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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함께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작성자김진수|작성시간26.06.19|조회수103 목록 댓글 0

함께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2026년 6월 21일 주일설교

 

로마서 12:15

 

 

정의와 천국

 

이 영상을 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릴스입니다.

 

https://www.facebook.com/reel/1654832459123718

 

여기 이 영상의 원본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자막은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si=-wZvOWZfj6Fj3lYe&v=GyEMbIRYVGA&feature=youtu.be

 

교수는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파란색 재킷을 입은 한 여학생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당신의 강의실에서 당장 나가고, 다시는 당신 수업에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여학생이 나간 후, 교수는 남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법은 왜 존재할까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학생들은 사회 질서 유지, 개인의 권리 보호 그리고 정의 등을 언급하며 저마다 답을 내놓습니다.

 

교수는 '내가 방금 여러분의 동급생에게 한 행동이 불공정했습니까?'라고 묻자, 학생들은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교수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왜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막으려 하지 않았고, 이 불의를 방관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침묵했던 것입니다.

 

교수는 이 비겁한 태도를 지적하며 경고합니다. 내가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내가 불의를 당했을 때 내 곁에도 아무도 서 주지 않을 것이라고요.

 

학생들에게 교수가 말하려던 정의가 제게도 쏙쏙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쏙쏙 들어왔을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교수가 말한 정의와 예수님의 천국은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오늘 저도 그 천국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그러고 보니 세례 요한도 그 천국을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은 그곳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쭉 듣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18-23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요한은 당신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물어보아야만 했습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은 수백 년 전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세례 요한만이 그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공평합니다. 천국은 가난한 사람이 차별 받지 않습니다. 장애자라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그런 곳이라면 이곳이 천국입니다. 죽어 갈 천국이 그런 곳이 아니라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때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런 공평한 곳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때 바벨이 아니 바벨탑이 그런 곳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차별을 미워하십니다. 하지만 그때처럼 당장 심판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아니 지금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을 만드는 일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공동체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어 그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런 교회라면 저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저는 거절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집단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천국을 전하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함께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회공동체에게 쓴 바울의 편지입니다. 당시 로마 교회도 유대인 출신과 비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별나지만 그때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로마서에서 저는 오늘 말씀인 한 구절을 찾았습니다. 로마서 12:15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지식이 결코 아닙니다. 출신은 더더욱 아닙니다. 함께 울고 웃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0:33-35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비 유대인, 사마리아 사람은 결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진짜였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절로 배가 아파옵니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는 훨씬 더 어렵습니다. 함께 우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그래 무조건 장례식장으로 쳐들어가 앉아있는 것처럼 잘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돈 10만원 때문에 모를 척 하는 것처럼 치사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 하나로도 당신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 함께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꾼 유대인은 되지 마십시오.

 

천국 시민은 그들의 친구입니다. 우는 자의 친구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친구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가깝지만 통화를 자주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울먹이는 목소리였습니다.

 

큰일 같은데 큰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큰일인데 제게는 아닐 수도 있기에 그러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15년 함께 했던 고양이가 위독하답니다.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고양이 정도 죽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그러는 것이 진짜 그래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저는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치 가족이 위독한 것처럼 힘들어 했습니다. 제가 저희 어머니가 위독했을 때 친한 형에게 전화했던 것처럼 그는 저에게 그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제가 겪었던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를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는 그때 제가 생각난 것이었습니다. 위로할 사람을 찾다가 제가 생각난 것이었습니다. 저라면 그렇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전화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요한복음 11:32-35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님, 와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어차피 곧 살아날 건데 왜 우느냐고 다그치거나 훈계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저 우는 마리아와 함께 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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