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욥기의 교훈

작성자커피향기|작성시간20.06.22|조회수546 목록 댓글 3
성경에서 욥기는 부피가 제법 큰 책 중에 하나로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래도 자세히 읽어보면 욥기처럼 재미있는 책도 없다. 마치 재판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신랄하게 말들을 주고 받는 것 같다.

종종 욥기는 고난을 이기면 복을 두 배로 받는다는 설교에 인용된다. 그러나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고난을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과 아무리 잘났어도 "자만하지 말라"이다.

욥은 당대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거부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만다. 게다가 온 몸에 부스럼이 나고, 불면증에 걸려서 잠을 못자고, 그나마 잠깐의 잠조차도 악몽으로 깨는 지독한 고통을 겪는다.

욥의 아내는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오해한다. 그래서 그토록 하나님께 충성했던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살하라고 요구한다. 그렇지만 욥은 아내의 의견을 묵살하고, 하나님을 끝내 원망하지 않는다.

욥의 가장 친한 친구 세 명이 욥을 보러 왔다가 너무나 기가 막힌 상황에 할 말을 잃는다. 무려 7일간이나 욥과 함께 땅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있었다. 욥의 친구들은 도대체 욥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고민하고 고민했다.

마침내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서 원인을 캔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없이 이런 고통을 허락하실리가 없다.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잘못했는지 솔직히 자백하고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고난에 대한 너무나 뻔한 해석이었고, 나름대로는 친구로서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 뻔한 해석에 토를 달았다. 자신이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죄를 지었을지라도, 강도보다 더 짓지는 않았는데, 왜 강도는 편안히 사는 데 나는 이토록 혹독한 징계를 받는가?

그러나 친구들은 이미 자기들 신학의 틀에 갇혀서, 욥을 몰아붙인다. 욥의 고난을 '죄'와 연관시키지 않고는 이 엄청난 고난이 해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런 천편일률적인 고난의 해석방식을 가진다. 현생의 고난을 해석하는데 현생의 죄로 충분하지 않으면 심지어 '전생'까지 들추어가며 기어코 죄를 뒤집어 씌우고야 만다. 나는 불교에서 전생이란 개념 자체가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성경의 욥기는 그런 해석을 거부한다.

욥은 고통 속에서 친구들의 추궁까지 겹치니 거의 죽을 맛이었다. 욥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욥 19:21) 그러나 친구들은 하나님이 치신 욥을 불쌍히 여기는 것조차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욥을 책망했다.

욥도 지렁이보다 더 꿈틀할 능력이 있는 자로서 어찌 가만있겠는가?
친구들의 추궁에 여러 가지로 항변하다보니 점점 이해불가한 영역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지나치게 변명한 나머지 도를 넘어섰다. 침묵해야 할 시점에서 너무 말을 많이 한 것이다. 한마디로 건방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암송하는 구절인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구절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이 부분만큼은 새번역성경이 오히려 정확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 공동번역은 더 적나라하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걸음을 낱낱이 아시나니,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 그 앞 뒤 구절인 9절 11절에 의하면 위의 번역이 문맥상 옳다.
즉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은 욥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욥의 건방짐이다.

욥과 욥의 친구들...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가?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욥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2-3)

그리고 여러 질문을 던지신다.
그 질문들은 다음 두 종류로 요약된다.
너는 아느냐?
너는 할 수 있느냐?

너는 아느냐라는 질문은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다. "산 염소가 새끼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라는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하늘의 법도라는 오묘한 일까지 질문하신다. 우주 전체의 지식을 100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아는 지식은 몇 %나 될까? 0.0000... 소숫점 몇 째 자리까지 내려가야 할까?

너는 할 수있느냐라는 질문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들소로 밭을 갈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서부터 교만한 자를 일일이 다 찾아내서 심판할 수 있는 능력까지 질문하신다.
인간이 대단해 보여도 코로나 사태에 쩔쩔매는 것을 보라. 인간들은 정말로 별 것도 아닌 것에도 무기력하게 죽는 존재다.

여기에서 나름대로 자기 의에 자신만만했던 욥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건방졌는가를 깨닫고 회개한다.

그리고 욥기의 중요한 부분은 욥의 친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욥의 고난에 대해 함부로 해석했던 친구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하신다. 그리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용서가 없다고 하자, 그들은 욥에게 용서를 구하고 욥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욥기를 통해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신다.
"고난을 함부로 해석하지 말아라"
"아무리 잘났어도 결코 자만하지 말아라"

주변에 고난 받는 사람이 있다면,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우리가 할 일은 단지 위로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만하지 말라. 자만은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과 같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자기 의의 끝판왕이었던 욥조차도 자만의 유혹 만큼은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그 전제를 의심하지 말고 이해가 안된다고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된다.

오늘날 코로나 사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사상의 틀 안에서 뻔한 해석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욥의 친구들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잠잠하자. 코로나의 교훈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드러날 것이다. 다만 인간의 무지함과 무력함을 절감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될 수만 있다면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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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국교회개혁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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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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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작성시간 20.06.25 좋은 글입니다.
    공감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커피향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25 자매님과 형제님 잘 계시지요~욥기에 대한 교훈에 공감되서 퍼왔어요 강동평신도교회 최야곱형제 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작성시간 20.06.26 커피향기 네, 평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하늘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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