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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교제

[스크랩] 율법주의 (여주봉 목사)

작성자Brother|작성시간07.03.08|조회수169 목록 댓글 0

 

율법주의 (여주봉 목사)

  
1. 율법과 율법주의



우리가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율법과 율법주의 사이의 구분을 명백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으로부터 나온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정확히 알아야 우리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우선 율법은 어떠한 것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리고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으로서 거룩한 것이요 선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율법과 율법주의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여 율법은 우리가 피해야할 나쁜 어떤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12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과 관련해서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율법이 주어진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목적을 올바로 알아야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



첫째,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7:7은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처럼 율법은 마치 우리 영혼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아무리 시커먼 오물이 묻어 있어도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우리 얼굴에 그토록 더러운 것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상숭배가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죄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어떠한 죄도 전혀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살인도, 도적질도, 간음도 한적이 없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이요,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이 그야말로 얼마나 죄로 가득차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죄를 심화시킵니다.



로마서 7:8은 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갈 5:16-18 참조). 누가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더욱 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에게 생깁니다. 그래서 멀쩡한 유리인데도 그곳에다 ‘유리를 깨뜨리지 마시요’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면 더욱 그것을 깨뜨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율법을 통해서 욕망을 부채질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 속에서 죄를 심화시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세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입니다.



갈라디아서 3:24은 말합니다,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마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몽학 선생이란 말은 오늘날로 하면 가정교사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 중에서 똑똑한 노예를 택하여 자녀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가정교사로 삼았는데, 그러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철저한 타락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죄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어떠한 의에도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철저하게 깨닫게해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이러한 목적들을 위해서이지, 결코 우리가 그것들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인 반면, 율법주의는 사탄에게서 나온 하나의 신앙체계이며, 따라서 악한 것이요,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르게하는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것을 철저하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신앙이 어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의 신앙체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율법주의 신앙은 그 모양에 있어서는 성경이 말하는 참 신앙과 비슷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달라,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고, 따라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 신앙체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율법주의 신앙의 대표격인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그리고 이 율법주의 신앙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할 것 없이 모든 시대에 걸쳐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 신앙체계입니다. 그래서 그 때 마다 성도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며, 참다운 신앙을 왜곡시키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몇가지 대표적인 예로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이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들 수 있는데,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은 비단 그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신앙체계는 모든 시대에 걸쳐 널리 퍼져 있으며,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것이 매우 팽배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율법주의는 악한 것이므로 성경은 율법주의 신앙을 철저하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처절하리만큼 심각하며, 그야말로 불꽃튀기는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레미야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그토록 심하게 싸웠던 싸움이 바로 이 율법주의 신앙과의 싸움이었다는 것 뿐 아니라, 이 싸움의 심각성과 그 절박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본질



그럼 율법주의 신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율법주의의 본질은 한마디로 줄여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행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신뢰하고, 마음의 상태보다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하며, 인격체이신 성령님보다 규례와 규칙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주일예배, 십일조, 성찬식, 침례(세례), 성경이나 성경공부, 기도 등 우리 신앙의 모든 면이 율법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의식(rituals)으로서 상징(symbols)이지 결코 실재(reality)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의 실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알맹이요, 이러한 의식들은 예수님을 싸는 포장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알맹이인 예수님을 아는 것, 즉 예수님과의 교제보다 이러한 의식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지키고 행하는 것에 중점을 두며, 또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성경공부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성경공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이것은 단순히 그분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것, 즉 그분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분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힘쓰기 보다, 성경공부하는 자체를 중시하며, 그것을 많이 함으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며,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것은 소위 성수주일이나 십일조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율법주의로 변질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보다 옳은 교리를 더 중요시하게 되고(당연히 옳은 교리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은 ‘일정한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conformity to rules)’으로 전락되어 버리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에게서 걷히며, 우리는 영적인 실재(reality)에 대해 눈이 멀게 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정확하게 이러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소위 성수주일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몇가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주요 목적으로 삼음으로서, 근본적인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 율법주의 종교로 빠지고 말아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 주위에는 신앙의 모양은 많으나 하나님의 실재와 생명은 없는체, 하나님의 임재는 걷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서 떠나 있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온갖 죄악이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조금만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래서 참다운 신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때 가면 이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깨달아 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하고 거짓의 실체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진리를 알게 되면 거짓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의 특징



우리가 율법주의의 본질을 위에서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참다운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를 깨닫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자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잠에서 깨고난 다음에야 비로서 그 사람은 자기가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참다운 신앙을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의 실체를 깨닫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실체를 조금이라도 더욱 알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의 특징을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인물들의 대표격이기 때문입니다.

 


1) 영적인 우월감.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자기가 남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을 규례와 규칙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에 두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킨 자기들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로부터 멀리 따로 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런데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한번도 빠짐없이 성수주일하고, 그 많은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고, 교회에서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사로 성가대로 봉사하고, 철야기도나 새벽기도는 한번도 거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에 빠진 결과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우리의 참다운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데서 나오는 소치입니다.

 



2) 전통에 의존.

 


율법주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전통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전통에 대한 의존입니다. 물론 모든 전통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전통은 따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은 규례와 절차를 중요시하여, 이것들에 집착함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 막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역시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잘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3에서 그들에 대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과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와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치신 날이 둘 다 안식일이었다고해서 유대인들은 그 사건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더욱 핍박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행함으로서 안식일을 범했으며,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도 아니요, 그 치유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아니며, 예수님은 사탄에 의해 그 사람들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기에 안식일을 범했다는 말입니까? 사람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실 때, 그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님의 경우에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붙여주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진흙을 이기는 행위가 안식일을 범한 행위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결단코 안식일을 범한 행위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여러가지로 세분하여 지켜왔고, 예수님의 행위가 그들의 그러한 전통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신앙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우습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소위 우리들의 주일 대예배 시간에 오셔서, 성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은, 그 당시에 하셨던 일들을 똑같이 행하셨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나라에 있는 매우 많은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쫓겨나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만큼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예배순서와 절차에 관심이 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의 예배순서와 절차가 자기가 과거에 다니던 그것과 다르다거나, 그 예배순서에서 자기가 기대하는 그 한가지가 빠지거나 하면, 이내 곧 이상하게 생각하고 돌아나옵니다. 이것이 곧 율법주의 신앙의 모양이요 그 특징인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할례받지 못한 마음, 다시 말해서 배우고자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강팍한 마음(unteachable spirit)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항상 성령을 거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율법주의 신앙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유대인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의 자세의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한 것이냐구요? 스데반은 위의 구절 바로 앞절에서(49-50절) 이사야 66장 1절 전체와 2절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66장 2절 나머지 부분을 찾아보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마음의 자세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찾는 자에게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의 자세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의 것과는 정반대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입니다. 즉, 배우고자하는 자세(teachable spirit)를 가진 자입니다.

 



3) 능력이 없는 종교.

 


율법주의 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능력이 없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거기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이 그저 형식과 절차로 가득찬 종교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경건의 능력이 주어집니까? 경건의 능력은 우리가 교회에서 요구하는 요구사항들을 잘 지킨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다고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사실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경건의 능력은 우리를 거룩케하시는 그분의 생명이요, 그분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는 소홀히하고 규례와 규칙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경건의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율법주의 신앙에는 외식(위선)이 가득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모양과 절차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겉모양은 매우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을 갗춥니다. 그리고 따라서 죄들을 속으로 숨깁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현상이 외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부분을 가장 한탄하시며, 그들의 이러한 부분을 가장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이것이 또한 오늘날 많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갈 때에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모양을 갗추지만, 우리들 속에는 온갖 세상의 욕심과 정욕과 시기와 질투와 간음과 싸움과 교만과 명예욕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 신앙의 결과요 그 열매인 것입니다.

 


4) 자기 의(self-righteousness).

 


율법주의 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자기 의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되기 때문에,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의존하여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의지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또한 그 결과로 그렇게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자기 의를 의지하는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의 무서운 점은 그들이 자기 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 없는데,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5) 영적 장님(spiritual blindness).

 


율법주의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거듭해서 소경이라고 부르신 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소경된 바리새인들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자기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따라서 자기들은 가장 잘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의 실체 혹은 실재(reality)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말씀을 더 잘 안다고 주장하던 사두개인들, 그리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두개인들에게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문자적으로 잘 안다고 해서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말씀의 실체 혹은 실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는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그래서 누구보다 영적으로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제로 영적으로 눈먼 장님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혹은 성령)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혹은 성령)이요 생명이니라(요 6:33)”라고 말씀하신 의미요, 사도 바울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게 하셨으니 의문(문자)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혹은 성령)으로 함이니 의문(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혹은 성령)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주관적이 되어버릴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온갖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과 그 실체 혹은 실재를 아는 것은 이러한 성서적인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문자적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아는 것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실체 혹은 실재를 만분의 일이라도 아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문자적으로 아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체를 만분의 일이라도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실 우리 주위를 보십시요. 우리는 기도할 때에나 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미사여구들을 사용합니다.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어버지여....’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말의 어느 것 하나에 대한 실체 혹은 실재도 거의 알고 있지 못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실체 혹은 실재를 십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파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엄청난 태산 앞에서도 결단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단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체를 백만분의 일만 깨닫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로 우리의 삶에서 죄를 버리기를 열망할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이나 신실함등과 같은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는가를 아시겠습니까?

 



사실, 오늘날의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종교적인 서적들이 범람하고, 셀 수 없는 세미나들과 강의들이 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체 혹은 실재를 거의 모른체 소망이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상태에 대한 한가지 원인은 우리 가운데 독버섯처럼 널리 퍼져있는 율법주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 혹은 실재(reality)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참다운 믿음도 그리고 참다운 순종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45-47을 보십시요.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오로지 모세를 믿고, 그 위에 그들의 모든 소망을 두고 있다고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구요? 한번 보실래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부터 찾아온 박사들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태어나셨느냐고 물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큰 난리가 났죠. 그러자 당황한 헤롯 왕이 서기관들을 불러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어디에 태어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자 서기관들은 이에 대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면서, 미가서에 나오는 이에 대한 예언들을 줄줄줄 외워대기 시작했습니다(마 2:5-6). 참으로 그들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나요? 동방박사들이 이 말을 듣고 베들레헴을 향하여 떠나갈 때, 그 성경말씀을 그렇게 줄줄줄 외우대던 서기관들 중 한 사람도, 단 한 사람도 같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소망은 율법이요, 모세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은 이 약속들을 목숨 걸고 믿는다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아마 동방박사들을 앞질러서 그리로 달려 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 아십니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진정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한 마디만 말씀드리죠. 만약 우리들이 우리가 말하는대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우리의 모든 삶을 그분 앞에서 계산받는 날이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진리의 실체 혹은 실재를 깨닫고 그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목회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렇게 신앙생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우리는 그만큼 율법주의 신앙에 젖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참 신앙.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신앙은 무엇입니까? 물론 이 참다운 신앙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이것과 대조해서 율법주의 신앙의 실체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참다운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율법주의 신앙을 물리치는 길이기도 합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 의한 신앙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믿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성경도 우리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이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런데 사실, 오늘날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성도는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매우 많은 성도들이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럼 과연 믿음에 의한 삶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에 관한 몇가지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이러한 진리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이러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 그 이상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관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과연 성령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사실 이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인내하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 그럼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조명이 선행되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얻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진리의 실체 혹은 실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게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적인 긍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성령의 역사로 이러한 주님을 발견하였으면, 오로지 믿음으로 겸손하게 그분께 나아가 나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나의 죄 용서를 위해 전적으로 그분만을 그리고 그분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 주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발견한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로지 믿음밖에 없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나의 어떠한 행실이나 종교적인 행위나 헌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발견하고 겸손하게 오직 믿음으로만 그분께 나아가 그러한 주님을 오직 믿음으로 신뢰하게 될 때,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도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나의 모든 노력과 개인적인 의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믿음으로만 나아가, 나의 구원과 죄용서를 위해 오직 주님만을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삶에서 이러한 믿음에 대한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는‘Holy Club’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철저한 성경공부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이 얼마만큼 성경공부를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했든지 그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Methodists’라고 놀렸고, 이 말이 나중에 감리교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마친 다음, 그는 사재로 안수를 받고, 미국 죠지아주에 가서 2년 동안 선교사로서 봉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에서의 선교사역을 실패로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들이 예배 드리는 곳에 찾아가, 그들과 함께 예배 드리던 중 그곳에서 진실로 구원을 받기 전까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 구원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날 밤 예배의 설교는 어떤 형제가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서의 서문을 읽는 것이었는데, 요한 웨슬레는 그 설교를 듣던 중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그날 밤에서야 비로서 그는 자기의 죄를 위해, 그리고 바로 그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으며(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그 실체를 깨달은 것을 말함), 그 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의 죄를 위해 오로지 그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온전히 의지하게 되었고, 자기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그 예수님만을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구원얻는 믿음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성령이 조명으로 깨닫고 나의 구원을 위해 오로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거룩한 삶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그저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이를 악물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닌 것도 이미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러한 삶도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능력으로 순간순간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그 예수님이 그 모든 능력과 사랑을 가지시고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며, 우리를 통해 사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고, 그러한 주님 앞에 순간순간 오로지 믿음으로 나아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사시도록 오직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하게 될 때, 그분께서 우리 속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살았던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마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0-21). 그리고 또한 이것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포도나무 가지의 삶이며, 허드슨 테일러가 발견한 삶이기도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도 뒤늦게나마 바로 이 삶을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그의 신앙생활과 그의 사역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중국 내륙으로 2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한푼의 도움없이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여 파송할 수 있었고, 그 수많은 난관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삶의 비결이야말로 구원의 진리와 별 차이가 없는 쉬운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다음은 허드슨 테일러가 그 당시 영국에 있던 자기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보모와 그리고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누이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약간 길긴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을 위해 그대로 싣고자 합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너희도 예수님께 너희 마음을 맡겨 주님께서 매일 보호하시도록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나는 내 마음을 내 힘으로 보호해 보려고 애썼었단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노력은 항상 허사였지. 그러던 중 마침내 자신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보호해 주실 것을 의뢰하기로 했단다. 너희들 생각에도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마 너희들은 가끔 “나는 지금부터 이기적이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으며 불순종하지도 않겠다”라고 작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그것을 내게 맡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내 능력으로 보호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해주신단다. 한 때 나는 예수님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꾸 잊어버리곤 했단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고 있으면 주님은 그렇게 해 주신단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란다. 블레췰리 양에게 이것에 대해서 더 얘기해 달라고 말하려무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너희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려무나. 그리고 너희가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하려무나.

 



아이들의 보모 블레췰리 양에게 보낸 편지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시는 것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일찍 체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진리가 아주 뒤늦게 깨달아졌지만 이 진리는 구속에 관한 진리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췰리 양이 나의 아이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생활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되 놀랍게 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마음의 평안과 안식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다고 믿지를 못했었습니다. 천국은 이곳 지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우, 하늘과 땅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누이 워커 부인에게 보낸 편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다고 느끼며 내 마음이 예수님으로 차 있음을 발견하고 항상 나와 교제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입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하려고 애쓰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힘이시고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봉사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되십니다. 주님의 가슴은 우리가 쉬는 곳이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채우시는 주님을 믿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필요가 있을 때, 우리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사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만약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의 노력을 통해 다른 방법으로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에 한해 그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의지했던 그 최후의 수단마져 무너져 버릴 때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최후의 수단을 의지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그 최후의 수단마져 무너져 내릴 때 진정으로 테스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어떻게 우리 주님을 믿습니까?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으로 실로 부요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의 실체 혹은 실재를 깨닫고, 오로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나의 모든 필요를 위해 오직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로지 하나님 만을 의지하여 2천명 이상의 고아를 먹여 살렸던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가 깨달았던 삶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삶은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아는 만큼,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조명으로 주님의 실체를 깨닫는 만큼, 우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 만큼 우리 주님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다. 그분 자신을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말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 2: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빌 3:7-10). 이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입니다. 참 신앙은 성령에 의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새언약의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7-12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므로 다음에 다른 장을 통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저는 여기에서 성령에 의한 삶 또한 위에서 말씀드린 믿음에 의한 삶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주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1-5). 여기서 말하는 이슈--율법주의 신앙.



율법주의 신앙으로의 전락은 사탄의 꼬임
율법주의 신앙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믿음이 헛되게 되는 것.
율법주의 신앙은 육체로 전락하는 것

 


성령에 의한 삶은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써 율법주의 신앙은 성령에 의한 삶을 대적한다. 참 신앙은 은혜에 의한 신앙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내걸은 또 하나의 기치가 ‘오직 은혜’였듯이, 우리 신앙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얻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엡 2:5),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갈 2:21). 그리고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로 하여금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할 때, 교만한 맘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벧전 5:5).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저의 간증을 하고자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두번째 주례를 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전에 제가 처음으로 주례를 섰을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예식장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사람들이 조용했고, 매우 짧은 설교였으며 또 나는 떨면서 하는 설교였는데도 은혜를 받고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번째 주례를 하기 위해 예식장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간단한 기도를 드리는데, 제 마음은 그렇게 심각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는데, 언듯 내 마음 속에 이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가 주례를 서는데 이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겠지.’ 글쎄, 내가 그러한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그냥 그러한 생각이 지나갔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지요. 아마도 내가 가르칠 때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느니, 또 나더러 설교를 잘 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듣고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말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이러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너와 함께 한것은 한번도 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은혜였다.’ 이 말씀을 들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이 여태까지 저와 함께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발 주님의 은혜를 내려주시사 함께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해 주신 주님께 진실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때, 우리는 율법주의 신앙을 이기게 되고, 또한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율법과 율법주의 그리고 참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되시나요? 그리고 이제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요. 우리가 처해있는 심각성을 이해하실 수 있으세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진리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대로 우리 주님을 알기를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생명과 변화들을 가져다 주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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