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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16|조회수8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루가 19,1-28)

말씀의 초대

 이 민족의 지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감이 되는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의 용감한 신앙의 정신을 보여 준다.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를 터인데도, 이 여인은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아들에게 고통을 견디고 모세의 법에 순종하라고 일러 준다(제1독서). 유다의 화폐 단위 미나는 백 데나리온이고 60분의 1 탈렌트이다. 어떤 귀족이 종 열 사람에게 똑같이 열 미나씩 나누어 주지만 그것으로 벌어들인 돈은 다르다. 주님을 위한 성실하고 충실한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돈 보스코 성인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지요.
“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었습니다. 시신은 마치 모든 것이 다 타고 이제 겨우 재만 남은 것과 같았습니다. 영혼이 빠져 나간 그의 시신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은 한평생을 불꽃으로 사시며, 당신의 전 존재를 주님 뜻에 따라 온전히 태워 버리고 이렇게 재 같은 모습이 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나누어 준 한 ‘미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이라는 ‘시간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이렇게 한 미나씩의 일생을 선물로 받았지만 하느님 뜻을 헤아리며 불꽃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날이 그날이듯 주어진 시간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이거나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인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자신이 살았던 ‘향기’만 남습니다. 잘났다고 하고 세상에서 출세하였어도 아무런 향기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아도 머무른 자리에 짙은 향기가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끊임없이 내어 주고 산 사람과 자기 것을 채우면서 산 사람의 차이입니다.
김용석 시인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가 있지요.
나는 꽃이에요 / 잎은 나비에게 주고 / 꿀을 솔방 벌에게 주고 /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 가을이 오면.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은 가을 ……. 그러나 꽃은 져도 향기는 바람을 따라 세상 어디엔가 떠돌고 있지요. 나비와 솔방 벌은 또 꽃잎이 준 꿀을 먹고 긴 겨울나기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고 꽃은 사라져도 그 속 깊은 곳에는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지요.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

 

미나는 그리스 돈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미나가 가장 큰 화폐였습니다. 노동자 100일분의 임금과 맞먹었습니다. 비유 말씀은 마태오 복음 25장의 탈렌트의 비유와 같습니다.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종은 이렇게 항변하지요.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그의 돈을 열 미나가진 이에게 주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믿는 이의 자세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관계도 두려움으로 맺어지면 바르게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서워함은 인생의 등불이 아닙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릅니다. 끊임없이 유혹받고 감정의 흔들림을 체험합니다. 두려움을 깨고 나와야 주님의 이끄심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삶의 어둠속에 갇히고 맙니다.
한 미나를 받은 종들은 다섯 미나 또는 열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미나는 입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능력입니다. 행복을 만들며 살라고 우리 안에 남겨 주신 하늘의 에너지입니다. 활용하지 않고 감춰 두었다면 꾸중은 당연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을 두렵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봐야 합니다. 두려움을 벗지 못하면 기쁨의 신앙은 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즐겁게 믿지 않으면 신앙에 대해 말하기를 귀찮아합니다.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둔 종의 모습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한 종은 말합니다.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의 변명 속에는 두려움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두려움은 상호 관계를 얼어붙게 합니다.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도 두려움이 개입되면 올바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죄를 짓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유혹을 받고 감정의 흔들림을 체험합니다. 그러한 우리가 두려움만으로 주님 앞에 나선다면, 믿음은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더 어둡게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미나로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번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미나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나가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주인이 주는 능력입니다. 그분께서 주셨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주님의 능력인 셈이지요. 기쁘게 살고, 남을 도우며 평화를 나누고, 행복과 사랑을 심으라고 우리 안에 남겨 주신 주님의 능력입니다.
두려움은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능력을 멈추게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두려움의 신앙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려움을 벗지 못하면 신앙의 기쁨은 멀어집니다. 내가 기쁘지 않은데 어찌 신앙의 기쁨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강영구 신부-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그대에게

여름 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잎새들은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대지로 돌아갑니다.
땅에 떨어진 낙엽들은 뿌리를 덮어 제 몸을 감싸고
다시 썩어서 제 몸을 위한 자양분이 됩니다.
순리(順理)가 사랑이고 사랑이 순리(順理)입니다.

60년 전에 나는 이 땅에 없었습니다.
60년 후에도 나는 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생명과 시간, 젊음과 건강, 재능과 지식 따위는 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지닌 돈과 재물, 지위와 명예, 갖가지 물건들도 제 것이 아닙니다.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욕망대로 제 뜻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제가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분의 뜻이 존중되어야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주인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나는 주인이신 그분 앞에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셈 바쳐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 시간 후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몇 년 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가 관심사여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을까가 관심사여야 합니다.
저를 신뢰하시는 그분이 큰 사랑으로 그것들을 저에게 맡겨주셨으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사랑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언젠가 주인이신 그분이
“잘 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금화를 맡은 종들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달란트를 맡은 세 종의 비유’(마태 25,14-30)와 흡사하다. 그러나 두 비유를 잘 살펴보면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선 마태오복음의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21장), 최후의 만찬을 목전에 두고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최후의 심판 비유’(25,31-46)와 함께 발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임박한 종말의 시작과 인자의 재림을 다루는 주제에 전체적으로 편입된다. 마르코복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오늘 복음의 비유에 걸맞은 몇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마르 13,34-36) 이에 비하여 루가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지막에,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해 놓았다.


  내용 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인다. 몇 가지 점만 지적하여 보자. 마태오는 단순히 어떤 주인이 먼 길의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달란트를 맡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라면(마태 20,1-16; 18,35 참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루가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금화 한 개씩을 준다. 여기서 금화 하나는 1미나로서 100데나리온의 금액이다. 루가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깔고 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2절),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4절),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27절)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오늘 비유의 역사적 신빙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신빙성을 따진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런 모양의 비유를 직접 말씀하셨다면 이를 두고 왜 두 복음사가가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두 복음서가 많은 부분의 같은 내용을 두고 가감?수정의 과정을 통하여 독자적인 복음서로 발전되어 온 것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이 비유를 발설하셨다면, 시기적으로는 예루살렘 입성 후가 될 것이며, 비유의 목적은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지긴 하지만, 이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 능력에 따라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비유를 가감?수정하여 마태오는 최후의 만찬 직전에 배치하고, 루가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시기에 배치하였을까?


  문제는 하느님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다. 물론 성자의 강생으로 하느님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태어난 메시아가 왕으로 등극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의 군대를 지휘하여 로마군대를 쳐부수는 전쟁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세상의 종말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에 대한 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러니 오늘 비유는 각각 마태오와 루가복음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발설한 비유를 두고, 마태오는 상당히 임박한 세상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가졌고, 루가는 거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비유를 말씀하셨다(11절)는 도입이 바로 그 이유이다.


  성서의 말씀이 기록된 후 2,0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것을 보면 루가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또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동시에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때 오늘 비유에서 주인의 질책을 받는 세 번째의 종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종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다른 어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비참한 말로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종이 주인의 의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였을 뿐 신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인은 각자가 맡은 것의 열매를 보고 싶어 한다. 하느님도 그렇다.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한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고, 사랑 없이는 생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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