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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지혜

[스크랩] 조선시대 왕 역사기록 속 음식에 얽힌 이야기들

작성자아름다운 그녀(서울)|작성시간15.07.17|조회수282 목록 댓글 1



조선의 국왕들은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왕들의 밥상(?)’이 궁금하다. 역사기록을 통해 왕들이 먹었던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세종3년(1421년) 11월 28일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치즈, 버터 이야기가 느닷없이 나온다. 기록의 제목은 “군역의 회피 수단인 수유치를 폐지하다.”이다. 


당시는 상왕(上王)인 태종이 살아 있던 시기로 그는 아들에게 왕권은 물려주었으나 병권은 스스로 행사하고 있었다. 


(전략) 황해도·평안도에 수유치가 있는데, 스스로 달단(??)의 유종(遺種)이라 하면서 도재(屠宰)로써 직업을 삼고 있었다. 매 호(戶)에 해마다 수유(?油) 한 정(丁)을 사옹방(司饔房)에 바치고는 집에 부역(賦役)이 없으니, 군역(軍役)을 피하는 사람이 많이 가서 의지하였다. (중략) 태상왕이 병조에 명하여 각도의 수유치(?油赤)의 호수(戶數)를 두루 살펴서, 있는 곳의 고을에서 군역(軍役)에 충당(充當)하게 하니, 참의 윤회가 아뢰기를, ‘수유는 어용(御用)의 약(藥)에 소용되며, 또 때때로 늙어 병든 여러 신하들에게도 내리기도 하니, 이를 폐지하지는 못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상왕은 말하기를, ‘그대의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이를 다 폐지하니, 모두 수백 호(戶)나 되었다.


중국 서부지역이나 티베트 등에서 음용하는 것이 수유차(?油茶), 또는 버터차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의 기록에 가끔 나오는 ‘수유’는 버터, 치즈 정도로 추정된다. ‘달단’족은 타르타르 족이다. ‘도재’는 짐승 도살을 의미한다. 




기록을 보면, 당시에는 고기 도축과 수유 만드는 일을 하면 병역이 면제된다. 지금의 공익요원과 비슷하다. 문제는 ‘달단의 후손’이 아닌 조선의 젊은이들이 달단 마을에 들어가서 병역을 피한다는 점이다. 


태종은 이들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한 신하가 나서서 “(수유는) 임금님 약으로 사용하고 더러 노 대신에게 하사하기도 하니 수유, 수유치를 폐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했지만 헛수고였다. 


“내 알 바 아니다.”라고 폐지하니 그 숫자가 모두 수백호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임금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먹었으리라 생각한다.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마음대로, 맛있는 것만 먹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먹는 것은 국왕으로서 끔찍한 고통인 경우도 많았다. 성군 세종대왕도 먹는 문제를 힘들어했다. 



‘세종대왕의 비극’은 그가 체질적으로 육식주의자라는 점에서 시작된다. 현대적인 건강법으로 생각하면 세종대왕의 몸은 단맛, 감칠맛, 고기, 당분이 많은 음식 등을 요구한다.  


문제는 세종대왕이 똑똑하고 부지런한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누구 못지않게 현명한 판단력을 가진 임금으로, 일도 열심히 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건국 초기이니 일거리는 산적해 있다. 


한밤중에 집현전 학사들이 공부하는 방에 찾아가고 한글 창제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게다가 그는 비만인데다 운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세자 시절, 아버지 태종이 걱정했던 말이 바로 “세자가 고기를 좋아하면서, 책만 끼고 살고, 도무지 운동은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노년에 당뇨로 고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군왕들이 ‘감선(減膳)했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근신하는 의미로 음식을 줄였다는 뜻이다. 


근신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홍수, 가뭄 등이 들면 임금은 하늘에 스스로의 죄를 묻고 음식을 줄인다. 반성의 의미다. 고기반찬, 기름 진 것, 심지어는 두부까지 줄였다. 


궁중의 어른들이 돌아가셔도 감선하거나 절식(絶食)한다. 곡기를 줄이거나 끊고 불효했음을 뉘우치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1395년생이다. 그가 보위에 오른 것은 24세 되던 해인 1418년, 조선 건국 27년 되던 해였다. 당시 ‘궁중 어른들’이 많았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고기를 좋아하던’ 세종대왕은 반드시 감선하거나 절식했다. 


재위 32년간 500회 감선, 절식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한 달에 1.5회 정도 ‘강제 다이어트’를 한 것이다. 





순조는 1810년, 11살의 어린나이에 군왕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후기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보면, 그가 즉위 초기에 달구경을 하다가 궁궐 밖에서 냉면을 사다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그 당시 궁궐 밖에는 늦게까지 문을 열고 영업하던 냉면집이 있었던가 보다. 조선 궁중에서는 남자 숙수들이 음식을 만들었다. 드라마 ‘대장금’은 드라마일 뿐이다.


해가 저물면 남자들은 전원 퇴근, 궁중에는 간단한 간식 정도만 내놓는 여자들 밖에 없었다. 호위병사(軍職, 군직)를 시켜 냉면을 주문한 ‘11살 어린 군주’의 모습이 퍽이나 애처롭다. 





영조는 조선조 최장수, 최장기간 보위에 있었던 군왕이다. 83세, 52년 간 보위에 있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일도 많이 한 그가 장수한 비결이 뭘까? 


흔히 영조의 장수 비결을 소식(小食)으로 꼽는다.


어머니 숙빈 최 씨가 궁중에서 육체노동을 하던 무수리라서 튼튼한 몸을 물려받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오히려 선천적인 약골을 스스로의 건강법으로 관리해 장수했다는 설이 더 타당하다. 


 


영조44년(1768년) 7월 28일 영조는 내국(內局) 도제조 김용택과 대화를 나눴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을 잃은 줄 알았는데 송이버섯, 날 전복, 새끼 꿩, 고추장이 있으면 밥을 잘 먹는다. 내 입맛이 아주 망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도제조가 “그러면 생복(生鰒)을 복정(卜定)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영조는 “영의정이 (호남)어사로 있을 때 큰 전복 한 마리 따는 것도 민폐라고 했다.”며 거부한다.




‘복정’은 일상적인 공물 이외에 추가로 올리는 물건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말린 전복은 궁중에 있었을 것이다. 생복은 나름의 맛이 있으나 민폐가 되니 따로 준비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영조44년이면 영조의 권한이 막강할 때다. 그럼에도 거부한 것이다. 


절대군주가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도 피한 것이다. 핑계가 “공자님은 몸이 아플 때 꿩고기 냄새만 3번 맡고 병상에서 일어나셨는데 웬 호들갑?” 정도다.





입에 맞는 것만 골라서 마음대로 먹었던 군왕은 연산군 정도가 유일하다. 


당시에는 녹미(鹿尾), 사슴꼬리가 별미였는데, 연산군은 싱싱한 사슴꼬리를 가져오지 않으면 지방 관찰사가 아무리 근무성적이 좋더라도 책임을 묻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니 폭군이다.  



조선시대 음식, 한식은 유교 성리학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도구다. 군왕도 성리학적 질서 안에서 음식을 먹어야 했다.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음식을 바라보면 소식, 절식, 감선, 철선이 군왕의 밥상에 걸맞다. 



출처_<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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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희망천사 | 작성시간 15.07.23 새로운 정보를 알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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