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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분과 함께

오늘의 복음묵상

작성자사랑방|작성시간11.11.19|조회수11 목록 댓글 0

2011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40)

 

말씀의 초대

 유다인들은 계속해서 안티오코스 군대에 승리하면서 성전을 되찾고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 세워 둔 제우스 신상을 부수고 성전을 정화한다. 안티오코스 임금은 침략 전쟁에 실패하자 병들어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제1독서). 죽음 후 하늘 나라에는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없다. 모든 이가 천사처럼 사는, 사랑이 온전히 충만한 나라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래 전에 나온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베를린 하늘을 지키는 두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천사는 하느님의 전령으로 인간의 삶 가까이에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움을 주며 베를린 하늘을 지키던 천사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다미엘 천사는 인간 사회를 지켜보면서 인간의 사랑이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인간이 된 순간부터 천사는 영원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이 겪어야 하는 유한성과 삶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다미엘 천사는 이런 인간의 조건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뇌와 고통을 감수하고도 이렇게 다미엘이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하는 사랑을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다미엘은 천사로서 죽음을 선택하고 한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곧 서커스단을 따라다니며 줄을 타던 마리온이라는 여자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듭니다. 그는 천사의 영원성을 잃었지만 ‘인간의 사랑의 이름’으로 그 영원성을 되찾게 됩니다.
이 영화가 던져 주는 의미는 인간의 사랑은 그 자체로 천사와 같은 불멸하는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은 지상에서 살면서도 이미 천상의 천사의 삶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성을 사는 천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 나라에는 더 이상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없다고 했지요. 이 말은 하느님 나라는 온전한 사랑의 나라이기에 인간의 삶을 규정지을 제도뿐 아니라 인간적인 에로스 사랑에도 매달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곳에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 있기에 천사같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부부 관계도 이웃 관계도 팔을 오므리고 자신 안으로 끌어안는 사랑에서, 팔을 활짝 펼치고 나를 내어 주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도 천사들처럼, 하늘 나라처럼 사는 방법입니다.

☆☆☆


죽은 이들이 주님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부활 신앙은 가톨릭 교회 교리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죽은 신앙에 불과합니다. 사두가이들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믿은 부활은 현실적인 처지가 그대로 반영된 부활입니다. 곧, 부자는 부자로, 지식인은 지식인으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없는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사두가이들뿐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부활 신앙에도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자도, 지식인도, 가난한 이도 주님 앞에서는 모두 평등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현세에서 좀 가졌다고, 힘이 있다고 으스댈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주님을 본받아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명하게 판별하여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부활은 이 땅에서부터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얻어 누릴 수 있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

 

사두가이파는 유다교의 사제를 배출하는 제사장 그룹입니다. 그들은 늘 현실을 중시했고, 사후 세계나 영혼 불멸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도 모세 오경만 인정했고, 율법을 통한 엄격한 제재를 강조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질문을 던집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인과 살다가 죽었다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부활의 모순점을 지적하려고 이상한 예를 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정확한 답변을 하십니다. 저세상의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설명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논리로 부활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론이 아니고 깨달음입니다. ‘건전한 상식위에 건전한 신앙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인연삶의 흔적이 저세상에서 이어짐은 상식적인 일입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간단한 이 사실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부활은 겸손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가르침은 하늘의 힘이 끌어 주지 않으면 영영 모르게 됩니다. 겸손은 깨달음의 전제 조건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
-강영구신부-

누가 우리 성당 앞뜰의 느티나무를 죽은 나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느티나무 가지에는 메마른 갈색 잎들이 힘겹게 매달려있습니다.
소슬 바람에도 낙엽은 눈발처럼 흩날리고 느티나무는 나목(裸木)이 되어갑니다
삭정이 같은 가지들을 펼쳐들고 죽은 듯이 겨울맞이를 하지만 저 나무는 싱싱하게 살아있습니다. 대지(大地)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사시사철 푸르고 싱싱한 나무가 있습니다.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가을이 와도 열매 맺지 않고 자라거나 시들지도 않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가보니 흡사(恰似)하게 만들어진 인조나무입니다.
아무도 그 싱싱한 나무를 살아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지요.

옛날 사람들은 수혼제(嫂婚制)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려했습니다.
여성의 인격과 인권이 무자비하게 짓밟힌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인 방법입니다.
현대인들은 인공수정(人工受精)이나 난자매매(卵子賣買), 대리모(代理母) 혹은 배아복제(胚芽複製) 따위의 방법으로 혈통을 잇거나 수명을 연장시키려 합니다.
여성을 상품화 혹은 도구화하는 비윤리적인 방법일 뿐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하늘의 법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혈통을 잇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래 산다고 과연 그 생명이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까?
하루를 살더라도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생명이 정말 살아있는 생명이 아닐까요.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부활(復活)은 소생(甦生)과 다르다.

-박상대신부-


  예수님의 그리 길지 않을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복음에 아주 드물게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등장하고,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부활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대항자로서 잘 알려진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록된 율법, 즉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여 모세율법의 자구(字句)를 고집하였으므로, 바리사이들이 중시하는 구전(口傳)의 법(法)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의적(敎義的)으로는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및 천사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고(마르 12,18; 루가 20,17; 사도 23,18), 오직 부유한 평안만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사제(司祭)들을 포함한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이 이에 속하였고(사도 4,1; 5,17), 로마인의 지배까지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환영하였다. 따라서 예수에 대하여는 바리사이들보다 더 격한 증오를 표시하여 예수를 단죄하고 처형, 사도들을 박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실로 극단적인 예를 들어 예수를 곤욕에 빠뜨리려 하였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아들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의 아내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 하는 수혼법(嫂婚法)이다.(신명 25,5-10; 창세 38,8) 그러나 사두가이파들의 맹점은 내세(來世)를 현세의 연장으로 생각한 데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부활(復活)을 소생(甦生)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죽은 후에 맞이할 새 세상이 이 세상의 연장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실제로 일어날 일은 우리의 상상 밖이다. 내세란 현세의 모든 생명질서가 무너지고, 죽음 자체가 완전히 극복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세의 부활은 이승의 차원이나, 죽었다가 소행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현세의 질서, 철저한 시간과 공간, 즉 물리(物理)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우리가 부활의 차원의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영역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로 나누어져 있으나 하느님에게는 오직 현재의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를 일컬어 ‘순수현재’(純粹現在, pura praesentia)라고 한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작이 있다면 과거가 있는 것이고, 끝이 있다면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요, 하느님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시며,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출애 3,6)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즉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섬길 수 없으며, 오직 산 사람만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살아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살아 있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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