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오 25,31-46)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직접 찾아내시고 상처 난 양을 낫게 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겠다고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실현된다(제1독서). 첫 인간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과 부활로 생명이 왔다. 죽음의 모든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아래 굴복시키신 것이다(제2독서).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가르시듯, 당신을 따르는 양들을 돌보시고 구원하신다. 주님의 목소리는 굶주린 이, 소외된 이들 안에서 들을 수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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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전례력이 끝나는 마지막 날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분 스스로 한 번도 자신을 왕이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날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우리 ‘인생의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왕은 예로부터 백성 앞에서 무소불위의 힘과 권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역사 이래 대부분의 왕은 백성을 지배하고 찬란한 궁궐을 짓고 그 안에서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왕이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힘과 세력을 가진 화려하고 위엄 있는 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복음은 우리의 왕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세상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이,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가 바로 주님 당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곧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겠다면, 배부른 이가 아니라 굶주리는 이를,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들고 약한 이를, 힘 있고 능력 있는 이가 아니라 헐벗고 목마른 이를 찾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신보다 더 잘난 사람만을 찾는 한, 더 능력 있고 더 가진 사람들만을 만나고 사귀려고 하는 한, 권력이 있고 힘 있는 이들에게 줄을 대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한, 우리 인생의 왕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세속의 왕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저 위에 있지만, 우리 인생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저 아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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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미래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고백하면 그분은 내 운명의 주인이 되어 주십니다. 평범한 이 진리를 다시 기억하며 실천하라는 것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의 교훈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죄와 연관된 것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에 구원이 달린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도 이웃에게 행한 것이 ‘예수님 당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해야 할 ‘작은 이웃’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제쳐 놓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상처 주면서 ‘사랑의 길’을 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왕이란 딱딱한 표현입니다. 누구나 그 앞에선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왕이 아니심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오늘만큼은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위의 ‘작은 이웃’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야겠습니다.
누가 우리의 왕인가
-강길웅 신부-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실로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으며 오히려 봉사하는 왕,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왕으로서 가난하고도 비천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왕이야말로 왕 중의 왕이요 세상 모두를 다스릴 왕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된 것은 기원 전 11세기경의 일입니다. 그때까지 그들에겐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한 모습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왕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등장되는 왕들은 모두가 백성을 실망시키는 왕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다윗'을 기대합니다.
‘새로운 다윗'을 소망하는 백성들의 기대는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되며 언젠가는 다윗처럼 자신들의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시켜 복된 나라로 이끌어 줄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런 왕은 등장되지 않았습니다. 모진 박해 생활과 식민지 생활에서도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등장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조국을 식민지에서 건지고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며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에서는 그분은 어쩌면 외면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백성들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분명히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왠지 속 시원히 세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병자들 치유요 그리고 설교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뭐 그런 소극적인 일뿐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으며 군중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메시아가 아니요 메시아는 아직도 안 왔다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3차 중동 전쟁에서 다얀 국방상이 이스라엘을 6일 만에 승리로 이끌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얀을 일시 메시아로 보았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왕은 다 지나가는 것이며 왕권은 언제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반석 위에 자기 왕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진정한 왕이십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가 주님보고 왕이 되어 오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천국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보통의 왕과는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왕이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헐벗으며 감옥에도 갇힌 병들고 비천한 인생들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왕이며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만이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방향과 그 본질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왕'이라는 개념을 착각한다거나 어긋난 왕을 찾고 있다면 그는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언젠가 ‘꽃동네'에서 자신도 불구자이면서 다른 불구자를 도와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서 도움을 베풀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고 천국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그들 가운데 주님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왕궁'을 찾는 모습을 봅니다. 교회 자체도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궁전'을 짓는 모습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를 바라보고 병든 자를 바라보십시오. 슬퍼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고 죄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바로 그들 안에서 주님이 여러분을 환영하여 당신 시민으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출처] 2011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작성자 진주