청정함에 귀의(歸依)하겠다는 맹세니 불법이 그러하니라.”하였다. 처음 이 일을 보고 또 그 말을 듣고서 비록 입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에 심히 괴이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추사처럼 높고 귀한 분이 어찌해서 이처럼 부처에게 미혹하였는가 하는 마음에 줄곧 의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한당(漢唐) 이래의 글을 보고서 명류재사(名流才士)에게 종종 이런 일이많음을 알았다....
추사 김정희는 임종 직전 뚝섬 봉은사에 머무르면서 매일 팔뚝에 심지를 박아 청정심을 닦는 지극한 불심속의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김정희가 손님들에게 거듭 안부를 물었다는 침계 윤정현은 이인석의 외삼촌인데, 그는 원래 추사의 문인(門人)으로 스승이 북청(北靑)에서 유배 생활할 적에 함경감사를 지내면서 뒤를 돌본 인연도 있었다. 추사는 일찍이 윤정현의 부탁을 받고 그의 호 침계(?溪)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쓸까 30년 동안이나 고심하다가 결국 해서와 예서를 섞은 자체로 써준 일이 있을 만큼 그를 아꼈다. 이 작품 역시 간송미술관에 전한다.(끝)
<옛그림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수업에선가 <세한도>에 결정적인 잘못이 있다고 주장한 학생이 있었다. 즉 작품 속의 집은 그 오른편이 보이는데 둥근 창문을 통해 본 벽의 두께가 어째서 왼편에서 바라본 모양으로 모양으로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은 그것뿐이 아니다.
첫째, 창문이 보이는 면은 직사각형 벽에 이등변삼각형 지붕이다. 이건 앞에서 본 것이지 애초 비껴본 모습이 아니다.
둘째, 지붕은 뒤로 갈수록 줄어들어 원근법을 쓴듯 한데 아랫벽은 오히려 뒤로 갈수록 조금씩 높아져 역원근법에 가깝다.
셋째, 지붕의 오른편 사선도 앞쪽에 비해 뒷쪽이 훨씬 가파르니 역시 오류가 아닌가?
김정희는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25세된 해 정월에 그곳 학계를 이끌던 78세의 노대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을 만났다. 첫대면에서 옹방강은 "조선에 이러한 영재가 있었던가 海東有此英才耶"하고 탄복하면서 "경전, 학술 문장이 조선의 으뜸 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는 자필 글씨를 즉석에서 써 주었다. 이렇게 한 시대를 울렸던 천재가 집 한 채를 제대로 못 그릴 리가 있는가?
추사는 <세한도>에 집을 그리지 않았다. 그 집으로 상징되는 자기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그래서 창이 보이는 전면은 반듯하고, 역원근으로 넓어지는 벽은 듬직하며, 가파른 지붕선은 기개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이 지나치게 사실적이 되면 집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옛 그림을 눈으로만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작가 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