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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02|조회수9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2일 수요일  위령의 날

 

 오늘은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이 하느님 나라로 빨리 들어가도록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모든 사제는 3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이 특전은 15세기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고,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사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든 사제에게 주어졌다. 3대의 미사 중 한 대는 예물을 받을 수 있고, 두 번째 미사는 모든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셋째 미사는 교황의 지향에 따라 봉헌한다. 교회는 11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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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ㄴ)


 

말씀의 초대

 욥은 친구들의 몰이해 속에 고통을 겪으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아야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 계신 주님을 깨닫고 구원자이신 그분을 뵙기를 갈망한다(제1독서).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근거이다. 신앙인은 이루어질 구원의 희망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희망하는 바를 믿는 것은 이미 삶 속에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제2독서). 우리 삶 속에는 참된 행복이 숨어 있다. 가난해도, 슬픔 속에서도, 때로는 온갖 박해와 고통 속에서도 하늘 나라의 참된 행복은 그 안에 있다. 그 행복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하늘 나라를 이미 사는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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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저울에 행복을 달면 /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 불행 49% 행복 51%면 /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 행복의 조건엔 /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 …… //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 또 불행하게 합니다. / 나는 오늘 그 1%를 /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행복하다고 …….
이해인 수녀님의 “1%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온전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말 못할 슬픔이 잠겨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희열과 행복이 감추어 있습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기울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는 신앙인은 늘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걷는 사람입니다. 1%의 차이가 우리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은 성과 속의 저울 양편에 놓인 우리 마음처럼 1%만 더 주님께 관심을 기울여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가난해도, 슬퍼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1%의 마음 기울기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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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참행복은 곧 당신 자신이시고, 당신의 말씀이십니다. 당신 안에, 당신의 거룩하신 그 말씀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고,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얻어 누려야 할 참행복입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돌아가신 분들은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참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연령들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참행복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한 사람이 되어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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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이 되면 시제(時祭)라는 것을 지냅니다. 5대 이상의 선조들을 함께 기억하며 묘소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때 벌초도 하고 무너진 곳도 손질합니다. 먼 친족과는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기도 합니다. 직계든 방계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동양의 전통입니다.
위령의 날서양의 시제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기억하며 위령 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사제들은 세 대의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세 때부터 시작된 특전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라는 취지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대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라는 가르침입니다
.
누구나 죽습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애정 때문입니다. 그분들 역시 모두를 잊어버린 채 천국에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의 남은 이들을 위해 반드시기도하십니다. 죽음 저쪽에서 행복을 누린다면지상의 가족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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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만이 통교의 대상은 아닙니다. 연옥 영혼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도 기도해 주십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행복과 기쁨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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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한지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도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남모르는 고통과 걱정 때문입니까? 아니면 재산이나 물질의 부족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행복은 그러한 것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
엄청난 고통과 산더미 같은 걱정 속에 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민이나 걱정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행복은 고통이나 걱정거리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은 분명 아닙니다
.
행복은 결과입니다. 정성을 드린 만큼 되돌아오는 꽃이며 열매입니다. 식물은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나무 역시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겨울을 견디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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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말씀은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줍니다. 마음의 가난입니다. 슬픔과 억울함을 참아 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먼 곳이 아니라 함께 부딪치며 살고 있는 가족 안에서 먼저 실천하는 일입니다.

 

☆☆☆ 

 ‘마음의 가난’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름답거나 화려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힘겹고 두려운 표현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겠습니까? 아무 욕심도, 아무런 욕망도 없는 마음이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으로 얼룩진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이 솟구치고 욕망이 흔들더라도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본능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본능이 일으키는 충동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능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절제입니다. 그런 절제를 지닌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
세상에는 행복의 조건을 갖춘 이가 많습니다.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에는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제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능만을 따라간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
슬퍼하는 이도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슬픔을 견디어 낼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도 그 원인이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참행복에 담긴 비밀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살까?

-강영구신부-

+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

그대에게

‘죽음을 어떻게 살까?(Dying Well)’
호스피스 전문가인 몬타나 대학의 아이라 바이옥(Ira Byock)교수가 펴낸 책 제목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과 지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잘 사는 것은 잘 죽기 위한 방편입니다.
잘 죽는 사람은 잘 살았기 때문에 잘 죽습니다.
삶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입니다.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웰 빙(Well-Being 잘 삶)바람이 거세고 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죽음(Dying Well)을 이야기하지 않는 잘 삶(Well Being)은 허구입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 궁리만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 앞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한다면 그 삶은 결코 잘 산 삶(Well-Being)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과 마주하더라도 의연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삶(Well Dying)이 잘 삶(Well-Being)입니다.

대지(大地)에 깊이 뿌리내리고 여름 내 푸르고 무성한 잎새들로 풍성한 그늘을 선물하던
느티나무는 지금 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 맞을 채비하고 있습니다.
저 느티나무는 잘 삶(Well-Being)이 잘 죽음(Dying Well)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처럼 하느님 안에 깊이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慰靈)의 날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나의 죽음도 생각하는 날입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삶과 죽음과 연옥

-박상대신부-

 

  오늘은 연중 제31주일과 11월 2일 위령의 날이 겹쳐 고유축일인 "위령의 날"로 지낸다. 교회는 전례력상 마지막 달이 되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한달 동안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언젠가는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삶을 반성하여 회개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가능하면 11월 한달 동안 자주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 친구, 지인(知人)들의 묘지를 찾아가 기도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은 정확히 1030년경 개혁수도회로 이름난 프랑스의 클뤼니수도원(베네딕토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오딜로(Odilo)가 처음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여 온 세계교회로 퍼졌다. 오딜로 대수도원장은 수사들에게 "비록 그들의 죽음이 너와 무관하다 하더라도 자주 불쌍한 영혼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오딜로 성인은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의 수호성인으로 통한다.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식물도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면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것은 분명한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다른 차원에서의 생명의 원리가 지속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를 증명해 주셨다. 진정한 삶은 어쩌면 죽은 뒤에 가능한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죽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아가는 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사건이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죽음이 곧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져오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죄 중에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바로 들지 못하고 연옥이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도 "연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화(淨化) 상태에 있는 연옥영혼들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아직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연옥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기도에 힘입어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상에 이른다면, 그들이 천상교회에서 지상의 우리들을 위해 전구해 줄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이러한 기도는 현세에 사는 지상교회의 소중한 의무인 동시에 자랑스런 특권이다.

 

  지상의 교회에 속한 우리는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죽는 것이 이득이고 사는 것이 형벌이다"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은 분명 커다란 무게이고 짐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삶의 모든 멍에를 지고 사셨던 예수님 때문에 힘과 위안을 얻는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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