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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10|조회수10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10일 목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레오 교황은 390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무렵 교황으로 선출된 성인은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영성적으로도 깊이 있는 설교로 유명하였다. 성인은 이단들과 싸우면서 이단 추종자들에게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동방 교회와 했던 교리 분쟁에서 그리스도교의 본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밝히고 로마를 야만족의 침략에서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루가 17,20-25)

 

 

말씀의 초대

 지혜는 하느님의 선하심의 모상으로서 세상을 통솔하고 이끈다. 지혜와 함께 있는 사람은 어둠 속에 빠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빛이 되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제1독서). 하느님 나라는 특정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에 있다. 바로 우리 가운데에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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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래란 말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놓고 평생 죽음을 연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입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목격하고서, 죽음을 알면 우리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연구 결론은 “살아라!”입니다. 이 말은 생물학적인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게끔 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자신의 존재를 통하여 손톱만큼이라도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퀴블러 로스는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그래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려면 “세상을 위해 어떤 봉사를 해 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서 늘 ‘사랑’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퀴블러 로스가 연구한 죽음은 삶에 대한 연구였고,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영국의 호스피스 운동의 대가로 알려진 로저 콜 박사도 아름다운 죽음은 아름다운 삶을 체험할 때 가능하다고 했지요.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주 저 멀리 공간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 존재의 의미가 충만한 곳, 그래서 충만한 기쁨과 평화가 깃들어 있는 상태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하루하루 자신의 ‘죽음’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죽순처럼 올라오는 온갖 욕망과 자존심, 부풀어 오른 ‘자아’가 죽을 때 하늘 나라가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진정한 삶은 죽음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하나입니다.

☆☆☆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득세하는 날이 언제냐는 질문입니다. 대단히 현실적인 물음입니다. 유다인이 이방인을 누르고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날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명쾌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현실의 성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는 말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와 계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습니다. 현실의 모든 것은 그분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다. 어느 누가 그분 섭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요? 현실과 미래에서 그분의 손길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믿음 안에서의 깨달음입니다.
종말 역시 하느님 나라의 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언제 올지 모릅니다. 인간의 판단 기준을 초월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지금 계속되는 삶의 끝이 나의 종말입니다. 저만치 오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으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분명 이 세상 안에 있습니다. 아기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마당을 뛰어다니는 어린이의 모습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길섶의 들꽃 속에서도, 그 위를 맴도는 나비와 잠자리와 새들의 지저귐 속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감사하는 눈길로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의 천국’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믿음과 감사로 사는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완벽한 다스림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날은 기쁜 날입니다. 그렇지만 놀랍고 두려운 날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가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단체와 조직을 형성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정을 떠나 그곳에 들어간 이들도 있습니다.
헬레나 씨는 여고 교사였습니다. 서른이 넘었지만 혼자였습니다. 주일이면 봉사 활동에 여념이 없는 그녀는 나름대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직 생활에 착실하던 그녀가 어느 날 사표를 내고 이상한 단체에 가입하였습니다. 본인은 결코 이상한 곳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이비 종교였습니다
.
헬레나 씨는 그곳에 퇴직금을 모두 바치고 가족들과도 연을 끊었습니다. 어렵게 그를 찾아가면 곧 종말이 온다며 자신을 찾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기에 그렇게 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가족을 외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큽니다
.
종말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종말을 좌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러기에 열심히 살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지금 삶의 연장이 종말인 셈이지요. 저만치 오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으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天國)

-강영구  신부-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그대에게

하느님 나라(天國)를 장소(場所) 개념으로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장소(場所)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는 곳’ 혹은 ‘가야 할 곳’이 아닙니다.
‘누리는 것’ 또는 ‘누려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뿌려진 겨자씨처럼(마태13,31),
밀가루 서 말 반죽 속에 든 누룩처럼(마태13,33) 우리 가운데 이미 와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마태오 6,9)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으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누립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비로운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며 함께 누리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쁨과 환희,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맑고 밝고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마태5,3.8)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마태5,9-10)

하느님 나라는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누리를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과 내일 복음은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준 기적사화(17,11-19)와 끈질긴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18,1-8)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언뜻 보기에 ‘종말에 관한 교훈’과 같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20-21절)와 인자(人子)의 재림(22-24절)과 수난예고(25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 복음을 간단하게 종말교훈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종말에 관한 묵시적 가르침이 예수님 공생활의 말기에 재차 언급되기 때문이다.(루가 21,5-38)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있게 될 종말교훈은 사실상 공관복음 모두의 관심사이다.(마태 24,1-44; 마르 13,1-37) 물론 마태오의 종말교훈은 마르코의 그것보다 길고 내용도 풍부하다. 게다가 마태오는 종말에 관한 비유(마태 24,45-25,46)까지 곁들여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공생활을 요약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마태오의 종말교훈에서 마르코의 종말교훈을 뺀 나머지 부분을 루가가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독자적으로 편집한 대목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것을 루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당도하시기 이전 시기에 있었던 가르침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이 자리에 배치될 수 있도록 루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끌어들여 예수께 질문을 던지도록 하였다. 그들의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20a절) 이 질문은 분명히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하느냐는 ‘시기’에 관한 질문이다.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던진 하느님 나라의 도래시기에 관한 질문은 구약에 예언된 ‘주님의 날’을 의미하고 있다.(이사 11,10; 13,13; 예레 31,31; 즈가 13,1; 말라 3,2) 구약성서의 이 대목들을 보면 ‘주님의 날’은 참으로 요란한 방법으로 도래한다. 그날은 만민의 야훼께서 당신의 진노를 터뜨리시는 날로서, 이스라엘과 새 계약을 맺는 날이고 샘이 터져 백성의 묵은 죄와 때를 씻어 줄 것이며, 이날 도래할 ‘주님’은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아서 그에게 맞설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는 만민이 쳐다볼 깃발이 될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에게 찾아들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시는 ‘주님’이 로마의 지배를 끊고 세상의 통치권을 거머쥘 다윗과도 같은 왕으로서 ‘언제’ 오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수님의 답은 우선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가 바리사이들의 생각같이 눈에 보이게 오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님’이 ‘이미’ 도래하여 너희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강생은 단지 몇 명의 목동들(루가 2,16-20)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님은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하였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人格, person)과 그분의 사역(使役, ministry)과 더불어 ‘이미’, 그리고 ‘여기’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와 이적활동이 바로 그 증거이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라고 대답하신 후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을 계속하신다. 이렇게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는 인자(人子)의 두 번째 오심으로 완성되고 성취될 것이지만, 당장에 그 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2절)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완성의 날을 조기(早期)에 선취(先取)하려는 어떠한 인간적인 유혹과 노력이나 활동도 거절하시며, 오히려 이를 경계토록 하신다.(23절) 제자들은 오로지 그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데 불림을 받은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도 ‘이미’, 그리고 ‘여기’에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또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의 아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노력에 ‘고통’과 ‘배척’이 필히 수반된다는 것이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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