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皇山
김장호
큰 강물이 소리없이 흐르듯이
큰 산은 야단스럽지가 않다.
사자평에 오르면 차라리
평지같은 착각.
앞뒤 봉우리들도 설레지 않고
그저 밋밋한 둔덕.
있대야 앉은뱅이 관목숲에 띄엄띄엄 돌더미
그리고는 허공에 바람뿐,
몽둥이로 한대 얻어맞은 것같은 멍청함으로
넓다 못해 바다같은 억새밭을 헤치면
천황산도 솟은 봉우리가 아니다.
돌아서서 천길 발아래
얼음골 호박소를 내다보고 비로소
어질해진다.
바다 위에 뜬 섬처럼 코 앞에
약탕관을 머리에 인 재약산
배냇골을 건너질러
영취산, 신불산, 간월산이 동으로 뻗다가
능동산 너머 까치머리같이 가물거리는
主山 가지산
북으로 운문산.
해발 천을 넘는 봉우리들 열개가 한데 얼려
하나의 산괴(山塊)를 이루는 이 거대한 파노라마도.
경상도 사람을 닮았는가
어질다 뿐 야단스럽지가 않다
듬직하다 뿐 도도해 보이지가 않는다.
(일명 영남 알프스라고 불리우는 산 중의 하나가 천황산이다. 몇 해 전
운문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등을 다녀왔는데 초겨울 사자평원에서
바라보는 억새풀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막힌 데가 없이 탁 트인 1000m가
넘는 정상의 광활한 평원에 몸을 가누기 어려운 바람 속에서 수십만
평에 달하여 바다를 이루는 억새풀의 출렁거림이 햇빛에 비추어 절묘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이런 풍경을 연출할 수는 없는 것, 연출자이신 主님
만이 힘들게 찾아온 사람들에게만 보여주시는 비밀 같은 풍경이었다.
마치 지리산 종주등반에서 계속 비구름 속에서 산행을 하다 천왕봉에서
잠깐 구름을 벗겨내어 산아래 그림을 보여주시는 체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힘들게 올라온 자들만이 누리는 主님이 주시는 특권
이리라. 올 해 제6차 지리산 종주등반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