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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11|조회수9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11일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성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의 판노니아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의 부모는 이교인이었다. 성인은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교육을 받고 황제의 근위병으로 근무하였다. 성인의 일화 가운데 구걸하는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주었는데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그 외투를 입고 나타나셨다고 한다. 그런 체험을 한 다음, 성인은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 나중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371년에는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그는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루가 17,26-37)

  

 

말씀의 초대

 지혜가 없는 사람은 무지해서 세상을 보면서도 그 안에 현존하시는 분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자연의 현상을 경외하고 별과 해와 달을 신으로 섬기면서 이 모든 것의 창조자는 알아보지 못한다(제1독서). 하느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은 늘 깨어 살지만 세상의 즐거움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은 순간의 만족에만 집착하여 무질서한 삶을 산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어도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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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언젠가 TV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어느 유명 인사가 난치병에 걸렸다가 살아나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화려한 삶, 모든 이가 부러워하던 당시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세월과 병의 고통으로 늙고 지친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다 돌아온 그의 정신은 오히려 진실하고 맑아 보였습니다.
사회자가 그에게 병이 들기 전과 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합니다. “병을 앓으면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 결국 죽음 앞에서 살아온 순간을 돌아볼 때 가장 소중한 것은 ‘내려놓음’, ‘나눔’, ‘섬김’이라고 생각한다. …….”
왜 이런 것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다가오는지요? 더 먹지 못한 것, 더 누리고 더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누고 사랑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마치 천 년도 더 살 것처럼 온갖 탐욕과 집착에 젖어 있을 때는 몰랐던 인생의 진정한 숨은 가치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각자가 가진 직업과 신분 안에, 사건과 만남 안에, 자기만의 고유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를 놓치고 살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게 되지요.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은 죽음 저 너머의 세계도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어도,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같은 옷을 입고 살아도, 또는 같은 일을 하며 살아도, 구원받을 사람과 그러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어떤 신분인지 무엇을 하고 사는지에 달려 있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며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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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의 홍수는 창세기 7장에 나옵니다. 불신으로 얼룩진 세상을 주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신 사건입니다. ‘소돔에 내린 불과 유황 역시 주님의 정화 작업이었습니다. 죄악의 상징이었던 도시를 태워 버리고, 의인 만이 구원된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계획과 능력을 뛰어넘은 사건들이었습니다.
미구의 종말 역시 인간의 상상력 밖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관하게 찾아옵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가지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재산과 물질은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우 종말은 개인의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저축한 돈이며 부동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는지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계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저세상의 삶이 결정됩니다. ‘이승의 인연과 체험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저세상을 살아갈 기초와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종말의 준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낙엽 지는 계절에 현실의 삶을 한 번 더 돌아보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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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오늘 복음에서 듣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비장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이 곧 올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에서도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종말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오는 것일까요? 몰래 와서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덮치기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종말은 마지막이면서 시작입니다. 이 세상의 끝이면서 저세상의 출발입니다. 한 해가 끝나면 새해가 시작되듯, 종말 역시 하나의 과정이지 그 자체로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해마다 12 31일은 묘한 느낌을 줍니다. 지나온 해는 아쉽지만 보내야 하고, 새해는 호기심으로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그러한 12 31일과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이 세상은 분명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세상이 시작됩니다. 종말은 이를 구분 짓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저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이 세상 삶의 축적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지요? 그 모든 것은 저세상 삶의 바탕이 됩니다. 성경은 이를 심판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종말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준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비장한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


요즈음 사람들은 ‘웰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 속에서의 웰빙은 물론 죽음도 잘 준비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깨어 기다리는 죽음과 종말은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가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깨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소돔의 시민들처럼 그날그날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바라는 우리는 방주를 준비한 노아처럼 늘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同床異命

-강영구  신부-

잘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대에게
동상이몽(同床異夢)은 한 침대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다른 꿈을 꾸는 이유는 소망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명(同床異命)은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지만 서로의 운명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한자리에 있지만 운명이 갈리는 이유는 가슴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가슴 속에 하늘나라(天國)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맑고 밝고 가난한 가슴으로 사랑하며 삽니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삶의 향기가 납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너를 나라고 생각하며 동체자비(同體慈悲)를 실천합니다.
누구든지 그를 만나는 사람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는 늘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가슴 속에 지옥(地獄)을 담고 삽니다.
온갖 욕망의 쓰레기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미움과 증오, 원망과 원한으로 부글거리는 가슴으로 살아갑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그는 늘 괴롭고,
증오와 원망의 칼날이 자신을 찌르고, 독선과 오만이 만나는 사람을 해칩니다.
그의 주변은 언제나 어둡고 살벌합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하늘나라를 누리는 사람도, 지옥으로 빠지는 사람도 제 발로 걸어갑니다.
당신의 운명은 당신이 결정합니다.
오늘도 하늘나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지금’그리고 ‘여기’에 종말이 있다.

-박상대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를 예수께 물었다.(20절) 그들은 구약을 통해 예고된 메시아가 올 때를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로 믿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날이 요란하게 올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아로 이 세상에 와 계신데 어떤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볼 눈이 있는 사람만이 메시아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2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라는 질문에 ‘이미’, 그리고 ‘벌써’로 대답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면,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인자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와 있음을 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22-35절) 그런데 재림의 정확한 시기와 장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재림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은 온다. 단지 그 날이 언제인지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인지를 굳이 알고 싶으면 그 날에 일어날 일들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날짜’를 먼저 정하고 난 뒤에 그 날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이 방법이 인자의 재림에는 통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날들을 결정하지만 재림의 시기는 하느님이 결정하신다. 인자의 재림은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날에 관하여 ‘언제, 어디서’보다는 ‘어떤 모양으로’ 그 날이 들이닥치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지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창세 6-7장)와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노아 때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날들을 정하고 그 날들에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고, 집을 지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부정과 부패를 일삼았다. 바로 그 날에 그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일상(日常) 중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노아와 소돔의 교훈은 일상 속에 최후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최후의 날을 정할 수는 없지만 살아가는 날들 속에 그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아무도 ‘지금, 그리고 여기’ 있으면서, 과거나 미래의 시점에 있을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장소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날과 장소도 바로 지금과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 완성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그 때가 되면 철저하게 혼자 서게 된다.(34-35절) 구원과 저주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구나 스스로가 져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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