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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13|조회수13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오 25,14-30)


 

 

말씀의 초대

 훌륭한 아내는 성실히 일하고 남편을 사랑하며 가난한 이를 도와준다. 이렇게 칭송받는 아내는 외적인 우아함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경외하기 때문이다(제1독서). 빛의 자녀는 대낮처럼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속에 살기 때문에 결코 어둠 속에 있지 않다. 구원의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제2독서). 탈렌트는 단순히 재능이나 능력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실현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말한다. 우리가 받은 탈렌트를 묻어 두지 말고 힘써 노력하여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들 관계에서 가장 안 좋은 버릇은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녀이거나 배우자이거나, 아니면 친한 동료이거나,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가하는 것은 긍정적인 이야기일지라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나 재능, 가진 것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 위축되는 것도, 반대로 우월감을 갖는 것도 둘 다 좋지 못한 버릇입니다. 위를 쳐다보며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사는 것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삶에 만족해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능력과 환경이 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탈렌트는 그 사람만이 가진 인생의 고유성입니다. 다섯 개의 탈렌트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며, 한 탈렌트를 받았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고유한 인생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데 있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도,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도,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노력하여 받은 것보다 두 배로 늘렸습니다.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만은 받은 탈렌트를 땅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남들과 비교하며 주인을 탓하고 원망하며 산 것입니다. 늘 남의 것만 바라보며 자신의 것은 쓸모없고 하찮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도,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도 모두 칭찬을 받은 것은 그것이 많든 적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섯 탈렌트를 받았다고 해서 자만하거나 게을러지지 않았으며, 두 탈렌트를 받았다고 해서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며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과 비교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내 삶이 한 탈렌트밖에 받은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기쁨, 평화, 행복, 사랑 등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든 인생의 가치가 들어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반명순 수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게 주어진 모든 것으로 주님의 신뢰에 응답하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종말 심판설교(마태 2425장)에서 인자의 내림(24,2931)과 최후의 심판(25,3146)은 서로 직결되는 이야기이지만 마태오는 두 이야기 사이에 ‘종말은 오겠지만 그때는 모르니 깨어 있으라.’(24,3225, 30)는 큰 단락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은 세 편의 비유가 이어지는데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와 지난주 말씀인 ‘열 처녀의 비유’, 그리고 오늘 말씀인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탈렌트의 활용’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서 후(後) 문맥인 ‘최후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25,14)에 비유됩니다. 주인의 여행과 종들에게 맡겨진 재산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습니다. 여행의 시간적 공백이 종들한테 온전한 권한과 자율성을 갖고 맡겨진 탈렌트를 활용할 수 있도록 유보된 시간이라면, 탈렌트는 종에 대한 주인의 신뢰를 나타냅니다. 이 탈렌트를 단순히 재화·재능·소질로 이해한다면 몇 개를 받았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종에 대한 주인의 신뢰라면 주인에 대한 종의 ‘신의와 충실성’이 요청되는 사랑의 과제일 따름입니다.(19절) 비록 여행이 지체될지라도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맡긴 소유에 따른 셈을 할 것이며’(19절), 주인에 대한 종의 충실성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겨진 탈렌트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로 평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5절)
주인으로부터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종들은 지체하지 않고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자세로 탈렌트를 두 배로 더 벌었습니다.(1617절; 20.22절) 주인은 그들을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 부르며 그들의 수고를 “작은 일에 성실하였다.”고 평가합니다.(21ㄱ.23ㄱ절) ‘착하다’는 것은 선에 기반하며 성실은 주인에 대한 충실성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선과 충실성에 따른 상급은 주인의 더 깊어진 신뢰이며, 이는 ‘많은 일’을 맡기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21ㄴ.23ㄴ절) 종말론적인 축복으로서 이제 더 이상 주종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지위 상승에 있습니다.(요한 15,1516ㄱ 참조) 이처럼 두 종에게 내린 주인의 똑같은 상급과 칭찬은 셈에 의한 수익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탈렌트를 몇 개 받았는가를 견주어 자만하거나 열등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선의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기는데”(마태 25,18) 그 이유는 주인의 인품을 모진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24절)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것은 땅을 파는 노력과 씨앗을 심는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고 결실을 거두려는 부도덕함의 평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맡겨져 활용해야 할 탈렌트가 아니라(20ㄴ. 22ㄴ절) “주인님의 탈렌트”(25절)로 생각하며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땅속에 사장시킨 이기적이고 불충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25절) 그는 주종관계에 의한 의무만을 채우려 했을 뿐 주인에 대한 사랑으로 탈렌트를 활용하려는 열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는 일차적인 행위로써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었으며 주인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대로 행하지 않는 “쓸모없는 종”이 되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져…거기서 울고 이를 가는” 고통의 장소로 분리되는 것입니다.(2630절)
주인은 자신이 맡긴 탈렌트를 되받는 “내놓아라.”가 아니라 “빼앗아라.”고 명령합니다.(28절) 주인은 소유를 맡길 때 종에게 준 것일까요?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는” 수혜자가 “누구든지”로 확대 적용되고 있습니다.(29절) 누구든지 “주어라” 또는 “빼앗아라”라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더 받거나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인데,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차이는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그분을 향했던 신의와 충실성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21. 23절) 그렇다면 우리가 소유한 탈렌트의 개수가 아니라 주님께 드린 사랑의 크기가 그분을 만나는 날 충실과 불충실로 드러날 것입니다.(25, 46 참조)

묵상(Meditatio)
제가 받은 탈렌트는 ‘생명’이란 가치로 다가섭니다.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은 어느 누구에게 주어졌든 그 크기가 같으며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15절) 활용해 가야 할 사랑의 도구이지 품격의 척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가 내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문득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두 팔을 벌리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일에 본전까지 잃어버린 분, 그렇게 죽어서 다시 사랑으로 오신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기도(Oratio)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5)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

-강영구  신부-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대에게

오늘은 평신도의 날입니다.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은 수도자의 날(봉헌 생활의 날)입니다.
예수성심 대축일(성체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은 사제들의 날(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바울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있는’(1고린12,14) 것처럼 교회도 서로 다른 소명을 받은 구성원들로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평신도의 날, 수도자의 날, 사제의 날을 정하고 있는 까닭은  
각자가 받은 성소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주듯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유한 소명을 맡기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제의 소명을, 어떤 사람에게는 수도자의 소명을,
어떤 사람에게는 평신도의 소명을 주십니다.
그중에서 평신도의 소명이 가장 고귀하고 소중합니다.
교회는 평신도의 바탕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즉 교회의 주체(主體)는 평신도입니다.
평신도의 밭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면 거기서 좋은 사제도, 훌륭한 수도자도 나옵니다.
평신도의 밭이 척박하고 메마르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제는 평신도로부터 태어나고 평신도 안에서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평신도를 위해서 봉사하고 평신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평신도의 주체의식(主體意識)이 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듭니다.
예수님도 평신도였고, 성모 마리아도 성 요셉도 평신도였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깨어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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