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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15|조회수10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1-10)

 

 말씀의 초대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는 율법을 지키려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는다. 어떤 고통과 박해도 그가 가진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게 할 수 없다. 그는 순교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모범과 귀감이 된다(제1독서).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키가 작았다. 그는 부자였지만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소외된 사람이었다. 자캐오는 돈으로 얻을 수 없는 자유와 해방을 주님을 만나 얻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고 싶은 만큼 자신의 그림자를 숨기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서 열등감(콤플렉스)이 생깁니다. 학벌, 신체적 조건, 환경이나 과거의 상처 등이 내면에서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합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이 더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 이야기는 열등감과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으며, 군중들에게 가려질 만큼 키가 작았다고 소개됩니다. 당시에 멸시받던 세리라는 직업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그는 온통 열등감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정을 해서라도 돈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돈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돈으로도 그의 열등감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공허했고 소외감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세리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동료 세리 마태오도 제자로 부르실 만큼 아무런 편견을 가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보려고 달려 나갔지만 군중 때문에 볼 수가 없자 나무 위로 올라가서 마침내 예수님을 뵙습니다. 나무에까지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만큼 그는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마음을 보시고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관심과 사랑을 받은 그는 회심이 일어납니다. 자캐오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 것은 더 이상 삶의 근거를 돈에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내적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적 자유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질곡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며 살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우리를 늘 부자유스럽게 하는 내적 열등감을 이겨 내는 것도 포함됩니다. 열등감은 주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오롯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내적으로 자유로워지며 열등감은 낫게 됩니다. 이것이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

 

자캐오는 세관장이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자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눈이 마주쳤을까요?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감동한 자캐오는 다른 사람을 등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의 ‘핸디캡’을 뜻합니다. 어쩌면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나무 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신은 사람들을 피했는데, 주님께서는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열등 의식’을 감싸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역시 ‘부족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자캐오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이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이를 닮아 가는 행동입니다. 서서히 그에게 ‘물들어 가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먼저 실행해야 합니다. 가족 중에도 분명 ‘자캐오’는 있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은 닮습니다. 좋은 모습은 빨리 닮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에게 조금씩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은 물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인도 모르는 새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이지요.
자캐오는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매료되어 갔습니다. 한 번이라도 뵈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캐오는 그런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고향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핸디캡을 극복하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강영구 신부-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대에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빈집은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할까요?

백 평 가까이 되는 큰 아파트, 갖가지 호사스러운 실내장식과 값비싼 고급 가구들,
그리고 안락하고 편리하기 그지없는 세간장치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집에 살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집일 수록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의 접근을 막으려고
스스로 높은 담을 둘러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싸늘한 무덤과 같습니다.
제 눈에는 초호화 고급 아파트와 호화 묘지가 비슷한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세관장 자케오는 돈 많은 사람입니다.
돈 속에 묻혀 갖가지 영화와 향락을 누리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은 그에게 안락과 편리와 쾌락을 주지만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손길, 따뜻한 눈 빛, 향기로운 미소가 절실했던 그의 집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자케오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루가19,8)
그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빈손이 되었지만 행복합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一明)


 

양심 - 내 마음속에 있는 내 것이 아닌 마음

-박상대신부-

 

  공관복음이 모두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치유사화(18,35-43)에 이어 루가는 오늘 단독으로 ‘자캐오의 구원사화’를 전하고 있다. 예리고는 요르단강 서쪽,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 요르단강이 사해(-395m)에 합류하는 북서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250m 낮은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보면 예리고는 사마리아, 베레아, 이두매아 지방을 서로 이어주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유다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리고에는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많은 세관들이 있었고,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자캐오는 이들 세관들을 모든 관장하는 세관장으로서 돈 많은 부자였다는 것이다.

 

  육체가 지나친 복을 누리면 그에 비해 영혼이 고갈되는 법, 자캐오는 돈 많은 부자로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세관원은 지방영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은 민간인들로서 계약에 따라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세관원은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해야 하고 개별적으로 지정액 이상의 관세를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양심을 속이는 죄인 부류에 속해 있었으며, 정직하다 하더라도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신앙을 제대로 따르고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이 직업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자캐오가 예리고의 모든 세관들을 관장하는 세관장이었다면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얼마나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을 것인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오늘 그에게도 구원의 날이 들이닥쳤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 주신 것이다. 물론 키가 작은 자캐오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서 자캐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실 길목을 미리 잡아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자캐오의 모든 처지를 한눈에 알아보신 예수께서 오늘 그에게 구원을 선사하신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예수께서 ‘오늘’이라고 말씀하시면 인간의 역사 안에 분명히 새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루가복음에만도 이러한 장면이 여러 번 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2,1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4,21)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19,9)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23,43)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에게 ‘오늘’은 구원의 날이지만, 오늘의 표징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날이 될 수도 있다.(7절) 그렇다고 구원의 ‘오늘’이 아무에게나 선사되지는 않는다.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또 그래서 죄인일 수도 있는 자캐오처럼 재물의 사회 환원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보상(8절)이 선행(先行)되어야 구원의 ‘오늘’이 선사되는 것이다. 즉, 회개가 하느님 구원의 선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자캐오가 자기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고 부당한 착취에 대한 4곱절의 보상을 다짐하는  회개와 회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그의 노력에 의한 예수와의 만남’과 이로 인해 ‘예수께서 그의 집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양심(良心)을 가지고 있다. 양심이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의 것이 아닌 마음이다. 자캐오도 이 마음 때문에 늘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늘 올바르고 착한 행동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마음이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의 마음인 이 양심의 현존을 깨닫고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노력의 결과는 의(義)를 향한 회개와 회심으로 드러나게 된다. 회개와 회심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기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두고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15,7) 내일이 아니라 ‘오늘’ 양심과 만나 회개하는 사람은 분명히 오늘이 가기 전에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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